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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의 역적, 나라에는 충절 지킨 강골 ?????????????????????????????????????????????????????????????????????????? ???강조(康兆)는 그 가계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왕조 중심의 이른바 정사(正史)에서 임금을 죽인 역적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에 그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사라져버린 탓이다. 따라서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벼슬길에 올랐고, 그가 죽을 당시에 몇 살이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다만 그의 본관이 신천(信川)이라는 사실과, <고려사> ‘세가’ 목종(穆宗) 조와 ‘반역자열전’에 간략한 내용만 남아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본편도 그가 목종 12년(1009년)에 정변을 일으켜 현종(顯宗)을 옹립하고, 그 이듬해에 거란군과 싸우다가 포로로 끌려가 죽은 사건을 중심으로 기술할 수밖에 없다.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고려사> 또한 특정한 인물에 관한 평가가 편찬자의 의도와 왕조 중심의 역사관에 따라 왜곡된 모습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다. 강조가 그렇고, 뒷날 몽골에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삼별초(三別抄) 항쟁을 주도한 배중손(裵仲孫)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민족적 자존심과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오랑캐들과 맞서 싸우다 목숨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왕조사의 역적으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강조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사> ‘세가’ 목종 12년 정월, ‘서경도순검사 강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드디어 왕을 폐위하고 새 임금을 세울 음모를 꾸몄다.’는 구절이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강조는 목종 때에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중추사 우산기상시로서 외직으로 나가 서북면도순검사가 되었다고 한다. 목종의 치세라는 것은 실은 그의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섭정을 맡아 권력을 전횡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강조는 고려의 국방정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서북면의 군사?행정 총책임자로 임명될 만큼 문무 양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현종 즉위 직후인 1009년 2월에 중대성사가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3월에는 이부상서참지정사로 승진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10월에 거란의 성종(聖宗)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강조는 행영도통사가 되어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출전했다가 그 다음달인 11월에 통주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어 거란으로 끌려가 죽었다. ??거란이 고려를 침공한 구실은 강조가 임금을 죽인 죄를 응징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구실에 불과했고, 실은 성종(成宗) 때에 서희(徐熙)에게 설득당해 고려에게 빼앗긴 압록강 동쪽 지역인 이른바 강동 6주를 탈취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는 거란의 성종이 강조를 바로 죽이지 않고 그의 인물이 출중하므로 죽이기 아까워 자신의 신하가 되라고 강요한 사실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강조는 끝끝내 이를 거부하고 당당한 고려의 무인답게 죽음의 길을 택했다. ??그러면 어찌하여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세운 정치적 대사건의 뒤에는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가 있었다. 사건의 배경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먼저 목종의 즉위 전후와 재위 당시의 상황부터 알아보자. ??목종이 즉위한 것은 997년 10월. 성종이 재위 16년 3개월 만에 병으로 죽기 전에 선제인 경종(景宗)의 적자요 자신의 조카인 개령군(開寧君) 송(誦)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당시 목종은 18세로서 친히 정사를 볼 만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천추태후가 섭정으로서 정사를 주물렀다. 