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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을지로) 독립운동 유적지 찾기(2)
◇ 시대일보 사옥 터 : 중구 명동 2가 55-17번지(명동역 6번 출구→400m)
- 3·1운동 후에 발간한 항일 신문 사옥 터
일제강점기에 최남선(崔南善)과 진학문(秦學文)이 주간 잡지 『동명』의 후신으로 1924년 3월 31일에 창간한 「시대일보」의 사옥이 중구 명동에 있었다. 민족의 단합과 협동을 표방한 이 신문은, 1면을 사회기사로 채우는 등 이채로운 편집을 시도해 눈길을 끌었던 서울의 항일 신문 사옥 터다.
「시대일보」는 「동아일보」·「조선일보」와 더불어 3대 민간지의 하나였으나, 재정난으로 휴간과 속간을 거듭하는 등 운영이 순탄치 못했다.
이 신문은 한때 보천교(普天敎)에 판권을 넘겼다가 안팎의 거센 비판 여론에 밀려 휴간에 들어갔고, 1925년 4월 홍명희(洪命熹)를 사장으로 맞아 면모를 일신하려 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한 차례 더 진용이 바뀐 뒤인 1926년 9월에 폐간되었다.
「시대일보」는 1926년 11월에 판권을 이상협에게 인계하고, 「중외일보」로 바뀌었다. 「중외일보」로 바뀌면서 「동아일보」의 옛 사옥 터(서울 종로구 북촌로5길, 40길 부근)를 사용했다.
◇ 이재명(李在明) 의거 터 : 중구 명동 2가 1번지(명동성당 정문 앞)
- 1909년 12월, 명동성당에서 나오는 매국노 이완용을 찔러 사형을 당한 이재명 의사
명동성당 정문 앞은 이재명(李在明) 의사가 1909년 12월 22일, 종현 천주교회당(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을 찔러 복부와 어깨에 중상을 입힌 의거를 한 곳이다.
이재명(1886~1910)은 평양 일신학교를 졸업한 뒤 1904년 미국 노동이민 모집에 응모해 하와이에서 농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1906년 다시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해 활동하던 그는 1907년 7월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 침략 원흉과 매국노를 처단할 것을 결심한 이재명은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 순시에 동행하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그만두고, 항일투쟁을 위해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그해 10월 26일 안중근의 이토도 처단 소식에 고무되어 다시 귀국한 그는 평양에서 동지들과 친일 매국노 이완용·송병준·이용구 등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상경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1909년 12월 22일, 종현 천주교회당(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군밤 장수로 가장하여 성당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찔러 복부와 어깨에 중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일제 경찰에 체포된 이재명은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9월 13일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 집터 : 중구 을지로 2가 1,164번지
- 조선말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집안인 이회영·이시영이 살던 곳
독립운동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 1867~1932)과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 1869~1953) 형제는 이조판서 이유승(李裕承)의 4남과 6남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이다.
현재 명동성당 정문 앞의 서울 YWCA에서 향린교회에 이르는 구간은 이들 형제의 저택이 있었던 곳이다.. 1910년에 경술국치가 되자 건영·석영·철영·호영 등 6 형제 전원과 일가족 50여 명은 전 재산 40만 원(현 시세 약 600억 원으로 추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망명을 떠난 전형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지(noblesse oblige)’ 집안이다. 우당 이회영·성재 이시영의 집안은 백사 이항복(李恒福)의 후손으로, 6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이회영은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개소하였고, 1912년에는 ‘합니하’로 이전하여 본격적인 무관학교 교육을 시작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에 폐교할 때까지 독립군 간부 3,500여 명을 양성하는 성과를 이루고, 독립전쟁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복군을 창설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고종황제를 설득하여 망명 계획을 추진하였다.
상해 임시정부가 구성되자 우당 이회영은 의정위원으로 참여한다. 이후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운동과 ‘의열단’ 조직을 지원함과 동시에 ‘항일 구국연맹’을 결성하여 흑색공포단을 산하에 두고, 의혈투쟁에 매진하였다.
1932년 우당 이회영은 중국의 항일부대와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하도록 현지 지도 차 상하이에서 배로 잠입하던 중 대련에서 체포되어 뤼순 감옥으로 이송, 모진 고문과 굶주림으로 66세인 1932년 11월 17일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을 받았다.
이러한 이회영 선생의 공적을 기려 기념사업회에서 2014년 2월에 '이회영 이시영 6형제 집터' 표석이 위치한 서울YWCA 앞에 흉상(胸像)을 건립하였다.
