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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살 찬란한 아씨시의 아침을 맞이했다. 숙소에서 바라다본 아씨시의 아침은 드넓은 초록빛의 평원과 나무들, 예쁜 벽돌색 집들과 성당의 종탑이 어우러져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였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아씨시를 보고 평화의 기도를 지으신 이유를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오전 9시 성 프란치스코 성당의 순례자 경당에서 그리스도 승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넷째 날 순례가 시작되었다. 김승호 신부님은 미사를 시작하시면서 “우리가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를 이 자리에서 봉헌할 수 있는 건 커다란 은총이다. 날짜를 잡다 보니 우연치 않게 되었는데 하느님의 섭리인 것 같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먼저 찾았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새기면 하느님의 초대가 오늘의 이 자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한 초대에 기쁘게 응답하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자”라고 하셨다.
신부님 강론
자그마한 것이 내게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또 엄청나게 큰일이 일어났는데도 시큰둥할 때가 있다.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서 한국순교성인 103위 시성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하늘에 빛이 나는 하얀 십자가 모양이 나타났다. 하느님이 늘 함께 해주신다는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지 못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똑같은 현상 안에 있었는데, 사람들은 다 다른 모습으로 반응을 했다.
결국 어떤 외적인 현상이 우리를 바꿔놓지 않는다. 하느님께 집중하고 있고 하느님 사랑의 힘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 안에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그것은 외적인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주님께 향할 때, 주님의 마음으로 다가갈 때 늘 새로워진다. 그 마음은 자그마한 것을 통해서 감동하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줄 안다. 무엇 하나 내버릴 것이 없는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은총이고 축복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 계시며 기쁨을 나눠 주시고 그 기쁨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삶을 살도록 인도해 주신다. 우리는 늘 그 삶에 초대를 받았고, 그 삶에 함께하고 있다. 어쩌면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하루를 오늘 살도록 주실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삶에 감사하고 거룩하고 소중한 이 성지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봉헌하고 희생하는 삶을 통해서 승화시키고 변화시키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늘 우리와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기에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의 복을 청하며 우리를 봉헌하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결심을 하면 시련과 유혹이 따른다. 그 유혹은 내가 하느님께 의탁하며 나아가도록 채찍질하는, 하느님이 내 손을 붙들어 주는 증표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거룩한 삶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우리가 그 거룩한 삶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 주시는 예수님과 성령님께 도움을 청하며 기도하자.
미사를 봉헌한 후 먼저 어젯밤 찾아갔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지하 무덤 경당으로 갔다. 지하 무덤 경당 제대 위 철격자와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내부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를 모신 석관이 있다. 그리고 성인의 무덤 주변 네 모퉁이에는 성인을 따랐던 초기 동료 4명의 무덤도 있다.
지하무덤경당
지하성당
지하성당
지하 성 니콜라오 경당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입으셨던 수도복과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성인이 생전에 기워 입었던 낡은 수도복은 가난을 사신 성인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낡은 수도복조차 가난한 이들에게 기꺼이 주었던 성인의 가르침을 받아 많은 이들이 주님의 사랑을 나누고 있다.
1223년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인준한 프란치스코 수도회 회칙서 한 장이 전시되어 있다. 다른 한 장은 바티칸에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이끌던 작은형제회는 121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프란치스코 수도회로 승인을 받았다. 그런데 최종 승인은 극단적인 청빈 의무를 완화한 회칙을 1223년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인준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인준한 프란치스코 수도회 회칙서
1224년 프란치스코 성인이 양피지에 친필로 쓴 동료 ‘레오 수사를 위한 축복 기도문’이 있다. 성인은 축복의 글을 쓰고 프란치스코 수도회 십자가인 타우 십자가로 싸인을 했다. 10여 년 전에 이 친필 밑 부분의 손상 부위를 복원했는데, 양피지를 복원할 때 쓰여졌던 종이가 경남의 신현세 전통한지공방에서 제작한 우리나라 전통 한지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 고문서를 복원하는데 우리나라 한지가 보존성이 우수해 아주 중요한 재료로 인정을 받아 사용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친필이 우리나라 한지로 복원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친필로 쓴 축복 기도문
선교와 순교의 열정에 불타있던 성 프란치스코는 이슬람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1219년 이집트로 가서 이집트의 왕 술탄을 만난다. 이슬람인들은 프란치스코를 죽이려고 했지만, 술탄은 프란치스코의 설파에 감명을 받아 프란치스코회원들의 예루살렘 순례를 허락했고 교회를 설립할 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그 징표로 상아로 만든 뿔나팔을 선물로 준다. 현재 이스라엘 성지 공식 관리를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맡게 된 것도 프란치스코 성인의 선교 덕이다.
