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나는 두 가지 점에 새삼(?) 눈을 떴다. 하나는 미세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우리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다는 늦은 깨달음. 또 하나는 작은 일에 구김 없이 웃을 줄 아는 천진함이다. (12) 아마도 무릇 예술가들이 저들을 조금씩 훔쳐 닮아야 할 것이다. 자기 일에 일점의 소홀함도 드러내지 않으려는 직업정신과 그것을 벗어났을 때 방심하고 자연스러워지는 생활 태도, 그건 보기에도 좋다. (13) 내게 설렘은 모든 것의 앞자리이다. 그것이 내 설렘의 본질인지 모른다. (16) 설렘이 없다면, 어찌 살까. 불가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것은 평상심을 깨는 일이다. 맞다. 설렘은 내 생의 불규칙 동사이자 찌들고 눌어붙은 감성을 들쑤시는 양아치 설레발이다. 설렘은 나의 평상심와 안일과 일상과 상식을 깨는 굴착부이며 불순한 첩자이며 초강력 비아그라의 원액 그 자체일 것이다. (19) 시를 눈으로 읽을 때 시는 종이와 문장 안에 갇히지만 소리 내어 읽게 되면 시의 말들은 제 소리와 빛깔을 입게 된다. (21) 보들레르던가는 청중 두어 명을 앞에 두고 낭송을 했다고 한다. 황동규 선생은 청중이 한 명도 없는 곳에서 낭송을 해보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기억의 회랑의 남아 있는 말이다. (21) 횡성으로 가다가 소초와 연초 제조창이 갈라서는 곳에서 제조창 족으로 좌회전. 몇 번 구불거리다 만나지는 강. (24) 짧은 독립 영화 같은 숲길이다. (25) 문막읍 후용리에 있은 극단 ‘노뜰’이 입주해 있는 공연장이다. 폐교를 개조한 공연센터는 그것만으로도 기특하고 아름답다. (25) 미륵산 초입은 화가의 말대로 황상사 복원 공사로 어지럽다. 복원은 참 나쁘다. 복원은 파괴의 다른 이름이다. 내 시집 가운데 세 권은 절판되었다. 복간을 궁리한 적이 있는데 황상사 복원 공사장 앞에서 그런 생각 두 번 다시 않기로 결심했다. 사라진 것은 사라진 인연을 따라갔을 뿐이다. 절판도 이쁘다. (27) 부론면 일대를 끼고 흐르는 강줄기 전체를 나를 부론강이 명명한다. 충주 쪽에서 온 남한강과 원주에서 발원한 섬강이 음양을 맞추면서 에로틱하게 한강으로 흘러드는 긴 도정이다. (28) 강줄기 끝 충청도 접경에 있는 소태면에 가면 식육점과 식당을 겸하는 집이 있는데 아줌마는 멋이 없지만 삼겹살은 맛이 있다. (29) 간판이 붙어 있는 걸 보면 지금도 영업 중인 모양이다. 원주 시외버스 터미널 골목에 붙어 있는 여인숙이다. 원주에 와서 숙소를 찾아 허둥대다가 하룻밤 묵은 집이다. (29) 지방대학들이 숨죽이고 있는 풍경이다. 교문에 이르는 도로변에 붙어 있는 대학촌들도 개점 휴업이다. 그 조용함들이 중층으로 쌓여 이 저녁 시간에 유감없이 디스플레이되고 있다. (32) 소설이야 이야기의 흐름이 있기에 여기 읽었다 저기 읽었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집 읽기는 그런 점에서 행복하다. 그냥 물고 씹고 빠는 맛이 있다. (38) 우좌간, 시집을 받으면 나는 아주 게으르고 두서없이 읽는다. 한자리에서 한달음에 읽지를 않는다. 실제로 시집은 그런 날림 독서를 용납하지 않는다.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대화하며 또 작업 걸며 읽게 되어 있다. 그런 애정에 값하지 못하는 시집은 불행한 책이다. (38) 유가, 불가, 도가의 철학과 사상이 그것입니다. 유가는 청빈을, 도가는 무위를, 불가는 무소유를 주창합니다. 이것을 공통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것은 정신적 자유의 획득에 있다고 봅니다. (41) 문학의 한 속성인 무용의 유용성을 바로 이해하고 여백의 미를 가져야 합니다. 물질적 풍요가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솔로몬의 영화가 들꽃 한 송이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42) 그녀가 어떤 인터뷰에선가 ‘자유롭고자’ 했다는 말은 인상적이다. 