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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교회 🌟
2024년 8월 25일 주일 예배
( 인도,설교: 정성욱 선교사 )
🌟 다 같이 기도함으로 8월 25일
주일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8월
넷째 주 주일을 허락해 주시고 전국
각지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교회에 다 함께
모여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시간 저희들에게 임재하여 주셔서
저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저희들이 주께 드리는 기도의
응답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시는 말씀의 은혜받게
하옵시고 저희와 가족들에게 주의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리오며
곧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찬송가
https://youtu.be/KiPmKrKZRUw?si=j1dAJRKXHuvIjKy4
🌟 교독문입니다.
시편 8편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 한 주간도 주 안에서 평안하셨는지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긍휼하심이
있으시길 축원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사도행전 28장 상반부
말씀을 주석을 참고하여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8장
1.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안즉...멜리데라 하더라
-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육지에 상륙하고 난 후에야 그곳이 멜리데라는 섬인 것을 알았습니다. 멜리데( * )는 오래전
제가 선교갔었던 이탈리아의 작은 섬인
말타(Malta) 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이 섬은 시실리 남쪽 약 98Km,
아프리카 북동쪽 약 320Km 지점에
위치한 섬으로, 전체 길이가 약 29Km
되고 너비가 15Km 정도 되는작은
섬입니다.
B.C. 1000년경 페니키아인들은 이섬에 이주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나
B.C. 218년 로마가 제 2차 카르타고
전쟁 초기에 이곳을 점령하여 다스려
왔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섬을 관할(管轄)하는 행정관을 세웠는데, 그 명칭은 '멜리데의 자치에 있어서 모든 일을 관할하는
우두머리'라는 뜻의 '멜리테시움 프리무스 옴니움 '(Melitesium Primus Omnium)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이 섬에 많은 수의
퇴역 군인과 그들의 가족들을 이주시켰기 때문에 이 섬은 상당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한편 '멜리데'의 위치에 대해서 현재의 말타(Malta)라고 보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멜리데'가 달마티아(Dalmatia) 해안 앞에 있는 '멜레다 '(Meleda)라고
이해합니다(Bryent, Papulus).
그러나 '멜레다'(Meleda)가 멜리데
(Malta)의 북동쪽에 위치한 아드리아
해(Adriatic Sea)의 북동쪽 달마티아
해안에 있다는 것은 다음 기항지가
'수라구사'라는 것(12절)과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수라구사는 멜리데(Malta)
바로 위에 있는 시실리 섬의 항구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후자의 견해는 '아드리아의 바다'(the sea of Adria, 27 : 27)fmf
'아드리아 해'(the Adriatic sea)로
오해한 데 기인한 것일 뿐 정당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바울의 예언은
성취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27 : 26, F.F. Bruce).
2.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토인들이...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 '토인들' 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바르바로이'(* )는 의성어로 멜리데 섬의 토착민들이 사용하는
페니키아어가 '바르'(Bar)- '바르'(Bar)로 들렸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
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서 영어의 '야만인'(Barbarian)이 파생되었기 때문에,
문명화되지 못한 미개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해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 용법상 야만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헬라인들이 그 말을
쓸 때 의미하는 바는 헬라 민족이 아닌
'타민족'을 가리킵니다(롬 1 : 14).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NIV에
서는 '섬 사람들'(islanders)로, RSV에서는 '원주민들'(natives)로 번역하고 있음
을 볼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섬에 사는사람들은
배에서 내린 바울 일행에게 적대 행위를
하지 않고 동정을 베풀어 불을 피워준 뒤 추위에 지친 몸을 녹이도록 배려
(配慮)해 주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베풀어준 친절은 일상적인 것이 아닌 특별한 친절이었습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27 : 24, 25).
여기서 '우리'가 뜻하는 것이 276명
전체를 가리키는지(27 :37) 아니면
바울과 함께 한 기독교인의 소그룹을
뜻하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276명 전체가 하나의 불을 피워 놓고
둘러앉아 몸을 녹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Haenchen).
