•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소요유 (逍遙遊)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주역입문 스크랩 易傳은 주역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글
篤敬先生 추천 0 조회 105 12.10.19 10: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역전易傳은 주역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글.

  

 

 

차     례.

 

   1. 역전의 저자나 형성 년대에 대해서,

   2. 역전을 주역, 즉 역경易經이라는 책과 비교한다면.

   3. 계사(繫辭)의 형성.

   4. 단전彖傳의 형성.

   5. 상전象傳 의 형성.

   6. 문언전(文言傳)의 형성.

   7.  설괘, 서괘, 잡괘의 형성.

   8.  역전의 철학적 문제들

 

 

 

 

 

 

    

  

역전易傳은 주역을 해설하고 있는 저작들을 모아놓은 것으로, 한대漢代 사람들은 이를 통털어 십익十翼이라고 불렀고, 현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역전을 주역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역전 혹은 십익이라고 하는 것은 곧, 단전彖傳 상하편, 상전象傳 상하편, 문언전文言傳, 계사전繫辭傳 상하편, 설괘전說卦傳,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 등 10편의 주역에 대한 해설서를 말하는 것이다. 이때 주역의 의미를 분명하게 해석해주는 날개와 같다는 의미에서 십익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상 일곱 가지 종류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네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는 주역 경문 바로 뒤에서 그 경문을 해석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단전과 상전이다.(단전과 상전이 처음부터 경문 바로 뒤에 붙어있던 것은 아니다.  단전과 상전이 형성되던 시기에는 계사전이나 설괘전과 같은 독립된 전傳이었으나, 한漢나라 정현鄭玄과 위魏나라 왕필王弼 등이 경문과 그를 해석한 전을 찾아서 비교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 경문뒤에 붙인 것이다.)

두번째는 건곤乾坤 두 괘卦의 괘효상卦爻象(괘와 효의 모양을 괘효상이라고 한다.)과 괘효사卦爻辭(괘와 효 뒤에 적어놓은 점치는 말을 괘효사라고 한다.)를 해석한 것이 있는데, 이것이 곧 문언전이다.

세번째로는 주역이라는 책의 성질과 서법筮法의 원칙을 해설하고 주역의 대의(물론 역전이 기록된 전국시대의 시각으로 이전부터 존재하던 점치는 책을 학문적으로 해석한 것이지만....)를 대체적으로 논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계사전과 설괘전이다.

마지막으로 주역 64괘의 구조와 차례를 해설하고있는 서괘전과 잡괘전이 있다.

 

마왕퇴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백서帛書 역전(백서주역처럼 비단 천에 쓰여진 주역해설 논문이 나왔는데, 백서역전은 현재 통용되는 역전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내용도 들어있다.)에서는 통행본 설괘전의 세 구절이 역지의易之義 속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이 십익만을 역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대漢代의 유일한 시각이라고 볼 수는 없으며, 주역과 마찬가지로 조금씩 다른 여러가지 역전 전본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1. 역전의 저자나 형성 년대에 대해서,

 

한대 사람들은 이 주역 해설서가 공자의 저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후세에도 매우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는데, 송대宋代 구양수歐陽脩가 처음으로 계사전은 공자의 저작이 아니라고 의심하기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 후로 엽적葉適은 십익 가운데 단전과 상전을 제외한 모든 내용이 공자가 저작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청대淸代의 최술崔述에 이르러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단전과 상전 마저도 공자의 저작이 아니라는 생각을 제기하였다. 그 까닭은 맹자가 살았던 때와 공자가 살았던 때가 시대적으로 그리 멀지 않았으며, 맹자 스스로 공자의 학술을 계승하여 후대에 전수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맹자에는 공자가 역전을 지었다는 이야기나 십익에 관련된 내용들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십익은 공자가 아니라 그의 후학들에게서 저작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이며, '공자가 역전을 지었다'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면 이 주장을 따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대부분 역전 각편이 오랜 시간 속에서 지속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어느 한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국시대 이래의 주역과 서법에 관한 해설을 모아서 편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 단전과 상전, 두 가지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보이는데, 그 이유는 계사전에서 서법과 주역의 원리를 해석하고 있는 내용이 상당부분 단전과 상전에서 제시한 해석의 규칙에 그 이론 근거를 두고 있으며, 문언전 역시 단전과 상전 단전과 상전 의 많은 부분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대 초기의 문헌들과 백서 역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십익 가운데 절대 다수가 한대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역전을 계사, 상, 단, 문언, 설괘 등으로 개괄하고 있다. 또 위지魏志에 의하면 역전의 각편은 일찍부터 개별적으로 단독 형성되었으며, 한대의 정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경 뒤에 전을 덧붙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통용되고 있는 왕필본 주역이다. 역전의 편찬은 유가학자들의 손에서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 내용과 사상은 도가道家와 음양가陰陽家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예를 들어, "음양陰陽"과 같은 범주는 논어에서 볼 수 없고, 맹자에서도 역시 찾아볼 수 없지만, 노자와 장자, 그리고 관자 등의 음양가 문헌에서는 철학적 범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역전은 한대인들이 비록 유가의 경전 해석서라고 생각했었지만 결코 공자와 맹자 두 사람의 사상만을 밝혀내고 있는 것이 아니며, 전국시대 이래로 형성된 수많은 사상가들의 관점을 흡수하여 형성된 것이며, 이점은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다.

 

 

▶ 2.  역전을 주역, 즉 역경易經이라는 책과 비교한다면,

 

경전에 대한 해석에 어떤 특징이 있을까? 대체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점치는 전적이던 주역이라는 책을 철학화의 길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송대의 주희朱熹는 문집文集, 답여백공答呂伯恭에서 "역전은 처음으로 길흉화복을 이야기했던 내용을 추론해서 의리義理로 밝혀내었다. (始因其言吉凶訓戒之意而推說其義理以明之.)"라고 역전을 평가했다. 이런 역易풀이 학풍(주역은 일반적으로 역易이라고도 하는데, 이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한자로는 해역解易이라고 하며, 이를 우리말로 역풀이라고 하였다. '주역의 내용을 해석한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 공자가 이미 그 단서를 열었던 것이다.

 

앞서 공자가 역전 각편을 저술한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주역이 공자 이전에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 책이므로 공자도 주역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실제로 주역에 대한 언급이 논어에 수록되어있다. 공자는 주역을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고 선한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개과선천) 서적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유가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 훗날 전국시대 제자백가 학술의 영향아래서 주역을 전수傳授하였던 학자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괘효상과 괘효사, 그리고 서법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주역의 내용을 이론화하고 체계화하여 역전 각편이 형성 되었다.

 

이 때문에 역전은 전체적인 면에서 보면 철학적 저작이며, 고대 역학자들의 말을 빌자면 바로 궁리진성窮理盡性(천하 혹은 사물 이치를 궁구하고, 그 본성을 모두 실현시키도록 한다는 의미인데, 설괘전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하는 저작으로서 천도天道(천도란 하늘의 원리 혹은 세계의 운행 원리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겠지만, 유가적으로 본다면 이는 물리적 원리가 아니며 일정한 지향성을 가진 원리로서 인간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사물이 이에 의해 좌우된다.)를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의 일을 강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길흉화복을 점쳐서 묻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철리哲理를 밝혀내는 서적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사상사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진보였으며, 그 중심에는 역전이라는 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역이 후세에 영향을 미치게 된 까닭은 분명 점술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역전에서 제기하고 있는 역풀이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전에서는 어떤 역풀이 원칙을 제기하고 있을까? 이를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단전과 상전에서는 괘효상과 괘효사를 해석하고, 괘효사와 괘효상 양자 간의 내재적 관계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괘효상과 괘효사간의 이런 관계는 훗날 "상사상응지리象辭相應之理(괘효사와 괘효상 사이에는 필연적인 내재적 관계 혹은 원리가 있다는 생각)"라고 불린다. 주역에서 특정 괘효상에 특정 괘효사를 붙여둔 것은 과연 논리적 관련이나 따라야 할 법칙이 있는 것일까? 이것은 분명 의미심장하고 생각해볼한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이것은 줄곧 역경의 심오한 비밀 가운데 한가지라고 생각되어 왔으며, 역대 역학자들 모두가 이 심오한 비밀을 밝혀보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어, 단전과 상전의 저자는 주역 내용의 체계를 찾고 있었는데, 그에 따른 수많은 역풀이 원칙(해역체례解易體例)을 제기하였다. 단전과 상전에서 내놓은 해역체례의 예를 들자면, 취상설取象說이나 취의설取義說, 당위설當位說, 중위설中位說, 왕래설往來說, 승승설承乘說 등이 있으며, 이를 통해서 주역의 괘효상과 괘효사 사이에 논리적 관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설명하려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와같은 해석을 통해 주역은 마침내 엄밀한 이론 체계를 가진 경전으로 인정되었다.(여기서 설명하지 못한 역전의 여러가지 역풀이 원칙이나 체계들은 이어서 역전만을 전문으로 설명하는 시간에 자세히 살펴보려 한다.)

 

둘째, 계사전과 설괘전 등은 수많은 역학적, 철학적 범주들을 제시하여 주역의 원리와 원칙을 해설하였다. 예를 들자면 음양陰陽, 강유剛柔, 삼재三才, 위位, 중中, 시時, 태극太極, 양의兩儀, 사상四象, 상象, 수數, 의意, 신神, 기幾, 도기道器, 형이상形而上, 형이하形而下, 동정動靜, 소식消息, 태화太和 등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기우奇偶 두 획과 괘효상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음양변역의 법칙과 음양상제陰陽相濟 이론을 제기한 것이다. 또한 여기서 도출된 범주와 명제들은 훗날 중국철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셋째, 문언전은 건곤乾坤 두 괘의 해석을 통해서 주로 유가철학의 윤리학설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예를 들면 사덕설四德說이나 경의합일설敬義合一說, 중도관中道觀, 도덕수업道德修業說 등은 유가 인생철학의 내용 가운데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넷째, 서괘전과 잡괘전에서는 주역 64괘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토론하고, 64괘의 괘상과 괘의가 완정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각각의 이어진 괘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며, 혹은 서로 상반되고 서로 결합하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커다란 계통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이런 사고 방식으로 사물의 변화과정을 관찰하는 한가지 유형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역전의 저자는 서법과 괘효상, 그리고 괘효사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고대의 점치는 일에 관련된 책을 철학적 저작으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고대 사회, 특히 선진先秦(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이전의 고대사회를 말한다.) 시대 사유능력이 이미 어느정도 수준에 도달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정체성整體性의 원칙(작은 체계들이 모여 전체의 조화로운 체계를 이룬다는 생각이다. 이를 주역을 통해 살펴보면, 주역의 64괘는 각각 고유한 체계와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것이 모여 주역이라는 정체를 이룬다는 의미이다.)이라든가 변역성變易性의 원칙(세계와 그 구성원들은 모두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단전과 상전에서는 효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변화하는 사물의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음양호보陰陽互補 원칙(서로 상대되는 것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는 의미이다. 주역에서는 음효와 양효 사이의 관계를 지칭한다.), 화합과 균형의 원칙, 상의합일象意合一(괘상과 괘가 의미하는 바가 일치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역전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언어와 개념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한다.) 및 상수합일象數合一 원칙(괘상과 괘상을 만들어내는 수가 일치한다는 의미이다.)과 같은 역전에서 제기한 이론 사유들은 역전이라는 사상 서적의 근거가 되는 것이 비록 주역이라는 점치는 책이었지만,이를 승화시켜 사상으로 발전 시켰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앞서 보여드린 여러가지 그림들의 유래는 역전에서 몇마디 해놓은 이야기에 사람들이 살을 붙이면서 조작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용말이 등에 프린팅하고 나온 하도河圖와, 신귀(신령스런 거북이?) 등에 프린팅된 낙서洛書....  대부분 왼쪽 그림을 하도라고 하고 오른쪽 그림을 낙서라고 그러지만 반대로 부르는 사람들도 많다.  그만큼 여러가지 학설이 분분하다는 말이지..... 말이 많을 수록 더 믿을 게 못된다....

