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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전명시감상] 9 - 왕사진 / 심경호 왕사진(王士?, 1634~1711)
1. 신운(神韻) 동양문고에 《정화선존(精華選存)》 1책이 있다. 청나라 초의 시인 왕사진(王士?)의 시를 완당노인 김정희가 수정(手訂)한 것을 구한말의 장서가 심의평(沈宜平)이 베낀 것이다. 수정이란 손수 선정하고 원문의 글자에 잘못이 있으면 정정하기도 한 것을 말한다. 김정희는 흔히 추사(秋史)라는 호로 알려져 있지만, 이 책에서 그는 완당노인(阮堂老人)이란 호를 사용했다. 완당은 청나라의 학자이자 문인인 완원(阮元)을 흠모하여, 완원의 이름을 따서 호를 지었다고 전한다. 심의평은 자가 승여(昇如)로, 본관은 청송이다. 음사로 군수를 지냈다. 일생 동안 일만 사천 권이나 되는 책을 모았는데, 늙어서도 그치지 않았다. 김정희가 지니고 있던 인장을 여럿 자기 소장의 책에도 찍었다. 하지만 위조를 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김정희를 숭모하여 그런 것이라고 전한다. 동양문고의 《정화선존》이란 책은 국내의 추사 연구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2012년 2월 3일, 동양문고의 서적을 조사하면서 처음으로 보았다. 겉표지에는 제첨(題籤)을 따로 붙였다. 그 제첨의 제목이 ‘정화선존(精華選存)’이고, 제목 아래에는 “부(附) 윤하칠절(綸霞七絶) 미인향초(美人香草)”라고 적었다. 내용을 보면 〈정화일선(精華一選)〉 〈정화이선(精華二選)〉 〈정화절구선존(精華絶句選存)〉 〈정화절구이존(精華絶句二存)〉 〈윤하칠절(綸霞七絶)〉 〈미인향초집(美人香草集)〉의 6부로 되어 있다. 여기서 〈윤하칠절〉과 〈미인향초집〉은 부록이다. 〈윤하칠절〉은 전문(田雯, 1635~1704)의 시 가운데 칠언절구만을 뽑은 것이다. 전문은 청나라의 문인이자 관료로? 자(字)는 자륜(子綸)? 혹은 윤하(綸霞)이고, 호는 몽재(蒙齋)이며 자호는 산강자(山疆子)이다. 그러나 덕주(德州, 지금의 산둥 성 더저우 시) 사람이라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덕주 선생이라고 더 많이 불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전문의 시문을 모은 《고관당집(古觀堂集)》 8책이 소장되어 있다. 한편 〈미인향초집〉은 소동파 등의 사(詞)를 선별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화선존》에서 왕사진의 시를 선별한 부분은 〈정화일선〉 〈정화이선〉 〈정화절구선존〉 〈정화절구이존〉 등이다. 내표지를 보면 ‘정화선존’이라는 제목 오른쪽에 길상실원본(吉祥室原本)이라 적고 제목 왼쪽에는 고향서옥장(古香書屋藏)이라 했다. 그리고 내표지의 오른쪽 아래에는 ‘청송심씨연고당도적(靑松沈氏淵古堂圖籍)’의 방형 붉은 도장을 눌러두었다. 길상실, 고향서옥, 그리고 연고당은 모두 심의평의 서실 이름이다. (사진 삽입-《정화선존(精華選存)》 일본 동양문고 소장) 동양문고 소장의 《정화선존》은 일제강점기에 마에마 교사크(前間恭作)가 수집한 책이다. 그래서 내표지의 ‘길상실원본’이라는 글씨의 윗머리에 ‘재산루수서지일(在山樓蒐書之一)’이라고 적힌 둥근 도장이 눌러져 있다. 