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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한옥마을 문화유적 답사 계획
일시 : 2010년 5월 21일(금)
장소 : 전주 한옥마을
동아쇼핑센터(08:00출발)-(186.4Km 3시간)-풍남문(도착 11:00)
전주 한옥마을 일원 답사(4시간. 점심 1시간)
(풍남문 → 전동성당 → 경기전 → 공예품전시관 → 오목대→ 전주향교 → 전통문화센터 → 학인당 → 강암서예관)
전주에서 4시 정각에 출발하여 대구 동아쇼핑센터 7시에 도착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풍남문(豊南門.보물 제308호.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2가 83-4)
읍성은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는 고을을 둘러쌓았던 성을 말한다.
옛 전주읍성의 남쪽문으로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0년(1734)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 불렀다. ‘풍남문(豊南門)’이라는 이름은 영조 43년(1767) 화재로 불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 44년(1768)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순종 때 도시계획으로 성곽과 성문이 철거되면서 풍남문도 많은 손상을 입었는데 지금 있는 문은 1978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보수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규모는 1층이 앞면 3칸·옆면 3칸, 2층이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다. 평면상에서 볼 때 1층 건물 너비에 비해 2층 너비가 갑자기 줄어들어 좁아 보이는 것은 1층 안쪽에 있는 기둥을 그대로 2층까지 올려 모서리기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수법은 우리나라 문루(門樓)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이다.
부재에 사용된 조각 모양과 1층 가운데칸 기둥 위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은 점들은 장식과 기교를 많이 사용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옛 문루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전주객사(全州客舍.보물 제583호. 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3가1)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명나라와 통하는 지방에는 우리 사신을 비롯해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도 묵었기 때문에 건물보수에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국가에 일이 생겼을 때에는 백성과 관아가 같이 의식을 행하였다.
전주객사는 전주서고를 지은 뒤 남은 재료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서의헌을 고쳐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객사의 정문은 주관을 앞면으로 하여 내삼문·중삼문·외삼문이 있었으나 원래의 내삼문 안쪽으로 축소되었다.
신주를 모셔두는 방인 감실에는 궐(闕)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국왕에 대하여 예를 행하기도 하였고(망궐례), 조정에서 사신이 오면 이곳에 묵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전주객사는 중앙에 주관이 있고 좌우에 동·서 익헌, 맹청, 무신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 주관과 서익헌, 수직사만 남아있다. 동익헌은 현재 초석만 남아 있으며, 서익헌과 규모가 같으나 도로확장으로 인해 1칸이 부족하다.
또한 주관 앞면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이것은 전주객사를 일컫는 말로서,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풍패 : 풍패란 중국 한고조의 고향으로, 전주가 조선 왕조의 발상지임을 나타낸다
전주전동성당(全州殿洞聖堂. 사적 제288호.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1가 200-1)
이 성당은 1908년 본당의 보드레 윤신부가 성전을 짓기 위하여 저축한 돈으로 서울의 명동성당(당시 종현성당) 내부설계자인 박신부(Victor Poisnel)에게 의뢰하여 설계도를 마련하고, 중국인에게 청부를 주어 공사감독하여 기공한지 7년만인 1914년에 준공되었다. 그후 마르셀로 라그루(M.Lacrpouts)신부가 부임, 미처 못다한 성당내부와 외부의 미화작업을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평면은 장방형을 기본으로 후진부를 만들기 위하여 5각으로 모를 죽였다. 내부는 네이브(Nave:[건축] 네이브 (교회당 중앙의 회중석 부분))와 양측랑(Aisle:(교회당의) 측면의 복도, 측랑(側廊))으로 나누고, 네이브의 천장은 반원 배럴볼트(Barrel vault:반원통형 둥근 천장)이고, 기둥이 선 구획마다 리브(Rib:[건축] 서까래; (다리의) 가로보; 살 (양산의))로 구획하였다. 네이브와 아일의 경계에는 8각석주를 세우고, 반원아취로 마감하였다. 아일의 천장은 리브볼트(Ribed vault)로 제대(祭臺)뒷쪽의 8각석주들과 연결되어 있다. 제대부와 신자석 사이는 벽돌쌓기로 구획하였다.
