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고 : 원오선사 벽암록
제92칙 세존승좌(世尊陞座) - 세존의 설법
<벽암록> 제92칙은 세존의 설법과 문수의 해설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세존께서 어느 날 설법하기 위해 법좌에 올랐다.
문수보살이 종을 치면서 말했다.
“법왕의 설법을 자세히 관찰하라. 법왕의 가르침은 이와 같다”
세존은 곧 법좌에서 내려 오셨다.
擧. 世尊一日陞座. 文殊白槌云, 諦觀法王法, 法王法如是. 世尊便下座.
본칙의 공안은 <종용록> 제1칙에도 똑같은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데,
출처는 <조당집> 제12권 화산(禾山)장이 최초이며, <전등록>에는 보이지 않고,
<벽암록>과 똑같은 내용은 <연등회요> 제1권과 <오등회원> 제1권 석가모니불전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로 <조당집> 제12권 화산장에는 화산선사의 설법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들어보지 못했는가?
석가가 법상에 올라 말 없이 침묵[良久]하시니,
대중들은 법문을 설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사리불[鷲子]이 나서 나무막대기로 치고 대중에게 알리기[白槌]를
‘법왕의 법을 잘 관찰하라!’하고, 또 ‘법왕의 법은 이와 같다’라고 하니,
부처님이 곧 법좌에서 내려 왔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이 한 구절의 법문을 가지고 얼마나 많이 꿰어 맞추고 있었는가?
또 아자세왕이 가섭에게 설법을 청했는데
가섭이 법석의 자리에 올라 잠시 침묵[良久]했다가 곧바로 법석에서 내려오니,
왕이 ‘어째서 제자에게 설법해 주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가섭이 ‘지위가 높고 명예가 두텁습니다[位崇名重]’라고 말했다.”
<조당집>에는 대중에게 알리는 인물이 사리불[鷲子]인데
<벽암록>에는 문수보살로 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조정사원> 제8권에 “나무 막대기로 치고 대중에게 알리는 백퇴(白槌)는
세존의 율의(律儀)로서 불사를 설명할 때 반드시 먼저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며,
대중을 조용하게 하는 방법이 된다.
지금 선문에서 백퇴는 반드시 불법을 잘 아는 존숙을 임명하여 그 소임을 맡겨 백퇴사라고 한다.
주지가 법상에 올라 설법하려 할 때
백퇴사는 나무막대를 세 번 치고, 대중에게 알리기를
‘용상(龍象)의 대중에게 법연(法筵)을 베푸니
마땅히 불법의 근본[第一義]을 관찰하라’고 크게 말한다.
대중을 용상으로 비유하고 마땅히 불법의 근본대의를 관찰하여 깨닫도록 하라고 당부하고,
이제부터 주지의 설법이 시작됨을 알린다.
주지의 설법이 끝난 이후에 빈주(賓主)의 법거량과 선문답이 실행되고,
법회가 끝날 때는 백추사가 앞으로 나아가 <화엄경> 제4권에 있는
‘그대들은 마땅히 법왕을 관찰하라. 법왕의 법은 이와 같다[汝應觀法王 法王法如是]’라는
게송을 외치고 법회를 증명하는 인사말을 한다.”
법왕은 세존을 지칭하는 말이며, 법왕의 법은 불법의 지극한 근본 대의이다.
본칙은 세존이 법좌에 올라 설법하려고 하는데,
백추사인 문수가 앞으로 나와 법회를 마친 게송을 외우며 대중에게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설법이 시작된다는 말을 하지 않고 설법이 끝난 사실을 알린 것이다.
설법이 시작했다고 생각하자 무언의 설법이 그대로 끝나버린 일자불설(一字不說)의 설법이다.
원오는 “한 자식만을 친히 얻었다”라고 착어했는데,
역시 불법의 지혜를 구족한 문수는 언어 문자로 설하지 않은 세존의 불법을
귀나 의식을 통해서 듣지 않고 법문을 깨달았다고 칭찬하고 있다.
문수가 백퇴하면서 세존의 설법이 끝났음을 알리자 세존도 곧바로 법상에서 내려 오셨는데,
법상에 오르고 내려오는 그 가운데 한 마디의 설법도 없었지만
설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문수는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세존의 설법은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설법하는 삼업설법이기 때문에
반드시 입을 통한 언어로만 설법하는 것이 아니다.
선승들의 어록도 선문답이라는 대화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말씀과 어묵동정의 일체 모든 행동도 불심의 전체작용으로
깨달음의 생활임과 동시에 제자들을 위한 교육이고 설법이었다.