천추태후는 경종의 제3황후였고, 성종의 친누이동생이었다. 정식 칭호는 헌애황태후(獻哀皇太后)였으나 아들이 제위에 오른 뒤 천추전에서 섭정을 맡아 정사를 좌우했으므로 자신을 천추태후라고 부르도록 하여 이 명칭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천추태후는 섭정을 맡아 국권을 장악한 뒤, 정부(情夫)인 김치양(金致陽)과 간통을 일삼아 황실의 체통을 떨어뜨리고, 더불어 역모를 꾀하다 실패한 불륜과 권력욕의 화신처럼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정사의 기록이 모두 맞는 것은 아니다. 사서의 기록 이면과 전후 맥락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인물의 평가는 전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추태후는 고려사 최초의 섭정으로서 오라비 성종 때에 자칫하면 여진과 거란에게 빼앗길 뻔했던 북쪽 변경의 방위를 튼튼히 했고, 문약한 사대주의 유학자들에 의해 스스로 중국의 하루살이 제국의 제후국의 지위로 격하를 자초했던 나라를 다시 자랑스러운 황제국으로 격상시킴으로써 고려의 주체적 자주성을 지켜냈다. 또한 그녀는 불교중흥을 통해 문화적 전통을 부활시킨 신심이 두터운 불제자이기도 했다. 천추태후, 곧 헌애황태후 황보씨(皇甫氏)는 제4대 황제 광종(光宗) 14년(963년)에 태어났는데, 그해는 고려의 연호로 준풍(峻豊) 4년이었다. 고려는 국초부터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당당한 제국이었던 것이다. ??고려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이복 남매간이나 삼촌과 조카 사이의 근친결혼으로 제위를 물려주었으므로 천추태후의 혈통 또한 매우 복잡하다. 태조 왕건의 부인이 공식적인 기록상으로도 29명에 이르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도 25남 9녀나 된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천추태후의 아버지는 대종(戴宗) 왕욱(王旭)이요, 어머니는 선의태후(宣義太后) 유씨(柳氏)로서 이들 또한 이복남매 사이였다. 왕욱과 선의태후는 결혼하여 효덕태자(孝德太子)?성종(成宗)?경장태자(敬章太子) 등 아들 셋과 헌애황후?헌정황후(獻貞皇后) 등 딸 둘을 두었다. 이 가운데 둘째 아들 치(治)가 제6대 황제 성종으로 즉위한 까닭은 그가 광종의 사위인 동시에 경종과는 사촌 겸 처남매부 사이였기 때문이다. 즉, 그는 광종과 대목황후 황보씨의 셋째 딸인 문덕황후(文德皇后) 유씨(劉氏)를 부인으로 맞았는데, 제5대 경종이 죽었을 때에 황위계승권자인 목종이 겨우 두 살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제위를 이었던 것이다. ??또한 막내 헌정황후는 헌애황후와 더불어 할머니의 성인 황보씨를 물려받고 언니와 함께 경종에게 시집갔으나 언니가 경종의 유일한 후사인 목종을 낳은 것과는 달리 자식을 낳지 못한 채 과부가 되고 말았다. 친정으로 돌아가 있던 그녀는 이웃에 살고 있던 숙부 안종(安宗) 왕욱(王郁)과 눈이 맞아 간통을 하고, 뒷날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끝에 제8대 황제로 즉위하는 현종을 낳고 그 산고로 죽게 된다. 안종 왕욱은 태조와 그의 다섯째 부인 신성황후(神成皇后) 김씨(金氏)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니 헌애?헌정황후 자매에게는 삼촌이었다. ??경종은 광종과 대목황후 황보씨의 맏아들로서 광종 6년(955년) 9월에 태어났다. 광종 16년(965년) 2월에 불과 11세의 나이로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10년 뒤인 975년 5월에 그 무섭던 아버지 광종이 재위 26년 2개월 만에 죽자 21세로 제위에 올랐다. 천추태후가 자신보다 여덟 살 많은 이 이복오라비 경종에게 시집간 것은 경종 3년(978년)께로 추정된다. 이는 그녀의 아들 목종이 경종 5년(980년)에 태어난 사실로 역산한 것이다. 경종은 재위 6년(981년) 6월에 병들어 눕더니, 날이 갈수록 위독해져 7월에는 조서를 내려 사촌동생 개령군(開寧君) 치(治)에게 제위를 넘기고 죽었다. 그렇게 해서 헌애황후를 비롯한 경종의 부인 다섯 명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당시 헌애황후는 겨우 18세였다. ??경종이 죽을 때에 헌애황후가 낳은 태자 송이 있었지만 겨우 두 살짜리 어린아이였으므로 사촌동생에게 제위를 물려준 것이었다. 친오빠 성종이 제6대 황제가 되자 헌애황후 자매는 황궁에서 사저(私邸)로 물러나와 지내야만 했다. 성종은 16년 3개월 동안 제위에 있었는데, 한 동안 이 두 자매는 완전히 세상에서 잊혀진 존재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두 자매의 나이가 너무나 젊었고 피는 너무나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자매는 경쟁이라도 하듯이 불륜행각에 나서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헌애황후의 상대는 외가쪽 친척인 김치양이었고, 헌정황후의 상대는 삼촌인 안종 왕욱이었다. ??억불숭유 정책으로 통치권을 강화하려다가 오히려 문약한 나라를 만든 성종은 997년 10월에 병사했다. 당시 나이 38세. 