그녀의 삶이 부자유스럽고 어딘가에 구속되어 있었다는 말에 밑줄을 긋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 말은 나의 뇌리에 오랫동안 침전된다. (46) 시가 한 사람을 견디게 한다는 말은 허사(虛辭)가 아니다. (63) 서재와 찻방을 겸한 손바닥만한 사랑채 벽을 장식하고 있던 시화전은 뭉클했다. 백지에다 손수 시를 쓰고 누군가의 그림을 곁들이기도 한 시화전이다. 외로움을 견디는 자작극이다. 한양대 철학과에서 공부하고 민박집 동천다려의 중니 노릇을 한 시인 강제윤이 그 사람이다. 1980년대 한때 운동권에도 가담했던 그는 순혈의 청년이었으며 그런 연유로 빵에도 출입한 경력을 가졌다. 그가 지금 섬을 벗어나 길 위에 서 있는 모양이다. (67)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멀리 치악산과 이웃한 백운산과 충주로 넘어가는 양안치 고개의 정상도 눈에 잡힌다. (77) 예전에 읽은 황동규 선생의 산문집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를 손에 들었다. (77) 걸리적거림 없는 독거는 좋지만 그게 입 큰 함정일 때도 있다. 게으름과 망념이라는 덫! 내일 새벽은 일찍 눈 뜨자. 오이도 사고 토마토도 몇 개 골라오자. 일용할 활기도 덤으로 묻혀오자. (79) 김소월은 소설 「함박눈」을 썼고, 한용운은 장편소설 『흑풍』을 썼고, 김수영은 미완의 소설 「의용군」을 집필했다. 소설의 질적 성취와는 별개로 시인의 정신적 자취를 판독하는 데는 흥미로운 암시를 던져준다. (80) 11층 아파트 베란다 기슭까지 찾아와 헤살대는 가을의 투명함을 손으로 잡아보려 허우적대지만 헛손질에 그치고 만다. 가을바람이, 가을의 사념이 온몸으로 달려든다. 쟁쟁이는 햇빛 속에 누워 건초처럼 몸을 말리고 싶다. 가을볕에 몸과 마음이 누렇고 검게 익어가도록 들녘 어딘가에 나를 방치하고 싶어진다. (85) 귀래 가는 길목에서 만났던 손곡 이달(李達)의 시비(詩碑), 단종이 쉬어 갔다고 이름을 붙인 단강, 학동들이 돌아간 한적한 단강초등학교 교정이 머금고 있는 한낮의 적막은 환쟁이와 시쟁이를 먼 기억의 언덕으로 납치하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우리 역시 그 풍경 속으로 이의 없이 투항했다. (85) 먼눈으로 섬강을 흘깃거리며 돌아오는 길에 가을이 살풋 눈썹 위를 걸어간다. (86) 나라 전역에 저 따구로 게재되고 있는 시들을 한꺼번에 철거하면 어떨까. 자동차 없는 거리를 만들듯이 시 없는 사회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94) 신림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길과 금대리에서 영원사에 이른 길은 그런대로 비포장을 유지하고 있다. (96) 요즘은 좋은 길을 소개해주는 사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나도 순 살결뿐인 매력적인 길 몇 개쯤 비밀히 간직하고 싶다. 가까운 사람에게 그 길을 선물해도 좋을 것인바. (97) 나는 치악산 곧은치를 오르거나, 오대산 북대령을 기고 있거나, 제천 정방사 대웅보전 마루에 걸터앉았거나, 부론강의 억새 틈을 서성대거나, 백운계곡 지장사의 비포장을 걸어가거나, 운학에서 강림으로 넘는 고개를 오르거나, 물벼락 맞은 영월의 서강 둑방을 어슬렁거린다. 내 실종과 유폐의 내역이다. (101) 운두령에 감춰뒀던 길 하나를 다시 더듬을까. (103) 이 밤, 귀가 순하다. 귀가 없다면 지금 수굿이 내리는 여름비의 음감을 어떻게 녹음할 수 있겠는가. (105) 현재의 행정명은 강원도 강릉시 완산면 목계리, 시와 리라는 단위가 엇물리는 그 ‘엇’의 고샅에 내가 태를 버린 마을의 문화적 징후가 있다. 도회적 단위인 시로 묶였으나 문화는 다름없이 리적(里的) 요소에서 서성인다. 배움과 물산과 시선이 다 옹졸해서 측은한 고장이다. (114) 중학교 2학년 무렵 초등학교 동창인 박기동이 시집 한 권을 들고 내 집을 방문했다. 기억이 맞다면 신석정의 『빙하』였다. (117) 훗날 박기동과 이종린은 『심상』으로 등단하고, 박은 강원대학교 사범대 교수가 되고, 이는 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117) 이응준의 소설집 『약혼』(143) 이응준의 소설을 읽다가 학자가 되려면 고양이에게서 세 가지를 배우라는 구절을 만났습니다. 고양이의 호기심, 고독, 자존심을 일컫는 삼묘론(三描論)이 그것입니다. 