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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문인협회 강원지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양수(국장)
동란 60년
. 학 암 김 남 석
동란 60년의 화두는 당연히 살아남은 자의 6. 25를 겪은 이야기다. 60년이 지난 지금에도 동족상잔의 비극을 야기한 침략자들은 적화 통일을 꿈꾸며 핵을 개발 하여 계속해 협박하고 있다. 동일 민족이란 구실 하에 평화와 화해를 구두선으로 읊조리면서 한편으로는 무지막지한 공갈을 하는 양면작전을 한 갑자가 지난 이제 까지 변함없이 구사하고 있다. 지정학적 위치에서 그 협박을 감내해야하는 대한민국이고, 그 국민이다.
우리의 조상은 100년 전, 개혁 개방이 늦어 국력을 기르지 못한 결과로 일본의 총칼 앞에 1910년 8월29일 나라를 빼앗겼다. 60 년 전, 1950년 6월 25일 민족의 비극인 민족상잔의 동란이 발생했다.
50년 전 4. 19의거로 민주주의가 한층 향상되었다. 5. 16 군 집권 세력의 혁신으로 경제발판을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빈민 국가 층에서 일약 상위권인 경제10위권에 닦아 섰다.
역사는 그 민족의 거울이며 반복한다. 비참한 굴절의 역사가 다시 오지 않도록 하는 것은 깨달은 후손의 할 일이다.
1) 광복 후 혼란 중에 건국
내가 본 해방 후의 혼란이 다시 오지 않기를 바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식민지 사슬에서 벗어나 광복이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민족상잔의 6. 25 동란을 맞았다. 해방 후 몇 년간은 아우성의 와중이었다.
광복 전에는 왜색으로 창씨 개명한 이름으로 일본의 황국신민을 만들려는 국민(초등) 교육을 받아야 했다. 실탄을 만들 자원이 부족한 일본제국의 마지막 광란으로 전쟁 물자를 수탈하려고 학생들에게 놋그릇을 가져 오라는 끝없는 독촉이 해방으로 없어져 좋았다. 창씨개명에서 벗어나 족보상 나의 본 이름으로 살며 내 나라 말과 글을 부담 없이 사용해 좋은 세상이었으나, 어른들은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노동자 농민의 천국을 만들어야하니 참여하라고, 밤으로 찾아오는 분을 피해 아버지 신발을 방문 앞에 벗어 놓지 못했다. 사회는 좌우익으로 양분되어 갈등이 자라고 있었다.
우익 좌익이란 말의 어원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프랑스 의회가 열릴 때 온건한 자몽드 당의 의석은 오른쪽에 앉고 강력한 개혁을 주창하는 지코뱅 당은 왼쪽 날개에 앉아, 그것이 유래 되어 급진개혁을 주장하는 자들을 좌익이라 하고, 온건 보수적인 노선을 걷는 자들을 우익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 연유에서 생긴 좌익이란 말은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는 공산당을 지칭하게 되었다.
광복 후 38도선이남 미 군정은 좌우합작의 정권창출을 용인하고 바랬다. 종전 직전 징병 권유 문을 ‘반도학생 출진보’ ‘경성일보’ 등에 발표해 일본 식민지 정책에 협조하던 몽양 여운형의 좌경세력 조직과 활동을 방임했다. 북쪽에서는 소련 주둔군의 절대적 지지와 비호로 김일성에게 공산정권 집권을 일방적으로 지원 할 때이다. 미군이 주둔한 남쪽 상황은 어땠는가. 독립운동의 선구자이며 반공주의자 이승만은 미 국무부의 견제로 즉시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가 국민의 열망에 의해 10월 16일 뒤늦게 귀국 할 수 있었다.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 요원도 단체 입국을 불허하고 개인자격으로 입국하도록 미 군정당국은 통제했다.
세계는 소련 중국 동구권 월남 북한 등 3분의 1정도가 붉게 물들어 가고,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야에서부터 공산주의가 앞으로 세계를 지배 할 것이란 주장이 팽배하여 소련과 협조해야 한다고 하는 세력이 미국정가에 상당 수 있을 때이다. 이승만은 상해 임시 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공산주의 자 이동휘李東輝를 국무총리로 같이 활동한 경험이 있어 공산주의의 허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미국의 끈질긴 좌우 합작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좌우 합작은 결국 선전과 선동을 잘하고 조직력이 강한 공산주의에 병합된다는 것을 간파한 선구자 이승만은 좌파 활동을 견제하고, 국민의 지지와 해박한 식견과 지도력으로 시장경제가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을 1948년 8월 15일 건국했다.
당시 세계지도자 중에 학벌에서도 이승만은 앞섰다.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학사,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1년 6월 저술한 '일본 그 가면의 실체(Japan: Inside Out)'에서 일본 군국주의 실체와 가까운 장래에 미국을 기습공격 하리라고 경고했다. 책에서 경고한 대로 그해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했다. 이승만은 이와 같이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지니신 분이었다.
