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9일, 제18대 대선이 박근혜 후보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먼저, 박근혜 당선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문재인 낙선자에게는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양 후보 진영 모두 열심히 뛰었고, 우리 국민이 유권자로서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결정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결과이므로 '선과 악'이나 '옳음과 그름'의 판단 대상이 될 수 없다.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혹자는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데 대해 크게 상심한 나머지 장차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마치 큰 변고라도 생길 듯 걱정한다. 다른 이들은 우리나라의 시대정신으로 부상한 복지국가의 길에 무슨 결정적인 걸림돌이라도 생긴 것처럼 우려한다.
건강한 중도 보수 정치세력도 복지국가 건설의 중요한 파트너
하지만 나는 그렇게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가 정치적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는 것을 허용할 만큼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토대가 그렇게 허약하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몇 년에 걸쳐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으로 부상하였던 복지국가의 건설과 완성은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건강한 보수 정치세력과 건강한 진보 정치세력 모두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보수 정치세력의 집권을 무조건적으로 적대시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이들이 집권 여당으로서 얼마나 복지국가에 친화적인 건강한 중도 보수 정치세력으로 발전해 나가느냐이다. 이 부분에 주목하여 객관적으로 비판하고 견인하는 게 옳다.
물론 잘 준비된 '건강한 진보 정치세력'이 집권하여 역동적 복지국가의 건설 과정을 주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건강하고 활기차고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제대로 된' 중도 진보 성향의 복지국가 정치세력을 준비하지 못하였다. 민주통합당이 국민적 신망을 받는 '제대로 된' 복지국가 정치세력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의 패배는 그것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일 뿐이다. 민주통합당 중심의 대선은 애초부터 이기기 어려웠던 한판의 도박이었고, 결국 전례 없던 범 진보 진영의 총 단합에 불구하고 민심을 얻는 데 실패했다.
'좌 클릭'에 성공한 박근혜의 집권과 중도 보수 정치세력의 미래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2007년 7월 '복지국가 혁명'을 출간하며 출범식을 했을 당시만 해도, 복지국가 담론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부 진보 진영은 복지국가 담론을 '개량주의'라며 비아냥거렸고, 보수 진영은 이를 경쟁만능의 시장주의 시대에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그런데 2010년 3월 15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주최한 '복지국가 국민제안대회'에서 주요 정치인들이 동참하여 제안한 역동적 복지국가의 담론과 정책은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후 6.2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보편적 복지'를 포함한 복지국가 담론은 범야권의 정치담론으로 자리를 잡아갔고, 우리의 시대정신으로 급속하게 부상하였다.
나는 특히 이 과정에서 드러난 당시 박근혜 의원과 여당의 개혁파가 보여준 '좌 클릭'의 정치에 주목하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박근혜 의원과 여당 개혁파의 '좌 클릭' 정치 행보는 가히 대한민국의 정치혁명에 비견할 만하다. 이건 인정해야 한다. 박근혜 후보의 이번 대선 공약을 지난 대선의 이명박 후보 공약과 비교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엄청나게 다르다. 작은 정부, 민영화, 규제완화, 감세, 비즈니스 프렌들리 등의 강고한 시장만능주의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고, 집권 후 그대로 실천했던 이명박 세력에 비하면, 박근혜 후보의 이번 공약은 지나칠 정도로 '좌 클릭'한 것이다. 보수 세력이 그만큼 '건강'해졌다는 징표이다.
만약, 박근혜 의원의 합리적 보수 정치세력이 당 내외 신자유주의 보수 세력의 반대에 막혀 복지국가를 향한 '좌 클릭' 정치를 추진하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환골탈태하지 못했더라면,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승리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이번 박근혜 후보의 대선 승리의 원천은 정치인 박근혜와 개혁적 중도 보수 정치세력이 보여준 과감한 '좌 클릭', 즉 중도 보수의 복지국가 정치 노선이었다.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세력은 이명박 대통령의 신자유주의와 선을 그었고, '작은 정부' 노선을 버렸다. 민영화는 아예 입에 담지도 않았고, 오히려 공공성의 강화와 사실상의 증세를 내놓았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우리가 본 박근혜 후보는 5년 전에 신자유주의를 놓고 서로 적임자라며 이명박 후보와 경쟁을 벌였던 과거의 박근혜 후보가 아니었다. 이것은 복지국가로 가는 길에서 '긍정적인 신호'이다. 나는 박근혜 정부와 그의 중도 보수 정치세력이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합리적 정치세력으로 거듭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집권 과정에서 이러한 면모를 충분히 보여주고 민심을 얻는다면, 합리적 보수 정치세력이 5년 후 재집권할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나는 복지국가의 건설과 발전, 보통사람들의 행복 증진이라는 측면에서 박근혜 정부가 성공하길 바란다. 국민은 우리의 시대정신인 복지국가와 박근혜 정부 간의 간극이 얼마나 벌어지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며 비판할 것이다.