《정화선존》은 김정희가 왕사진의 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또 그의 감식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이 귀중한 문헌이 마에마 교사크의 손을 거쳐 도쿄의 동양문고에 있다는 사실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2. 김정희가 《정화선존》에 그 시를 뽑아 실어둔 왕사진은 한시의 역사에서 신운(神韻)의 설을 제창한 것으로 저명하다. 왕사진은 자가 이상(貽上) 혹은 자진(子眞)이고, 호는 완정(阮亭)·어양산인(漁洋山人)이다. 지금의 산둥 성 환대현(桓臺縣)에 해당하는 신성(新城) 사람이다. 본래 이름은 왕사진이었으나, 그가 죽은 후 청나라 옹정제의 이름인 윤진(胤?)의 글자를 피하여 왕사정(王士正) 혹은 왕사징(王士徵)이라고 고쳤다. 그 후 건륭제가 왕사정(王士禎)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왕사진은 또한 찬제거사(?提居士)라는 호도 사용했다. 영조 때 요절한 조선의 시인 이언진(李彦?, 1740~1766)이 찬제거사라는 호를 사용한 것은 왕사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찬제란 범어 ksanti의 음역으로, 마음을 안정시켜 온갖 모욕과 번뇌를 참는 수행을 말한다. (사진 삽입-왕사진(1634~1711) 초상)
왕사진은 1655년(청나라 순치 12)에 진사가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형부상서를 지냈다. 시를 잘 지었는데, 청수(淸秀)하고 한아(閑雅)하며 담백하면서도 유창하고, 시상이 넓고 풍부하다. 늘그막에는 작품이 더욱 독특하여 청나라 제일의 시인으로 꼽혔다. 일찍이 명말 청초의 시인 전겸익(錢謙益)·오매촌(吳梅村)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큰형 왕사록(王士祿), 셋째 형 왕사우(王士祐)와 더불어 ‘삼왕’으로 일컬어졌다. 또 같은 시대의 뛰어난 시인 주이준(朱彛尊)과 함께 ‘주왕(朱王)’이라 병칭되었다. 조집신(趙執信)이란 시인은 그를 비판했지만 대부분의 청나라 사람들은 서척(書尺)과 필화(筆話)에서 ‘어양(漁洋)이란 두 글자만 나오면 반드시 도행(跳行)하여 쓸 정도로 그를 존경했다. 문집으로 《대경당전집(帶經堂全集)》이 있다. 왕사진은 어렸을 때 형 왕사록의 가르침을 받아서 왕유·맹호연·왕창령·위응물·유종원의 시를 본받게 되었다. 28세로 양주(揚州)에 있을 때 둘째 아들을 위해 당시(唐詩) 가운데 5·7언 율시와 절구를 뽑아서 그 선집을 《신운집(神韻集)》이라고 했다. 왕사진이 이 선집을 ‘신운’이라 부른 것은 송나라 엄우(嚴羽)의 《창랑시화(滄浪詩話)》를 계승한 것이라고 한다. 《신운집》에서 왕사진은 왕유 등 자연과의 혼연일체를 노래한 시들을 뽑았다고 한다. 단, 이 시집은 전하지 않는다. 55세 때는 《당현삼매집(唐賢三昧集)》을 편찬하여, 성당의 근체시에 구현된 오도(悟道)의 경지를 존중하고, 시와 선(禪)이 일치한 경지를 추구했다. 왕사진은 시에서 신운을 주장했다. 시의 상징성과 이미지를 중시하고, 외부 대상에 접하여 일어나는 흥취(興趣)를 추구했으며, 투철(透徹)의 오(悟)를 시 창작 방법으로 삼았다. 그는 그러한 주장을 《어양시화(漁洋詩話)》나 《대경당시화(帶經堂詩話)》에서 거듭해서 주장했다. 이것은 청나라 초의 여러 시인들이 유민(遺民)을 자처하여 황량하고 비장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과는 다르다. 왕사진은 산수를 사랑하여 담려(淡麗)함과 호방(豪放)함을 시에 담았다.
