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영리 수정 제안의 문제점
얼마 전 뉴스엔조이 홈페이지에서 “4영리 수정에 대한 제안”이라는 글을 읽게 되었는데, 그 주장을 하게 된 기자의 마음을 그 기사를 읽는 동안 일부나마 필자도 읽을 수 있었다. 사실 4영리라는 소책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소개하는) 데 유용한 도구로 사용된 것만은 틀림이 없다.(예수님에 대한 소개와 구령은 차이가 있다.) 이 전도를 위한 소책자는 특히 한국 대학생들에게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시 여러 경로를 통해서 고발해 왔듯이 그 전도지에는 구원에 필요한 핵심이 빠져 있는 실정이라 온전한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지막 네 번째 원리에서 영접하는 단계가 있는데, 정상적인 복음을 전했다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을 촉구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록 거기에서 인용하는 성구(계 3:20)는 적절한 구절이 아닐지라도 피전도자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다면 전도자는 피전도자에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받아드렸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구원도 믿음도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구원이 하나님께만 속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받는 방법을 성경을 통해서 알면서도 피전도자에게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도 요한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고 성경의 기록 목적을 밝히고 있다.『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씀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며, 또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도록 하려 함이라』(요일 5:13). 그리고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분을 통하여 너희에게 죄들의 사함이 선포되었으며』(행 13:38). 물론 요한이나 바울은 사도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부분이다. 이런 증거 구절들을 볼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을 인용하여 복음을 전하고 피전도자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했다면 당연히 요한복음 1:12 말씀과 로마서 10:9,10 말씀에 따라서 구원을 선포할 수 있다. 성경을 인용하는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월권을 행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 4영리 수정에 대한 제안을 했던 기자는 4영리 책자에 나타난 많은 잘못된 부분을 바르게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중요한 “영접”에 관한 부분에서 찬물을 끼얹는 주장을 하고야 말았는데, 따라서 영접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짚어보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관해서, 즉 하나님께서 의로 여겨주신 점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은 구원받았으니 곧바로 헌신과 함께 의로워져야만 하거나 구원받은 증거로 행위가 드러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헌신을 하거나 육신의 삶이 온전히 의로운 사람은 결코 없다. 모두 다 구원받은 죄인들일 뿐이다. 죄인은 의롭지 못하다. 다만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의 은혜로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뿐이다.『행함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사람의 복에 관하여 다윗도 말하였으니』(롬 4:6).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브라함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기 훨씬 이전 창세기 15장에서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더라』(창 15: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중에 의로 여겨진 사람의 행동으로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들로 선한 간증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늘 넘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자신의 죄를 자백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풀이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주님의 영으로 충만하기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주님의 영으로 충만해서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사람은 이 땅에 없음을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의인은 땅 위에 한 명도 없느니라』(전 7:20). 자신은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기 때문에 그 결과 자신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고 산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요,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방법이셨다.『행함이 없어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롬 4:5). 그런데도 오늘날 경건함을 외치는 영적 경건주의자들이 외치는 것은 복음을 전한 후 영접이라는 도식화된 방법을 통해서 그들을 억지로 또는 싸구려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 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는데, 그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자마자 순식간에 헌신하고 변화될 수 있단 말인가?
지난날 영적 거성들이 전한 단순한 복음을 듣고 청중들은 믿고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막 집회에서 또는 옥외 집회에서 복음을 증거했고 그 복음을 들은 그들이 구원받은 후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지금까지 그 역사가 이어져왔는데, 그렇다면 모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헛된 일을 했다는 것인가? 예루살렘 교회에 모여든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고 자신들이 구세주를 죽였음을 알았으며 회개와 더불어 주님을 영접하여 그 자리에서(문맥적으로 보면 그날 바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자 그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들은 침례를 받더라. 그리하여 그 날에 약 삼천 명의 사람이 더 늘었더라』(행 2:41) (물론 이 상황은 교리적으로 과도기적인 상황이었는데 그들은 아직 거룩하거나 현재의 그리스도인들,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죄들을 사함 받은 것으로 인하여 침례에 응했던 것이다.) 그들은 단지 갓 태어난 어린아이에 불과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이제 그들은 태어났으니 자라나야 할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었는데, 즉 영적 양식을 먹고 점진적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태어남이 있어야 자랄 수 있듯이 결코 점진적인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태어나 자랄 때도 각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것처럼 영적인 출생도 이와 같이 자라가야 하는 과정이 있고 그 차이 역시도 천차만별임은 의심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아직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그는 구원받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강도에게 “너는 그렇게 해서는 구원 받을 수 없어 어떻게 너와 같은 흉악한 강도가 예수님 만나서 몇 마디 나눴다고 구원받을 수 있어? 너는 지금 죽어가면서 헌신할 기회도 없는데 무슨 열매를 맺을 수 있겠어? 구원이 그렇게 싸구려인줄 알아?” 하면서 그의 구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물론 그 강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지지 않은 과도기적 상황에서 구원받은 것은 분명하다.) 성경적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죄인의 죽었던 영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일어난다. 그렇다면 다음 순서는 말씀 안에서 강성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갓 태어남이 있고 그 후로 조금씩 성장단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갓 태어난 아기에게 태어난 어떤 증거들을 행위를 통해 보여 달라고 한다면 그 무엇을 보여 줄 수 있겠는가? 그는 한낮 갓 구원받은 죄인일 뿐이다. 이처럼 순서를 무시하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인 영접과 구원에 관한 확신을 심어주는 말, 곧 “당신이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고 고백했다면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침례에 순종하시면 됩니다.”라는 말을 빌립처럼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빌립이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합당하니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나이다.”라고 하더라』(행 8:37).
그런데도 “당신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우기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들의 주장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으니 결코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말을 피전도자에게 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자신들은 왜 자신을 소개할 때 자신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가? 그리스도인이란 거듭난 사람,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말하는데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고 남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오히려 자신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피 전도자에게는 아직 구원은 하나님께 속했으니 말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이 영적 교만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무엇이든지 억지로 주장하게 되면 앞뒤가 맞지 않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구령현장에서 행해지는 영접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 비난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로 마귀에게 이용당하는 방해 공작이며 경건을 가장한 치명적인 누룩이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우롱당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갈 6:7).
박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