범야권의 복지국가 정당으로의 환골탈태가 답이다
2010년 10.3 전당대회 이후, 민주당이 보여준 변화 노력도 결코 무시 못 할 큰 성과를 남겼다. 특히 민주당이 당헌에 '보편적 복지'를 명시하고, 분명하게 복지국가 노선을 천명한 것은 과거의 보수야당 민주당을 벗어나는 본격적인 '좌 클릭' 행보였다. 이는 그동안의 중도 보수 야당이 중도 진보 야당으로 성격을 바꾸는 것으로, 이로 인해 마침내 우리나라의 정당구조는 박근혜 의원과 여당의 개혁파가 추진하는 중도 보수 정치세력과 민주당 중심의 중도 진보 정치세력으로 분립하여 이념과 정책으로 상호 대결하는 바람직한 정당정치 질서로 나아갈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정당정치가 잘 발전해 나간다면,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합의 정치'에 기반을 둔 유럽식의 복지국가 정당정치 구조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러한 국민적 기대와 열망을 저버렸다. 한나라당의 개혁파가 보여주었던 정치개혁 행보에 비해 그 폭이 협소하였고, 그만큼 절박하지도 못하였다. 이건 지난 4.11 총선 당시, 한나라당이 후신인 새누리당이 민주당의 후신인 민주통합당을 압도적으로 이긴 것으로 잘 설명된다. 이명박 정부 심판론이 비등하였던 당시의 정치 정세에서 야당의 승리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건만, 민주통합당은 크게 패배하였다. 당시 민주통합당의 당권을 접수한 '친노' 정치세력은 돌아가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뜻과 달리 "깨어 있는" 시민들과 함께 하는 복지국가 정당정치가 아니라 그들만의 패권적 정치행태를 고집하였고, 이는 곧 총선의 대패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총선 이후 민심은 민주통합당을 떠나고 있었다. 대대적인 혁신이 요구되었다. 그럼에도 '친노' 정치세력은 권력 야합을 통해 다시 당권을 거머쥐는 데만 골몰했다. 이 모든 것이 '친노' 대선 후보를 내기 위함이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친노' 정치세력은 이 모든 정치과정에서 성공했다. 총선 이전 신생 민주통합당의 당권 장악과 '친노' 중심의 계파 공천, 총선 이후의 자숙을 대신한 '권력 담합'으로 당권 재 장악, 그리고 '친노' 대선 후보의 당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그들의 뜻대로 했다. 거대 정당의 힘으로 안철수 전 후보도 끝내 사퇴하도록 했다. 그런데 대선에서 졌다. 이게 바로 민심이다. 범 보수와 범 진보의 진영 대결에서 안철수 세력뿐만 아니라 진보 세력이 총 단결했고, 압도적으로 밀었다. 그런데도 졌다.
민주통합당 후보가 왜 졌는지, 진지하게 성찰하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민주통합당과 우리사회의 일부에서는 아직은 "패배해서 아프니까, 힐링이 필요하니까" 지금은 단합할 때라고 말한다. 나는 이래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상처가 있으면 치료해야 한다. 상처를 숨겨두면 더 곪을 뿐이다. 정확하게 진단하고 곪은 부위를 도려내야 한다. 아프더라도 참아야 한다. 이게 국민의 뜻이자, 보편적 복지국가를 염원하는 민주 진보적 국민들의 요구이다. 대선 패배 후, 문재인 전 후보가 "이번 대선은 민주당으로는 이기기 어려웠던 선거"였다고 말했다. 부끄럽지만, 이건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을 듣고 화가 났다.