술탄이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선물한 뿔나팔
성당 앞 잔디밭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타고 오는 젊은이의 동상이 서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세상의 권력과 명예를 좇아 기사가 되고자 아폴리아로 가는 도중(1205년) 스폴레토 계곡에서 “왜 주인을 섬기지 않고 종을 섬기려느냐? … 집으로 돌아가라. 내가 할 일을 알려주겠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아씨시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을 순례한 후 성인의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인의 집이라고 알려진 곳에 지은 키에사 누오바 성당은 문이 닫혀 있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살았던 방 위에 제단을 세우고,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갇혔던 감옥이 보존되어 있는 성당은 들어갈 수 없었지만 성당 마당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와 어머니 피카 부인상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키에사 누오바 성당
어머니 피카는 사슬을 들고 있고, 아버지는 옷을 들고 서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감금된 프란치스코를 풀어주었고, 아버지는 성인이 입었던 옷을 벗어서 돌려준 것을 받았다고 해서 옷을 들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부모님 표정이 슬퍼보인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부모님 상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 길’이라고 하는 곳의 성인의 부모님집 벽에 “이곳에서 태양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라고 단테가 성인을 떠오르는 태양으로 묘사한 글이 벽에 붙어있다. 예수님이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셨다. 태양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단테가 프란치스코를 태양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인격적으로 만난 빛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 준 인물이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말씀하셨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교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 빛과 같은 역할을 한 분이시다.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 길
성인이 감금되었었다는 곳의 나무로 된 문짝 옆에는 성인이 어머니 피카 부인의 도움으로 문을 열고 감금된 곳에서 빠져 나오는 장면이 테라코타로 표현되어 있다.
성인이 감금되었던 방의 나무 문짝
성인의 생가에서 조금 떨어진 옆에 프란치스코 성인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마구간이 있다. 성인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서 마구간을 개조한 경당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하루는 성인을 임신한 어머니에게 우연히 로마로 향하던 순례객이 “당신의 아들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 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성인이 태어날 때가 되어서 산통이 오는데도 나오지를 않다가 순례객의 예언대로 마굿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렇게 프란치스코 성인은 제2의 그리스도로 존경받고 있는 분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태어난 마구간
마구간
마구간을 떠나 이어서 성녀 글라라 성당으로 갔다. 성녀 글라라(1194~1253)는 1194년 아씨시에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났다. 18세 때 우연히 프란치스코 성인의 설교를 듣고는 감화되어 그리스도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프란치스코의 첫 여제자가 된 글라라를 중심으로 프란치스코 수도회 제2회로 불리는 글라라 수도회를 창설했다. 1213년 초 프란치스코 성인이 재건해 놓은 성 다미아노 성당을 모원으로 삼고 “가난한 자매들의 회(글라라 수도회)”가 탄생된다. 그러나 성 프란치스코와는 달리 봉쇄 수도원 안에서 가난과 보속의 삶을 살아가는 관상 생활이었다. 1240년 이슬람인들이 수도원을 습격하러 오자 성광을 들고 성녀가 나섰을 때 엄청난 빛에 의해 이슬람 군인들이 놀라서 이 지역으로부터 철수를 했다는 전승이 있다. 그래서 글라라 성녀는 성광을 들고 있는 것이 상징처럼 되어 있다.
글라라 성당
글라라 성당
성녀 글라라 대성당은 움브리아 지방의 아름다운 들판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1257년~1265년에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외관은 연분홍색과 흰색의 돌로 가로줄 무늬로 이루어져 있어 부드러운 색감을 나타냈다.
처음에 글라라 대성당이 있던 자리에는 성 조르조 성당이 있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과 주교좌 사제단의 소유인 학교가 딸린 성당이었다. 1226년 프란치스코 성인이 선종하자 성인의 유해를 프란치스코 대성당을 지어 옮기기 전까지 조르조 성당에 모셨다. 1253년 글라라 성녀가 선종하자 성녀의 유해를 프란치스코 성인이 묻혀있던 같은 자리에 모셨다. 그러면서 글라라 수도회 수녀들이 조르조 성당으로 수도원을 옮기고 싶어 한다. 아씨시의 주교님 또한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때에 여자 수도회가 성 밖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1257년 알렉산드로 4세 교황의 중재로 조르조 성당은 글라라 수도회의 소유가 되었고, 아씨시의 주교는 글라라 성녀를 기념하기 위한 새로운 성당을 건축하게 된다. 1265년 완성되어 클레멘스 4세 교황에 의해 글라라 대성당이라는 이름으로 축성이 되었다.
