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상 산지 테푸이에 둘러싸인 앙헬 폭포를 만난 후 산타페(Santa Fe)로 향한다. 남미의 어지간한 나라마다 ‘산타페’라는 지명은 하나씩 다 있는 걸까. 멕시코, 콜롬비아, 쿠바, 에콰도르, 온두라스만으로도 모자라 여기 베네수엘라에도 있으니.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립공원이라는 모치마 국립공원(Parque Nacional Mochima) 안의 작은 바닷가 마을이 산타페다.
하지만 마을의 분위기가 기대했던 것과는 딴판이다. 되는 대로 마구 지어 올린 가건물 같은 집들과 여기 저기 파이고 뜯긴 도로. 골목은 쓰레기가 나뒹굴고, 어디선가 생선 썩는 냄새까지 바람에 실려 온다. 구멍가게 앞에는 일 없는 남자들이 대낮부터 맥주를 마시며 불쾌한 얼굴로 앉아있다.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저 인간들은 뭘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딱 이런 분위기다.
무인도에서 보내는 하루는 모치마 국립공원 투어의 하이라이트 |
무인도에서 보내는 하루아무리 너그럽게 봐줘도 상상했던 휴양지의 풍경과는 너무 다르다. 이토록 삭막한 분위기라니... 아마도 나 혼자였다면 마을 분위기에 위축되어 도망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든든한 친구가 곁에 있으니 겁먹지 말자. 해변의 모래 사장을 지나 프랑스인 커플이 운영하는 숙소를 찾아간다.
이런 어촌까지 와서 살고 있는 외국인이라니... 이 사람들은 어쩌다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을까. 마을의 심란함을 깨끗한 숙소가 달래준다. ‘작은 정원’이라는 이름처럼 정원과 수영장이 있는 숙소의 분위기가 괜찮다. 주인 부부도 친절한 데다가 코차이마 해변까지 1분만 걸어 나가면 되는 거리다.
산타페 해변은 가건물 같은 마구잡이 건물들이 가득하다 |
모치마 국립공원은 베네수엘라 북동쪽 해안 수크레(Sucre) 주의 도시 쿠마나(Cumana)와 안소아테기(Anzoatequi) 주의 푸에르토라크루즈(Puerto la Cruz)를 잇는 해안선과 32개의 섬을 아우른다. 동쪽 카리브 해안과 투리미키레 산군(Turimiquire)을 보호하기 위해 1973년에 지정된 국립공원이다.
94,935 헥타르의 국립공원 면적의 절반 이상이 바다로 산호초 해변과 원시림을 품은 깊은 만, 맹그로브 숲을 품고 있다. 깨끗하고 잔잔한 바다는 스노클링, 다이빙, 수상스키, 요트 세일링, 낚시 등을 즐기기에 좋아 베네수엘라 각지로부터 휴양객을 불러 모은다.
산타페의 해변에 서 있는 동네 꼬마 |
우리도 다음날 스노클링 장비를 빌려 작은 배에 오른다. 프랑스와 스페인 커플이 오늘의 동행. 고요한 바다를 20분쯤 달려간 배가 작은 해변에 선다. 모래사장에 자리를 깔아놓고 스노클링을 즐기는 시간. 산호도 없고, 빛깔 고운 열대어도 없는 바닷속이지만 친구와 함께라 즐겁기만 하다. 잠시 후 해변의 유일한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 서비스는 엉망이고 가격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시에라라는 생선구이가 너무 맛있어 불만제로의 상태가 되어버린다.
다시 배를 타고 라 피시나까지 간다. 바다 한 가운데에 배를 정박시키고 이곳에서 두 번째 스노클링. 이번에는 물살에 너울거리는 산호들도 보인다. 스노클링을 처음 해보는 내 친구도 신이 났다. 수영을 못 하는 내 친구와 수영을 하지만 겁이 많은 나, 우리는 둘 다 구명조끼를 입고 거의 버둥거리며 떠다닌다. 남들 눈에는 좀 웃기게 보이겠지만 무슨 상관이람.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카리브 해 위에 떠 있다는 거다.