그리고 이야기의 초점이 바울에게
모아져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적당한 규모로 무리를 지어 불을 지폈을 것입니다
(Richard N. Longenecker).
오래전 저는 하나님의 사역을 하면서
아마도 "내가"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의 글과 영상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거의 항상
사도행전 말씀처럼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은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
전도와 헌금(후원) 등으로 혼자가 아니라
함께 주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독사가...손을 물고 있는지라 - 계속해서 불을 피우려면 많은 나무가 필요했으
므로 사람들은 불을 쬐는 틈틈이 마른
나무를 주워 모아야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죄수 신분이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그의 성실한 생활 태도 때문에도 열심히 마른 나무들을 주워다 넣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마른 나믓가지를 한아름
주워다 불에 넣고 옆에 앉아 불을 쬐려니까 그 나무 속에있던 독사 한 마리가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뛰어나와 바울의
손가락을 무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여기서 '독사'(* ,에키드나)는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에게 사용한 단어이며(마 3: 7 ; 눅 3 : 7), 예수께서도 사용한 바 있는 말입니다(마 12 : 34 ; 23 : 33).
그런데 혹자는 오늘날 멜리데 섬에 독사가 없다는 조사 결과와(Preuschen),
바울이 물렸으나 아무런 문제가 발생
하지않은 것에 비추어(5, 6절), 바울의
손에 달린 뱀이 독이 없는 것이었을 가능성이있다고 봅니다(Loisy).
그러나 원주민들이 독사와 독이 없는
뱀을 구분하지 못했을 리 없고 의사인
누가가 그런 정도의 구별을 못했을 리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 섬에
독사가 없다고 해서 오랜 과거에도
없었다고 단정하기 힘듭니다.
따라서 독사가 아닐 것이라는 견해는
타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생태계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 결과 상당수의
생물이 멸종하거나 도태되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자연 현상이고 보면,
이곳 멜리테 섬의 독사도 이렇게
도태되어 없어진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Ramsay).
일례로, 근래에는 하와이에 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4.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 원주민들은 틀림
없이 바울이 독사에게 물린것을 확인했고 따라서 그가 죽는 것은 자명한 사실로 여겼습니다.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뱀에 물린 뒤
일곱 걸음을 걷게 되면 죽게 된다는
칠점사에 바울이 물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바다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왔으나 끝내 독사에게 물려 죽
게 되는 것은 필경 그가 살인자이기 때문이라고 여긴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의' (,헤 디케)가
끝까지 응보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디케'(* )라는 표현은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인과 응보적 정의의
신개념을 나타내는 것인데 누가가
헬라적 배경에서 정의의 신을 일컫는
이름인 디케(Dike)를 사용하여 표현한
듯합니다(Lenski).
그러나 정확하게 무엇을 가르키는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멜리데
섬의 토속 신앙의 대상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濟藤篤美)
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바울이...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 바울은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손을 흔들어 뱀
을 불속에 떨어버렸습니다.
바울은 독사에게 물렸고, 원주민들은
바울이 죽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바울에게는 이상한 일이 전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막 16 : 18의 약속이 '성취된 것'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본절에서 '짐승' 으로 표현된 '데리온'(* )은 위험한 짐승
특히 뱀을 가리킬때 사용된 말로
입증되었습니다(Bauer, Worterb).
6.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그가 붓든지...신이라 하더라 - 바울이 뱀에 물렸으므로 당연히 그의 손이 부어오
르고 조금 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그들이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상은 그 원주민들에게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원주민들은 달리 해명
할 길이 없게 되자 바울더러 신(神)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신의 심판을 받은 자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했던 그들이 이제는 정반대로 바울을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은
루스드라에서(14 : 11-18)와는 달리
바울을 신으로 경배하려 하거나 당연히
신에게 취해야 할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그들의 말은 바울이 '신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의미였을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뱀에 물렸으나
기적적으로 생명을 잃지 않은
클레오메네스(Cleomenes)에 대해
'신이 사랑하는 자'(*, 데오필레스) 라고
묘사한 풀루타크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바울은 그들의 생각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고 그분의 은총을
입고 있다는것을 모르는 원주민들로서는 그 이상 달리 생각할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Haenchen).