성재 이시영은 16세에 관직에 나아가 10여 년간 형조좌랑·홍문관 교리·승정원 부 승지·궁내부 수석 참의·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되었고, 근대학교 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 뒤 1907년 중추원 칙임의관, 1908년 한성재판소장·법부 만사 국장·고등법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경술국치를 맞자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여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에 따라 6형제의 가재(家財)를 재원으로 삼아, 1910년도 말에 서간도(西間島)로 가족을 거느리고 망명하였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로 상해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한 이후에는 국무위원·재무부장·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며, 광복 직전까지 상해임시정부의 핵심적 소임은 수행되었다.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 나석주(羅錫疇) 의사 의거 터 : 중구 을지로 2가 181번지(KEB하나은행 본점)
- 1926년 겨울, 조선의 경제 침탈의 본거지인 동척(東拓)에 들어가 폭탄과 총격을 가한 나석주 의사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은 일제 경제 침탈의 상징으로, 1926년 12월 28일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 의사의 투탄 의거가 있었던 곳이다. 그의 의거는 당시 침체하여 있던 국내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한민족에게 독립의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나석주(1892∼1926)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이 있었던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1915년 북간도 나자구(羅子溝) 독립군 양성학교를 졸업하였다. 3·1운동 때 겸이포에서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후 결사대를 조직해 독립군 자금 모집과 친일 은율군수를 처단하는 등 활동을 펼치다가 1920년 9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나석주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약하다가 한단 군관학교를 거쳐 1923년~1924년까지 중국군 장교로 근무했다. 그 뒤 1926년 톈진[天津]에서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해 한층 적극적인 독립투쟁을 생각하던 중, 1926년 6월 유림 대표 김창숙을 만나 융희황제(순종)의 백일제 망곡(望哭) 날을 기해 조선의 강토와 경제를 착취하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은행·조선식산은행 등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나석주가 중국인으로 가장하여 상해에서 출발한 것은 이해 12월 24일이었다.
1926년 12월 26일 인천항에 도착하여 일본 경찰의 엄중한 경계망을 뚫고,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나석주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동춘잔에서 숙박하고, 12월 28일 오전에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주변을 자세히 사전 탐사하였다.
오후 2시 5분경 중국옷을 입은 그는 먼저 조선식산은행(남대문통 2정목 140-1)에 들어가 대부계 철책 너머로 폭탄 한 개를 던졌으나 불발이었다. 폭탄 불발로 크게 실망한 나석주는 권총을 빼 들고 큰길 건너편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 정문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먼저 일본인 잡지 기자 고목고강(高木告江)에 총격을 가한 뒤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으로 따라오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 횡지광(橫智光)을 향해 2발을 발사하고, 2층의 토지개량부의 기술주임. 오오 머리를 거꾸러뜨린 다음 기술 과장 아야다가 놀라 도망가자, 뒤 쫓아가 사살하였다. 그리고 그 옆의 토지개량과에 폭탄 1개를 투척하였으나 폭탄은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1층으로 내려온 나석주는 같은 구내의 조선철도 주식회사 정문 쪽으로 뛰어 들어가며, 정문을 지키던 일본인 수위 마쯔모도와 그곳에 와 있던 시계점 점원 기무라를 향해 각각 1발씩 발사한 뒤 밖으로 빠져나왔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즉시 황금정 파출소에 신고하여 일본 경찰이 황급히 출동하였으나 나석주는 이미 을지로 거리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멀리 벗어난 나석주는 동쪽으로 달리다가 그를 본 경기도 경찰부 경부과 다하다가 다가오자 그를 사살하였다. 이때 나석주의 뒤에는 4~5명의 일본 경찰이 쫓아오고 있었다. 나석주는 도저히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을지로 2가의 건재 약국 앞에 이르러 전신주에 몸을 피하는 체하다, 쓰러지면서 추격해 오는 경찰에게 2~3발을 발사한 후 자기 가슴에 권총 3발을 쏘아 자결하니 그의 나이 35세였다.
일본 경찰은 나석주를 총독부 병원에 입원시켜 응급치료를 받게 하였는데, 약간 정신이 들자, 일본 경찰이 이름을 묻자 “나석주”라고 대답하고, “김창숙과 밀의하였다.”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일본 경찰은 그에게서 폭탄 두 개, 10연발 권총 1정, 탄환 66발을 그 자리에서 압수하였다.