모치마 국립공원 에서는 돌고래떼를 쉽게 볼 수 있다 |
비가 내리는 날은 숙소의 그물 침대에 누워 책을 읽으며 쉰다. 동네 산책을 나섰다가 거센 비를 만나 남의 집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수다를 떨기도 하면서. 맥주 몇 캔을 사들고 들어와 정원에 앉아 마시며 밤을 맞는다. 휴식 같은 하루가 간다. 비가 그친 다음날은 카라카스(Islas Caracas) 섬으로 놀러 가는 날. 그저께 스노클링을 갔던 할아버지의 배를 하루 종일 전세 냈다.
스노클링 포인트는 할아버지가 알아서 데려다주기로 하고. 40분쯤 달려 베네도라는 곳에 배를 세우고 오늘의 첫 스노클링. 거대한 산호들이 가득한 물 속 세상이 신비하기만 하다. 다음 포인트는 티그리오와 카누아. 이 망망대해의 바다 속에 물고기와 우리 둘 뿐이라니. 세 번쯤 스노클링을 하고 나니 어느새 뱃속 시계가 점심을 알린다. 타쿠아루모 무인도의 해변에 배를 세운다.
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숯불을 피워 흰 생선을 구워준다. 부드럽고 고소한 생선이 입에서 스스르 녹는다. 친구는 ‘지금껏 먹은 최고의 생선구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세운다. 밀려오는 파도에 발을 담그며 모래사장을 따라 걷는다. 에메랄드 빛깔의 바다가 우리를 따라온다. 섬에는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다. 오늘 하루 이 섬의 주인은 우리.
배를 따라오는 돌고래 |
돌아오는 길, 할아버지가 “델피네스(Delpines)!"라고 외친다. 할아버지가 가리킨 곳을 보니 정말 십여 마리의 돌고래 무리가 헤엄치고 있다. 배를 돌려 따라간다. 우리를 발견한 돌고래 몇 마리가 몸을 돌려 우리 배를 향해 온다. 푸른 바다 밑으로 희고 검은 돌고래의 몸들이 떠오른다. 다시 배의 방향을 트니 돌고래들도 방향을 바꾼다. 그렇게 몇 번을 배를 돌려가며 돌고래들과 논다. 믿을 수 없이 행복한 시간이 흐른다. 뭍에 내려 들뜬 마음에 할아버지께 팁을 듬뿍 드렸다.
무인도에서 보낸 하루는 내가 모치마 국립공원에서 보낸 최고의 시간이었다. 이 아름다운 국립공원은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위협 받는 국립공원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푸에르토라크루즈와 쿠마나 사이를 잇는 고속도로가 국립공원을 관통해 뚫린데다가, 고속도로 옆으로는 천연가스 수송관까지 건설 되었다. 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부터 이곳에 살던 주민들과의 갈등도 커지고 있다.
주민들의 광물 개발이나 야생동물 불법 거래 때문이다. 푸에르토라크루즈나 바르셀로나 같은 도시들은 주변의 유전 개발로 인해 급속한 산업화를 겪고 있다. 이곳의 자연이 망가지는 것도 시간 문제라고 한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도 우리는 돌고래 떼와 만날 수 있을까.
최상품 카카오 재배지산타페에서 며칠을 뒹굴 거린 후 우리는 동쪽으로 달려 리오카리베(Rio Caribe)로 이동한다. 파리아 반도에 자리 잡은 리오카리베는 산타페보다 훨씬 깨끗하게 정돈된 느낌이다. 주민들의 인상도 더 부드럽고 친절하다. 노점에서 남미식 튀김 만두 앰파나다를 사먹고 초콜릿 농장을 찾아간다. 베네수엘라의 카카오는 그 진한 맛과 향기 때문에 최고의 카카오로 꼽혀왔다.
