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극은 입센의 희곡을 토대로 독일 샤우뷔네 베를린 극장의 예술감독인 오스트마이어가 연출한 작품입니다. 입센은 19세기 작가지만 연극의 문제의식과 메세지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유효한 내용이라 갑자기 원작이 궁금해졌습니다.
스토크만 박사는 자신의 마을이 온천개발지구로 지정되어 개발되려 하나 그 온천물이 공장의 폐수로 인해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언론에 공표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오염의 원인을 제공한 공장은 자신의 장인이 운영하는 곳이고, 개발을 추진하는 마을의 시의원이 자신의 친형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스토크만 박사를 압박합니다. 누군가에 매수당한 듯한 언론도 그를 외면합니다. 마을 주민들은 모처럼 갖게 된 개발이익을 챙기지 못할까봐 그를 비판합니다. 정경언론이 유착되어 진실을 숨긴채 스토크만은 그들에게 민중의 적이 되어가고 마침내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합니다. "최고의 적은 침묵하는 다수이다. 침묵하는 다수와 진실을 말하려는 소수, 누가 민중의 적인가?"
이때 갑자기 침묵하는 관객석으로 의견을 묻습니다. 관객을 연극의 주체로 끌어들여 한층 열띤 토론으로 이어가는 연출기법을 사용하는 것이죠. 물론 여기에는 통역이 뒤따릅니다. 이때부터 연극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그전까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던 관객들이 저마다 손을 들고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 같이 토론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사회에서 참 낯설은 광경이라 적잖이 놀랬습니다. 관객들은 현재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옥시 사태나 4대강 이슈 등 환경과 관련된 문제뿐 아니라 정치권의 소극적 태도, 대자본의 탐욕, 언론의 횡포에 대해 비판합니다. 독일 배우들은 연극보다 한국 상황이 더 극적이라고 말해서 다들 한바탕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정의와 진실을 위해 싸우던 스토크만 박사와 그의 부인은 장인이 준 주식을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습니다. 과연 그는 돈 앞에서 자신의 양심을 지킬 수 있을까요? 연극 <민중의 적>은 많은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수는 항상 옳은가? 다수는 소수를 무시해도 좋은가? 누가 다수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가? 누가 우리를 지배하는가?
소신있는 소수가 되어가기 어려운 시대, 침묵하고 있는 다수가 가장 경계해야 할 '민중의 적'은 아닌지...
무겁고 어려운 주제이지만 바클리의 <크레이지>와 데이빗 보위의 <체인지스>의 선율은 가볍고 경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첫댓글 이 연극은 마치 아고라의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토론하는 시민들의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군요. 현재 미국의 대선가도를 봐도 여전히 민주주의는 완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개선하고 진화해야 하는 제도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 중심에 시민의식이 있겠죠. 항상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든 민주주의는 그 명분과 상관없이 정체되거나 후퇴할 가능성이 상존하죠. 그렇기에 이런 연극이나 작품들이 그런 문제의식을 일깨우는 자극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맞는 말씀입니다. 민주주의가 일종의 생활양식이라면 토론과 논쟁은 그것을 실천하는 연습과 습관이 될 수 있겠죠. 이 연극은 대의민주주의가 잘 작동되는 독일에서 만들어졌지만 의외로 남미 등 다른 사회에서도 반응이 좋다고 합니다. 저도 사실 우리나라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 깜짝 놀랬습니다. 그만큼 시민사회가 점점 성숙해지고 있는 거겠지요?
Lg가 보인 멋진 공연을 함께하셨군요. 올 이 창을 처임봤습니다. 멋진글 부탁합니다. ㅎ
네에 기억에 남는 공연이었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