그해 8월에 성종은 경주를 순시하다가 9월에 울산에서 갑자기 병들어 위독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하여 즉시 귀경하여 죽기 직전에 경종의 적자인 개령군 송을 불러 제위를 물려주니 그가 곧 목종이요, 당시 18세였다. 아들 목종이 제위에 오름에 따라 모후 헌애황후도 16년 만에 환궁하게 되었다. ??목종은 이미 장성한 18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지만 뒷날 ‘술과 사냥을 좋아할뿐 정사는 돌보지 않은 무능한 제왕’이라고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목종이 처음부터 정사를 나몰라하고 놀기만 하면서 헛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이는 본래 그의 마음이 약했고 효성심이 깊은데다가, 그 효성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마땅했을 어머니 천추태후가 너무나 무서운 여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황제가 된 아들이 18세의 당당한 청년임에도 자신이 천추전에 앉아 섭정으로서 천하를 호령한 것이 아니겠는가. ??목종이 즉위하여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머니를 황태후로 봉한 것과 대사면령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섭정으로서 실권을 장악한 천추태후가 황제의 입을 통해 시행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녀는 또한 오라비 성종 때에 간통 사실이 드러나 곤장을 맞고 귀양갔던 정부 김치양을 불러들여 합문통사사인 벼슬을 주었고, 나중에는 우복야 겸 삼사사를 시켜 둘이서 조정의 인사권까지 좌우했다. 이처럼 천추태후가 섭정으로 앉아 전권을 장악하고 강력한 불교중흥 정책을 밀고나가자 성종 때에 유교중시 정책에 따라 출세했던 유학자 출신 문신들 사이에서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이런 사정은 황보씨 가문 출신인 목종의 즉위와 천추태후의 집권에 따라 상대적으로 입지가 위축된 신라계 호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천추태후의 정적(政敵)이 되어 숨죽인 채 기회만 엿보았다. ??그런데 목종 6년(1003년)에 천추태후가 김치양의 아들을 낳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해에 천추태후는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을 강제로 출가시켜 황궁에서 내쫓아버렸다. <고려사>는 이 일이 천추태후가 김치양의 아들로 하여금 황위계승자로 삼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고 했다. 대량원군은 태후의 친동생인 헌정황후와 숙부 왕욱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하지만 황제인 목종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남은 태조 왕건의 혈통이기도 했다. 목종에 이어 현종으로 즉위하게 되는 대량원군은 성종 11년(992년) 7월에 태어났다. 불륜으로 태어났지만 대량원군은 태조의 핏줄이었으므로 성종이 이를 가엾게 여겨 황궁에서 기르도록 했던 것이다. 천추태후가 황궁에서 쫓아낼 때 대량원군은 불과 12세였다. 그는 강제로 머리를 깎인 채 숭교사에서 중노릇을 시작했다. ??어쨌든 목종은 천추태후가 섭정을 맡아 정권을 좌우하자 만사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계부(繼父) 아닌 계부 김치양까지 가세해 정사를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자 황제고 뭐고 다 귀찮았다. 의욕을 상실한 목종은 술과 사냥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동성애에 빠져들게 되는데, 그 상대는 유행간(庾行簡)이란 내시였다. 목종은 유행간을 곁에서 잠시도 떠나지 못하게 하고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유행간은 목종에게 발해 출신인 유충정(劉忠正)이란 자를 소개했다. 이렇게 해서 세 사내는 밤이건 낮이건 붙어지내며 동성애로 세월을 보냈다. 목종은 유행간에게는 합문사인, 유충정에게는 좌사낭중이란 벼슬까지 내렸다. 그러자 이 둘은 황제의 총애를 믿고 호가호위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환관 주제에 조정의 인사를 비롯한 정사에 간섭하고 나서자 자연히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파의 눈 밖에 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갈등이 깊어지자 결국 유행간과 유충정은 천추태후의 실각만 목빠지게 바라고 있는 유학자의 진영으로 가서 붙었다. 이미 전에 천추태후가 김치양의 아들을 낳았을 때부터 기회를 노리던 정적들이었다. 기록에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자신들의 불륜의 씨를 황제로 옹립하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고 했지만, 꼼짝 못한 채 이들의 덫에 걸려 선제공격을 당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미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목종 12년(1009년) 정월, 운명의 해가 밝았다. 