오랫동안 벨기에와 스위스의 초콜릿 원료로 사랑 받았다. 베네수엘라에서도 덥고 기후가 습한 카리브해 연안이 최상품 카카오 재배지로 꼽힌다. 카카오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구름이 많고 높은 습도, 연중 기온 섭씨 20도 이상, 강수량 200미리 이상의 환경이 필요하다. 또 카카오 나무는 다른 나무의 그늘 아래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무성한 숲도 필수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20140122_120%2F1390352872853KabUE_JPEG%2F06.jpg%3Ftype%3Dw323) 베네수엘라의 카카오는 최고급 초콜릿의 원료로 사랑받는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20140122_15%2F139035288536236eKt_JPEG%2F07.jpg%3Ftype%3Dw323) 카카오 나무의 꽃 | |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 나무는 브라질의 아마존 강 유역과 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 강 유역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열대 식물인 카카오는 예전부터 신의 음료라 불렸다. 역사 상 초콜릿을 처음으로 먹은 이들은 3천여 년 전의 중앙아메리카의 올메크 족이라고 한다. 그들의 지배 계급이 액체 상태의 음료로 초콜릿을 마셨다. 고형 초콜릿은 아스텍 인들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고, 마야인들은 신성한 의식에 초콜릿을 사용했다고 한다.
잘 익은 카카오 열매를 쪼갠 모습 |
우리가 찾아간 파리아 카카오 농장 입구에는 올해의 미스 베네수엘라가 이 집 딸임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베네수엘라라는 나라 이름을 처음 들은 것도 미스 유니버스 같은 미인대회 때문이었다. 베네수엘라는 옆 나라 콜롬비아와 함께 미인 대회 상위입상자가 많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엉덩이나 가슴 수술을 하다가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사고 소식도 종종 들려온다.
미스 베네수엘라가 된다는 일은 인생을 바꾸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기기도 하는 일인가 보다. 농장주의 딸은 미스 베네수엘라에 뽑힐 만큼 부와 미를 타고 났는데 이곳 농장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삶은 어떨까. 초콜릿은 커피와 함께 가장 가난한 이들이 만들고 부유층이 소비하는 사치품에 해당한다. 대표적인 아동 노동 착취 산업이기도 하다.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는 베네수엘라 농민들은 일당 5달러 정도의 저임금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카카오는 비극의 열매라고도 불린다. 카카오 재배자끼리의 경쟁도 심해 종종 폭력 사태를 불러온다. 어쩐지 이제부터 다크 초콜릿을 먹을 때면 쓴 맛이 좀 더 강하게 느껴질 것만 같다.
카카오 열매의 과육을 벗기고 남은 씨가 초콜릿의 재료가 된다 |
2,700그루의 유기농 카카오 나무를 재배하는 이 농장은 초콜릿도 만들어 파리아(Paria)라는 브랜드로 판매한다. 농장의 카카오 나무는 카카오 중 최고급 품질인 크리올로(Criollo) 종. 전 세계 카카오 생산량 중 1프로 미만을 차지한다나. 우리는 이곳에서 초콜릿 제조과정을 구경하고, 카카오로 만든 술과 초콜릿을 사들고 돌아온다.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다음날은 파리아 반도의 플라야 메디나(Playa Medina)를 찾아간다. 픽업 트럭을 세 번 갈아타고 2시간 만에 해변에 도착하니 고생을 보상해주는 풍경이 기다린다. 야자나무가 늘어선 무성한 숲이 바다를 향해 뻗어있다. 바다와 키스하기 위해 몸을 한껏 내민 산 같다.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라더니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남아있다. 무성한 열대림과 부드러운 모래사장, 투명한 바다. 야자나무 잎으로 지붕을 얹은 그늘막마저 인공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히는 메디나 해변 |
해변의 노점에서 코코넛 주스를 파는 청년이 다가온다. 코코넛에 빨대를 꽂아서 마신 후, 껍질 주변의 하얀 살을 발라 먹는다. 코코넛을 먹고 나니 이번에는 바위에서 캔 싱싱한 굴을 파는 청년이 기다린다. 우리는 순식간에 24개의 굴을 해치운다. 레몬을 뿌려먹는 통통한 굴은 지금까지 먹었던 굴과는 전혀 다른 맛이다. 텅 빈 해변에서 보내는 천국과 같은 오후. 이렇게 베네수엘라에서의 마지막 날이 가고 있다.
글·사진 김남희 여행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로, 서른넷에 사표 쓰고 방 빼서 떠난 세계일주를 꼽는다. 지구의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사이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시리즈를 비롯해 [유럽의 걷고 싶은 길],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등의 책을 펴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