글라라 성당 내부
대성당 안의 오른쪽 십자가 경당에는 글라라 수녀회가 다미아노 성당에서 이곳 성당으로 이전할 때 모셔온 다미아노 십자가 원본이 제대 위 허공에 매달려 있다.
그런데 다미아노 십자가의 예수님은 고통과 죽음의 모습이 아니라 부활하여 살아 계신 예수님이시다. 중세 비잔틴 종교화의 특징으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의 본성 중 영원히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한 그림이다. 중세에 그림은 글을 모르는 이들의 성경 교육 도구로 사용했기에 전지전능하신 신의 시선으로 그렸다. 신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했기에 비참하게 힘없이 죽는 예수님은 그릴 수가 없었다.
14세기 이후 인본주의 사상을 추구하는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서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인간의 눈으로 관찰하여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하고 십자가에 처절하게 고통받고 돌아가셨다는 이미지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다미아노의 십자가 예수님은 너무나 평안한 자세로 두 손과 두 팔을 벌려 우리 모두를 하늘나라로 데려가기 위해서 기다리시는 살아계신 예수님이시다.
글라라 대성당 안의 십자가 경당
다미아노 십자가
글라라 대성당 중앙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면 지하에 글라라 성녀의 유해가 있다. 성녀의 유해는 사람의 형태로 만들어진 유골함에 모셔져 있고 글라라 수녀회의 수도복을 입고 있다.
유해 맞은편에는 글라라 성녀와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전시관 가운데 긴 갈색 옷은 글라라 성녀가 입었던 수도복과 망토다. 아래 동그란 유리병에 있는 것은 글라라 성녀가 사용한 실패, 왼편의 띠는 성녀가 사용한 수도복 띠, 그 위 은색 뚜껑으로 덮인 유리함 안에는 글라라 성녀의 머리카락이다. 왼편의 신발 하나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라베르나 산에서 오상을 받을 때 신으셨던 신발이다. 왼쪽의 옷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회개 후에 입으신 옷이다. 오른쪽의 옷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수도복이다. 아래 책은 성인의 기도서이고, 그 옆에는 성인이 사용한 수도복 띠이다.
오른쪽 전시관에 긴 양말은 글라라 성녀가 오상의 상처를 감싸기 위해서 만들었던 양말이다.
흰 옷은 글라라 성녀가 손수 지어서 만든 옷이다. 자료에 의하면 성인이 수의로 사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기도 하고, 또 프란치스코 성인을 위해서 만든 옷이라고 하기도 한다.
글라라 성당 순례에 이어 리보토르토 성당을 순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내년에 올 희년 준비 공사로 문이 닫혀 있다고 해서 가지를 못했다. 이탈리아는 희년 준비로 순례 가는 성지마다 공사 중인 곳이 많았다. 리보토르토 성당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집을 떠나 동료들과 함께 극도의 가난과 형제애를 추구하며 나환자를 돌보며 움막 생활을 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프란치스코의 뜻을 같이하려는 형제들이 점차 많아지고 주위 주민들의 떠나라는 눈치도 있어 아씨시의 성 밖 포르치운쿨라(작은집)로 이전을 해서 회칙을 만들고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를 조직한다. 포르치운쿨라가 있는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내일 아침 순례할 예정이다.
글라라 성당을 순례한 후 저녁식사 때까지 자유 순례 시간이 주어졌다. 성 다미아노 성당을 순례하고 싶었다. 다미아노 성당은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당신 모습을 드러내셨고, 프란치스코 성인과 글라라 성녀의 삶을 통해서 당신 현존을 보여주신 곳이다. 다미아노 성당은 가는 길이 내리막길이라 힘들고,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 원본이 글라라 성당에 있기 때문에 순례자들이 아씨시에 와도 잘 찾지 않는다고 한다. 가는 길이 내리막길이지만 듣기와는 다르게 글라라 성당에서 그리 멀지도 않았고 일행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걸어가니 힘든 줄도 몰랐다.
다미아노 성당 가는 길
9세기에 지어진 성 다미아노 성당은 1030년까지 베네딕토 수도원 경당으로 사용되다가 부서지기 시작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다 허물어진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님께서 가르쳐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을 때, 그곳 십자고상으로부터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재산을 팔아 성당을 보수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권력과 탐욕에 빠진 교회를 영적으로 쇄신시키라는 뜻임을 깨닫게 된다.
