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비우고 내려놓기
“오메! 참말로 땅을 그냥 준다고요?”
아담한 장성성당 바로 곁에는 어울리지 않게 큰 종탑이 서 있었다. 하지만 속 빈 강정처럼 그 안에는 종이 없었다. 더욱이 한국 최초의 콘크리트 성전 안에는 하느님을 찬송할 풍금조차 없었다.
새 성전 짓기에도 빠듯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중국 상하이에 종을 주문하는 한편, 서울에 가서 풍금을 사왔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심금을 울리는 풍금 소리는 여운이 풍부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거룩함이 솟아올랐다.
“그 양반 천주교 신자가 됐대. 알짜배기 땅까지 팔아서 성당 지으라고 줘버렸대.”
내가 가톨릭에 입교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목포와 장흥 일대의 지식인들과 유지들의 일대 관심사가 됐다. 명실공히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인텔리 아니었던가. 일거수일투족이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는 건 당연했다.
성탄절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잘 알고 지내던 외인 교사들에게 말했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일세. 최초의 미사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었지. 그러니까 말뜻 그대로 크리스마스를 경축하는 데는 가톨릭 교회뿐 아닌가? 이번 크리스마스 때 우리 성당에 와서 보게.”
아뿔싸! 성탄 자정 미사에 술에 얼큰하게 취한 교사들이 정말 왔다. 그렇게 추운 날, 술 마시다 말고 미사에 올 생각을 했다니……. 때마침 나는 교우들이 많아 성당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곤 반가워하며 큰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렇게 사람이 많아서야 어디 미사 구경이나 하겠나?”
나는 급히 그들을 성당 옆으로 이끌었다. 옆문으로 들어가 그들을 제대 바로 앞에 앉게 했다. 우리 일행의 낌새를 챈 본당 신부의 얼굴에 환한 빛이 감돌았다. 나 역시 선교의 기쁨을 한껏 누렸다. 다음날 지청구를 사방에서 들었지만 말이다.
“술주정뱅이들을 미사에 끌고 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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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 북교동성당. |
하지만 나로 인해 장성 일대가 가톨릭에 관심을 가졌던 건 사실이었다. 장성으로 이사한 이듬해에 79명이, 그 다음 해에도 42명이 세례를 받았다. 장성성당의 교세가 쭉쭉 뻗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외조카딸 영길이가 헐떡이며 달려왔다.
“아저씨! 큰일 났어요. 제 동생이 다 죽어가요.”
나는 일본인 의사를 데리고 단숨에 달려갔다. 이질이었다. 약을 지어 먹이자 한고비를 넘긴 듯했다. 그래도 다급한 상황이라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만에 하나 순탁이가 죽게 되면 좋은 곳에 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자.”
외사촌인 오재복과 식구들이 모두 숙연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대세를 줬다. 다행히 외조카는 며칠 뒤 건강하게 일어났다. 그 일을 계기로 외사촌 식구가 모두 그해 성탄절에 세례를 받았다.
순탁이는 나중에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 누나인 영길이는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해 수녀가 됐다. 우리 집 뜰에서 뛰놀던 김종남 로마노가 사제가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한편 졸지에 남편을 잃은 큰형수도 나와 뜻을 같이했다. 26살에 청상과부가 돼 어린 남매를 키우던 그녀 역시 산정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큰형의 빈자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웠던 것이다.
급기야 자신이 살던 좋은 집을 교회에 봉헌해 그 자리에 북교동성당이 들어섰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던 내 마음이 주위 사람들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고 그 무엇이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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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장성성당 마당에 세워진 김익진 기념비. |
나는 장성에 전통 차밭을 일구어 일본과 중국처럼 농업을 개량하고자 했다. 그리고 농업학교를 세워 기술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싶었다. 그 뒤 수도회를 초대해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 사업을 맡기고자 했다.
자그마한 하느님 나라를 일구고자 한 셈이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선 장성군 동화면 동호리 일대의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이만여 평의 야산과 농지를 사들였다.
토지를 정리하고, 차밭을 조성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대동아전쟁이 터진 것이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일본은 더욱 악랄해져 갔다. 탄피를 만들기 위해 집집마다 놋그릇과 놋수저를 강탈해갔다. 장성 성당의 종마저 떼어가 버렸다.
내 꿈의 터전 역시 고스란히 날아가 버렸다.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논밭을 마구잡이로 징발했다.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땅을 빼앗긴 건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하지만 토지 징발 과정에서 총독부의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인들에 대한 분노는 참을 수 없었다.
일본에 대한 간사한 충성보다는 나에 대한 비열한 배신이 더 충격이었다. 그간의 내 호의와 자비를 그렇게 잔인하게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장성에 터를 잡고 신심 깊은 교인으로 살고자 했던 지난 몇 년이 허망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경찰은 1945년 초에 나를 아무 이유 없이 장성경찰서에 가뒀다. 일본에 유학한 지식인임을 잘 알고 있던 그들이었다. 그런 내가 땅을 빼앗긴 울분 때문에 그들에게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게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유학을 하고 온 나를 요시찰 인물로 주목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 나의 홍군입대 경력을 그들에게 귀띔해 주었으리라는 짐작도 갔다.
“대한독립 만세!”
마침내 일본이 손을 들었다. 투옥된 지 6개월 만에 해방이 됐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은 잠시였다. 미군은 남쪽에, 소련군은 북쪽에 주둔하면서 분단이 시작됐다. 정치인과 정부 관리들이 나를 찾아와 미군정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미8군 정보처의 고문과 미군정의 자문을 맡아달라는 청이었다. 하긴 일본과 중국을 환히 알고, 일본어와 중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 드물던 시절 아니었던가. 매일 미군 지프차가 집으로 와서 나를 데려갔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댔다.
“금방 고관대작이 되겠네.”
“몇 년 안에 이 장성 땅을 전부 사고 말 거야.”
부러움 반 시샘 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일은 오래 하지 않았다.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보는 게 가슴 아팠다.
게다가 맨발의 성자를 따르고자 한 내게 재물과 지위는 걸맞지 않았다. 나는 미련 없이 손을 훌훌 털고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찰서 감옥에서 한 결심을 실행에 옮길 때라 생각했다. 한때나마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부르짖던 사람이 지주로 산다는 게 늘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1945년 말 총 농가 206만 5,477호 가운데 자립농가는 28만 6,824호로 13.9%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자작을 겸한 소작농이거나 순소작농이었다.
묵상 중에 내 땅을 모두 소작농민들에게 나눠주기로 작정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비우고 내려놓았던 것처럼…. 성경 말씀이 결정적이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든 이들에게 모든 걸 내주고 싶었다. 장흥과 목포 일대의 소작농민들을 한 사람씩 불렀다. 1948년 정월 대보름 무렵이었다.
“형제여, 날 용서하시오. 지주 행세하며 토지세 받던 어제의 내가 아니오. 당신이 소작하던 그 논밭은 이제 당신 겁니다.”
일 년 뒤인 1949년 6월, 정부의 유상 농지개혁법이 공포되었다. 나는 그 전에 무상으로 농지 개혁을 한 셈이었다. 소유권 양도 문서를 건네받은 농민들의 반응은 실로 다양했다.
의심의 눈초리로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기만 하던 이, 기쁨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엎드려 절하던 이, 하염없이 흐느끼며 감사의 말을 쉬지 않고 하던 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행복이 그럴까 싶었다.
나 역시 온전히 비움으로써 모든 짐을 내려놓았다. 내게도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아버지! 위민(爲民)과 청렴(淸廉)을 이제야 실천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