국민소득 50불 밖에 안 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우리나라를 경쟁과 시장경제가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그때 만들었으므로, 세계 공산화의 일환으로 야기한 6. 25 동란을 미군이 주축이 된 UN군이 공산군의 침입을 막아 주었고, 지금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의 된 기틀을 만들었다.
내가 살던 강릉시 구정면은 낮에는 전통성이 있는 농촌으로 조용하였으나, 해방 후 밤은 좌익세력의 준동으로 불안하고 뒤숭숭했다. 국군은 조직되어 기능을 발생하기 이전이다. 먼 산 밑에는 반정부의 아우성과 횃불이 자주 오르며, 면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지서는 높다란 방탄막이 담을 치고 밤에는 지서支署 거점만을 지키고, 면 전체에 치안능력이 미치지 못했다. 지서가 있는 같은 마을 여찬리의 우익 인사인 청년 단장 김 모(김순기)씨 집에는 사제 폭탄이 던져지고 불안했다.
이런 혼란 중에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불법적인 좌경운동을 견제하며 이북에서 월남한 서북청년단원들이 지원 오므로 농촌 지서에서도 힘이 되어 면 전체의 치안을 관장하게 되었다.
2) 괴뢰 정권이란 호칭
2차 세계 대전에 패망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우리 땅에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의 경계 38선은 우리민족의 비극인 분단경계선이 되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고 한국에 향후 5년간 신탁통치를 한다고 미, 영, 소 외상회의에서 결정하고, 곧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다고 발표되었다. 해방 후, 독립정부를 갈망하던 각종 애국단체는 12월 30일 반탁전국대회反託全國大會를 열어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12월 31일에는 신탁통치 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회장 권동진, 부위원장 안재홍, 김준연)를 조직 반탁운동을 전개했으며, 북한에서도 조만식 선생을 주도로 반대운동에 같이 가담했다. 그러나 반탁을 같이 외치던 국내 좌익 계열과 북쪽에서는 소련 공산당의 지시로 찬탁으로 급변했으며, 남한에서는 이승만김구를 중심으로 반탁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47년 6월 23일 단오절을 기해 전국적인 규모로 반탁운동을 강렬하게 전개하므로, 47년 8월말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국 소멸 되고, 신탁통치 안은 없어졌다.
광복 다음해 군정 시에 1946년 7월 소련의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불러 조선반도의 정세와 남북 조선의 실상을 자세히 묻고 시험을 치렀다. 이것에 대비해 북조선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에게는 소련 점령군 정치위원 레베제프 소장은 사전 꼼꼼하게 준비시켰다. 그래서 김일성을 스탈린의 마음에 들게 했으며, 박헌영은 스탈린의 물음에 대해 ‘그것은 인민들과 상의해야 결정할 수 있다’ 고 답하니, 스탈린은 ‘인민은 땅을 가는 사람들이요, 결정은 우리가 해야지’ 라고 했다. 스탈린은 결국 깐깐한 박헌영을 싫어했고, 자기에 고분고분한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선발했다. 그래서 김일성은 생전에 황장엽 비서에게 자신이 스탈린에 불려가 시험을 잘 쳐서 박헌영을 누르고 지도자로 뽑혔다고 자랑했다.
일본 법정대 교수 시모도마이노부오(下斗米伸夫)가 쓴 냉전사에 의하면 48년 4월 24일 모스크바 교외 스탈린 별장에서 스탈린, 몰로토프, 주다노프 등 소련공산당 간부들이 북한 헌법체제를 경정했다 한다. 이 회의에는 북한의 지도자 참여 없이 일방적으로 스탈린이 직접 문안을 가필, 임시헌법이란 용어에서 임시를 삭제하며 헌법안을 결정했다. 이 헌법에 따라 북쪽에서는 8월에는 조선 최고인민회의가 이루어졌고, 9월 2일에는 제1회 인민회의를 소집을 했으며, 9월 8일에는 소련이 나려준 헌법을 채택, 9월 9일 조선인민공화국 창설이 일사천리로 추진되었다.
이렇게 반탁운동이 공산당지시로 찬탁으로 급변하고, 나라의 지도자를 스탈린의 시험으로 선정하고, 소련의 일방적으로 결정한 헌법초안에 따라 조선 인민공화국이 탄생하였으므로, 해방 후에는 이북의 정권을 소련의 꼭두각시 허수아비를 의미하는 괴뢰傀儡 정부라고 불렀고, 그 군대는 괴뢰군 또는 북괴군 이라고 불렀다.
제주 4. 3사태를 유발해 5. 10 민주 선거를 방해 하였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자유선거를 통해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수립했다. 근래 공산집단의 하수인과 좌경세력의 추종자들이 48년 12월 UN총회에서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한 대한민국을 보고 괴뢰 정권 운운하고 있다.