다미아노 성당
프란치스코 성인이 기도 중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십자가는 성당의 이름을 붙여 다미아노 십자가라고 불렀고, 글라라 성녀 선종 후 글라라 수도원이 다미아노 성당에서 현재 글라라 대성당으로 이전할 때 함께 옮겨졌다. 현재 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십자가는 모조품이다.
다미아노 성당 내부
다미아노 성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예로니모 경당과 십자가 경당이 있는데, 예로니모 경당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명령으로 초기 작은 형제들이 글라라의 공동체를 도와주기 위해 머물렀던 장소다.
예로니모 경당. 왼쪽부터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도, 성 예로니모, 아기 예수님을 무릎에 놓고 기도하시는 성모님 ,성 프란치스코, 글라라의 모습이다.
십자가 경당에 있는 인노첸시오 수사의 나무 십자고상
2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오르면 다미아노 성당 제대 위쪽으로 만들어진 성녀 글라라의 경당이 있다. 이 경당은 성녀가 29년간 긴 병상 속에서 아래층 성당의 미사 소리를 들으면서 미사를 드렸던 장소다.
글라라 경당
글라라 성녀는 1212년 말부터 선종하실 때까지 다미아노 성당(글라라수도원)에 머무셨다. 성녀는 봉쇄와 관상 수도 생활을 통하여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정신을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는 절대 믿음을 보여주었다.
1253년 8월 11일 글라라 성녀가 임종하신 자리
성녀께서 임종하신 침실의 창문에서 수도원의 사각정원이 내려다보인다. 회랑 지붕은 둥그런 벽돌 기와로 빗물이 정원으로 떨어져 모일 수 있도록 내부로 기울어져 있고, 정원 바닥 아래에는 물을 모아두는 집수장이 만들어져 있다.
다미아노 성당의 사각정원
사각정원에서 수도원 공동식당으로 들어가면 초창기의 아무 장식도 없는 나무 의자와 식탁이 그대로 남아있다.
1228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프란치스코 시성식 후 공동식당에서 성녀와 함께 자리를 하였고 성녀에게 식사 전 기도를 부탁하였다. 성녀가 십자성호를 그으며 기도하자 그곳에 있던 빵 하나하나에 십자 표시가 빵 위에 나타났다고 한다.
수도원 공동식당
수도원 공동 식당. 식탁 위에 꽃이 놓여있는 자리가 글라라 성녀가 앉아서 식사하던 곳
글라라 성녀는 평생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조그만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 여러 번의 성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현존을 그리스도인들과 이교도인들에게 증거했다. 나도 성녀를 본받아 기도와 사랑으로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되는 길을 갈 수 있는 행복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다미아노 성당을 떠나 다시 언덕길을 올라 코뮤네 광장 한가운데 위치한 시청 바로 옆 ‘성 마리아 성당’으로 갔다.
이 성당은 기원전 1세기 로마시대의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를 위해 지은 신전인데, 현재 베네딕토 수도회에 의해 16세기에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그러다 보니 겉모습은 신전의 모습이고 내부는 성당의 모습이다. 지금도 신전의 여섯 기둥은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된 상태이다.
성 마리아 성당
지극히 지혜로우신 동정녀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꾸며져 화려했다. 신전이 성당으로 변경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가톨릭 국가에 와 있음을 실감했다. 잠시 앉아서 성모님과 같은 겸손과 지혜로 복음의 기쁨을 누리도록 은총을 청했다.
성 마리아 성당 내부
이어서 걸어보지 않은 골목길도 구석구석 더 걸어보고 싶은 마음에 숙소에서 내려다보였던 성 베드로 수도원을 찾아갔다. 성 베드로 수도원은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사용하고 있다. 주요 성당 및 광장, 골목길은 사람들이 바글대었는데, 두 블록 골목쯤 아래로 내려오니 사람이 없고 너무나 한산했다. 길도 잘 모르면서 성당의 종탑만 보고 찾아간 성당에는 아무도 없이 방 짝과 나 둘뿐이었다.
성 베드로 수도원
성당 내부는 수도자들의 청빈한 삶을 보여주듯 아무런 장식 하나 없이 너무나 검소하고 소박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 아니어서 조용히 머물기에는 좋은 곳이었다. 조용한 성당에 앉아 있다 보니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아씨시가 평화의 도시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런 고요함 속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전을 찾는 이들이 너무 없다는 생각에 하느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는데, 잠시 후 이은우 마태오 형제님 부부가 순례를 와서 무척 반가웠다. 텅 빈 성당에 한동안 머물며 지금까지 나의 삶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서 나머지 삶의 여정도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며 넷째 날 순례를 마쳤다.
수도원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