7.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 - '제일 높은 사람' 이 이 섬의 토착민 추장을 가리키
는지, 아니면 이 섬의 최고 행정 책임자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영수' (領袖)
를 뜻하는 '프로토스'(* )가 로마에서
파견한 최고 행정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 용례가 있음을 감안할 때(Corpus Inscripionum Latinarum
10.7465),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름 '보블리오' (* ,포플리오스)는
라틴계 이름으로 보이며 '푸블리우스'(Publius)나 '포필리우스'(Popilius)를 그렇게 기술한 것으로 보입니다
(Ramsay, Haenchen, Bruce). 는
누가가 이 사람의 이름만을 기술한
것에서, 석달 동안 바울 일행이 그곳에
머물면서 바울, 누가 그리고 보블리오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형성 되었음을
추측하기도 합니다(Zahn).
아무튼 이 사람은 바울 일행을 자기집에 영접하여 사흘간 친절한 대접을 하였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꽤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소작인들을 거느닐 만큼 여유가 있었
을 것입니다.
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열병과 이질 - 여기서 복수형 '푸레토이스'(* ) 로 묘사된 열병은 멜리데와
지브랄타의 지중해 해역에 오랫동안 널리 퍼져있던 말라리아와 같은 것입니다.
이 열병에 걸리면 그 고통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데 보통 4개월이상 고통을
당하였고 긴 경우에는 2-4년간 지속되기도 했으며 심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병이 멜리데의 염소 젖을 먹고 발병한다는 것과 그 병원체가 미생물 '마이크로코쿠스 멜리텐시스' (Micrococcus melitensis)라는 것이 의학적으로 규명된 것은 1887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뒤센테리오'(* )으로 표현된
보블리오의 부친이 앓고 있는 또다른 질병 '이질'은 곱똥이 나오고 뒤가 잦은
질병을 가리킵니다.
의사인 누가는 보블리오의 부친이 앓고
있는 질병을 정확하게 진단하였으나
병을 고치는것은 오직 바울의 기도와
안수의 결과였습니다.
바울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 기도를
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의미도 있지만 자기를 알리는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병을 고침으로써 자신이 증거하는 복
음과 하나님께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기회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R. N. Longenecker).
9.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병든 사람들이...고침을 받고 - 보블리오의 부친을 고친 소문은 멜리데 섬 전체에 금방퍼져 나갔고 그리하여 다른 병자들도 바울에게 몰려들어 병고침 받기를 원했습니다.
본문의 '고침을 받고'의 헬라어 표현
'데라퓨오'( * )는 의학적 술어입니다.
이에 대해서 람세이(Ramsay)는 누가가 의사로서 치료를 했을 경우 '데라퓨
오'가 사용되고 바울이 안수하여 치유한 경우에는 '이아오마이'(* )가 사용된다고 구분하며 더 나아가 하르낙(Harnack)은 본문의 병자들이 누가의 치료를 받았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의학적인 치료와 기적적인 치유가 단어의 사용에 의해 드러난다고 하는
람세이(Ramsay)의 분석은 일리는
있지만 보편성을 갖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치유 행위에 대해서는
위의 두가지 동사가 모두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눅6 :18 참조).
물론 본문에 나오는 치유에 대해서
의사인 누가가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구태여 바울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누가가 가볍게 치유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확인되어야 하는것은,
치유의 주체가 바울이라는 것이며
'치유를 받았다' ( , 에데라퓨온토)는
의학적 표현은 바울의 이적적인 치유가
의학적으로 완치(完治) 판정을 받은
것임을 밝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0.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후한 예로...대접하고 - 바울 일행과 섬
사람들 사이에 매우 아름다운 사랑의 행
위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본문의 '후한 예'에 해당하는 헬라어
'티메' (* )는 의사의 치료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서 사례금을 지급하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나(Bauer, Worterb), 그렇게 보는 것보다는 고마운 행동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현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Haenchen).
