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 경동시장에서 만나요/전성훈
경동시장하면 떠오는 한 편의 영화, 60년대 말 더스틴 호프만과 케서린 로스 주연의 “졸업”이다. 영화 속에 삽입된 ‘사이먼 앤 가펑클’의 주옥같은 아름다운 노래들 중 ‘Scarborough Fair’가 기억난다. 먼 옛날 스코틀랜드 어느 한적한 마을 시장 주변의 과실수와 그 열매를 아련한 추억 속으로 불러내어 눈물샘을 자극하는 정경을 읊은 반전가요다. 어린 시절 소꿉장난 같은 냄새가 나는 ‘스카보르 시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향기가 나는 곳, 사람들이 부딪치면서 주고받는 땀 냄새와 생선 비린내 그리고 마늘과 양파 냄새가 뒤범벅 된 곳, 딱히 뭐라고 꼭 집어 형언할 수 없는 먹먹하고 절절한 사람 냄새가 질퍽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정감 있는 곳이 바로 제기동 경동시장이다. 경동시장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구 '약령시장'처럼 각종 한약재의 원료를 팔고 사는 곳이다. 수많은 약재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약제를 손님이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으로 약재를 쪄주거나 다려주는 약재소가 널려 있다. 경동시장에서 한약 재료만 파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재래시장처럼 각종 나물, 채소, 수많은 과일, 생선 그리고 “별별” 고기를 다 판다. 노점상 아낙네와 할머니들, 점포를 가지고 있거나 점포를 얻어 장사하는 중년 아저씨와 아주머니까지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생활터전이자 활기 넘치는 웃음바다가 바로 경동시장이다. 경동시장을 찾는 주 고객은 젊은이가 아니다. 젊은이들은 거의 찾기 어렵다. 대부분 50대 이상의 중년이거나 연세가 상당히 지긋하신 노인들뿐이다. 젊은 사람들이 찾기에는 상품의 종류와 판매방식 그리고 가게 모습들이 그들의 코드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재래시장을 젊은이들 취향에 맞출 필요는 없다. 나이든 세대가 따뜻한 인정을 느끼고 후덕한 인심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그들만의 장터도 있어야 한다.
어머니께서는 생전에 이곳 경동시장 어느 약제소의 단골이셨다. 그래서 당신께서 필요하실 때마다 그 곳을 이용하셨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경동시장을 자주 찾으신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배낭을 등에 짊어지시고 상계동 백병원 앞 버스 정류장까지 먼 거리를 걸어가셨다. 그리고 경동 시장행 버스를 타시고 필요한 야채와 과일을 사 오셨다. 더운 여름철이나 한 겨울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늘 경동시장을 찾으셨다. 나 역시 수차례 경동시장을 다녔다. 30대의 한창 팔팔한 젊은 시절, 가을철 추어탕 재료인 미꾸라지를 사러 갔고, 복날을 앞 둔 여름철에 개고기를 사다가 집에서 보신탕을 직접 끓여먹으며 여름을 나기도 하였다.
그 이후 20년이 훨씬 넘도록 경동시장을 잊고 지내다가 작년부터 경동시장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물건을 사러 가는 것이 아니라 지하 음식점 순례에 나선다. 지하 음식점은 일부러 음식을 먹으려고 찾지 않는 한 그냥 지나치게 된다. 이곳 음식점은 깨끗하고 매끄럽게 치장한 채 손님을 맞이하는 백화점이나 대규모 쇼핑몰의 음식점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조금은 투박하고 지하실 특유의 상큼하지 못한 퀴퀴한 냄새가 간간히 난다. 가까이 지내는 성당 교우와 자주 찾는 곳은 빈대떡과 손칼국수를 정갈하게 내 놓는 집이다. 홍두깨로 밀어놓은 굵은 칼국수에 호박을 숭숭 썰어 넣은 뜨거운 멸치국물 칼국수는 기막히게 맛있다. 풍채 좋은 펑퍼짐한 모습의 마음씨 고운 주인아주머니는 손이 커서 칼국수를 큰 대접에 가득 담아주고 덤으로 다른 그릇에 또 퍼준다. 칼국수를 내놓기 전에 입맛을 돋우라고 깡조밥을 건네며 막된장에 비벼 한 숟가락 크게 뜨라는 말씀을 잊지 않는다. 주인아주머니에게 부탁하면 다른 음식점에서 파는 음식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홍어회, 생선회는 물론 삼겹살, 소고기, 생선구이까지 지하 음식점에서 파는 것은 어느 것이나 다 맛 볼 수 있다. 가격도 저렴하고 맛이 좋다. 안주가 마련되면 주인아낙과 술 한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시간은 저만치 달아난다. 술기운으로 불콰해진 얼굴을 느끼면 슬슬 주머니를 뒤져서 값을 치루고 가게를 나선다.
경동시장에서 술 한 잔 거나하게 걸치고 길을 천천히 걸으면, 우리나라 단편문학의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이효석 선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주인공인 ‘허 생원’과 ‘동이’가 떠오른다. 고달프고 힘겹기 그지없는 삶에 찌든 장돌뱅이 ‘허 생원’, 어느 날 허름한 장터 숙박 집에서 어쩌다 하룻밤 풋사랑을 나눈다. 하룻밤 인연은 축복 같지 않은 축복의 새 생명을 잉태한다. 그러나 생명을 나누어 준 자와 받은 자는 서로 알지 못한 채 부딪치면서 막장드라마 같은 인생의 바다를 헤치고 나아간다. 인간은 서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며 또한 숙명적으로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로움이 뼈에 사무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꿈속에서라도 온갖 사람 냄새가 진동하는 경동시장으로 달려가고 싶다. 세월의 무게만큼 아주 오래전에 그 목소리와 형체를 잊어버린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2015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