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시편 15편 1-5절
설교제목 : 함께 살 자
옷소매 붉은 끝동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한 해의 시작에서 희망차고, 활기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올 초에 종방한 “옷소매 붉은 끝동”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웹툰의 원작을 아름답고 의미있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제목은 옷소매 끝이 붉게 물들여져 있어서 옷소매 붉은 끝동입니다. 한자로 풀이하면, 홍수(紅袖)입니다. 왕을 섬기는 궁녀들이 궁궐 안에서 옷소매 끝을 붉게 물들여 입었고, 옷소매의 끝동을 붉게 물들인 여인들은 곧 왕의 여인이라는 징표였다고 합니다. 궁녀인 덕임과 세자 이산(정조)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입니다. 저에게 의미있게 다가온 두 가지 내용을 나누고자 합니다. 왕의 소유였던 궁녀신분으로서 덕임은 왕을 연모하면서도 자유를 갈망하였습니다. 왕의 후궁으로 살아가기보다 평범한 궁녀의 삶을 원하였습니다. 모든 궁녀들은 왕의 총애를 받아 후궁이 되고자 했지만, 한 여인으로 자주성과 독립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삶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곱씹게 했습니다.
또 한가지는 마지막 이산이 죽어가면 별당에서 다시 덕임과의 만나는 장면에서 별당 밖으로 나가지 않고 붉은 꽃을 보며, “순간이 곧 영원이 됐다”는 말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순간이 곧 영원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진술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시간을 이해하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시간이란 방향을 가지고 움직이며 흘러가는 직선적 시간이 있습니다. 이런 시간의 관념은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시간 이해는 시간의 흐름은 인간의 표상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에 흐르는 것도 방향도 없다는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영원한 현재로서 점과 같은 형국입니다. 움직인다 하더라도 원주를 도는 반복 회귀를 가리킵니다. 종교를 보면 이 시간관념은 극명하게 대비가 됩니다. 그런데 엄밀히 경험적 측면에서 보면 이 두 시간의 이해는 공존하는 듯 합니다. 우리는 순간을 살고 있고, 이 순간이 의미로 채워질 때 영원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미로 채워지는 다양한 방식은 사랑하는 것(이)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2022년 순간 속에 의미로 채워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 사랑하는 것 곁에 머물러 보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과 함께 살고 싶은가?
오늘 시편 15편은 질문을 던지고, 답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인은 누가 주님의 장막에서 함께 살 수 있는 자인지, 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물 수 있는 자인지 질문합니다(1). 이런 물음에 진정한 반응을 보이기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나는 주님의 장막에 함께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나는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물고자 하는 갈망이 있는 자이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 전적인 신뢰가 없다면 이 노래들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면서 저에게 다가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너는 주님의 장막에 살고 싶은가?” “너는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물고 싶은가?” 이 시편의 제목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의 평생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성전을 건립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전건립을 위한 모든 재원을 마련하는 것으로 임무를 다하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건립을 완성합니다. 이런 주님의 장막에 대한 사모함을 잘 담아낸 것은 시편 84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편 84:1-4, 10)
주님의 장막에 대한 사랑, 그리움, 설렘임이 묻어 있는 시입니다. 일생동안 우리는 무엇과 함께 살고자 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과 함께 살고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나의 갈망이 무엇인지 이해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장막에서 주님과 긴밀한 만남을 갖고자 하는 그런 그리움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장막과 성산에서
또한 누가 주님의 장막에 살 수 있고,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수 있는 자인가라는 물음에는 주님의 장막과 주님의 성산에 함께 살아야 할 당위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장막에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궁극적 목표이자 방향일 것입니다. 주님의 장막tabernacle이란 주님이 계신 거처입니다. 이 장막은 고정식이 아닙니다. 이동식 텐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장막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한복판에서 주님을 내 마음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든 무엇을 하든 나의 중심에 주님의 장막을 마련한 자입니다.