현대시는 이미지를 중시한다. 이미지란 ‘상상력에 의하여 구체적인 정경(情景)을 마음속에 그리는 일’ 또는 ‘이전에 감각으로 얻었던 것을 마음속에서 재생한 것’을 뜻한다. 이미지는 심상(心象) 또는 영상(映像)이라고 번역한다. 문학에서는 언어를 이용하여 이미지 군(群)을 마음속에 생산하게 되는데, 그것을 이미저리(imagery)라고 부른다. 그것을 상상력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시는 이미지를 통하여 시의 주제나 시인의 정서를 표현한다. 이미지를 제대로 표현하지 않은 시는 비시적(非詩的)이라고 간주된다. 한시는 비시적인 것들도 용납한다. 시의 리듬만으로 시의 주제나 시인의 정서를 표현한 훌륭한 시가 있다. 설리적(說理的)인 시가 그 예이다. 다만 한시라고 하여도 대개는 이미지를 중시한다. 그런데 현대시에서는 객관 대상이나 경치를 재현하기보다도 이미지 자체를 중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시들을 흔히 절대 이미지(심상)의 시라고 한다. 한시에서 이미지를 중심한 것이 바로 왕사진의 신운설이다. 심지어 그는 상상 속의 경관을 이미지 중심으로 중첩하는 방식을 택했다.
왕사진은 사공도의 작품이라고 전해 오는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 가운데 “한 자도 쓰지 않고 멋을 모두 표현한다(不着一字盡風流)”라는 글귀를 좋아해서, 시에서 언외(言外)의 무한한 맛을 추구했다. 또한 왕사진은 남송의 엄우(嚴羽)가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선도(禪道)는 오직 오묘한 깨달음에 있고 시도(詩道) 또한 오묘한 깨달음에 있다.”라고 하여 선과 시의 동질성을 언급한 것에 주목했다. 그래서 “사다리를 버리고 언덕에 오르는 것을 선가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라 하고, 시인은 조화의 경지라 하므로, 시와 선은 차별이 없다.”라고 했다. 그 결과 왕사진은 시에서 함축과 자연, 충담(沖澹)과 묘오(妙悟)를 가장 중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시에서 회심(會心)을 중시하여 《당현삼매집(唐賢三昧集)》의 자서(自序)에서 사공도와 엄우의 시는 별도로 회심이 있다고 했다. 왕사진은 왕유?배적?이백?상건?맹호연?유신허(劉?虛, 劉愼虛) 등의 오언시에 담긴 묘제(妙諦)와 미언(微言)을 선(禪)의 경지라고 간주했다. 그리고 고계(高啓)?조능시(曹能始)?이태허(李太虛)?정맹양(程孟陽) 등의 율시에도 천연의 신운이 있다고 보았다. 특히 왕사진은 《당인만수절구선(唐人萬首絶句選)》 7권을 엮어서, 당시의 절구 가운데 신운이 깊은 시들을 제시했다. 이것은 송나라 홍매(洪邁)가 편한 《만수당인절구(萬首唐人絶句)》 1백 권을 토대로 독자적인 시관에 따라 시들을 선별한 것이다. 왕사진은 시의 외계적 범위가 넓고 아득하고, 물상의 인상이 아련하고 흐릿하며, 가을?밤?저녁의 시간을 노래하여 격렬한 열정보다도 맑고 심원한 맛을 중시하는 시풍을 추구했다. 따라서 그가 말한 신운이란 언어의 지시적 기능(denotative function)보다도 함축적 기능(connotative function)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서, 외물에 속박되지 않는 평정한 마음 상태를 추구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시에서 사실 자체를 중시하지 않고 상상적인 시공간을 감각적으로 제시하려고 했다. 왕사진이 신운설의 이론을 적용하여 지은 시로는 〈추류(秋柳)〉 4수를 손꼽는다. 