 

 

 

 

 

 

▶ 3. 계사(繫辭)의 형성 

 

 

‘계사繫辭’ 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괘효상卦爻象 아래에 달아(뒤에 붙임) 두었음을 가리키는데, 곧 계사전에서 “말을 달아서 그 길흉吉凶을 판단한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효사爻를 말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주역 상하경 뒤에 달아 둔 것, 즉 계사전을 가리킨다.

 

계사전은 주역과 서법筮法의 대체적 의미를 통론하면서도, 경문을 구절마다 해석하지는 않았기에 역대전易大傳이라고도 일컫는다. 공영달孔潁達의 주역정의周易正義 판본에서는 상전上傳을 12장章으로 나누고, 하전下傳을 9장章으로 나누었다.  주희朱熹의 주역본의周易本義 판본에서는 상전上傳과 하전下傳을 각각 12장으로 나누었다. 주희는 정이程?의 생각을 근거로 “천수天數가 다섯이며, 지수地數가 다섯이다. …… 변화를 완성하고 신비로운 일을 행한다.(天數五,地數五 …… 成變化而行鬼神也)”라는 단락을 “대연지大衍之數는 50이다.(大衍之數五十)”의 앞에 두는 것으로 편집하였고, 다시 “천일天一,지이地二 …… 천구天九,지십地十(天一,地二……天九,地十)” 단락을 “천수天數가 다섯이며 …… 신비로운 일을 행한다.(天數五……  行鬼神也)” 앞에 두었다.

 

왕부지王夫之는 주역내전周易內傳, 계사상전繫辭上傳에서 한서漢書 율력지律歷志와 위원숭衛元嵩(아래에 인물 해설)이 원포운시元包運蓍편에서 인용한 계사전 문장을 근거로, ‘천일天一’에서 ‘지십地十’까지의 20 글자가 “천수오天數五” 위에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여 주희의 편집을 고증했고, 당연히 주희의 판본을 따랐다. 마왕퇴馬王堆의 한漢나라 묘지 유적에서 출토된 백서본帛書本 주역에서도 계사전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현재의 통행본과 일부만 동일할 뿐 기타 부분은 통행본 계사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 통행본 설괘說卦의 첫 세 단락이 백서본 계사에서는 후반부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한대 초기에 계사의 전해지는 판본(傳本)이 여러 가지 존재하고 있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통행본 계사는 문장의 의미가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죽간竹簡(종이가 없던 시절에는 나무나 대나무 조각에 글씨를 쓰고 이걸 가죽끈으로 묶어서 책을 만들었었는데.... 가죽끈이 삭아서 떨어지면 책의 내용도 쉽게 앞뒤가 뒤바뀌곤 하는게 결정적인 문제점이었단다.)의 순서를 잘못 배열한(錯簡)것이라 의심되는 부분도 있다. 또한 어떤 장절章節에서는 위 아래 글 사이에 어떤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 “끝까지 올라간 용龍은 후회함이 있다.(亢龍有悔)”에 대한 해석은 문언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계사는 한 시대, 한 인물의 손에서 나온 저작이 아니며, 지속적으로 편찬되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계사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음양陰陽 이론으로 주역과 서법의 원리를 해석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역학사易學史나 철학사哲學史에 있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계사의 중요한 장절章節이 언제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 역시 토론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인데, 이경지李鏡池는 주역탐원周易探源에서 계사는 서한西漢 시대 소제紹帝와 선제宣帝 사이에 형성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백서본 계사의 출토로 인해 이 주장은 이미 부정되었다.

 

고형은 주역대전금주에서 계사가 공자 문하의 제자 공손니자公孫?子 이전에 형성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 까닭은 통행본 예기禮記의 악기樂記 편 가운데 한 단락이 계사의 첫 구절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서 건곤乾坤이 정해진다.(天尊地卑,乾坤定矣)”의 내용과 대체로 동일한 데 있다. 통행본 악기는 곧 공손니자가 저작한 것이며, 악기 가운데 이 단락은 계사를 옮겨서 쓴 것이므로 계사는 공손니자 이전에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따른다면 계사는 전국시대 전기 혹은 초기의 작품이다. 악기의 글은 다음과 같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은데,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이를 본받아 정해진다. 낮고 높은 것이 늘어서서 귀하고 천한 지위가 이를 본받아 정해진다. 움직이고(動) 고요한(靜) 것에는 일정함 있어서 크고 작은 것들이 나뉘게 된다. 일이 같은 종류끼리 모이고, 사물이 무리로 나누어지는 것은, 성性?명命이 서로 다른 것이다. 하늘에서는 상象이 완성되고, 땅에서는 형체가 완성된다. 이와 같이 예禮는 천지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땅의 기운이 위로 올라가고 하늘의 기운이 아래로 내려와서 음陰과 양陽이 서로 부딪치고 하늘과 땅이 서로 엇갈리며 천둥번개가 울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사시가 움직이고 해와 달이 데워주어서 모든 변화가 발생한다. 이와 같이 음악(樂)은 천지간의 조화로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성인은 예禮이니 악樂이니 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天尊地卑, 君臣定矣. 卑高已陳, 貴賤位矣. 動靜有常, 小大殊矣. 方以類聚, 物以?分, 則性命不同矣. 在天成象, 在地成形. 如此則禮者, 天地之別也. 地氣上齊, 天氣下降, 陰陽相摩, 天地相蕩, 鼓之以雷霆, 奮之以風雨, 動之以四時, 煖之以日月, 而百化興焉. 如此則樂者天地之和也. …… 故聖人曰禮樂云.)

 

이 구절은 앞의 구절과 함께 ‘악례樂禮’라고 불리는 부분으로, 예禮와 음악(樂)의 유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통행본 악기, 그 중에서도 특히 ‘악례’ 부분이 공손니자의 저작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사기, 악서樂書에서는 일찍이 악기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한대 초기에 이미 이 글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가운데 수많은 중요한 자구나 단락은 순자 악론樂論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후대인들이 공손니자의 말이라고 생각하는 “음악(樂)이란 것은 일음(여기서 일一은 첫 번째 음, 즉 궁음宮音을 말하는 것이다.)을 자세히 살펴서 조화로움을 정하는 것이며, 악기(物)를 써서 음절을 꾸미는 것이다.(樂者審一以定和, 比物以飾節.)”라던가 “음악(樂)이란 것은 선왕先王이 기쁨을 표현해낸 방식이다.(樂者先王之所以飾喜也.)” 등의 이야기는 모두 순자 악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몇몇 문구는 여씨춘추 적음適音편이나 음초音初편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서는 악기 가운데 어떤 부분이 공손니자에서 따온 것인지, 또는 공손니자 본인의 작품인지 아닌지 등은 이미 고증할 길이 없어진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는 “무제武帝 때 하간헌왕河間獻王은 유학儒學을 애호하여 모생毛生 등과 함께 주관周官이나 제자백가들이 음악에 대해 논의한 기록들을 채록하여 악기를 엮었다.(武帝時, 河間獻王好儒, 與毛生等共采周官及諸子言樂事者以作樂記.)”라고 하였고, 또 “유향劉向이 서적들을 교열할 때 악기 23편을 얻었다.(劉向校書, 得樂記二十三篇.)”라고 기록하였다. 현재 볼 수 있는 악기가 바로 유향이 교열한 23편 가운데 일부분이다. 이로써 우리는 지금의 악기가 결코 공손니자 한사람만의 저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곽말약郭沫若이 일찌기 청동시대靑銅時代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악례’의 장절에 관해서는 그것이 공손니자 시대의 작품인가 아닌가를 단정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예를 들면 그 중에서도 “천지天地의 만물이 본받는다.(天地官矣.)”나 “성명性命이 서로 다르다.(性命不同矣.)” 등은 바로 순자가 자주 사용하던 용어들이다.

 

악례 가운데 이 장章의 서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제五帝는 그 시기가 서로 달라서 음악(樂)을 그대로 이어 쓰지 않았으며, 삼왕三王은 세대가 서로 달라서 예禮를 그대로 이어 쓰지 않았다.(五帝殊時, 不相沿樂. 三王異世, 不相襲禮.)” 이것은 상앙商?의 주장으로, 결코 전국시대 전기 혹은 초기에는 나올 수 없었던 주장이다. ‘악례’ 장의 내용에 관해 살펴볼 때, 음악(樂)으로 천지를 조화롭게 하고 예禮로 천지의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식의 생각은 순자 악론에서 말하는 “음악(樂)은 같은 것을 합치고, 예禮는 다른 것을 구별한다.(樂合同,禮別異.)”는 주장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악례’ 장章은 공손니자가 지은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순자 후학의 손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더욱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통행본 악기에 근거해서 계사가 전국시대 전기의 작품이며 맹자나 상앙 이전에 이미 형성되었다고 판단하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다.

 

                  고대 음악의 정신을 서술한 것이 악기樂記이다.