그러나 정초부터 불길한 조짐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목종이 숭교사에 다녀오는 도중에 난데없는 돌풍이 불어 황제의 일산대가 꺾이는 일이 생겼다. 또 연등회가 한창 열리고 있는데 황궁의 기름창고에 불이 나서 천추전이 소실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후의 거처가 불타 없어지자 효성이 깊은 황제는 이에 상심하여 그것이 병이 되어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때부터 목종은 모든 궁문을 닫아걸고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대신들의 문병도 거절할 정도였으니 물론 정사도 전혀 돌보지 않았다. 그런데 평소에 태후 및 김치양과 사이가 나빴던 내시 유충정이 태후와 김치양이 대량원군을 죽이고 장차 그들의 아들을 제위에 앉히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을 했다. 목종은 중추원사 최항(崔沆)과 급사중 채충순(蔡忠順)을 불러 이런 유지를 내렸다. ???“짐의 병이 점점 깊어져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지금 태조의 후손으로는 대량원군밖에??? 없으니 경들은 진심으로 사직을 위해 타성(他姓)이 제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라.” ??이렇게 자신의 후계자로 대량원군을 지목하고 밀의 황보유의(皇甫兪義)를 신혈사로 보내 대량원군을 불러오도록 했다. 아울러 대량원군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서북면도순검사 강조를 황도로 불렀다. 황명을 받은 강조는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서경을 출발했다. 그런데 오늘의 황해도 서흥인 동주 용천역에 이르렀을 때에 내사주서 위종정(魏從正)과 안북도호부장서기 최창증(崔昌曾)을 만났다. 두 사람은 강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은 지금 개경으로 가면 죽소. 공을 소환한 것은 황제가 아니라 사실은 태후와 김치??? 양이라오. 황상의 병이 위중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렸소. 이들이 폐하의 병세가 중한 것을??? 알고 제위를 저희 자식에게 넘기려고 황명을 날조하여 공을 부른 것이란 말이오. 그러니??? 까 공은 다시 서북면으로 돌아가 크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보존하고, 일신도 보존하는??? 것이 좋겠소. 기회를 잃지 마시오.” ??이들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간 강조가 서경으로 되돌아갔다. 천추태후는 강조가 군사를 이끌고 올까 두려워 심복을 보내 절령(자비령)을 지키게 하고 사람들의 통행을 막았다. 그런데 얼마 뒤에 강조의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를 대지팡이 속에 넣고 종을 중으로 변장시켜 보냈다. 그 종은 주야로 달려왔으므로 기력이 다해 밀서를 전하자마자 곧 죽고 말았다. ??강조가 편지를 읽어보니, ‘황제가 이미 붕어하고 간신들이 조정을 어지럽히니 속히 군사를 이끌고 와서 난을 평정하라‘고 쓰여 있었다. 강조는 정말로 황제가 죽은 것으로 알고 도순검부사인 이부시랑 이현운(李鉉雲)과 함께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다시 서경을 출발, 개경으로 남하했다. 그러나 평주(평산)에 이르렀을 때에 아직도 황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강조가 진퇴를 두고 고민하자 휘하 장수들이 권했다. “이미 군사를 이끌고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무엇을 망설입니까? 어차피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릴 판인데 그대로 황도로 쳐들어갑시다!” ??강조는 그 말이 옳다 하고 그대로 개경으로 밀고내려갔다. 그리고 부하들을 신혈사로 보내 대량원군을 모셔오도록 시키는 한편, 황제에게도 편지를 보내 ‘용흥 귀법사로 잠시 피해 계시면 난을 평정한 뒤 바로 모시러 가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부하들이 대량원군을 모시고 오자 곧장 황도에 입성해 황제와 태후를 쫓아냈다. 그리고 황보유의 등이 대량원군을 모시고 오자 제위에 앉히고 목종을 양국공(讓國公)으로 강등시켰다. 또 군사를 보내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7명을 죽이고, 천추태후의 심복 30여 명을 먼 섬으로 귀양보냈다. 법왕사에 유폐당했던 목종은 최항을 강조에게 보내 말 두 필만 빌려달라고 하여 그 말을 타고 태후와 함께 귀법사로 갔다. 이때 목종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음식을 구할 정도로 비참했다. 이 모두가 섭정으로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던 태후 때문이었지만 목종은 단 한마디도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때 천추태후가 무슨 말로 이 효성 지극한 아들, 하지만 자신이 허수아비 노릇을 시킨 끝에 망쳐버린 불쌍한 아들을 위로했는지는 전혀 기록이 없다. ??강조가 목종을 죽인 것은 오로지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김광보(金光甫) 등 부하들을 시켜 목종에게 사약을 보냈다. 