왕사진은 그 시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날 강남의 왕자(굴원을 가리키는 듯)는 낙엽에 느껴 슬픔을 일으키고 금성(金城)의 사마(동진의 桓溫)는 버드나무 긴 가지를 붙잡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나는 본디 한 많은 사람으로서 성격이 툭하면 감개하고는 한다. 정을 양류(楊柳)에 붙이는 것이 《시경》 소아 〈출거(出車)〉 편에 나오는 말몰이 병사와 같다. 슬픈 가을에 가탁하여 상념을 흘려내고 상수 언저리의 상부인을 멀리 바라보노라. 마침 네 편의 시를 이루었으므로 친구들에게 보인다. 정유년[순치 14년] 가을, 북저정(北渚亭)에서 쓴다. 〈추류秋柳〉의 첫 수를 소개하면 이렇다. 김정희도 《정화선존》의 맨 처음에 이 〈추류〉시를 뽑아두었다. 秋來何處最銷魂 가을 들어 어디가 가장 애간장을 끊는가 殘照西風白下門 금릉성 백하 문 근처, 낙조 비치는 곳 他日差池春燕影 지난날엔 봄 제비 그림자 들쑥날쑥하더니 祗今憔悴晩煙痕 지금은 쓸쓸하구나 저녁나절 안개 속 愁生陌上黃?曲 죽은 애마 위해 당태종이 지은 맥상황총곡은 수심을 일으키고 夢遠江南烏夜村 강남 오야촌에 태어난 하황후의 일, 아득하기만 해라 莫聽臨風三弄笛 환이(桓伊)가 왕휘지(王徽之) 위해 세 번 불었다는 피리 곡조, 견디기 어렵구나 玉關哀怨總難論 옥문관 병사들이 이 곡 듣고 슬픔에 잠길 마음은 도무지 표현키 어려워라
이 시는 전고를 많이 사용하여, 신운을 주장하는 논리와 모순되는 듯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왕사진은 이 시에서 애상의 정경을 중첩해서 상상케 하여 애상 속으로 젖게 만들었다. 그 정경은 결코 실제 경치가 아니라 이미지로 재구성된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신운을 추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 삽입-《정화선존(精華選存)》에 실린〈추류(秋柳)〉 4수,) 3. 왕사진의 시는 눈앞의 광경을 세밀하게 그리지 않고, 오히려 안개에 낀 부연 모습과 애상적 정조를 자아내는 정경을 그려냈다. 이를테면 〈청산(靑山)〉에서 왕사진은 안개에 가린 흐릿한 광경을 연출하면서 애상적 정조를 고조시켰다. 新雨過靑山 갓 내린 비가 청산을 지나자 新 : 晨. 微. 漠漠寒煙織 아득아득 찬 안개가 비단 짠 듯하여 不見?陵城 말릉성은 보이지 않으나 坐愛秋江色 가을 강의 빛을 앉아서 사랑하노라 남경 근처 고우라는 곳에 배를 정박하고 지은 〈고우야박(高郵夜泊)〉은 이러하다. 이곳은 양자강의 지류인 진회가 있어, 예부터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특히 북송의 진관(秦觀)이 이곳을 사랑했다. 하지만 왕사진이 이곳에 갔을 때는 풍류스런 시인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살풍경한 광경을 왕사진은 서운해했다. 寒雨秦郵夜泊船 찬비 내리는 진우, 한밤의 배에 묵으니 南湖新漲水連天 남쪽 호수에 불어난 물이 하늘에까지 닿아 있다 風流不見秦淮海 북송의 진관(秦觀)처럼 풍류를 아는 사람은 보이지 않으니 寂寞人間五百年 적막한 인간세상 오백 년이나 지났구나 진관의 자는 소유(少游)인데, 호가 회해(淮海)이므로 사람들이 그를 진회해(秦淮海)라고 일컬었다. 소식(蘇軾)에 의해 현량방정(賢良方正)으로 천거되어 태학박사(太學博士), 국사원 편수(國史院編修)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문학이 뛰어났다. 황정견(黃庭堅)의 시 〈병기형강즉사(病起荊江卽事)〉에 “문 닫고 앉아 시구 찾는 이는 진무기이고, 손 마주해 붓 휘두르는 이는 진소유로다[門覓句陳無己, 對客揮毫秦少游]”라고 했다.