 

 

 

 

백서본 계사와 육가陸賈의 신어新語에서 인용한 계사의 내용을 근거로 한다면, 계사의 하한선은 당연히 진한 교체기 이전임이 분명해진다. 그 상한선에 관해서는 아직은 이를 판단할 만한 직접적인 사료가 없다. 계사의 내용에 대해 말하자면 그 가운데 약간의 괘효사 해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주역의 성질과 팔괘의 기원 그리고 시초점의 원칙과 규칙(體例) 등을 주로 논술하고 있다. 계사에서는 특히 건곤乾坤 두 괘卦를 높이 추앙하고,  이 두 괘가 주역의 연원 혹은 기초라고 여기고 있는데, 이른바 “건곤은 역易의 진리가 쌓여있는 곳인가?(乾坤其易之縕邪?)”라는 것이 그것이다.

 

계사의 건곤괘에 대한 해석과 시초점의 규칙(占筮體例)에 대한 논술에 대해 말한다면, 이 전傳은 단彖과 상象 두 전傳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계사는 건곤 두 괘卦를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건乾은 사물의 위대한 창조를 주재하고 곤坤은 사물을 완성시키며(乾知大始, 坤作成物)”, “건乾은 고요하면 한곳으로 모이고 움직이면 곧아서 크게 낳는다. 곤坤은 고요하면 합쳐지고 움직이면 펼쳐져서 넓게 낳는다. 넓고 큰 것은 천지와 짝을 이루고, 변하여 통하는 것은 사계절과 짝을 이루며, 음양의 (변화하는) 의미는 해 달과 짝을 이루고, 쉽고 간략하여 훌륭한 것(善)은 지극한 덕德과 짝을 이룬다.(夫乾, 其靜也專, 其動也直, 是以大生焉. 夫坤, 其靜也翕, 其動也闢, 是以廣生焉. 廣大配天地, 變通配四時, 陰陽之義配日月, 易簡之善配至德.)”

 

여기서 이른바 ‘위대한 창조(大始)’, ‘사물을 완성시킴(成物)’, ‘크게 낳는 것(大生)’, ‘넓게 낳는 것(廣生)’ 등은 바로 건곤 두 괘卦의 단에서 말한 “만물이 이로부터 비롯되며(萬物資始)”, “만물이 이로부터 생겨난다.(萬物資生)”이며 단의 문장과 연결시켜 본다면 그 의미는 자명해진다. 계사에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象을 이루는 것을 건乾이라 하고, 본받는 것을 곤坤이라 하며(成象之謂乾, 效法之謂坤)”, “건乾은 천하의 지극히 굳건한 것이며, 그 덕행이 언제나 평이한 것은 험난함을 알기 때문이다. 곤坤은 천하의 지극히 유순한 것이며, 그 덕행이 언제나 간략한 것은 막힘을 알기 때문이다.(夫乾, 天下之至建也, 德行恒易以知險. 夫坤, 天下之至順也, 德行恒簡以知阻.)”

 

이것은 바로 상象에서 말한 “하늘의 운행은 굳건하며(天行健)”, “땅의 형세(地勢)가 곤坤이다.(地勢坤)”이며, 상의 내용과 연결시켜 볼 때 문장의 의미가 자명해진다.

 

계사에서는 다시 성인이 천지의 상象을 관찰하여 도구를 만들었다는 이론(觀象制器說)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황제黃帝 요堯 순舜이 옷을 늘어뜨리고 천하를 다스린 것은 건괘乾卦와 곤괘坤卦에서 채택한 것이다.(黃帝堯舜垂衣裳而天下治, 盖取諸乾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옷을 늘어뜨린 것'을 건곤 두 괘卦의 상象에서 채택한 것일까?  왜냐하면 건괘乾卦  상象에서는 구오효九五爻 효사爻辭를 풀이해서 “나는 용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대인이 일한 것이다.(飛龍在天, 大人造也)”라고 하였고, 곤괘坤卦 육오효六五爻 효사爻辭를 풀이해서 “누런 치마가 크게 길吉한 것은 꾸미는 것(文)이 안에 있는 것이다.(黃裳元吉, 文在中也)”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황제黃帝(실제 인물인지 아닌지도 모를 고대 전설상의 제왕이다. 한마디로 뻥이다. 하긴 고대 문화 가운데는 뻥이랄까, 아님 신화랄까 할 수 있는 설화 속에서 발전한 것들이 아주 많다.)가 옷을 발명한 것을 인류문명이 시작된 것으로 삼은 것이다. 이상은 계사의 건곤에 대한 해석이 단 상 두 전傳에 대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데, 건乾을 평이한 것으로 여기고 곤坤을 간략한 것으로 여겨서 “건乾은 평이함(易)으로 주재하고, 곤坤은 간략함(簡)으로 완성할 수 있다.(乾以易知, 坤以簡能)”라고 말하였으며, 건곤을 간략하고 평이한 이치(簡易之理)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것은 계사가 단 상의 건곤 이론에 대해 발전을 이루어낸 것이다.

 

서법筮法의 측면에서 보면 단 상 두 전傳에서는 음양강유설陰陽剛柔說을 제기하여 괘상과 효상을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춘추시기에는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단에서는 태泰비否 두 괘卦의 괘상을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內)은 양陽이고 바깥(外)은 음陰이니, 안으로 굳건하고 바깥으로 유순하다.(內陽外陰, 內健而外順)”, “안은 음陰이고 바깥은 양陽이니, 안으로 부드럽고 바깥으로 굳세다.(內陰而外陽, 內柔而外剛)”

 

이때 안(內)은 하괘下卦를 지칭하고 바깥(外)은 상괘上卦를 지칭하는데, 태괘泰卦는 건乾이 아래에 있고 곤坤이 위에 있기 때문에, ‘안(內)은 양陽이고 바깥(外)은 음陰’이라고 말하였다. 비괘否卦는 건乾이 위에 있고 곤坤이 아래에 있기 때문에 ‘안은 음陰이고 바깥은 양陽’이라고 말하였다. 건괘乾卦의 세 효爻는 모두 양효陽爻이며 곤괘坤卦의 세 효爻는 모두 음효陰爻인데, 이것을 달리 강剛과 유柔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단에서는 양효陽爻를 강剛, 음효陰爻를 유柔라고 하며, 각각의 효爻는 위 아래로 오고간다고 생각하였는데, 예를 들어 수괘隨卦를 풀이하면서 “(양)강剛이 와서 (음)유柔 아래에 있으니, 움직이고 기뻐함이 수隨 이다.(剛來而下柔, 動而悅, 隨.)”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계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하고 있다. “움직임과 고요함에 일정함(常)이 있어 (괘의) 양효(剛)와 음효(柔)가 결정된다.(動靜有常, 剛柔斷矣)”, “(괘의) 양효(剛)와 음효(柔)가 서로 밀쳐서 변화를 낳는다.(剛柔相推而生變化)”, “단사彖辭는 상象을 이야기한 것이고, 효사는 변화를 이야기한 것이다.(彖者, 言乎象者也. 爻者, 言乎變者也)”, “효爻와 상象은 괘卦 안에서 변동하고, 길흉은 괘卦 바깥에 있는 사람의 행동에서 드러난다.(爻象動乎內, 吉凶見乎外)”(단彖의 강유왕래설剛柔往來說에 의하면 양효와 음효가 하나의 卦 안에서 왕래하기 때문에 괘효상은 괘卦 안에서 변화하는 것이며, 길흉 판단은 인간의 행위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괘卦 밖에서 드러난다고 하였다.), “(괘의) 양효(剛)와 음효(柔)가 서로 바뀌니, 일정한 기준이 될 수 없고, 오직 변화에 맞추어갈 뿐이다.(剛柔相易, 不可爲典要, 唯變所適)”, “팔괘는 상象으로 알려주고, 괘효사(爻彖)는 정황(情)을 말해주는데, (괘의) 양효(剛)와 음효(柔)가 (하나의 괘卦 속에) 뒤섞여 있어서 길?흉이 드러난다.(八卦以象告, 爻彖以情言, 剛柔雜居而吉凶可見矣.)이런 것들은 모두 단의 강유왕래설剛柔往來說을 해석한 것이다.

 

앞서 단에서는 시중時中 관점으로 괘사卦辭의 길흉을 해석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바 있다. 이런 규칙과 관련해서 계사에서는 “(괘의) 양효(剛)와 음효(柔)란 근본을 세우는 것이며, 변하여 통하는 것은 때에 (맞게) 따르는 것이다.(剛柔者, 立本者也, 變通者, 趣時者也.)”라고 말했다. 또한 “여섯 효爻가 서로 뒤섞여 있는 것은, 오직 시대적인 상황(에 맞춘 것)일 뿐이다.(六爻相雜, 唯其時物也)”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효의 위치(爻位)에 따른 길흉은 그것이 처해있는 시간적 위치(時位: 때에 따른 상황 혹은 효가 그 자리에 위치하고 있을 때의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계사에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뒤섞여 있는 사물의 성질(德)을 가려내고, 그것들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은, 중효中爻가 아니면 갖추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아! 또한 존망存亡과 길흉吉凶을 알고자 한다면, 효爻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단사彖辭를 보면 반 이상을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若夫雜物撰德, 辨是與非, 則非其中爻不備. 噫! 亦要存亡吉凶則居可知矣. 知者觀其彖辭, 則思過半矣.)” 이것은 한 괘卦의 여섯 효爻 가운데 중효中爻, 즉 제이효第二爻와 제오효第五爻가 그 괘卦의 의미(卦義)와 그 길흉을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단사彖辭’는 공영달 소疏에 의하면 괘사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역시 단彖의 문장을 지칭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굳센 것이 중앙에 있다(剛中)’ , ‘부드러운 것이 중앙에 자리한다(柔得中)’, ‘중앙에서 바르다(中正)’ 등은 모두 단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계사가 시초점의 규칙에 관해 논술하면서 단과 상의 효위설을 해석 혹은 총결하였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밖에 단과 상은 모두 취상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런 경향은 특히 대상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계사는 다시 이를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인聖人은 천하 (만물)의 깊은 도리를 관찰하여 그 모양새를 본뜨고 그 사물에 알맞게 형상화하였기 때문에 상象이라고 말한다.(聖人有以見天下之?, 而擬諸其形容, 象其物宜, 是故謂之象)”, “그러므로 역易은 상象이며, 상象이란 것은 형상이다.(是故易者象也, 象也者像也.)” 이상의 자료들 가운데서 계사가 시초점 규칙에 대해 해석한 것은 단 상의 규칙을 원본으로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반드시 어떤 서법 규칙이 먼저 있고나서야 비로소 그런 규칙에 대한 해석과 총결이 나올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생각해보면 계사는 당연히 단 상 두 전傳 이후에 나온 것이다.