천추태후와 목종 모자는 가까스로 임진강을 건너 적성현에 이르렀을 때였다. 목종은 증조모의 고향인 충주로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려고 작정했던 것이다. 목종은 새 황제가 사약을 보낸 것이 그의 진심이 아니라고 믿었기에 마시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김광보가 시위군 안패(安覇)를 시켜 죽여버리고 말았다. 목종을 죽였다는 보고를 받은 강조는 현종에게 그가 자살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목종의 시신은 한 달 뒤에 적성현 남쪽에서 화장되었다. 그는 선정황후(宣正皇后) 유씨(劉氏) 말고는 다른 부인이 없었고, 자식도 없었다. 이렇게 아들을 먼저 보낸 천추태후는 목종의 장례가 끝난 뒤 자신의 할머니 신정황태후 황보씨의 고향인 황주로 가서 지내다가 20년 뒤인 현종 20년(1029년)에 개경으로 돌아와 숭덕궁에서 죽었는데 그때 66세였다. ??현종은 강조를 중대성사로, 이현운을 중대부사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강조를 다시 이부상서 참지정사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그의 집권은 겨우 1년밖에 가지 못했다. 그 이듬해인 현종 원년(1010년)에 거란군이 쳐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거란의 성종은 그해 5월에 “고려에서 강조가 임금을 죽인 것은 대역무도한 일이니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물어야겠다”하고, 7월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 목종을 살해한 까닭을 물었다. ??이에 고려 조정은 8월부터 11월까지 네 차례나 거란에 사신을 보내 사정을 설명하고 전쟁을 피하려고 했으나 이미 속셈이 다른 데에 있었던 거란의 성종은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치겠다고 통고해왔다. 고려는 전쟁이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이미 10월 초하루에 참지정사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중대부사 이현운과 병부시랑 장연우(張延祐)를 부사로, 검교상서우복야 상장군 안소광(安紹光)을 행영도병마사로, 소부감 최현민(崔賢敏)을 좌군병마사로, 형부시랑 이방(李昉)을 우군병마사로, 예빈경 박충숙(朴忠淑)을 중군병마사로, 형부상서 최사위(崔士威)를 통군사로, 좌사원외랑 황보신(皇甫申)과 병부원외랑 원영(元潁)을 판관으로 삼아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통주(선천)로 가서 주둔하다가 적군을 막게 했다. ??그해 11월에 마침내 거란의 4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오늘의 의주인 흥화진을 포위하고 항복을 강요했다. 하지만 순검사 양규(楊規)와 이수화(李守和) 등 장수들은 끝까지 항전했다. 이튿날 구주성 밖에서 최사위 등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승리를 거둔 거란의 성종은 다시 통화진을 포위하고 항복을 권유했다. 그가 항복을 권유한 편지에는 ‘너희가 강조를 사로잡아 보내면 즉시 군사를 돌이킬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바로 개경으로 쳐들어가 너희 처자를 모두 죽일 것’이란 공갈협박이 들어 있었다. ??계속해서 포위를 풀지 않고 항복을 권했지만 흥화진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거란의 성종은 포위를 풀고 군사를 둘로 나누어 20만은 자신이 이끌고 강조가 지키고 있는 통주로 향하고, 20만은 안주 남쪽 무로대에 주둔시켰다. 이때 양규가 흥화진을 굳게 지킨 덕분에 고려는 결국 거란군과 강화할 수 있었다. 거란의 입장에서는 후방의 흥화진이 온전히 버티고 있는 한 언제든지 보급로가 끊어지고 퇴로가 차단당해 잘못하면 몰살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란의 성종은 작전을 바꿔 포위를 풀고도 흥화진이 마음에 걸려 계속해서 항복을 권유했고, 심지어는 강조의 이름으로 항복을 권하기도 했지만 양규는, “나는 오진 성상의 명령을 받아 싸우는 것이지 강조의 명을 받는 것은 아니다”면서 끝내 항복을 거절했다. ??그 뒤 양규는 군사 700명을 거느리고 흥화진을 나와 통주 인근에 흩어졌던 패잔병 1천여 명을 수습하여 곽주의 거란군을 공격하여 모두 죽이고 성안에 잡혀 있던 백성 7천여 명을 구출해 통주로 옮겼다. ??그때 성종이 이끈 거란의 주력군은 개경 공략에 주력하고 있었다. 고려 조정은 주화파와 주전파로 갈려 논란을 벌이다가 끝까지 항복을 반대한 강감찬(姜邯贊)의 건의에 따라 현종은 남쪽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이때 현종은 전라도 나주까지 피란을 갔는데, 그 사이에 거란이 강화를 받아들이고 철군을 시작했다. 하지만 거란군이 철군하자 고려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격을 개시해 곳곳에서 거란군을 괴롭혔다. 양규가 전사한 것도 이러한 반격전의 와중에서였다. 그 이듬해인 현종 2년(1011년) 1월 28일 양규는 애전에서 퇴각하는 거란군을 공격하여 1천여 명을 죽였으나 주력군의 기습을 받아 장렬히 전사했다. ??양규야 말로 제2차 거란의 침범 당시 가장 빛나는 전공을 세운 장수였다. 그는 지원군도 없이 홀로 버티며 10개월간 7전 7승을 거두며 숱한 적군을 죽였고, 포로로 잡혀가던 3만여 명의 백성을 구해냈다. 