정면 중앙에는 높은 종탑을 세우고, 양측 아일부에는 작은 탑을 세웠는데, 이종탑의 지붕은 12개의 채광창을 돌린 12각형의 드럼(Drum)위에 12각형의 뾰죽돔(Pointed dome)를 얹어 마무리하였고, 작은탑은 8각형 드럼위에 8각형 뾰죽돔을 얹었다. 몸채의 지붕은 평함석 이음으로 마감하였다.
전동성당사제관(문화재자료 제178호(전주시).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1가 200-1)
전동성당 사제관은 본당 건립 후 2대 주임신부였던 라크루시니부가 장차 전주교구가 설정될 경우를 대비하여 1926년에 건축을 시작하였다. 이 건물은 1937년 전주교구청사 및 교구장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1960년 이후부터는 주임신부와 보좌신부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전동성당의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당과 같이 북향을 하고 있다. 건물 중앙에는 2층 현관으로 연결되는 주 출입구가 있으며 1층의 출입구는 건물의 남측면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완전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1층 부분은 2,3층과 달리 깬돌 허튼층쌓기를 하였고 창 주변은 벽돌로 둘러싸여 있는데 상부는 모든 창과 마찬가지로 결원아치를 틀었다. 2,3층 창대에는 화강석을 설치하였고 창틀 외곽은 벽돌로 리아스식 쌓기를 하여 치장하였다.
정면과 측면의 아치는 화강석의 초석과 기둥, 쇠시리형 벽돌을 사용한 주두와 조화를 이루며 입면에 풍부한 변화와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있다. 난간은 †자형이며 공간으로 띄운 무늬쌓기로 정교하게 꾸몄고 화강석과 벽돌을 혼용한 포치의 난간 구성도 매우 특색이 있다.
지붕의 형태는 모임지붕으로 골함석잇기를 하였는데 지붕면 네 곳 중앙에 도머(Dormer)창을 설치하였다. 1층은 식당, 세면장, 창고로 사용되며 2층은 회합실과 로지아, 3층은 신부실과 로지아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동성당 사제관은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가미한 절충식 건물로서 도내에는 유구가 극히 적은 근대 서양풍건축이다. 또한 조형적으로도 아름다운 외관을 유지하고 있으며 당시의 건축기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1926년에 건축된 서양식 건축으로서 전동성당의 본당과 더불어 역사적인 가치가 인정되는 근대 건축이다. 그동안 유지관리 상태가 양호하고 우리나라 초창기의 양식건축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다.
경기전(慶基殿.사적 제339호.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
이곳은 조선(朝鮮) 이태조(李太祖)의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한 곳이다.
전주(全州)는 원래 이왕조(李王朝)의 시조(始祖)인 신라(新羅) 사공(司空) 이한공(李翰公)의 발상지(發祥地)라 하여 전주이씨(全州李氏) 후손(後孫)들이 조상(祖上)을 받드는 성역(聖域)으로 삼아온 터전이기도 하다. 태종(太宗)은 1410년에 완산(完山)(전주(全州)), 계림(鷄林)(경주(慶州)), 평양(平壤) 3개소(3個所)에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의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여 어용전(御容殿)이라 하였다. 그후 세종(世宗) 24년(1442)에는 전주(全州)에 경기전(慶基殿), 경주(慶州)에 집경전(集慶殿), 평양(平壤)에 영숭전(永崇殿)이란 호칭(呼稱)을 붙였다. 그러나 경기전(慶基殿)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소실(燒失)되었고, 그후 광해군(光海君)6년(1614)에 중건(重建)된 것이다. 한편 영조(英祖)47년(1771)에는 경기전(慶基殿) 북(北)쪽에 조경묘(肇慶廟)를 세워 이왕조(李王朝)의 시조(始祖)인 이한공(李翰公)과 시조비(始祖妃)인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하였다.
현존(現存)하는 경기전(慶基殿) 건물(建物)의 배치(配置)는 남(南)쪽의 홍살문(紅箭門)을 지나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양측에 문간체(門間體)의 익사(翼舍)를 달아낸 내삼문(內三門)에 면(面)하게 되는데 그 통로(通路)는 전(塼)으로 바르게 깐 신도(神道)이다.