 

계사에서는 주역의 원리를 해석하면서 약간의 범주範疇와 개념槪念 및 명제命題,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을 제기하였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 개념과 명제는 전국 후기의 사상 조류에 상응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계사에서는 역易에 태극太極이 있다(易有太極)”고 하였는데, ‘태극’이라는 어휘는 선진先秦 시기의 문헌 가운데 오직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의 “태극보다 위에 있어도 높다고 하지 않고, 육극六極보다 아래에 있어도 깊다고 하지 않는다.(在太極之先而不爲高, 在六極之下而不爲深.)” 에서만 보인다. 이 곳의 태극은 육극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태극은 공간적으로 가장 높은 극한을 말한다. 이와는 달리 계사에서 말한 ‘태극’은 대연지수大衍之數 혹은 기우奇偶 두 획이 그어져서 나누어지기 이전의 상태, 곧 괘상의 근원을 지칭하기 때문에 태극이라고 부른다. 장자에서 말한 ‘태극’이 당연히 이 말이 가지는 최초의 함의이겠지만 계사에서는 장자의 ‘태극’을 사용해서 서법을 해석하였던 것이다.

 

다시 예를 들어보자면 계사에서는 “정기精氣는 사물이 되고 떠다니는 혼백(遊魂)은 변화하는 까닭에 귀신鬼神의 정황을 알 수 있는 것이다.(精氣爲物, 游魂爲變, 是故知鬼神之情狀.)”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정기精氣’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으로 귀신鬼神을 해석한 것이다. 이런 관점은 관자管子 내업內業편에서도 볼 수 있는데, 내업內業에서는 “사물의 정기(精)를 얻으면 생명이 탄생한다. …… 천지간에 떠다니는 것을 귀신이라고 한다.(凡物之精, 此則爲生 …… 流于天地之間,謂之鬼神.)”라고 말하였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계사에서는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서 건곤乾坤이 정해진다.(天尊地卑,乾坤定矣)”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천존지비天尊地卑’설은 다시 장자 천도天道편에서 “존귀한 것이 앞서고 낮은 것이 뒤를 따르는 것은 천지의 운행과 같기 때문에 성인聖人은 이를 본보기(象)로 취하였다. 하늘은 높고 땅이 낮은 것이 신명神明의 자리이다.(夫尊卑先後, 天地之行也, 故?人取象焉. 天尊地卑,神明之位也.)”라고 한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계사에서는 천지신명天地神明으로 건곤 두 괘卦의 연원을 해석하였는데, 바로 성인취상설聖人取象說이다. 또 계사는 성인이 (괘)상象을 관찰하여 도구를 만들었다는 이론(聖人觀象制器說)을 논술하면서, 복희씨伏羲氏가 그물을 발명하였고, 뒤를 이어 신농씨神農氏가 쟁기와 보습을 발명하였으며, 황제黃帝 요堯 순舜이 옷이나 배와 노, 그리고 소와 말을 부리는 방법과 화살 등을 발명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역사적 통치자의 순서에 대한 서술은 상군서商君書 갱법更法편에서 “복희와 신농은 교화는 하되 토벌하지는 않았고, 황제黃帝와 요堯 순舜은 토벌은 하되 분노하지는 않았다.(伏羲神農敎而不誅, 黃帝堯舜誅而不怒.)”라고 한 데서도 보인다. 이상은 계사에서 사용된 개념이나 명제, 술어 등이 전국시대 중기 이후의 철학과 학술사상의 발전 상황을 반영하고 있어서, 계사가 장자莊子나 상앙商?, 그리고 관자管子 내업內業편 보다 먼저 나왔을 수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서법 규칙에 대한 해설이라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그 범주나 개념 그리고 명제의 발전이라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계사의 상한선은 마땅히 단의 내용과 장자 대종사편의 이후가 된다. 다시 말해 계사는 전국 후기에 지속적으로 형성된 저술이며, 그 하한선은 전국 말년으로 판단할 수 있다.

 

전설속의 복희와 그 짝궁 여와의 모습이다. 아랫도리는 뱀이다. 이런 뱀들이 그사람들 선조인가?...... 농담이고........ 어느 문화권에서나 이런 전설은 존재한다. 특히나 그리스 신화에서는 반인 반수의 동물(?)들과 인간, 그리고 신들이 서로 영향을 끼치며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놓았다.           뱀...... 이 동물은 고대세계에서는 지혜의 상징이었다. 그러니 복희가 팔괘를 만들었다는 둥 하는 말 뻥이다!

 

 

 

 

 

 

  용어, 인물 해설

 

............... 위원숭衛元嵩: 남북조 시대 북주北周의 술수가術數家이다. 익주益州(지금의 사천四川) 성도成都 사람으로, 음양역산陰陽曆算에 정통하고 술수에 능했다고 한다. 예언을 잘하였고 불교를 믿었으며, 저서로는 원포元包 10권이 있었으나 현재는 5권만 전하는데, 원포는 귀장歸藏에 관한 주요저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 4. 단전彖傳의 형성.

 

 

단전彖傳은 주역 경문을 따라 해설하고 있기 때문에 경문과 마찬가지로 상,하편으로 나뉘는데, 주역 64괘의 괘상卦象과 괘 이름(괘명卦名) 그리고 괘사卦辭를 해설하고 있으며, 효사爻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단이라는 명칭과 관련해서 한대漢代의 주석에서 “단彖”을 “판단하다.(斷)”로 풀이한 것은, 한 괘卦의 의미를 단정하는 것이 그 뜻 이라고 본 것이다.  계사에서는 “단彖은 재材이다.(彖者, 材也)”라고 말했다. 또 “단사彖辭를 보면, (점치는 일의) 반 이상을 생각해낼 수 있다.(觀其彖辭, 則思過半矣)”라고 말하였다.  ‘재材’는 덕행德行이며, 한 괘卦의 의미(卦義)를 가리킨다. ‘단사彖辭’는 공영달孔潁達 소疏(당나라때 과거시험의 교과서로 쓰여진 오경정의五經正義 가운데 주역정의周易正義에 있는 공영달의 소疏, 공소孔疏라도 한다.)에 의하면 괘사卦辭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괘卦의 의미와 괘사卦辭를 해석하고 있는 전傳 역시 단彖이라고 부른다. 

 

상象 역시 통행본  주역 경문을 쫓아서 해설하고 있기 때문에, 상편과 하편으로 나누어지며, 64괘卦의 괘상卦象과 괘사卦辭 및 효사爻辭를 해석하고 있다. 괘상卦象과 괘의卦義를 해석하고 있는 부분은 대상大象이라고 부르고, 효상爻象과 효사爻辭를 해석하고 있는 부분을 소상小象이라고 칭한다. 이 전傳이 상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대상에서 괘상과 괘의를 해석할 때 취상설取象說을 주로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다시말하자면, 팔괘八卦를 하늘과 땅, 그리고 바람, 우뢰, 물, 불, 산, 연못과 같은 여덟 가지 자연현상에 나누어 배치하여 64괘卦의 괘의卦義를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계사繫辭에서 “단彖은 상象을 말하는 것이다.(彖者言乎象者也)”이나 “역易은 상象이며, 상象이란 것은 상징이다.(易者象也, 象也者, 像也.)”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언文言은 이전 사람들의 말을 문자로 기록한 것인데, 이 전傳에서는 건곤乾坤 두 괘卦의 괘효사卦爻辭만을 해석하고 있다. 이상의 세 가지 전傳은 경문을 따라 해석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계사나 설괘 등의 다른 전傳과는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이며, 이때문에 이 세가지 전은 동일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전傳을 서로 비교해보면 아무래도 단의 형성 년대가 비교적 빠르다고 할 수 있다.

 

단의 형성 년대와 관련해서 논증할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대략적인 상한선과 하한선만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선진 시기의 전적 가운데서는 오로지 순자荀子 대략편大略篇만이 단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략의 함괘咸卦에 대한 해석은 단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서로 다른 점은 대략에는 “두 기운(氣)이 서로 감응해서 함께하며, 그쳐서 기뻐한다.(二氣相感以相與, 止而說)”는 단의 구절이 없는 대신 “고귀한 것이 비천한 것 아래로 내려간다.(以高下下.)”로 단의 “부드러운 것(柔)이 위에 있고 굳센 것(剛)이 아래에 있다.(柔上而剛下)”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때 유柔는 상괘上卦인 태兌를 가리키고,  강剛은 하괘下卦인 간艮을 말하는 것이다.) 순자의 글은 단의 문장보다는 비교적 간략한데, (이것은) 단彖의 요점을 간추려 적은 것으로 보인다. 대략은 순자가 강의한 기록인데, 이때 단에서 문장의 의미를 인용하면서도 간략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살펴보면 단이 형성된 시기의 하한선은 마땅히 순자 이전이 될 것이다.

 