이 의거가 일어난 후 일제는 모든 언론을 봉쇄하고, 각 관청·은행 등에 경찰을 파견, 잠복시키는 등 초비상 경계령을 내렸다.
1962년에 나석주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99년 10월 29일, 당시 한국외환은행은 「나석주 의사 기념사업회」가 보낸 나석주 의사 동상 건립을 위한 용지 할애 요청을 수용하여 5평 정도의 땅을 제공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1999년 11월 17일, 중구 명동에 있는 한국외환은행본점 후문 앞에서 「나석주 열사 기념사업회」의 서영훈 회장 등 관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운동가 나석주 의사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이 당시 동상을 세운 자리는 KEB하나은행 본점(한국외환은행 본점) 후문 앞 광장으로 5평 정도 공간에 동상과 함께 영문·한글판 기념 비석을 세웠다. KEB하나은행 본점 영업부 출입구 쪽의 나석주 의사 의거 기념 표석도 이 자리로 옮겼다.
◇ 최익환(崔益煥) 숙소 터 : 중구 주교동 125번지(을지로4가역 4번 출구 부근)
- 3·1운동 후에 조선의 독립을 위한 비밀조직인 대동단을 결성한 최익환 숙소
1919년 3월 말 비밀결사 대동단(大同團)을 결성한 최익환과 전협은 그해 4월,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경성부 주교정(舟橋町, 중구 주교동) 최익환의 숙소에서 등사판을 사용하여 「선언서」 약 50매와 「기관 방략(機關方略)」 약 40통, 「 진정서」 약 20통, 「포고」 약 50통을 인쇄하였다.
「선언서」는 대동단의 취지와 목적을 게재하고, 손병희 등 민족 대표 33인의 독립선언에 기초해 끝까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분투할 것을 선언한 문서였다. 「기관 방략」은 대동단 기관의 구성 및 활동 방법을 규정한 문건이었고, 「진정서」는 미국 및 파리강화회의에 일제 한국병합의 불법성을 통박하고 조선 독립의 공인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최익환은 1919년 5월, 경성부 종로5정목 178번지 양제은의 집에서 동지 권태석과 함께 조선인 학생의 독립운동 궐기를 촉구하는 「등교 학생 제군」 약 60통과 선언서와 같은 취지의 글을 기술한 「선언」 약 2천 매 등을 인쇄해 일반에 배포할 계획을 실행하던 중 5월 23일,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당했다.
◇ 훈련원(訓鍊院) 터 : 중구 을지로 5가 40-3(훈련원공원, 국립중앙의료원)
- 1907년 8월 1일, 정미7조약에 따라 훈련원에서 한국군 해산식을 거행
현재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서쪽 일대의 훈련원공원 자리는 조선시대에 무인들의 과거시험 장소이자 무예를 익히고, 병서(兵書)와 전진(戰陣)의 강습을 맡았던 훈련원(訓鍊院) 관아가 있었다.
조선말에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1907년 7월 19일,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7월 24일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실질적으로 장악하였다.
이어서 새로 황제로 등극한 순종을 압박하여 7월 31일, 군대해산 조칙(詔勅)을 내리도록 하였다. 일제는 한국군을 강제로 해산시키기 위해 모든 준비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한국군 해산 장소를 훈련원으로 정했다. 그리고 8월 1일, 훈련원에서 군대 해산식을 강행하였다.
그에 앞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는 군부대신 이병무 이하 각 부대 대대장급을 자신의 관저로 불러 황제의 군대해산 조칙을 전달하고, 오전 10시까지 각대 사졸을, 무장을 해제한 채 맨손으로 훈련원에 집합하도록 지시하였다.
8월 1일 오전 8시, 군대해산에 분개한 시위대대 제1대대 박승환(朴昇煥) 대대장이 자결하자 이를 알게 된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군인들이 남대문과 서소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는 무장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오전 10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무장해제당한 상태로 집결한 한국군 장병들을 중무장한 일본군이 포위한 가운데 군대 해산식을 진행하였다.
서울 시위대의 해산으로 시작된 한국군 해산은 8월 3일, 수원 진위대 해산에서, 9월 3일, 북청진위대 해산에 이르기까지 1개월여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강화와 원주 진위대 장병들이 조직적인 무장봉기에 나서고, 일부 해산 군인들이 의병진에 가담함으로써 의병 투쟁은 일종의 국민 전쟁으로 발전해 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