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예술제 창시한 파성 설창수(16)
파성은 개천예술제 초창기에 예산을 어떻게 충당해 나갔을까 궁금해진다.당시는 도라든가 시라든가 하는 데서 지금처럼 예산을 따올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큰 몫을 확보해 놓고 거기에 예산을 탁발로 보태는 예산체제가 될 수 없었던 듯하다.
파성은 예술제 한 두달전부터 전국에 탁발 행보에 나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산 지원이나 상품 지원을 받기 위해 각도의 도백이나 기관장들을 두루 방문하여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고 약간씩의 지원을 얻어온 것으로 보인다. 예술제는 처음에 '영남예술제'라는 이름으로 시작이 되었지만 서제에서 개천제단에 향불을 피워 올리는 제례를 갖추었기 때문에 방문처에 가서 설명하거나 설득하기가 용이했을 것이다.
국내 유일의 광복 기념에다 정부수립 기념을 겸하면서 단군 성조에 올리는 예술 천품의 봉헌의식이므로 대동 민족의 염원과 일체 왕손으로서의 책무감을 환기시키고 보면아무도 그 청원을 외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거기에 능숙한 웅변의 쩌렁 쩌렁한 중량감을 보여주게 되면 동족 겨레로서의 소름끼치는 사명감에 함께 불타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 아닌가 한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초기 예술제의 시스템은 경남일보가 중심역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창립 당시 파성은 사장은 아니었지만 사원 대표격으로 사실상 경남일보의 중심이었다. 제1회 예술제의 부서 담당을 살펴보면 총지휘 설창수, 미술부 박생광, 연극부 김문규, 변론부 박세제, 영화부 정운태, 기획부 임홍태, 동원부 박경래,설비부 김순태, 연락부 김대규, 음악부 이용준, 무용부 진여고 무용부, 문학부 이경순, 총무부 최동수, 선전부 노대식, 접대부 김동렬, 재정부 윤기원, 상무 김종만 등이 드러난다.
이들 중 총지휘에 파성, 변론부에 박세제, 기획부에 임홍태, 총무부에 최동수, 선전부에 노대식, 접대부에 김동렬, 재정부에 윤기원 등이 편집국 업무국, 총무국 등에 소속된 경남일보 사원들이었다.기획, 총무, 선전, 접대, 재정을 경남일보 사원들이 맡았다는 것은 경남일보가 사실상 예술제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 하부 배역은 수면하로 숨어 있지만 알려진 이야기로는 진주시내 각동의 동책(洞責)을 기자로 보임하여 일정 금액의 스폰서를 구해 내기로 시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기자들이 할당액을 채우지 못하자 저녁에 선술집에 모여 화풀이로 술잔을 던지기도 했다는데, 어떤 기자는 가슴이 답답하여 "기자가 이런 것도 해야 되나? 차라리 내게 권총을 한 자루 주시든지....."하며 울분을 토했다는 것 아닌가.
진주에는 대동공업사가 있어서 그쪽의 협찬을 받는 것이 큰 몫이 되었고, 중소기업 쪽에서도 협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밖에 비빔밥집, 짜장면집이나 다방, 요식업, 목욕탕 경영자들의 눈물겨운 협조가 있었을 것이다. 어김없이 예술제가 되면 청사초롱을 문전에 밝히고 십시일반 조국 광복과 정부수립을 함께 축하했던 것이다.
1960년대 말 어느 예술제때 필자는 경남일보 장태현(시인, 시림 동인)문화부장과 구대동공업 본성동 공장 곁 동동주집에서 한 잔 하는데 장태현 부장이 "저 군중들을 보시오. 저 밀고 밀리는 군중들 속에 파성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요"하고 파성의 창제에 대한 숨길 수 없는 감격을 말했다.군중들로 말한다면 가장행렬에서의 군중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천 선진에서, 하동 금남에서, 함양 우루목에서, 산청 덕산에서, 합천 삼가에서, 진양 이반성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새벽에 도시락 싸들고 모여 와서 12시에 지나갈 가장행렬을 좋은 자리에서 보기 위해 돗자리 깔고 몇 시간을 대기하고 있었던 것, 거기에 예술제의 진면목이 있었다 하여 과언이 아니리라.
어쨌거나 초기 예술제의 환희에 찬 창업의 뒤안길에는 경남일보와 경남일보 사원들의 애환이 놓여 있었다. 말하자면 예술제는 그들의 고뇌를 머금고 시작되었다는 것임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