외삼문(外三門) 내정(內庭) 좌우(左右)로는 사고석 담장을 돌렸는데 동측(東側)에는 협문(夾門)을 두고 포장도(鋪裝道)를 전기(前記) 신도(神道)에서 이곳으로 연결하였다. 그리고 내삼문(內三門) 문간체에 양측으로 연결되는 담장에도 각기 1개소씩 일각문을 두었다. 내삼문(內三門)을 들어서면 그 북(北)쪽에 내·외삼문(內·外三門)과 남북축(南北軸)을 맞추어 정전(正殿)이 놓이고 그 동·서(東·西) 양측에 익사(翼舍) 또는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꺾이어 남향(南向)하다가 끊기어 그 나머지 부분을 담장으로 연결하여 폐쇄공간(閉鎖空間)을 이루고 있다.
정전(正殿)은 지대석(地臺石)과 면석(面石), 갑석(甲石)으로 이루어진 춤 높은 기단 위에 정면(正面) 3간(間), 측면(側面) 3간(間) 다포계(多包系) 형식(形式)의 맞배집인데 그 전면(前面)에 바로 붙여 춤이 약간 낮은 기단을 정전(正殿)기단과 접속시켜 앞으로 돌출시키고 그위에 첨각(添閣)을 두어 마치 능침(陵寢)의 丁자각(丁字閣)과 같은 평면(平面)을 하였다. 이 첨각기단(添閣基壇)의 동·서·남면(東·西·南面)에는 각 1개소씩 계단을 두어 전(塼)을 깐 포도(鋪道)와 연결되게 하였는데 남(南)쪽에는 폭(幅)이 넓은 신도(神道)와 연결되고 동·서(東·西)쪽은 폭(幅)이 아주 좁은 도로(道路)로 연결되어 한번 꺾이어 내삼문(內三門)쪽으로 향하였다. 정전(正殿)은 전면(前面)에는 띠살 사분합(四分閤)을 달고 측면(側面)에는 전퇴(前退)쪽으로 외짝의 띠살문을 달았으며 그외의 면은 심벽을 쳤다. 공포는 창방과 평방위에 배열한 내·외(內·外) 삼출목(三出目)의 다포형식(多包形式)인데 측면(側面)에는 포작(包作)을 배열하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또 전면(前面)의 첨각(添閣)은 전·측면(前·側面)이 단칸으로 벽없이 트이었다. 공포는 주심포(柱心包) 형식(形式)이고 지붕은 전면(前面)에 풍판(風板)을 두고 정전(正殿)처마 밑으로 연결시켰다.
정전(正殿) 양측에 접속(접속)된 익사(翼舍)는 동서(東西)로 2간식(間式) 연결되다가 남북(南北)으로 뻗은 4간(間)짜리 행각(行閣)과 연결되었는데 이들은 내정(內庭)쪽으로는 트인 열주(列柱)를 보이고 외측(外側)으로는 벽체(壁體)로 막혀 있다. 또 정전(正殿), 익사(翼舍), 행각(行閣)의 기단(基壇)을 약간씩 단차(段差)를 두어 위계(位階)를 나타낸 것 같다. 이 행각(行閣)의 공포는 초익공(初翼工) 형식(形式)이다.
경기전(慶基殿)의 건물 배치에 대(對)하여 상세한 그림으로 그린 '경기전(慶基殿), 조경묘도형(肇慶廟圖形)'이 있는데 여기에는 현재(現在) 없어진 부속건물(附屬建物)들과 별전(別殿)이 있고 서남(西南)쪽에 전사청(典祀廳), 동·서재(東·西齋), 수복방(守僕房), 제기고(祭器庫) 등의 부속건물(附屬建物)이 배치되었으며 동북(東北)쪽에는 별전(別殿)과 그 앞에 조산(造山)을 두고 있는 광역(廣域)의 범위를 조영(造營)하였다.
조선태조어진(朝鮮太祖御眞.보물 제931호.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 경기전)
조선왕조의 태조인 이성계(1335∼1408)의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이었다. 고려후기에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 등을 지냈으며, 1392년에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조선왕조를 일으켰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각종 기록에 의하면 태조어진(太祖御眞)은 모두 25점이나 그려졌는데, 면복본(冕服本) ·정건본(幀巾本) ·익선관본(翼善冠本) ·곤복본(袞服本) ·황룡포본(黃龍袍本) ·입자본(笠子本) ·마좌본(馬坐本) 등이다. 물론 모두 영전(影殿)이나 진전봉안용(進展奉安用)이다.