단이 형성된 시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 상한선은 시초점의 원칙(占筮體例: 체례는 규칙이나 원칙을 말한다.)과 관련해서 살펴볼 수 있다. 즉, 역풀이에 춘추시대의 사람들은 강유설剛柔說이나 효위설爻位說을 이용한 기록이 없지만, 단에서는 강유설剛柔說을 제시하고 있다.(강유剛柔는 역전에서 매우 중요한 범주이며,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때문에, 강유설剛柔說의 사용에 대해서는 이후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그러므로 단이 춘추시대 이후에 나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전傳이 전국시대 초기 혹은 전기에 형성되었는가 아닌가는 논의해볼만한 문제이다. 전국시대 전기에 형성되었다는 학설(戰國前期說)을 지지하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사기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의 기록 때문인데, 이 책에 의하면 공자는 역易을 노나라 사람 상구商瞿에게 전수하였고 상구는 초楚나라 사람 한비자홍?臂子弘에게 전수하였으며, 한비자홍은 다시 강동江東 사람 교질矯疵에게 전수하였다고 한다. 단의 문장은 압운을 맞추는 글자(韻語)를 상당수 포함하고 있어서, 노자老子나 장자莊子 등의 저작과 같은 계열에 속하고, 저자는 남방 사람으로 보이는데, 한비자홍은 순자에 나오는 자궁子弓이다. 자궁은 초楚나라 사람이므로, 단이 자궁의 저작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단에서 사용되고 있는 술어들 가운데 ‘강유剛柔’, ‘영허盈虛’ 등과 같은 말들은 분명 노장老莊의 저작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단의 사상을 살펴보면 도가사상道家思想의 영향을 받은 것 이외에, 맹자孟子의 학설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데, 그 가운데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그 첫 번째는 시중설時中說로, 단이 서법筮法을 해석하는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이 바로 ‘시중時中’이다. 한 괘卦의 여섯 효爻 가운데, 제이효第二爻와 제오효第五爻가 상괘上卦와 하괘下卦의 중앙(中位)에 자리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이 중앙에 있는 효爻(中爻)가 길吉하기 때문에 ‘중中’혹은 ‘중정中正’은 사물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단에서는 수괘需卦를 해석하면서 “천위天位에 자리하여 바르게 중앙에 있기 때문이다.(位乎天位, 以正中也)”라고 하였으며, 송괘訟卦를 해석하면서 “대인大人을 보는 것이 이로운 것은 중앙에서 바른 것을 숭상하기 때문이다.(利見大人, 尙中正也)”라고 하였다. 또 소축괘小畜卦를 해석하면서 “굳건하면서도 겸손하고, 굳센 것이 중앙에 있으면서도 뜻이 행해지므로 마침내 형통하다.(健而巽, 剛中而志行, 乃亨)”라고 하였으며, 이괘履卦를 해석하면서 “굳센 것이 중앙에서 바르니 황제의 임무를 이행하지만 거리끼지 않는 것은 광명정대하기 때문이다.(剛中正, 履帝位而不疾, 光明也)”라고 하였다. 동인괘同人卦를 해석하면서 “문명文明하면서 굳건하며, 중앙에서 바르게 응한 것은 군자君子의 바름이다.(文明以健, 中正而應, 君子正也)”라고 하였으며, 대유괘大有卦를 해석하면서는 “부드러움(柔: 陰爻를 가리킨다.)이 존귀한 자리(尊位: 第五爻의 위치를 말한다.)를 얻어서, 크게 중앙에 있으면서 위아래가 이에 응하므로 대유大有라고 한다.(柔得尊位, 大中而上下應之, 曰大有)”고 했는데, 이런 식의 문구가 단에 가득 차 있다.

 

시時와 관련해서 (단에서는) 여섯 효爻의 길흉은 각각이 처해있는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르고, 상황에 따라 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때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미덕으로 보았다. 예를 들자면 대유괘大有卦를 해석하면서 “하늘에 응해서 때에 맞게 행하기 때문에 크게 형통하다.(應乎天而時行, 是以元亨)”라고 하였고, 수괘隨卦를 해석하면서 “천하가 적합한 때를 따르니, 때를 따르는 뜻이 크도다!(天下隨時, 隨時之義大矣哉!)”라고 하였으며, 감괘坎卦를 해석하면서 “왕공王公이 험한 곳을 만들어서 나라를 지키니, 험한 것을 쓰는 때와 그 쓰임이 크도다!(王公設險, 以守其國, 險之時用, 大矣哉!)”라고 하였다. 또 둔괘遁卦를 해석하면서 “굳센 것(剛: 遁卦의 九五爻를 가리킨다.)이 마땅한 자리에 있으면서 응하고 있으므로 때에 맞추어 행하는 것이다.(剛當位而應, 與時行也)”라 하였고, 손괘損卦를 해석하면서는 “굳센 것(剛: 上卦인 艮을 가리킨다.)에서 덜어서 부드러운 것(柔: 下卦인 兌를 가리킨다.)에 보태는 것에는 때가 있으므로 덜어내고 더하는 것이나 채우고 비우는 것은 때에 맞게 행해야 한다.(損剛益柔有時, 損益盈虛, 與時偕行)”고 하였으며, 간괘艮卦를 해석하면서 “때가 멈추어야 할 때는 멈추고, 때가 행해야할 때는 행해서, 움직이고 정지하는 것에 그 때를 잃지 않으면 그 도道가 광명하다.(時止則止, 時行則行, 動靜不失其時, 其道光明)”라고 하였다. 이런식의 문구 역시 단에서는 많은 출현 빈도를 차지한다. 단에서는 중中과 시時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시중時中’, 즉  때에 맞추어 중도中道를 행하는 것을 인간의 행위준칙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단에서는 몽괘蒙卦를 해석하면서 “몽蒙이 형통한 것은, 형통함으로 행하는 것이 때에 알맞기 때문이다.(蒙亨, 以亨行時中也)”라고 말했다. 이상의 내용은 단에서 ‘시중時中’을 추앙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시중설은 유가儒家의 학설이다. 사실 유가에서 중도中道를 숭앙하는 것은 공자에서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단의 저자 역시 중위설中位說을 제기하여 괘상의 길흉을 해석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공자가 ‘시時’관념을 행위준칙으로 제기하였던 것은 아니다. ‘시時’를 숭앙하기 시작한 것은 맹자孟子이다. 그는 공자를 찬양하면서 “공자는 성인 가운데서도 때에 알맞게 하신 분이다.(孟子 萬章下: 孔子, 聖之時者也.)”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공자는 “벼슬살만하면 벼슬하고 그쳐야할 것 같으면 그쳤으며, 오래도록 해야 하면 오래하고 속히 해야 하면 속히 하였기(孟子 公孫丑上: 可以仕則仕, 可以止則止, 可以久則久, 可以速則速.)” 때문인데, 때에 맞도록 행동하였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성인이라는 것이다. 맹자 역시 중도中道를 추앙하여 “공자께서 어찌 중도를 바라지 않았겠는가!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다음의 것을 생각하신 것이다.(孟子 盡心下: 孔子豈不欲中道哉! 不可必得, 故思其次也.)”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맹자는 시時와 중中을 결합하여 이상적 인격표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막子莫은 중中을 고집하였는데, 중中을 고집한 것은 (도리에) 가까운 것이다. 중中을 고집하면서 권도가 없으면 마치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과 같다.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그것이 도道를 해치기 때문인데, (이는) 한 가지만을 들고 백가지를 폐기하는 것이다.(孟子 盡心上: 子莫執中, 執中爲近之. 執中無權, 猶執一也. 所惡執一者, 爲其賊道也, 擧一而廢百也.)” 이때 ‘중中을 고집하면서 권도가 없다’는 것은 그저 중도中道만을 지켜서 때에 따라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즉 때에 맞게 중도中道를 행하지 못하여 결국 한 가지 틀만을 굳게 지키게 되고 도리어 ‘도道’를 훼손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맹자는 시중설時中說의 창도자이다. 때문에 중용中庸에서는 “군자는 때에 알맞게 한다.(君子而時中.)”라고 말했다. 단의 시중時中 관념은 맹자학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단에서 “때가 멈추어야 할 때는 멈추고 때가 행해야할 때는 행해서, 움직이고 정지하는 것에 그 때를 잃지 않는다(時止則止, 時行則行, 動靜不失其時)”라고 말하는 것은 맹자가 공자에 대해 평가하면서 말한 “벼슬살만하면 벼슬하고 그쳐야할 것 같으면 그쳤다” 혹은 “공자는 성인聖人 가운데서도 때에 알맞게 하신 분이다.”와 결코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단彖의 사상과 맹자사상 사이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두 번째 근거는 하늘에 순종하여 사람들에게 응한다는 학설(順天應人說)이다. 단에는 두 가지 조목에서 천인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단은 혁괘革卦를 해석하면서 “천지가 변혁하여 사시가 이루어진다. (은殷나라) 탕湯왕과 (주周나라) 무武왕이 혁명을 한 것은 하늘(의 도리)를 쫓아서 사람들에게 응했던 것이다. 혁革의 때가 크도다!(天地革而四時成. 湯武革命, 順乎天而應乎人. 革之時大矣哉!)”라고 하였으며, 태괘兌卦를 해석하면서 “이 때문에 하늘(의 도리)를 쫓아서 사람들에게 응한다. 기쁘게 백성들 보다 먼저 (솔선)하면 백성들이 그 수고로움을 잊어버리고, 기쁘게 어려운 일을 하면 백성들이 죽음을 무릅쓸 것이며, 기뻐함이 커서 백성들이 인도될 것이다!(是以順乎天而應乎人. 說以先民, 民忘其勞; 說以犯難, 民忘其死; 說之大, 民勸矣哉!)”라고 말했다. 이것은 탕왕과 무왕이 (하夏나라) 걸桀왕과 (은殷나라) 주紂왕을 정벌한 것을 혁명으로 본 것이다. 혁명은 바로 하늘을 쫓아서 사람들에게 응하는 일이므로, 하늘을 쫓아서 사람들에게 응하였던 것은 백성들의 마음(民心)을 깊이 얻어서 그들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정성을 다해 복종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맹자에서도 보인다. 맹자는 “하늘(의 도리)를 따르는 자는 살아남고, 하늘(의 도리)를 거스르는 자는 멸망한다.(孟子 離婁上: 順天者存, 逆天者亡.)”라고 말했다. 이른바 ‘하늘(의 도리)를 쫓는 것’은 곧 ‘사람들에게 응하는 것’ 이며 사람들의 바람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요堯임금이 정권을 순舜임금에게 이양했던 것이 한편으로는 하늘의 뜻을 구현해 냈던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에 순응했던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늘이 주었고, 사람들이 주었다.(孟子 萬章上: 天與之, 人與之.)”는 것이다. 그러므로 폭군이 민심을 거스르는 것은 곧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를 토벌하게 되는 것이다. 맹자는 “(사람들을) 해치고 도적질을 일삼는 사람은 한낱 필부라고 한다. 한낱 필부인 주紂를 죽였다고는 들었지만 임금을 시해하였다는 듣지 못했다.(孟子 梁惠王下: 殘賊之人, 謂之一夫.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라고 말했다. 이것은 바로 ?단彖?에서 말한 ‘탕무혁명湯武革命’설說이다. 정권을 잡거나 잃는 것이 하늘(의 도리)를 쫓아서 사람들에게 응하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에 맹자는 다시 ‘열민悅民’설說을 제기하면서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즐긴다면, 백성들 역시 그의 즐거움을 즐거워할 것이니(孟子 梁惠王下: 樂民之樂者, 民亦樂其樂.)”, “차지하는데 연燕나라(燕은 戰國七雄 가운데 한 나라로 지금의 중국 북경 부근이 그 영역이다. 맹자 의 내용에 의하면 齊나라 宣王이 연나라를 정벌한 후 이를 차지하기 위해 맹자와 상의하였다고 한다.) 백성들이 기뻐하면 (연나라를) 차지하고(孟子 梁惠王下: 取之而燕民悅, 則取之.)”, “차지하는데 연나라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차지하지 말아야 한다.(孟子 梁惠王下: 取之而燕民不悅, 則勿取.)”라고 하였으며, 또한 임금이 백성들로 하여금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하면, 비록 위태롭고 어려운 일에 부닥쳐 “죽게 되더라도 백성들이 떠나지 않아야 한다.(孟子 梁惠王下: 效死而民弗去.)”라고 하였다. 이는 단에서 ‘기뻐함(悅)’으로 태괘兌卦의 괘명卦名을 해석하고 ‘기뻐함이 커서 백성들이 인도된다.(說之大, 民勸矣哉)’로 ‘하늘(의 도리)를 쫓아서 사람들에게 응한다.(順乎天而應乎人)’를 해석하는 것과 일치한다.