4.11 총선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민주통합당의 지지율은 여당을 압도했다. 누구라도 당시의 민주통합당이 당연히 총선에서 이길 것이라고 여겼다. 2012년 초만 하더라도 총선과 대선 승리를 꿈꾸었던 민주통합당을 망친 세력은 누구인가? 그래서 이번 대선을 "민주당으로는 이기기 어려운" 선거가 될 정도로 민주당을 형평 없이 망쳐버린 정치세력은 누구인가? 이 부분에 대한 진단과 수술이 필요하다. 개인적 차원에서 누굴 탓하자는 게 아니다. 우리 정치가 복지국가의 대의에 따라 온 국민과 '함께 사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뜻은 "깨어 있는" 시민과 함께 유러피안 드림을 쫓는 복지국가의 길임에 틀림없다. 민주통합당을 중도 진보의 복지국가 정당으로 환골탈태하게끔 하는 것이 "깨어 있는" 시민들과 그를 사랑했던 지지자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이다. 이 일에는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역동적 복지국가 진영의 과제와 역할
노무현 대통령이 "깨어 있는" 시민을 강조했던 이유는 민주주의는 국민이 원하는 만큼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복지국가를 원하더라도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설사, 국민의 상당수가 복지국가에 대한 선호를 표시하더라도 기꺼이 세금을 내겠다는 국민이 광범위하게 존재하지 않는 한, 복지국가의 건설은 불가능하다. 이번 대선에서 보았듯이, 정치적 민주주의 하에서 선택은 유권자인 국민이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국민의 이기적 심성을 추종하는 대중추수주의 정치를 지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반대로, 소수의 엘리트가 국민을 계몽하겠다며 정치적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일은 더더욱 안 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신자유주의 양극화와 민생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담론과 정책의 영역이다. 나는 지난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단법인 싱크탱크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통해 이 일을 추진해왔다. 역동적 복지국가론(이에 대해서는 나의 신간 '복지국가가 내게 좋은 19가지'를 참조)은 이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나온 이론적 성과물이다. 회원들이 내는 얼마 되지 않는 회비로 운영되는 소규모 싱크탱크로는 역부족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신자유주의 선진화 담론과 투쟁해서 당당하게 이겼고, 보편주의 원리의 복지국가 담론을 제기하여 경제와 복지가 대립적 이분법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임을 공론화하여 박근혜 후보조차 이 논리를 수용하도록 대세를 만들었다. 앞으로 갈 길이 더 멀다. 우리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복지국가의 담론과 정책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둘째, 복지국가의 담론과 정책을 온 국민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대선에서 여야 정당의 대선 후보들은 모두 복지국가를 말하였지만, 그 방향과 내용은 현저히 달랐다. 공정한 경제 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경제민주화 정책의 심화와 발전의 정도가 달랐고, 보편적 복지를 둘러싼 입장과 복지정책의 규모도 달랐다. 나는 이것을 여야 정치권, 보수와 진보 정당 간의 복지국가를 둘러싼 건강한 경쟁과 발전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경합하면서 발전하는 것이 복지국가 '합의 정치'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정작 문제로 삼는 것은 여야 정치권이 내세운 복지국가의 담론과 정책을 이해하는 우리 국민의 수준과 태도이다.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 이건 장차 우리나라 복지국가 운동의 큰 과제이다.
셋째, 대한민국의 낡은 정당정치 질서를 복지국가 정당정치로 재편해야 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먼저 박근혜 정부의 여당이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건강한 중도 보수 정치세력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래서 명실상부하게 복지국가 '합의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해 주어야 한다. 다음으로 지금의 민주통합당이 보편주의 원칙의 역동적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합리적 중도 진보 정당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새 정치를 가능하게끔 하는 선거제도의 개편이 요구된다. 각 정당들이 자신이 득표한 만큼의 의석을 배분받는 방식의 비례성 강한 선거제도를 도입하여 다당제의 숙의민주주의를 제도화해야 한다.
나는 이 과정에서 민주통합당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와 여당은 이들을 올바르게 견인하는 야당의 힘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또, 시민사회세력과 연대한 건강한 야당의 '국민적 담론 형성' 능력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과거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의 '좌 클릭'은 보수 정치세력이 스스로 원했던 게 아니었다. 시대정신의 변화에 강제된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우리나라가 보편주의 원칙의 역동적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시민사회와 함께 '건강한 중도 진보 정치세력'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지금 민주통합당의 환골탈태를 위한 노력과 범야권의 향배를 주목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