이들 태조어진은 문소전(文昭殿) ·선원전(璿源殿) ·집경전(集慶殿) ·경기전(慶基殿) ·영숭전(永崇殿) ·목청전(穆淸殿) ·영희전(永禧殿) ·남별전(南別殿) 등에 봉안(奉安)되었다.
태조어진 봉안에 참여한 화가를 보면 윤상익(尹商翊) ·조세걸(曺世傑) ·이재관(李在寬) ·조중묵(趙重默) ·조석진(趙錫晉) ·채용신(蔡龍臣) 등이 있다.
현재 전주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는 태조어진은 고종(高宗)9년(1872)에 조충묵(趙重默)이 모사(模寫)한 익선관본이다. 물론 현재 유일의 태조어진이다.
어깨와 앞가슴에 황룡(黃龍)을 수 놓은 청포(靑袍)를 입고 용상(龍床)에 정좌한 태조의 모습은 공식적인 어진도상형식(御眞圖像形式)으로 그려졌다.
참고로 현존하는 조선왕조의 어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안의 연대는 모사년대(模寫年代)이다.
태조어진(1872), 모조어진(模祖御眞)(1714 ·1744), 익종어진(翼宗御眞)(1826), 철종어진(哲宗御眞)(1852), 고종어진(高宗御眞)(1891 ·1899 ·1901 ·1909) 등이다.
예종대왕태실및비(睿宗大王胎室및碑.시도민속자료 제26호(전주시).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
예종대왕 태실과 함께 경기전 경내로 옮긴 태실비(胎室碑) 비석 전면에 "예종대왕태실(睿宗大王胎室)"의 6자가 해서(楷書)로 음각(陰刻)되어 있다. 후면에는 "만력 6년 10월초 2일건(萬曆六年 十月初二日建)"이라 하고, 그 아래 두줄로 "후 156년 갑인 8월 26일 개석립(後 百五十六年 甲寅 八月二十六日 改石立)"이라 새겨 있다. 그런데 만력 6년은 조선 선조 11년(1578년)이며, 후 156년 갑인(甲寅)은 영조(營祖) 10년(1734년)이다. 비(碑)는 높이 0.73㎝, 저폭(底幅) 1.26㎝ 크기의 거북이가 도사리고 앉아 있는 형태의 돌위에 세워졌고, 윗부분은 용(龍)을 조각한 대리석이다. 비는 높이 1m, 폭 46㎝, 두께 21㎝로서, 네 모퉁이가 각이 되게 했다.
조경묘(肇慶廟.시도유형문화재 제16호(전주시).전북 전주시 풍남동 3가 102번지)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공 부부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조선 영조 47년(1771) 세웠다. 철종 5년(1854) 경기전을 고칠 때 같이 수리하였고, 고종 31년(1894) 위봉사에 잠시 모셨다가 이곳으로 다시 모셨다. 위패는 영조 47년에 왕이 친필로 써서 보낸 것이라고 한다.
오목대이목대(梧木臺梨木臺.시도기념물 제16호(전주시).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1-3번지)
이목대는 조선(朝鮮) 태조(太祖)의 5대조(五代祖)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출생지(出生地)로 전하여 오는 곳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시조(始祖) 이한(李翰) 공 이후 목조에 이르기까지 누대에 걸쳐 이곳에서 살았으나 목조대에 이르러 관원(官員)과의 불화(不和)로 함경도(咸鏡道)로 이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비문(碑文) 역시 오목대(梧木臺)의 것과 같이 고종(高宗)의 친필(親筆)이며 비각(碑閣)은 당초에 오목대의 동편 높은 대지 위에 있었으나 도로확장공사로 이곳에 옮겨 세웠다. 오목대는 조선왕조(朝鮮王朝) 태조(太祖)가 된 이성계(李成桂) 장군(將軍)이 고려(高麗)의 3도 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있을 당시 군사를 이끌고 잠시 머물렀던 장소이다. 고려 우왕(禑王) 6년(1380) 금강(錦江)으로 침입한 왜구가 퇴로를 찾아 남원으로 내려오자 장군이 이들을 맞아 운봉(雲峰)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오목대에서 개선 잔치를 베풀었다고 전한다. 현존하는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필遺址)'라는 비석은 고종황제(高宗皇帝)(1863∼1907, 재위)에 의하여 광무(光武) 4년(1900)에 건립된 것이다.