또한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문다는 것도 동일한 의미일 수 있으나, 거룩한 산(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시온산)은 우리가 지향해가는 삶의 이정표, 방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우리의 시선과 지향이 거룩한 산을 향하는 삶입니다. 이런 장막과 성산은 자기실현의 전형적 특성을 드러냅니다. 내적 중심을 향한 여정이자 궁극의 목표를 향한 길인 개성화의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개성화 과정은 개별 인격이 전체성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 정신의 고유한 내재적 충동입니다. 인간 모두에게 펼쳐진 정신적 발전을 향한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장막에 함께 사는 삶과 주님의 성산을 향한 지향은 우리에게 필수적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함께 할 세 가지 조건
그렇다면 이런 주님의 장막에서 함께 살고, 성산에 머물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요? 그 조건을 2-5절까지 노래합니다. 엄밀하게 살펴보면 그 조건은 2절에 모두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3-5절은 부정적 조건을 진술합니다.
첫째는 깨끗한 삶, 둘째는 정의를 실천하는 삶, 셋째는 마음의 진실을 말하는 삶입니다. ‘깨끗하다’는 말은 개역개정에서는 ‘정직’이라고 번역합니다. 원어는 ‘타밈’으로 ‘흠없는’, ‘완전한, 온전한’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깨끗한 삶이란 불순물이 제거된 상태, 정화된 상태를 표현합니다. 이런 상태는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도달할 수 없습니다. 완전무결한 상태는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깨끗함이란 과정 속에서 실행해야하는 정화의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외적 내적으로 수많은 것들로부터 오염되고 더러워집니다. 눈과 귀, 입과 손과 발, 우리의 마음이 온갖 것에 의해 투입당하고, 투사하면서 몸에 떼가 끼듯 더러움이 쌓입니다. 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나를 깨끗이 하는 방식은 나의 내면을 탐색하는 것입니다. 묵상하기, 조용히 머물러 있기, 꿈을 살피기 등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더러움을 발견하고 씻을 수 있습니다. 올 한 해 나를 깨끗이 하는 매일의 작업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에 10분이라도 나를 반성하는 시간을 통하여 내면의 정화작업을 해나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다음으로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조건은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정의’는 개역개정에는 ‘공의’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어는 ‘차디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언약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며, 이웃과의 관계에서 의로운 삶을 준수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집단의식의 의무나 도덕 규범에 의해 실천되는 정의실현을 넘어선 개념입니다. 정의의 기준점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말하면 집단적 무의식의 절대법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의 객관적 기준에 의거하는 정의입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삶이란 내면의 법칙을 따라 사는 것이요 해야만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삶을 경계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내면의 법칙, 하나님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정의로움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이었으면 합니다.
마지막 조건은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 안에 있는 진실을 발설하는 삶입니다. 내 마음 안에 있는 진실을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함이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마음의 생각이 신뢰할 만함을 가리킵니다. 신뢰할 만한 것을 발설하며 살아가는 삶이 나를 반성적으로 볼 수 있고, 내면과 조화를 이루어 사는 자만 가능할 것입니다.
《논어》 학이편에서 증자는 매일 세 가지를 반성한다고 말합니다. 증자왈曾子曰 오吾 일삼성오신日三省吾身하나니 위인모이불충호爲人謀而不忠乎아, 여붕우교이불신로與朋友交而不信乎아 전불습호傳不習乎아니라.
“증자는 말했다. ‘나는 날마다 다음 세 가지 점에 대해 나 자신을 반성한다. 남을 위하여 일을 꾀하면서 진심을 다하였는가? 벗과 사귀면서 신의를 지키었는가? 전수받은 가르침을 반복하여 익혔는가?”
이런 반성적 시각을 가지고 자신을 살필 수 있는 자만이 마음 안에 있는 진실을 말하여 하나님의 장막을 중심에 두고 동거동락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장막에 함께 살고,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물 수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습니다(5b). 주님의 장막과 거룩한 산이 삶의 유혹에서 중심을 유지하게 하고, 폭풍우와 전쟁 속에서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주님의 장막에 함께 살 수 있는가? 당신은 주님의 거룩한 산에 머물 수 있는가? 불안하고 멀미나는 세상입니다. 마음을 미혹하여 한 눈 팔게 하는 세상입니다.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의 장막을 중심에 모시고, 주님의 거룩한 산을 지향삼아 세상 한복판에서 사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두려움에 삶의 멀미를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