원오는 ‘평창’에 세존이 법상에서 말씀을 하지 않고 불법의 근본을 설한 사례를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여 주시기 전에 벌써 이러한 소식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오가 말한 이러한 소식이란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기 이전 불법의 궁극적인 진실을 말한다.
말하자면 불법의 궁극적인 진리는 언어 문자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도단(言語道斷)과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주장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석가는 마갈타국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유마거사[淨名]는 비야리성에서 문수의 입을 막았으니
이 모두가 말이 없는 침묵으로 이미 설해 버린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조론>의 ‘열반무명론’에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석가는 마갈타국에서 방문을 걸어 잠갔고, 정명은 비야리성에서 입을 다물었으며,
수보리는 설법하지 않음을 주창하여 불도의 근본을 나타내자
범천은 설법 듣는 것이 없음이 참된 청법이라는 사실을 말하며 꽃비를 내렸다.
이것은 모두 불법의 이치를 정신(마음)으로 깨닫도록 했던 것이다.
그래서 입으로 침묵한 것인데, 어찌 논변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논변으로 능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열반경>에 “진실한 해탈은 언어와 법칙을 떠나서 적멸하며 영원히 평안하다.
시작도 끝도 없고 어둡지도 밝지도 않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것이 마치 허공과 같고, 명칭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
<중론>에서 말하길 “열반은 실재하지 않지만 역시 실로 없는 것도 아니다.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심의식의 생각도 없어진 경지이다[言語道斷 心行處滅].”
석존이 성도 후에 문을 닫고 21일간 설법하지 않았다고 하는 말은
심오한 불법이 난해하여 설법해도 중생들이 오해할 것을 염려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설법을 어떻게 할까 걱정한 고사를 말한다.
또 <유마경>에 유마거사가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침묵으로 표현한 고사를 말하는데,
언어나 문자로 불법에 대해 설명한다면
불법의 진실을 상대적인 언어나 문자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불법의 지혜가 될 수 없다.
<벽암록> 65칙에 전하는 외도가 부처님께
“말이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이 없는 것도 묻지 않겠습니다.”
“유언(有言), 무언(無言)을 떠나서 불법의 궁극적인 진실을 설해 주시요”라는 질문에
세존은 단지 침묵을 했다.
그러자 그 외도가 “세존께서 대자 대비하시어 저의 미혹한 구름을 열어 주시고
저로 하여금 도를 체득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라고 칭찬하며 물러갔다는
일화도 마찬가지이다.
아난이 “부처님께 외도는 무엇을 얻었기에 도를 체득했다고 하십니까?”라고 묻자,
세존은 “훌륭한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린다”고 말했다.
유무의 상대적 분별심으로 가로막힌 미혹을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인 근원적인 불심의 지혜를 침묵으로 설하여 깨닫도록 한 것이다.
참된 설법은 언어 문자의 방편에 의거하지 않고 침묵하는 설법을 깨달아 체득해야 한다.
언어문자로 설할 수 없는 불법의 진실을 체득하도록 하는 법문이
언어의 갈등을 텅 비우고 본래의 불심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침묵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고 있다.
“수많은 성인[列聖]들 가운데 작가가 있어 법왕의 명령이란 이와 같지 않은 줄을 알았네”
세존의 가르침을 받은 수많은 보살들과 성문연각 등 8만 대중들 가운데
정법의 안목을 갖춘 사람이 있었다면 세존이 승좌설법하고, 문수가 백퇴하며,
또 세존이 법좌에서 내려오는 이러한 필요 없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법은 불법을 가르치기 위한 수단인데,
불법을 체득한 사람은 설법이라는 방편과 의식이 필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회석상에 선타객(仙陀客)이 있었더라면.”
<열반경> 국왕의 영리한 시자 선타파(仙陀婆)는
주인이 부르면 소금, 그릇, 말, 물 가운데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판단하여
조금도 틀리지 않고 대령한 것을 말한다.
선타파와 같은 참된 지음의 동지를 구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문수보살이 백퇴(白槌)를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원오도 “문수는 작가가 아니다”라고 착어한 것처럼,
세존이 승좌한 후에 백퇴를 하는 것은 이미 때늦은 행동이다.
대중 가운데 선타파와 같은 영리한 사람이 있었다면
굳이 문수가 백퇴를 할 필요도 없었는데,
어쩔 수가 없이 백퇴를 하게 되어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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