전주한옥마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全郡街道)가 개설(1907년)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 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인 것이다.(전주시청 자료)
전주향교일원(全州鄕校一圓.사적 제379호.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26-3외)
전주 향교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26-3외에 위치하며, 교육과 관원양성을 위한 국가적 교육기관으로서 지방에 설립한 조선시대 교육기관이다. 전주향교는 1410년(조선 태종10)에 창건되고 1603년(조선 선조 36년)에 이전·중건되었으며 전국 향교 중 유일하게 계성사((啓聖祠) 공, 맹, 증, 안자의 부의 사당)가 갖추어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향교는 고려시대(高麗時代) 부터 있었다고 하나 확실한 고증이 어려우며, 원래의 위치는 지금의 경기전(慶基殿) 근처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세종(世宗) 23년(1441) 경기전을 짓고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이웃에 있는 향교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소란하다 하여 전주부(全州府)의 서쪽인 화산(華山)의 동쪽 기슭으로 옮겼으나 임진·정유재란을 겪은 후 전주부(全州府)에서 멀어 불편하므로 당시의 관찰사 장만(張晩)이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라 한다.
전주 향교의 건물 배치는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東)ㆍ서무(西廡)가 있고, 정면에 일월문(日月門), 그 앞에 만화루(萬化樓)가 있으며, 대성전(大成殿) 뒷담 사이로 명륜당明倫堂이 있으며, 서쪽으로 장판각(藏板閣), 계성사(啓聖祠), 양사재(養士齋)와 사마재(司馬齋) 그리고 주위에 고직사(庫直舍) 등 여러 건물이 있다.
이곳 배향 위폐는 서울의 성균관과 같이 대성전에는 공자를 주벽으로 사성과 십철, 송대 육현을 배향하고 있으며, 동서 양무에는 공자의 제자를 비롯한 중국의 유학자 7인과 우리나라의 18현 등 총 25인을 배향하고 있으며, 계성사에는 5성의 위폐를 모시고 있다.
전주 향교는 조선 조때 관학의 성격을 띠고 있을 당시, 이 향교는 도호부의 관아가 있던 관계로 학생수가 액내생 90명, 액외생 90명으로 총 180명에 정 7품의 훈도 1명이 배속되어 학생들에게 사서오경(四書五經)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현재 향교 내에 현존하는 건물인 명륜당은 1904년(광무 8년)에 군수 권직상(權直相)이 중수한 것이며, 대성전은 1907(융희 원년)에 당시 군수였던 이중익(李重翼)이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2칸이다. 정면 3칸에는 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모두 원주이고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합각에는 풍판을 달았다. 또 계성사는 1741년(영조 17년)에 판관 송달보가 창건하고, 정랑 이기경이 상량문을 섰다.
그 중에도 장판각에는 주자대전(朱子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 사기평림(史記評林)등 9,600여 점의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우리의 옛 교육시설을 둘러 볼 수 있는 전주 향교는 갑오개혁 이후 교육기능은 없어졌으나, 매년 봄·가을에 제례를 지내는 행사는 지속되고 있다.
학인당(學忍堂.시도민속자료 제8호 (전주시).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105-4번지)
인재(忍齋) 백낙중(白樂中)은 뛰어난 효자(孝子)로서 고종황제(高宗皇帝)(1863∼1907, 재위)로부터 승훈랑(承訓郎)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다. 사후(死後)에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본인의 호(號) 중 '인(忍)'자를 따서 '학인당(學忍堂)'이라 하였다. 솟을대문에는 '백낙중지려(白樂中之閭)'라 쓴 현판(懸板)을 걸어 놓았다. 7량가구(七樑架構)의 곱은자집으로, 꺾이는 부분의 팔작지붕 처리가 흥미로우며 추녀와 사래 끝 등에는 동판(銅板)으로 싸서 풍우(風雨)를 막게 하였다. 이 건물은 조선(朝鮮) 말기(末期)에 건립된 상류가옥(上流家屋)으로 전주고도(全州古都) 한옥보존지역(韓屋保存地域)의 대표적(代表的)인 건물 중 하나이다. 당시(當時) 일류(一流) 도편수(都片手)와 목공(木工) 등 연인원(年人員) 4,280명이 압록강(鴨綠江), 오대산(五臺山) 등지(等地)의 목재(木材)를 사용하여 2년 6개월에 걸쳐 건축하였다 하며 백미(白米) 4,000석(石)이 투입되었다 한다.
참고자료 : 문화재청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