섬 사람들은 바울 일행이 머물때 뿐만
아니라 떠날 때에도 항해에 필요한 물품들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아마 식량과 의복 같은 필수품들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 한 사람에 의해 그와 함께 있던 275명의 사람들도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고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해 주는 것이었습니다(27 : 24).
11. ○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석 달 후에 - 당시에는 선박들이 겨울 철
3개월 동안 항해를 중단하는게 일반적
인 통례였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를
출발하여 가이사랴로 가는 사절들이
겨울철 항해중지 기간으로 인해 3개월간 중간에 머물러야했습시다(Josephus).
항해가 재개되는 시기에 대해서는
2월 8일에 서풍이 불면서 시작되었다는 기록(Pliny the Elder, Natural History)과 3월 10일까지는 항해가 불가능했다는 기록이(Vegetius, on Military Affairs iv. 39) 있습니다.
그런데 후자의 기록은 근해 항해가
아니라 먼 바다의 항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Bruce), 따라서 전자의 기록에 의거해 볼 때 바울 일행이 탄 배가 태풍을 만나 파선당한 것은 11월 초순경이었을 것입니다.
알랙산드리아 배...디오스구로. - 바울
일행은 마침 그곳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지낸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 배는 멜리데 섬의 '발레타
'(Valletta) 항구에서 겨울을 지냈을
것입니다.
여기서의 '우리'가 276명 전체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백부장과 그의
부하 군인들과 죄수들 그리고 바울과
누가, 아리스다고를 포함하는 그룹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 배도 곡물 수송선이었다면 후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누가는 이배의
이름을 '디오스구로'(* )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디오스구로'는 제우스(Zeus)와 레다(Leda)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
이 아들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Pollux)를 가리킵니다.
이들 쌍둥이 별자리 '제미니'(Gemini)는 폭풍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해주는 항해의 수호자로 여겨졌습니다.
아마 이 배의 앞 머리 양편에는
이 쌍둥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 '디오스구로'라는 명칭이 씌어
있었을 것입니다(Longenecker).
12.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 이 도시는 시실과 섬의 수도로 섬의
동해안 남쪽에 있는 중요한 항구입니다.
멜리데로부터 약 150K 떨어져 있고
성의 둘레가 35Km 되는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유명한 수학자 아르키메테스(Archimedes)의 고향으
로도 유명합니다.
B.C. 734년 고린도인들이 식민지로
건설하였고, B. C. 212년 이후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배가 왜 이곳 수라구사에서
사흘간 머물렀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1) 멜리데에서 불어오던 남풍이 멈추었기 때문이라는 견해와(Bruce) (2) 심한 역풍(逆風)을 만났거나 짐을 내리고 새 짐을 싣고 가기위해서였다(Haenchen)는 견해가 있는데 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13.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레기온 - 이는 오늘날의 '레기오 디카라브리아' (Reggio di Calabria)를 가리키는
데 메시나(Messina) 해협의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있는 항구입니다.
지리적 위치상 중요한 항구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폐항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남풍이 불기를 기다리며 하루를 묵었습니다.
남풍이 일어나므로...보디울에 이르러
- 바로 다음날 남풍이 불어 주었기 때문에
더이상 지체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레기온에서 340Km 떨어진 보디올까지 이틀만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보디울'(Puteoil)은 '작은 샘' 이라는
뜻을 가지며 오늘날은 포주올리(Pozzuoli)라고 부릅니다.
보디올은 나폴리 만에 위치한 네압볼리(Neapolis)의 외항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송해온 곡물들은 이곳에서 내려져
내륙으로 운반되었습니다.
보디올에 도착함으로써 바울은 긴 해상
여행을 끝내고 로마를 목전에 두게 되었습니다.