한편 왕사진의 〈진회잡시(秦淮雜詩)〉는 금릉(金陵) 옛 교방의 고사를 소재로 한 시이다. 《지북우담》에 ‘탈십랑, 정라낭(脫十娘鄭妥娘)’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즉, 금릉의 옛 교방에는 돈(頓)과 탈(脫)이란 성의 기녀들이 있는데, 이들은 원나라 사람으로서 교방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순치(順治) 말년에 왕사진이 강녕(江寧)이 있을 때, 탈십랑(脫十娘)이 나이 여든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생존해 있어서, 만력 연간에 북리(北里)에서 가장 뛰어났다. 그래서 왕사진은 느낌이 있어서 다음 시를 지었다. 舊院風流數頓楊 구원의 풍류라면 돈문과 양옥향을 손꼽았지 梨園往事淚沾裳 이원의 지난 일들 생각하면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樽前白髮談天寶 술잔 앞에 백발로 천보 연간(화려했던 시절)을 얘기하나니 零落人間脫十娘 초라한 인간 세상의 탈십낭이로다 마치 강주 사마 백거이가 옛 교방의 비파 연주가를 만나 눈물지었던 것과 같은 무상감을 토로했다. 왕사진의 〈혜산하추류기과방(惠山下鄒流綺過訪)〉은 절묘한 시이다. ‘혜산 아래 추류기를 지나며’라는 뜻의 제목이다. 雨後明月來 비 갠 뒤, 밝은 달 뜨고 照見下山路 내려가는 산길 비추어 본다 人語隔谿煙 계곡 안개 너무 사람의 말소리 人語隔溪煙, 借問停舟處 잠깐 배 머룰 곳을 물어본다.
왕사진은 강소성 소주 풍교진(楓橋鎭)의 한산사에 밤비가 내리는 광경을 두 수의 시로 묘사해내었다. 제목은 〈야우제한산사기서초례길이수(夜雨題寒山寺 寄西樵禮吉 二首)〉인데, 밤비 속에 한산사를 두고 시를 지어 형 서초와 예길에게 부친 두 수라는 뜻이다. 그 첫 수는 다음과 같다. 日暮東塘正落潮 날 저물어 동쪽 못에 조수가 떨어질 무렵 孤?泊處雨瀟瀟 외로운 배 정박한 곳에 쓸쓸하게 비가 내린다 疏鐘夜火寒山寺 성긴 종소리 들리는 밤, 한산사 불빛이 또렷하다 記過吳楓第幾橋 단풍 든 오 땅 몇 번째 다리를 지났는지 기억한다오 이 시는 당나라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에서 시상을 빌려 왔다. 두 번째 수는 이러하다. 楓葉蕭條水驛空 단풍잎 성글어지고 물가의 역관은 비었는데 離居千里?難同 천리 멀리 헤어져 함께 하기 어려워 서글퍼라 十年舊約江南夢 함께 강남을 노닐자던 십년 약속이 한갓 헛된 꿈이 되어 獨聽寒山半夜鐘 한밤 한산사 종소리를 홀로 듣노라
〈비릉귀주(毗陵歸舟)〉라는 시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泊船西?河 배를 서려의 강에 정박하여 解纜東城路 닻줄을 동성의 길에 푼다 ?月淡孤舟 서늘한 달은 외로운 배에 맑게 비치고 遙村隱紅樹 먼 곳의 마을은 붉은 나무숲 속에 은은하다 杳杳暮歸人 아득하여라 저물녘 돌아오는 사람 悠悠渡江去 유유히 강 건너 떠나가네 〈파교기내이수(?橋寄內二首)〉는 사천(四川) 향시의 시험관이 되어 길을 떠나 장안 근처의 파교에서 아내에게 부친 두 수의 시이다. 그 첫 수는 이러하다. 長樂坡前雨似塵 장락 고개 앞에 비는 먼지같이 내리고 少陵原上淚霑巾 소릉 언덕에서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橋兩岸千條柳 파교 양쪽 언덕에 있는 버드나무 천 가지를 送盡東西渡水人 동쪽 서쪽으로 강물 건너는 이들에게 보낸다오 당시 왕사진의 부인 장씨(張氏)는 아들을 잃고 스스로도 병석에 누워, 마치 영결하듯이 왕사진을 떠나보냈다. 장씨는 추평(鄒平) 사람으로 강남 진강부(鎭江府)의 추관(推官) 장만종(張萬鍾)의 딸이며, 도찰원좌도어사(都察院左都御史)로 시(諡)가 충정공(忠定公)인 장연등(張延登)의 손녀이다.