 

단의 사상과 맹자 사상 사이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세 번째 근거는 양현설養賢說이다. 단에서는 ‘어진 이를 숭상할 것(尙賢)’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어진 이를 길러낼 것(養賢)’을 주장한다. 단은 대축괘大畜卦를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축大畜은 강건하고 독실하며 빛나는 것이기에 날마다 그 덕德을 새롭게 하며, 굳센 것(剛)이 위에 있으니 어진 이를 숭상한다. …… ‘집에서 밥을 먹지 않는 것이 길하다’고 하는 것은 어진 이를 길러내는 것이다.(大畜, 剛健篤實輝光, 日新其德, 剛上而尙賢 …… 不家食吉, 養賢也.)”  또 이괘?卦를 해석하면서 “천지가 만물을 길러내고 성인은 어진 이를 길러내서 만 백성에게까지 미치니 이의 때가 크도다!(天地養萬物, 聖人養賢以及萬民, ?之時大矣哉!)”라고 하였으며, 정괘鼎卦를 해석하면서 “나무를 불에 넣어 (솥의 음식을) 삶아 익힌다. 성인은 (솥의 음식을) 삶아 상제에게 제사하고 대규모로 (음식을) 삶아 성현聖賢을 길러낸다.(以木巽火, 亨, ?也. 聖人亨以享上帝, 而大亨以養聖賢.)”라고 말했다. 공자와 맹자는 모두 어진 이를 숭상할 것을 제창했지만, 맹자는 어진 이를 숭상하는 것 이외에 다시 어진 이를 길러낼 것(養賢說)을 주장했다.

 

맹자는 “어진 이를 기쁘게 따르면서도 등용하지 못하고, 또 길러내지도 못한다면 어진 이를 기쁘게 따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孟子 萬章下: 悅賢不能擧, 又不能養也, 可謂悅賢乎?)”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어진 이를 기쁘게 따르는 것(悅賢)은 어진 이를 숭상하는 것(尙賢)과 어진 이를 길러내는 것(養賢) 두 가지를 모두 포괄한다. 어진 이를 길러내는 것에 관해서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堯임금이 순舜을 대한 것을 보면, 자신의 아홉 아들로 하여금 (순舜을) 섬기도록 하였고, 두 딸을 (순舜에게) 시집보냈으며, 백관들과 소 양 곡식창고들을 준비하여 밭두렁 가운데서 (일하고 있는) 순舜을 봉양한 후에야 그를 등용하여 윗자리에 앉혔으므로 왕공王公이 어진 이를 존중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孟子 萬章下: 堯之於舜也, 使其子九男事之, 二女女焉, 百官牛羊倉?備, 以養舜於?畝之中, 後擧而加諸上位, 故曰王公之尊賢者也.)” 이것은 다시 '어진 이를 길러내는 것(養賢)'이 '어진 이를 등용하는(擧賢)' 전제조건이 된다는 말이다. 맹자 자신은 여러 제후들 사이를 전전하며 생활하였고, 이에 대해 스스로 그들의 봉양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여간 맹자 뻥치는 거는 알아줘야 된다....... 유가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무라 그럴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들 정신세계도 정말 독특하다.)이것은 단의 ‘어진 이를 길러낸다(養賢)’는 관점과 일치한다.

 

이상의 세 가지 증거는 단과 맹자의 학설이 사상적 측면뿐만 아니라 술어術語와 개념 그리고 명제에 이르기까지 서로 계승관계가 존재함을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맹자의 관점이 단에서 왔는가, 그게 아니라면 단의 관점이 맹자에서 왔는가에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의 관점이 맹자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단의 ‘시중時中’설은 주역과 서법筮法을 해석한 것인데, 만일 맹자의 시중설時中說이 단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면, 맹자는 주역에 대해 한마디도 평론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맹자의 관점이 주역 계통에서 온 것이 아님을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의 ‘탕무혁명湯武革命’설은 맹자의 탕무정벌설湯武征伐說을 개괄한 것이며, ‘혁명革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혁괘革卦의 괘명卦名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사상思想의 내용은 언제나 이론에 앞서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 뒤에야 비로소 이론적 개괄이 이루어진다. '어진 이를 길러내는 것(養賢)'과 관련해서 살펴보면, 맹자에서 성인(聖)과 현인(賢)은 구별되어서 성인은 현인보다 높은 경지에 있으며, 결코 성聖과 현賢 두 단어를 이어서 하나의 단어처럼 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단에서는 정괘鼎卦를 해석할 때 성聖과 현賢을 이어서 부르고 있다.  단어와 단어가 결합되어 하나의 개념처럼 쓰이는 사조詞組의 변화 발전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단의 내용은 당연히 맹자 이후에 나온 것이다. 여기에 근거한다면, 단의 형성 년대는 맹자보다 빠를 수 없으며, 전국시대 중기 이후인 맹자와 순자 사이라고 확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상전과 문언전의 형성시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맹자님 이란다......  평생 주역 이야기는 한마디도 않았지만.... 그래도 관계가 있단다. 이것도 우기는건 아닌지?

 

 

 

 

 용어, 인물 해설

 

 

.................. 상구商瞿: 상구는 춘추시대 노나라의 학자로 공자의 제자이며, 자字는 자목子木이다. 공자에게서 주역을 배워 자하의 문인인 초나라 사람  한비자홍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 비자홍: 한비자홍의 한비?臂는 이름이며 자홍子弘 또는 자궁子弓은 자字이다. 전국시대 초楚나라 사람이며, 자하子夏의 문인으로 공자역학의 3대 전인이라고 전해진다.

 

 

▶ 5. 상전象傳 의 형성.

 

상象이 형성된 년대와 관련해서, 고형高亨은 대상大象에서 64괘卦의 괘명卦名과 괘의卦義만을 풀이하고 괘사卦辭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까닭은, 단彖에서 이미 괘사卦辭를 풀이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상象은 단彖보다 늦게 나왔다고 생각했다. (高亨, 周易大傳今注 참고) 이 것은 매우 상전의 형성 시기를 매우 정확하게 지적한 말이다. 

 

단에서는 괘사卦辭만을 풀이하고 효사爻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소상小象에서는 상전象傳임에도, 효사爻辭를 보충할 때 단전의 효위설을 동시에 채택하고 있는데, 이 역시 상이 단보다 뒤늦게 나왔다는 증거가 된다.  또 상의 문구에서는 여러 곳에서 단의 주장을 발휘해내고 있다. 예를 들어 단에서는 건괘乾卦를 풀이하면서 “만물이 이로부터 비롯되며 마침내 하늘을 통할한다.(萬物資始, 乃統天)”라고 하였는데, 대상大象에서는 “하늘의 운행이 굳건하다.(天行健)”라고 하였다. 단은 곤괘坤卦를 풀이하면서 “곤坤은 두텁게 사물을 싣고 있어서, 그 덕德은 끝없는 지경에 합한다.(坤厚載物, 德合无疆)”라고 하였는데, 대상에서는 “땅의 형세가 곤坤이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두터운 덕德으로 사물을 떠받친다.(地勢坤, 君子以厚德載物)”라고 하였다.  단은 태괘泰卦를 풀이하면서 “이것은 천지가 교합하여 만물이 서로 통하는 것이다.(則是天地交而萬物通也)”라고 하였는데, 대상에서는 “천지가 교합하는 것이 태泰이니 제후(后)는 이를 본받아 천지의 도道가 알맞게 운행되도록 한다.(天地交泰, 后以財成天地之道)”라고 하였다. 단은 다시 비괘否卦를 풀이하면서 “이것은 천지가 교합하지 않아서 만물이 서로 통하지 못하는 것이다.(則是天地不交而萬物不通也)”라고 하였는데, 대상에서는 “천지가 교합하지 않는 것이 비否이다.(天地不交, 否)”라고 하였다.

 

이상 살펴본 예에서 그 말투를 살펴보면 상의 문장은 바로 단의 문장에 대한 해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에서는 또 준괘屯卦를 풀이하여 “굳센 것과 부드러운 것이 처음 만나서 어려움이 생겨난다.(剛柔始交而難生)”라고 하였고, 소상小象에서는 이 괘卦의 육이효六二爻 효사爻辭를 해석하여 “육이六二의 어려움은 굳센 것을 타고 있기 때문이다.(六二之難, 乘剛也)”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단의 의미를 사용해서 효상爻象을 해석한 것이며, 이런 유형의 예는 매우 많이 보인다.

 

예기禮記 심의편深衣篇에서는 일찍이 곤괘坤卦 육이효六二爻의 소상을 인용하여 “육이六二의 움직임은 곧고 방정하다.(六二之動, 直以方也)”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상의 하한선은 당연히 심의편이 기록되기 이전이다. 그렇지만 심의의 형성 년대는 이미 고증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예기라는 서적이 대체로 전국시대에서 진한秦漢 교체기(진나라가 혼란에 빠진후, 한나라가 자리를 잡을 때 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사이의 작품이라고 여겨지고 있을 뿐이다. 또 중용中庸(본래는 예기의 한 편篇이었으나, 송대 주희는 대학大學과 함께 중용中庸을 독립시켜, 논어 맹자와 더불어 사서四書라 불렀다.)에서는 군자의 덕행을 이야기하면서 “넓고 두터운 것은 땅과 짝지을 만하고, 높고 밝은 것은 하늘과 짝지을 만하며, 유구悠久함은 끝이 없다.(博厚配地, 高明配天, 悠久無疆.)”라고 하였다.  그리고 ‘유구悠久’에 관해서는 “쉬지 않으면 오래되고(不息則久.)”, “유원悠遠하면 넓고 두텁게 된다.(悠遠則博厚. )라고 해석하였다. 또한 “넓고 두터우니 만물을 떠받칠 수 있고, 높고 밝으니 만물을 덮어 주는 것이, 유구하기에 만물을 완성하는 것이다.(博厚所以載物也, 高明所以覆物也, 悠久所以成物也.)”라고 하였다. 이 논조를 따르자면 하늘의 덕德은 쉬지 않는 것이며, 땅의 덕德은 사물을 떠받치는 것이다. 이것은 상에서 “하늘의 운행은 굳건하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스스로 힘써 쉬지 않는다.(天行健, 君子以自强不息)”라고 말한 것이나 “땅의 형세가 곤坤이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두터운 덕德으로 사물을 떠받친다.(地勢坤, 君子以厚德載物)”와 일치한다. 중용은 예기의 한편이었으며, 진한秦漢 교체기의 작품인데, 그 안에서 군자의 덕德과 천지의 도道에 대해 해석한 것은 상象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근거로 하면 상의 하한선은 마땅히 진한秦漢 교체기 이전으로 보아야 하며, 마찬가지로 전국시대 후기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 6. 문언전(文言傳)의 형성