되레 시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항목입니다. (148) ‘조용히 해’라고 해야 할 자리에 ‘조용히 합니다’ 로 대체하는 그 묘한 어법을 이 자리에서 흉내 냅니다. (152) 손가락 하나로 대상을 가리킬 때 놀고 있는 나머지 손가라 네 개는 자기를 가리키고 있음을 뼈저리게 압니다. (152) 시집에는 어쩐다는 도리 없이 시인의 체액 전부가 고여 있습니다. 고뇌의 빛깔, 땀의 농도, 시선의 높낮이, 미적 갈구, 감정의 파고, 시적 장악력, 생에 맞서는 깡다구, 새로움을 자르는 쟁투심, 자명함에 대한 반란, 삿대질, 언어의 작란(作亂), 견딜 수 없는 외로움, 참는 외로움, 죽이는 외로움 등등과 등가를 이루는 휘황한 고심참담이 시집에 묻고, 젖고, 튀고, 섞여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이 서로를 물고 빨고 버팅기며 타오르는 소리들, 시집은 한 시인의 내면적 자연입니다. (155) 박용래 시인은 시상이 떠오르면 항상 자식들을 불러 다 받아쓰게 했답니다. 자식들이 불평하면, 시인 아버지는 “시를 쓰려고 하면 내가 시를 쓸 수 있구나 하는 기쁨에 손이 떨려 글씨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라고 말했더랍니다. 시상 앞에서 손이 떨리다니! (156) 영화관에 몇 번 가본 바에 따르면, 열 명 채 안 되는 관객이 앉아 있기 일쑤고 그나마도 몇은 안면 부대낀 인물이기 쉽습니다. (157) 시라는 칼은 손잡이까지 칼날이다. (168) 다시 말하자면 시적 리터러시는 언어적 능력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시적인 것에 대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169) 영월읍에서 고씨동둘을 지나 하동면사무소가 있는 옥동에서 ‘와석고개’를 넘기 전에 ‘망경사’라는 절의 표지판을 보고, 골짜기로 들어와 골짜기 안의 마을을 지나쳐 구불구불 산 위로 올라오시다 보면 왼쪽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이 보일 것입니다. (172) 소설가 김도연이 메밀막국수를 먹으며 던진 “앞으로 오대산 북대령은 차로 넘을 수 없다”는 전언이 머릿속에서 국수 가락처럼 여러 토막으로 분절되었습니다. 내 시집 『사경을 헤매다』의 첫머리를 장식한 시도 다름 아닌 「북대령」입니다. (186) 시쓰기의 보상은 시를 쓰는 오직 그 순간이다. (192) 여행이나 연애나 낯섦이 탕진되면 죽음이지요. 같은 여행지도 갈 때마다 다르다는 것처럼 사람 즐겁게 놀래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198) 노동자에게 고마워하지만 미안하지 않다고 토로하던 시인의 치열한 정신적 헌신이 확연해지는 대목이었습니다. (198) 남과 싸우면 웅변가가 되고, 자기와 싸우면 시인이 된다. (200) 서점에서 더러 신간 같은 얼굴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212) 내 세대의 노래는 아니지만, 015B의 「아주 오래된 연인」의 한 대목을 입으로 우물거렸습니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처음의 열정과 선도(鮮度)를 유지하는 건 역시 벅차고 지고한 일일 겁니다. (215) 한 때 너무도 좋아했으나 지금은 좋아했다는 사실까지 부인하고 싶은 부담스러운 존재, 물론 거기에도 일말에 죄의식과 부채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덧 시는 나에게 이미 내 애를 배고 있기에 차버릴 수도 없는 지긋지긋한 애인 같은 존재가 되었다. (216) 진주는 신림우체국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제천 방향의 우측 편이었다. (238) 매포의 들골기사식당에 걸음을 멈춘 것이 11시 50분이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네 시간 20분을 걸었습니다. 4천 원짜리 청국장을 시켰는데 대성공이었다. 청국장 맛은 느끼함이 생략되어 단순했고, 곁다리 반찬들도 간소하고 정갈했다. (249) 이 길을 걸으며 나는 참 행복했다. 55번 고속도로와 함께 국내 최장의 죽령터널이 뚫렸고, 대개의 차들은 굴속으로 스몄다. 덕분에 한적한 신세가 된 이 길을 방심하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257) 한참을 내려오니 희방계곡이다. 