난이 끝난 뒤 현종은 그의 전공을 높이 사 공부상서를 추증하고 그의 아내 은율군부인 홍씨에게 손수 쓴 칙서를 보내고 곡식을 내렸으며, 그의 아들 양대춘을 교서랑에 임명했다. 또 현종 15년(1024년)에는 삼한벽상공신으로 추봉했다. ??한편 통주의 강조는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치고 적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부대는 성의 서쪽 세 줄기 강물이 합치는 곳에 주둔시켜 자신이 지휘하고, 또 한 부대는 성 인근의 산에 진 치게 했고, 나머지 한 부대는 성 가까이에 진 치게 했다. 그리고 각 부대마다 수레바퀴에 날카로운 칼날이 달린 검차(劒車)를 여러 대 배치했다. 거란군이 몰려오자 고려군의 신무기인 이 검차라는 이름의 전차는 위력을 발휘하여 수많은 적군을 베어 죽였다. 이런 식으로 여러 차례 거란군의 공격을 물리치자 강조는 적을 얕잡아보는 마음이 들었다. 병법에도 경적필패(輕敵必敗)라고 했는데, 무슨 까닭에 강조가 그런 상식적인 교훈마자 잊어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적군이 또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부하 장수와 바둑을 두고 있던 강조는, “입안의 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얼마든지 오라고 하라”면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때 거란군의 선봉장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삼수채를 격파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벌써 많은 적군이 들어왔다”는 두 번째 보고를 받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강조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당시의 정황을 <고려사> ‘열전’은 이렇게 전한다. ???- 놀라 일어난 강조가 “정말이야?”하고는 정신이 혼미해졌는데 갑자기 목종의 환영이 나타나 꾸짖기를, “네 놈은 이제 끝났다. 어찌 천벌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강조가 즉시 투구를 벗고 무릎을 꿇고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하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란군이 달려들어 강조를 결박했다. - ??비록 강조가 거란군에게 패해 생포되기는 했지만 그의 행동을 두고 살펴볼 때 이러한 기록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다시 말해서 왕조사 중심으로 편찬하다가 보니 강조가 역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조작한 장치로 보인다. 이를테면 강조가 목종을 내쫓고 대궐에서 현종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군사들이 만세를 부른 일이 있었다. 만세는 황제에게나 바치는 것이 아닌가. 강조가 놀라 일어나 꿇어앉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새 황제께서 오시지 않았는데 이 무슨 소리인가?”하고 꾸짖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황보유의 등이 현종을 모시고 와서 즉위했던 것이다. 또 강조가 거란의 성종이 끝내 굴복하지 않고 사나이답게 죽었다는 사실도 그가 비록 목종을 죽인 죄는 있지만 결코 나라를 배신한 비겁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패장으로서 포로가 되었지만 강조는 고려 대장부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거란의 성종이 그의 인물이 아까워 “나의 신하가 되겠는가?”하고 묻자 강조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하여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 성종이 다시 물었지만 강조의 대답은 여전했다. 성종이 강조의 살을 찢으면서 강요했지만 강조는 끝까지 거절했다. ??성종은 이번에는 함께 포로가 된 이현운에게 항복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오랫동안 강조를 따랐던 이현운은, “두 눈이 이미 새 일월(日月)을 보았는데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하고 대답했다. 세 일월을 보고 옛 산천을 잊겠다는 말은 고려를 등지고 새 황제에게 충성하겠다는 소리였다. 이에 곁에 있던 강조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현운을 발길로 걷어차며 이렇게 소리쳐 꾸짖었다. “너는 고려 사람으로서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예라, 이 비겁한 놈아!” ??도저히 강조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성종은 할 수 없이 그의 목을 베었다. 강조는 이렇게 죽어 뒷날 <고려사>에는 반역자로 기록되었지만, 그는 끝끝내 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장렬한 최후로 고려에 충절을 바친 참다운 고려의 무인이었다. ?? |
출처: 平海居士 원문보기 글쓴이: 평해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