이제 로마까지는 불과 220Km 밖에
안 남았고 그 정도의 거리는 건강한
장정이 아피오 도로를 통해 걸어서
오 일이면 갈 수 있었습니다(Zahn).
14.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바울이 로마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형제들이 로마로 가는 길목인
보디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서 7일동안 형제들과 머문 후
로마로 향하게 됩니다.
여기서 형제라 함은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말씀을 간직하고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은 세상에서
멸시받고 고난받고 늘 외롭기만 합니다.
세상은 딱히 피해본 것 없는데도
전도자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고
핍박을 합니다.
심지어 어떤이는 욕설과 모욕을 주고
때론 때리기까지도 합니다.
거기다가 바울은 죄인의 신분으로
이번 여행에서 여러번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그러나 전도자의 곁에는 항상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보호하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이송 중 임에도,
얼마간의 자유를 허락받았습니다.
주님이 호송인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신
까닭입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형제된 자들을
보내셔서 위로와 사랑의 교제를
받게 하십니다.
이는 전도자에게 큰 기쁨이요.
위로와 힘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교회와
동역자들도 주님의 피로 한 몸을 이룬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며 서로 힘이 되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15.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압비오 저자 - 이는 압비우스 광장(Forum of Appius)을 가리키며
로마로 부터 65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압비아 대로상에 있습니다.
이 대로는 B.C. 312년 로마의 감찰관
압비우스 글라우디오(Appius Claudius)가 이 도로의 건설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도로는 로마로 향하는 길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완벽한 도로의 하나로
로마의 장군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의 입성을 할때, 군중들이 열열한
환영을 하며 맞이하던 길 이었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으로 그 길을 걷고 있지만 사실상 그 길은 복음으로 로마를 정복하기 위한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삼관 - 이 지명은 '트리온타베르논'(* , )
을 의역한 것으로 삼관(三館)
즉 '세 개의 숙소'(Tres Tabernae)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로마로부터 50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두 곳에서 바울을 맞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맞으러 오니...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 바울과 로마 교인들과의 만남
은 매우 감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바울로서도 일찍이 와보려고 했었고
(19: 21), 또한 주님께서도 그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과 약속을 주신 일이있던(23:11;27:24) 로마에
오게 되었으니 그 기쁨과 감사가 말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한 이곳 로마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어서 그를 환영해주었으니 마음이 든든했을 것입니다.
본문의 '맞으러'는 '아판테신'( * )으로
어떤 도시의 대표단이나, 왕이나 장군을 맞이할 때 쓰는 단어임을 생각할때 로마의 성도들이 바울을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로서 얼마나 뜨겁게 환영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외롭고 지친 전도자에게 형제들의
환대는 다시 일어설 큰 용기와 힘이
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는
것은 그가 성도들을 만나기 전에는 절망을 하거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음으로 해서 낯선 곳에 대한 어색함이 없어지고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 생겼다는 의미일 것입니다(Bruce).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마지막 때에 부족한 종도
홀로 로마로 선교를 갔었지만
선교와 전도는 늘 외롭고 힘든
길이라 주 안에서 한 몸된
성도들의 위로와 격려와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비단 저에게만 적용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우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교회
공동체를 세워주시고 교회 성도들과
동역자들과 함께 마지막 때 복음 전파로
주님 다시 오심을 예비하고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 주는 믿음의 공동체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운
마지막 때 우리는 이제 한 팀이 되고
한 몸이 되어 마지막 때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나라 전국과 전 세계로 복음을
전하는 저와 성도분들과 동역자들이
모두 되어 천국에서 별처럼 빛나는
상급을 받으시길 축원드리겠습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세워주신 교회 공동체로
주 안에서 한몸된 저희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서로 간의 힘과
용기가 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고난과 환난 가운데서도
이 세상을 능히 이기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힘을 합해서 복음 전파로 주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평탄하게 하여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상급을 받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리오며
곧 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