〈파교기내이수(?橋寄內二首)〉의 둘째 수는 이러하다. 太華終南萬里遙 태화 끝 남 쪽 땅은 만리나 아득하니 西來無處不魂銷 서쪽으로 와서 상심하지 않는 곳이 없구려 閨中若問金錢卜 규중에서 만약 돈으로 점을 친다면 秋雨秋風過?橋 가을비 가을바람 속에 파교를 지난다고 나올 것이오.
왕사진은 죽은 아내를 애도하는 시인 〈도망시(悼亡詩)〉에서, 병치레가 잦은 자신을 애처로워하는 구절을 남겼다. 즉 “약로경권송생애(藥爐經卷送生涯)”라는 구절로 ‘약로를 경전 삼아 생애를 보내다’라는 뜻이다. 이 시는 왕사진이 43세에 북경에서 호부(戶部)의 관직에 있을 때 아내 장씨(張氏)의 죽음을 맞아 지은 시라고 한다. 왕사진의 〈도망시〉는 26수나 되는 연작시인데, 그 가운데 제23수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藥爐經卷送生涯 약로를 경전 삼아 평생을 보내니 禪榻春風兩?華 선탑에 부는 봄바람에 두 귀밑머리 세었네 一語寄君君聽取 한 마디 그대에게 보내니 잘 들으시게 不敎兒女衣蘆花 “아이들에게는 갈대꽃 넣은 옷 입히지 않으리다.” 약로(藥爐)는 약 달이는 화로, 선탑(禪榻)은 참선할 때 앉는 평상이다. 왕사진은 자신이 병치레를 하여 항상 약을 달여 먹고 지내면서, 한편으로는 선탑에서 참선에 드는 일이 많다고 말한 것이다. 갈대꽃 넣은 옷[蘆花衣]이란 공자의 제자인 민자건(閔子騫)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민자건이 어렸을 때 그의 계모는 한겨울에 자신이 낳은 두 아들에게는 솜을 넣은 옷을 입혔으나, 전처소생인 민자건에게는 갈대꽃을 넣은 옷을 입혔다. 두툼하게 보이지만 따뜻하지 않은 옷을 말한다. 여기서는 죽은 아내가 자식 사랑이 남달랐던 것을 추억하면서, 그대가 죽은 뒤에도 재혼을 하지 않고 아이들을 모두 따뜻하게 보살피겠노라고 약속한 것이다. 이 시의 운각(韻脚)은 涯, 華, 花이다. 평수운(平水韻)에 따르면 상평성 제9 佳운[涯]과 하평성 제6 麻운[花와 華]을 통압(通押)했다. 평수운을 이용한 엄격한 격식과는 동떨어져 있으나, 근대의 시인들은 왕왕 이와 같이 통압하기도 했다. 또한 〈도망시〉 제26수에서 왕사진은 이렇게 읊었다. 宦情薄似秋蟬翼 벼슬살이 생각은 엷기가 가을 매미 날개와 같고 愁思多於春繭絲 가을 상념은 봄누에가 실 뽑아내는 것보다 많도다 此味年來誰領略 이 맛을 이즈음 누가 맛볼 것인가 夢殘酒渴五更時 지난밤 꿈이 남고 술이 몹시 마시고픈 오경의 이 기분
이덕무는 왕사진의 〈진주절구(眞州絶句)〉를 사랑했다. 진주는 양저우(揚州)의 서쪽에 있는 명승지였다. 〈진주절구〉는 모두 6수인데, 이덕무는 그 제4수를 특별히 언급했다. 江干多是釣人居 강가엔 낚시하는 사람들 많은데 柳陌菱塘一帶疏 버들 길 마름 뜬 못, 일대가 시원하다 好是日斜風定後 좋구나 해 기울고 바람 잔 뒤 半江紅樹賣?魚 온 강의 붉은 나무 아래 농어 파는 정경이여
4.