 

문언文言은 경학자가 건곤乾坤 두 괘卦의 괘효사를 풀이한 기록이다. 그 가운데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子曰)”라고 하는 부분은 사실 공자의 말이 아니라 경학자의 말이거나 혹은 거짓으로 공자의 말이라 의탁한 것이다.(정통주의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신성시되는 훌륭한 사람 이름으로 자기 생각을 많이 발표한다. 어떻게 보면 사기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근데 이건 유가儒家 학자들에게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도가 무리들 역시 이런 경향이 있었다. 물론 각종 도가 전적들의 은유적 말투는 작자가 처음부터 그 내용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길 바라지 않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들게도 하지만....  또 이런 일들은 동양에서만 일어난 일도 아니다. 서양에서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 했었다. 물론 교회다니시는 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절대 아니라 그러시겠지만, 성경에 쓰인 내용 가운데서도 이런 내용들이 아주아주 많다.  한마디로 고대 문헌들을 100% 글자 그대로 믿는것 그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하다 못해 역사서에도 사기친게 한두가지가 아니니까..... 이전에 '삼국지와 영웅이야기'에서도 여러번 이야기한 내용이지만.....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역사책은 절대 글자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무슨 허무맹랑한 국수주의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니고, 우리 역사서가 중국의 눈치를 봐도 너무 보는 사람의 손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에, 절대 중국에 대해 독립적인 행위나 언사를 한 사람들을 좋게 보지 않았고, 그 내용을 많이 왜곡했기 때문이다. 이런건 여러가지 측면에서 다시 연구해야할 문제라 생각된다. 조선시대 모화관慕華館이라는 곳이 있었다.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인데 이름자체가 지금 보면 굴욕적이라 할만큼 사대적이다. 또 이런 사람들이 기록한 역사를 100% 글자 그대로 믿는거 자체가 우습다.) 문언의 건괘乾卦 여섯 효爻에 대한 해석은 크게 세 단락이 있으며, 대체적 의미는 대동소이한데, 이는 문언이 경학자의 강의 기록이며 한사람의 손에서 저작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문언의 건괘乾卦 괘사卦辭 “원형이정元亨利貞”에 대한 해석에서는, 이 네 글자를 네 가지 덕德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좌전左傳 양공襄公 9년 조에 기록된 목강穆姜의 수괘隨卦 괘사 해석을 옮긴 것이며 몇몇 글자만 차이가 있다.

 

문언의 기타 해석은 대부분 단이나 상의 내용을 인용하고, 여기에 작자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예를 들면 ‘건乾’과 ‘원元’을 연결시켜 읽고, 동시에 단의 내용을 해석하여 “때로 여섯 마리 용을 타고 하늘을 날며, 구름이 떠가고 비가 내려서 천하가 평안하다.(時乘六龍以御天也, 雲行雨施天下平也.)”라고 하였다. 또 곤괘坤卦를 해석하면서 “만물을 포용하고 길러냄이 빛나는 것은 곤坤의 도道가 순응하는 것이니, 하늘을 받들어 때에 맞게 이행한다.(含萬物而化光, 坤道其順乎, 承天而時行)”라고 하였다. 이것은 단의 “만물이 이로부터 생겨나서 마침내 하늘을 순응하여 받든다.(萬物資生乃順承天)”이나 “포용함이 빛나고 커서 만물이 모두 형통하다.(含弘光大, 品物咸亨)”에서 나온 것이다.

 

또 소상小象에서는 “잠복해 있는 용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양기가 아래에 (숨어)있는 것이다.(潛龍勿用, 陽在下也)”라고 하였는데, 문언에서는 “잠복해 있는 용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양기가 잠복해서 숨겨져 있는 것이다.(潛龍勿用, 陽氣潛藏)”라고 하였다. 그리고 소상에서는 곤괘坤卦 육이효六二爻의 효사爻辭를 풀이하여 “육이六二의 움직임은 곧고 방정하다.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땅의 도道가 빛나는 것이다.(六二之動, 直以方也. 不習无不利, 地道光也)”라고 하였는데, 문언에서는 “직直은 바른 것이며, 방方은 의로움(義)이다. 군자는 공경스럽게 (마음) 속을 곧바르게 하고, 의로움으로 바깥(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방정하게 한다.(直其正也, 方其義也. 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라고 하였고, 다시 “땅의 도道(地道)는 완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늘을 대신하여 끝냄이 있다.(地道無成而代有終也)”라고 말했다. 이상은 문언이 단전이나 상전 보다 늦게 나왔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문언에서는 건괘乾卦 구오효九五爻의 효사爻辭를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추구하며, 물은 습한 데로 흐르고 불은 건조한 데로 타오르며, 구름은 용龍을 따르고 바름은 호랑이를 따르며, 성인이 일하면 세상 만물이 이를 지켜보니, 하늘에서 근원한 것은 위와 친하고 땅에서 근원한 것은 아래와 친해서 각각 그 무리를 따른다.(同聲相應, 同氣相求, 水流濕, 火就燥, 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 本乎天者親上, 本乎地者親下, 則各從其類也.)”  그런데  여씨춘추呂氏春秋 응동편應同篇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같은 부류의 사물은 서로 끌어당기는데, 기운이 같으면 합해지고 소리가 같으면 서로 응해서, 궁음宮音을 치면 궁음宮音이 진동하고 각음角音을 치면 각음角音이 진동한다. 평평한 땅에 물을 대면 습한 데로 흘러가고 가지런한 섶나무에 불을 놓으면 불은 건조한 데로 타들어간다. 산의 구름은 풀이 우거진 듯하고 물의 구름은 물고기 비늘 같으며, 가뭄 때의 구름은 연기와 같고 우기의 구름은 물결과 같아서, 모두가 그것이 (인하여) 생겨난 무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이 없다.(呂氏春秋, 有始覽, 應同: 類固相召, 氣同則合, 聲比則應, 鼓宮而宮動, 鼓角而角動. 平地注水, 水流濕. 均薪施火, 火就燥. 山雲草莽, 水雲魚鱗, 旱雲煙火, 雨雲水波, 無不皆類其所生以示人.)”

 

이 말은 문언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여씨춘추 응동은 바로 전국 후기의 음양오행가陰陽五行家의 저술로 생간된다. 그러므로 문언은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형성시기의 하한선은 당연히 여씨춘추 이전이 될것이다.

 

 

  용어, 인물 해설

 

 

.........................  목강穆姜: 목강은 노魯나라 양공襄公의 조부로서, 좌전左傳 성공成公 16년조의 기록에 의하면 성공成公을 제거하고 교여僑如를 옹립하려다 실패하여 동궁東宮에 구금되었다고 한다.

 

 

▶ 7.  설괘, 서괘, 잡괘의 형성

 

 

설괘전說卦傳에 관해서 공영달 소疏(주역정의 공영달 소)에서는 “팔괘의 성질(德業)이 변화하는 것과 팔괘가 상징하는 자연현상(法象)의 작용을 설명하였다.(陳說八卦之德業變化及法象之所爲也.)”고 말했다. 공영달의 말처럼 설괘의 주된 내용은 팔괘의 괘상과 괘의를 해석하는 데 있다. 설괘의 전반 부분은 팔괘의 형성과 성질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며, 동시에 팔괘를 여덟 가지 자연현상을 상징한다고 여기고, 팔괘를 동남서북 방위에 배속시켰다. 후반부는 괘상과 괘의를 해설하였다. 그 해석은 춘추시대 이래의 서법 가운데 취상설取象說과 취의설取義說에 대한 총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중에는 “도道?덕德에 화목 순응하며 의로움(義)에 맞게 다스리며(和順於道德而理於義)”, “성性, 명命의 이치에 순응한다(順性命之理)”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는 ‘도덕道德’이나 ‘성명性命’을 연결해서 읽고 있으므로 마찬가지로 전국시대 후기의 작품이다.

 

한대漢代 묘지 유적에서 출토된 백서본帛書本 계사에는 통행본 설괘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전傳 가운데 일부분은 한대 초기에 이미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서帛書 64괘卦의 배열순서는 설괘의 건곤부모설乾坤父母說을 기초로 하였다.

 

설괘의 팔괘방위설八卦方位說에서는 진震이 만물을 탄생시키기에 동쪽에 배치하였고, 손巽은 만물을 깨끗이 정제하기에 동남쪽에 배치하였다. 리離는 만물을 빛나게 하기에 남쪽에 비치하였고, 곤坤은 만물을 길러내기에 서남쪽에 배치였으며(설괘에서는 곤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태兌는 만물을 기뻐하게 하기에 서쪽에 배치하고(설괘에서는 태兌에 대해서도 곤坤과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건乾은 음 양이 서로 부딪히도록 하기에 서북쪽에 배치하였다. 감坎은 만물을 수고롭게 하기에 북쪽에 배치하였으며, 간艮은 만물을 완성시키기에 동북쪽에 배치하였다. 설괘에서는 다시 “태兌는 딱 가을이다.(兌, 正秋也)”라고 하면서 사계절의 의미에 팔괘와 방향을 짝짓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계절에 (동서남북) 사방을 짝짓는 것은 관자 사시四時편이나 예기 월령月令편에서 찾아볼 수 있고, 여씨춘추 십이기十二紀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설괘의 팔괘방위설은 전국시대 후기 음양오행학설陰陽五行學說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래와 같은 팔괘방위는 기본적으로 설괘의 이론에서 기원한 것이다. 앞서 '주역에 대하여' 마지막 편에서 설명드렸듯이, 중앙에 있는 팔괘의 방위는 설괘의 팔괘 방위이며, 바깥에 있는 팔괘의 방위는 송대宋代에 처음 나온 팔괘의 방위이다.