반복되는 선동선전은 공산 조직 유지의 중요한 기능이다. 괴뢰란 말은 자기들의 발생 형태를 칭하는 말임에도 모르쇠하고, 자기들의 역사를 들먹이는 괴뢰란 용어를 타에게 사용하고 있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3) 정체성을 빛낼 기념관
2010년 3월 26일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대통령의 135주년 탄신일이다. 북에서는 민족상잔의 6. 25동란을 야기한 김일성의 생일은 국경일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건국대통령의 장례도 가족장으로 치르고 나라에서 주관하는 탄신 기념행사도 없다. 이런 뜻이 배여 있는 날에 서해 영역을 지키는 해군함정 천안함이 피격 격침되었다.
건국대통령의 탄신일에 군함이 피격된 뉴스를 보고 불현듯 이승만 대통령의 사저 이화장을 보고 싶어 찾았다. 서울 종로구 이화동 1번지가 이화장의 위치이다. 이화장은 낙산 산록에 있다. 가꾸지 않고 있는 건국대통령의 사저이므로 안내판도 없어 여러 번 물어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이화장은 독립운동가 이승만씨가 광복 후 귀국해 거주하시던 곳이다. 나라를 세우고 조각 대상자를 일일이 면담한 작은 목조 조각당과 한옥 건물이 있는 아담한 1800평의 별장 형 건물이다. 당시는 낙산 산록에 있은 정서 깊은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고 여러 정권을 거치는 과정에 이화장은 민가로 사방이 숨 가쁘게 에워 쌓였다. 위편 아파트 쪽에서 깨끗하지 못한 지하수가 스며 나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내하는 분을 따라 이화장 안에 비치된 건국대통령의 건국 구국 호국의 유품과 도서 집기 기념품 생활용품을 보고 나와서 이화장 벽에 붙어 있는 여러 기념사진을 구경하였다. 영구히 기념할 사진을 실내에 전시 할 곳이 없어 건물 외벽에 붙여 진열 하는 실정이다.
건국한 대통령의 기념관이 없다. 대를 이어 적화통일 꿈꾸며 대한민국을 협박하는 김정일에 거액을 지원하여 민족의 불안을 야기하는 핵을 개발하게 한 DJ는 몇 개의 기념관이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의 기틀을 세운 건국대통령의 기념관이 없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연로하여 인의 장막에 싸여 장기 집권한 허물은 있다. 그러나 민의를 알고 민주주의와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하야했다. 그 허물로 위대한 건국의 업적마저 가려져야 하는가.
중국인들의 애국정신을 살펴보자. 등소평은 모택동이 조종하는 홍위병 난 중에 실각 해 몇 번의 암살 위기를 당했다. 그러나 발전하는 역사를 반전시킨 홍위병을 조종한 모택동을 평하여 ‘중국인민을 해방시킨 그의 공은 후기의 정치적 실수로 희석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들 나라를 이어갈 정체성을 긍정적인 평가로 정리했다.
이웃 중국은 저러함에도,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건국대통령의 후기 장기집권의 실수를 계속 꼬집는 것은 건국대통령 때문에 광복 후 공산정권을 세우지 못한 아쉬움의 후예들이 민주주의 그늘에서 기를 쓰며 탓 하는가 .전쟁 중 휴전된 상태로 상대 정권을 소멸을 기원하는 그들의 기도가 계속 은밀하게 활동하기 때문인가. 4. 19에 출현한 새로운 지도층이 나라의 정체성의 큰 뜻을 몰라서인가.
소련의 허수아비 지도자로 출발해 비극의 민족상잔을 야기한 김일성의 기념관과 기념물이 북쪽에 수없이 많이 있다. 그의 탄신일을 국경일로 거대한 축제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의 탄신일에 국토를 지키던 천암함이 격침되었다. ·····
역사는 있는 그대로 사실을 승계하는 것이다. 광복 후 소련에 가까우므로 지정학적 여건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여론도 많았다. 남한을 지배하던 미 군정도 좌우합작의 연립정부를 바랬다. 이런 불리한 사회 여건 속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철학 박사 답께 인본주의 자유민주주의 나라를 건국했다. 6. 25 동란 후 한미상호 바위조약 체결로 호국의 기틀도 튼튼히 마련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자유롭고 안전한 영토 안에 살고 있다. 대를 이은 공산정권 독재자의 강역 밖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다.
신이 아닌 인간의 역사는 허물과 과실을 머금고 발전한다. 건국대통령의 건국이념과 구국 호국 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을 빛낼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기념관을 만들어 영구히 기념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약력 1996년 한국 수필로 등단. 저서: 순라끈의 넋도리 외 1권. 수상: 강원한국수필 문학상 수상 경력: 한국수필 공영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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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문인협회 강원지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양수(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