계곡에서 쏟아지는 물소리에 기대면서 잠시 눈을 감았다. 계곡을 거슬러 가면 희방사와 만난다. (258) 풍기 시내에 접어들자 내가 이 소도시의 타자라는 생각만이 올연했다. 낮은 건물, 비좁은 거리가 이상한 안도감으로 이끈다. 풍기는 이곳저곳을 헤집고 돌아다니도록 유혹했다. 이 순간,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이 서울 공연을 마치고 서울을 느끼고 싶어서 아무도 몰래 강남의 한 좌판 앞에서 서성거렸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259) 부석사 동네 사람은 선운사를 보기 위해 길 떠나고, 선운사 동네 사람은 부석사를 찾아온다. (262) 나는 산이 만든 아련한 곡선만 보면 물컹한 감동을 먹는다. (263) 걷기에 주목했던 누구도 능률과 실질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냥 걸어야 한다. 걷기에 이데올로기는 없다. (264) 한갓진 부석면의 거리들이 한때 내가 초등학교 선생질을 했던 강원도 정선의 아우라지가 있는 동네를 닮았다. 추억이 왈칵 쏟아진다. (265) 여름날에 들렀을 때 젊은 가이드의 설명이 되살아난다. 지붕은 어떻고, 기둥은 어떻고 하던 말들. 부질없는 말들이다. 그런 지식은 다 사라지고 그냥 부석사의 아름다움만 눈앞에 있다. 모든 아름다움은 설명이 필요 없고 분석도 필요 없다. 설명과 분석을 넘어서는 자리다. (266) 무량수전 앞, 내 그토록 좋아하는, 오로지 부석사에 가는 이유에 걸맞은, 석등 위 이끼 사이로 바람이 불어간다. 숨이 멎듯 미세한 바람을 느낀다. 사랑스러워라, 살아서 꿈틀댄다는 이 맛. (267) 눈앞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 그저 희망만 있을 뿐이다. (268) 잠이 덜 깬 부석면 시내에 들어섰다. 지난 밤 철시하고 아직 개점하지 않은 시가지가 화장 안한 여자의 맨얼굴 같다. (269) 논리는 언제나 자기 방어적이다. 논리는 다른 논점에 의해 격파당하기 직전까지만 논리적이다. 논리에는 아쉽게도 도덕이 없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는 말을 논객은 가볍게 음미해보길 바란다. (271) 다섯 시간이면 봉화에 닿으리라.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때 물야면 표지가 나오고 ‘안동 60km’ '봉화 16km'의 표지판과 만났다. 알게 모르게 걸은 거리와 남은 길을 계산하게 된다. 얄미운 나를 타박한다. 생각 없이 걷자니까, 그냥. 그때그때 머릿속에 움직이는 생각만 들고 가자. 그도 무거우면 놓고, 사라져도 찾지 말고. (271) 11시 30분에 물야면 소재지에 이르렀다. 우체국이 있고 면사무소가 있고 장터가 있는 작은 마을이다. 부석면을 떠올리게 하는 마을이다. 걸음을 쉴 겸 마을을 둘러본다. (273) 물야우체국에 걸음을 들이민다. 젊은 직원 한 사람이 손님을 맞아주었다. 우체국 업무와 관계없는 질문에도 친절하게 대답해주어 고마웠다. 열 평 정도의 공간에서 혼자 있는 그가 좋아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보이기도 했다. 봉화까지는 10분 거리라고 했다. 근데 그건 자동차 얘기다. 12킬로미터 남았으니까 대략 세 시간 남은 길이다. (273) 시가지를 빠져나와 조금 걷다 만난 정류장 벽보판에 가수 현철 디너쇼 포스터가 눈에 스쳤다. 멀리서 봐도 얼굴 넓적한 가수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디너라는 말과 내가 가고 있는 마을은 격이 잘 맞아주지 않았다. 디너보다는 새참 정도가 어울릴 일이다. 무슨 상관. (274) 물야초등학교 북지분교장. 교사 한 사람이 1,2학년을 가르치든가 아니면 1,2,3 학년을 한꺼번에 묶어서 가르치는 곳이 분교장이 아닌지. (275) 어제 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조치원에서 이삿짐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오던 소설가 심상대가 그 나름의 고충 어린 소회를 던지기에 ‘벌써 졸업’이냐고 했더니, 뺑뺑이 친 사람은 생각 않고 ‘벌써 제대’냐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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