 

 

 

서괘序卦는 통행본 주역의 64괘 배열순서에 대해 이론적으로 해설한 것이다. 그 가운데 건 곤 두 괘卦에 대해 취상설로 설명한 것을 제외하고는, 괘명卦名에 대한 해석은 대부분 취의설을 주장하였다. 예를 들자면 준屯을 가득함(盈)으로, 몽蒙을 어린 것(穉)으로, 수需를 음식의 도道로, 사師를 무리(衆)로, 이履를 예의(禮)로, 태泰를 통함(通)으로, 고蠱를 일(事)로, 감坎을 빠짐(陷)으로, 리離를 붙어있음(麗)으로, 항恒을 오래함(久)으로, 진晉을 나아감(進)으로, 진震을 움직임(動)으로, 간艮을 그침(止)으로, 손巽을 들어감(入)으로, 태兌를 기뻐함(悅) 등으로 풀이하였다.

 

서괘에서는 취의설에 의거하여, 건乾에서 미제未濟까지의 64괘가 하나의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뒤에 있는 괘卦는 앞의 괘卦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서괘가 괘명卦名에 대해 해석할 때에는 대부분 단彖이나 상象의 의미를 따르고 있으므로, 당연히 단 상이 나온 이후에 저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회남자淮南子 무칭훈繆稱訓에서는 일찍이 “역易에서는 박剝이 끝내 다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복復으로 받았다고 말하였다.(易曰, 剝之不可遂盡也, 故受之以復.)”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전傳은 한대 초기 이전에 이미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잡괘雜卦는 괘명 중에서 상반된 의미를 취하여 64괘가 바로 32가지의 대립되는 측면임을 설명하였다. 예를 들자면 건乾의 굳셈(剛)과 곤坤의 부드러움(柔), 비比의 즐거움(樂)과 사師의 근심함(憂), 혁革의 옛 것(故)과 정鼎의 새로움(新), 함咸의 신속히 함(速)과 항恒의 오래함(久), 박剝의 문드러짐(爛)과 복復의 돌아옴(反) 등이 있다. 이 전傳은 아마도 한대인의 손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8.  역전의 철학적 문제들.

 

 

    주역의 경經과 전傳은 초기에는 경학자(經師)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전수되던 것이다.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의 기록에 의하면 서한西漢의 경학자 비직費直이 주역을 연구할 때, 장구章句에 구애되지 않고 단, 상, 계사 등을 이용해서 상하上下 경經을 해설하였다고 한다. 또 위서魏書 고귀향공기高貴鄕公紀에서는 역박사易博士 순우준淳于俊의 말을 인용해서 “정현鄭玄은 단과 상을 경經 속에 넣어서, 배우는 이들로 하여금 찾아보는 번거로움을 줄여 쉽게 깨칠 수 있도록 하였다.(鄭氏合彖象於經, 欲使學者尋省易了也.)”라고 하였다. 이 주장에 따르면 전傳을 경經에 붙인 것은 한대 경학자 비직이나 정현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훗날 왕필王弼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현재 통행하고 있는 주역 판본에서 경經과 전傳을 이어서 엮은 것은 왕필이 전한 판본이다. 이런 편집 방식은 찾아서 읽기 편하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찾아보는 번거로움을 줄여 쉽게 깨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편집 방식 역시 한 가지 문제점, 즉 경經을 전傳으로 풀이하여 경經과 전傳이 구분되지 않고, 경經과 전傳이 하나의 완정한 체계를 지니고 있어 복희씨와 문왕文王이 지은 주역의 의리義理는 공자가 지은 십익十翼 가운데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동시에 수반하게 되었다. 이런 관념들은 전체 봉건시대 역학사易學史를 줄곧 지배하였다. 왜냐하면 전傳으로 경經을 풀이하여, 경문經文에 대한 주석이나 풀이 역시 오랜 학설들을 벗어던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크게 제사지내고 점쳐 물어봄이 이롭다.(元亨, 利貞)”의 ‘정貞’을 봉건시대의 역학가들은 줄곧 ‘정正’으로 풀이하였는데, 이것은 단과 상  두 전傳에서  ‘정貞’을 ‘정正’으로 보았고, (또한)  단과 상을 공자가 지었기에 (그 내용은) 당연히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허신許이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정貞을  “점쳐서 묻는 것(卜問)”이라고 풀이하였지만 역대의 경학자들에게는 채택되지 않았다.

 

     전傳으로 경經을 풀이하는 가장 큰 폐단은 주역이 점치는데 사용된 책이라는 역사적 면모를 가려버린데 있다. 근래의 주역 연구에서는 마침내 유가儒家 경학자들의 정통관념을 깨고 경經과 전傳을 나누어서 경經을 경經 자체로 풀이하고 전傳을 전傳 자체로 풀이하여, 주역에 대한 주해注解에 새로운 공헌을 하였다.

 

 

역전易傳과 역경易經은 서로 관계가 있으면서도 또한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전傳은 경經에 대한 해석이지만, 그 해석은 역전의 저자가 근거도 없이 날조한 것이 아니라 전국 이래 사회의 정치 문화사상 발전으로 이루어진 역사적 산물이다. 역경과 비교할 때 역전이 가지고 있는 현저한 특징은 고대에 점치는데 사용되었던 책을 철학화한 것에 있다. 이런 역풀이 경향은 춘추시대에 시작되었으며,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철학유파의 형성과 발전에 수반되어 마침내 역전을 대표로하는 역풀이 저작들이 형성되었다. 역전의 경經풀이를 서법 규칙에 대한 논술과 괘상 및 괘효사에 대한 해석에 대해 말하자면 모두 철학적 측면에서 개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가儒家의 윤리관념과 도가道家 및 음양오행가陰陽五行家의 천도관天道觀은 역전이 역경을 풀이함에 있어서 지도적 사상이 되었다.

 

역전은 사실상 철학 저작으로서, 자신만의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전국시대 하나의 거대한 철학유파가 되었으며, 역학사 및 철학사에 있어서 모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대漢代 이래로 형성된 여러 역풀이 철학유파들은 모두가 역전 중에서 그들의 사상의 연원을 찾을 수 있었다. 역전의 저자가 비록 유가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 관점은 결코 공자와 맹자를 대표로하는 유가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고대 유가의 또 다른 위대한 스승인 순자와 마찬가지인데, 역전의 철학사상은 전국시대 철학의 발전적 면모를 반영하고 있어서, 결코 공맹孔孟의 정통파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다. 역전의 사상은 모두 공자에게 귀속된다는 것은 한대의 공자를 존숭하는 태도(尊孔論)와 같은 편견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솔직히 주역은 맹자 아찌 보다는 순자 아저씨가 훨씬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거 같다. 근데 유가 정통주의자들은 맹자를 정통으로 두기위해 애써 맹자와 주역과의 관계도 찾아내려하고, 순자의 이야기는 무시하려고 많이 노력한다........ 내말은 맹자가 주역, 특히나 역학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도 이야기 했듯이 맹자의 시중설時中說이나 중도관中道觀은 역전의 역풀이 규칙(解易體例)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맹자가 먼저 주역을 연구했던 것이 아니라, 맹자의 후학들이 맹자의 사상을 통해 주역을 바라본 것이 역전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걸 거꾸로 말하니 맹자가 열씨미 주역을 공부한게 되버리는 것이다.  이런게 역사 해석을 거꾸로 하는 거다.... 아래는 순자.......

 

 

 

역전은 비록 철학 저작이지만 그것은 결국 주역의 서법을 해석한 것이며, 또한 점치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역전 가운데는 두 가지 종류의 언어가 존재하는데, 한 가지는 점치는 일과 관련된 언어이며, 다른 한 가지는 철학적 언어이다. 어떤 문구는 서법만을 해석하고 있고, 어떤 문구는 저자가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논술하고 있으며, 어떤 문구에는 서법과 철학적 관점 두 가지가 겸비되어있다. 그러므로 역전의 철학적 관점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방면을 모두 살펴 보아야 한다.

 

역학사를 살펴보면 역전에 대한 해석에도 두 가지 경향이 존재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경향은 서법(시초점 치는 법)의 각도에서 그 안에 있는 철학적 문제들을 해석하데 치우쳐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계사에서는 “정기精氣는 사물이 되고 떠다니는 혼백(遊魂)은 변화하는 까닭에 귀신鬼神의 정황을 알 수 있는 것이다.(精氣爲物, 游魂爲變, 是故知鬼神之情狀.)”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정기귀신설精氣鬼神說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동한東漢의 경학자 정현은 오히려 서법 중의 7 8 수數로 ‘정기精氣는 사물이 된다.(精氣爲物)’를 해석하고, 9 6 수數로 ‘떠다니는 혼백(遊魂)은 변화한다.(游魂爲變)’를 해석하였다. 이런 역풀이 경향은 훗날 상수학파象數學派라고 불리게 된다.

 

소옹(강절)은 대표적 상수학자이다. 이 사람이 너무 상수학으로 유명하다보니, 훗날 매화역수라는 점치는 책이 이 양반 이름으로 나오게 되었다. 물론 현재는 이책이 위작僞作이라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생각한다.

 

 

 

또 다른 한 가지 경향은 철학적 이치의 각도에서 그 안에 있는 서법을 해석하는데 치우쳐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계사에서, “역易에 태극이 있는데, 이것이 양의兩儀를 탄생시켰다.(易有太極, 是生兩儀)”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의 본래 의미는 시초를 세거나(설시?蓍) 혹은 괘卦를 긋는 과정이며, 이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서법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훗날 수많은 역학가들과 철학가들은 이것을 우주의 형성 과정으로 해석하였고 철학 이론으로 변화시켰다.

 

이런 두 가지 경향은 모두 편면적인 것이다. 근래의 역전 연구들은 경經과 전傳을 나누어 바라볼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대체적인 방향은 정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전 중의 문제들을 구별하여 바라보지 않고 모두 철학 문제로 바라봄으로써, 역전을 주역이나 그 중의 서법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혹은 서법을 탈피하여 그 철학적 이치를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혹은 본래 서법을 이야기한 문제를 철학적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 등은 다시 역전이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지나치게 높이 끌어올리려했다는 평가를 면하기 힘들다.

 

그치만 이런 뻥들이 사상이나 문화 발전의 기틀이 되었다.  서법(점치는 법)을 철학으로 해석했기에 오늘날 주역이 그마만큼 대접받는 거다. 

 

다음부터는 서법과 전국시대 철학의 발전 상황을 결합하여 역전 중의 철학적 문제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옛날 사람들은 이 책이 위에 있는 소강절 아저씨가 지었다고 생각했단다.....

 

                           

 

 

 

 

 

 

출처 -http://blog.daum.net/sumin99/ 6405319

 

http://blog.daum.net/xyzlife/6630967

 

 

 

.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