한편 왕사진은 당나라 유종원의 〈강설(江雪)〉에 나오는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구절을 사랑했다. 이 구절은 다음 시에 나온다. 千山鳥飛絶 즈믄 산에 새들의 비상 끊어지고 萬逕人踪滅 온 길에 사람의 자취 사라진 때 孤舟蓑笠翁 외로운 배에 도롱이 삿갓의 늙은이 獨釣寒江雪 눈 내리는 추운 강에서 홀로 낚시질하네
유종원의 이 시는 의경(意境)이 청고(淸高)하고 격조(格調)가 고아(高雅)하여 만고절창으로 꼽힌다. 천지가 은빛인 속에서 홀로 빈 낚시를 드리운 뜻은 강태공 여망이 천하 경영의 의지를 상징한다. 또 선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방편을 넘어선 절대인식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의 주제로 그림을 그렸고, 또 제화의 시나 속찬의 시를 지었다.
溫其球. 秋江獨釣圖
그런데 왕사진은 추운 겨울 강에서 홀로 낚시하는 모습이 아니라 가을 강에서 홀로 낚시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에 제화시를 남겼다. “추강독조도(秋江獨釣圖)”라는 제목이다. 청나라 화가 대진(戴進)이 선면(扇面)에 그린 〈추강독조도(秋江獨釣圖)〉에 제화시를 쓴 것이다. 一蓑一笠一扁舟 도롱이 하나, 삿갓 하나, 조각배 하나 一丈絲綸一寸鉤 한 발 낚싯줄, 한 마디 낚싯바늘 一曲高歌一樽酒 한 자락 노래, 한 주발의 술 一人獨釣一江秋 한 사람 홀로 가을 강 하나에서 낚시하누나 一자를 연결하여 만든 유희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시이다. 왕사진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일자(一字) 시 한 수를 남겼다.
왕사진은 한편으로는 고시에 평측의 법칙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왕문간고시평측론(王文簡古詩平仄論)》을 남겼다. 그 핵심은 장편 칠언고시의 평운도저와 측운도저 형식에서 출구와 대구(낙구)의 평측을 번잡하게 규정한 것이다. 한편 왕사진의 조카사위 조집신(趙執信)은 《성조보(聲調報)》를 지어, 오언고시?칠언고시?악사(樂詞)?오언율시?오언고시?칠언고시?제량체(齊梁體)?반격시(半格詩)?오언율시?칠언율시?오언절구?칠언절구?악부(樂府)?잡언(雜言)?백량체(柏粱體)의 형식을 논했다. 《왕문간고시평측론》에서 왕사진은 평운도저 칠언고시는 율구를 절대로 피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하여 여러 규칙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측운도저 칠언고시에 대해서는 그것이 태반이 측운을 이용하므로 규칙을 엄격히 지킬 필요가 없어서 중간이 율구와 비슷하여도 무방하다고 했다. 한편 조선의 정약용이나 홍길주는 왕사진의 고시평측론을 비판하고 스스로 독자적인 이론을 주장해서 자신의 시에서 실험해 보았다. 왕사진이 쓰촨(四川)으로 향할 때 산시성(陝西省) 포성현(褒城縣) 북쪽에 있는 칠반령(七盤嶺)에서 지은 오언 장편고시를 소개하기로 한다. 칠반령을 넘어 사천으로 들어가는 길은 포사(褒斜)라는 골짜기를 거쳐야 한다. 七日行褒斜 칠일에 포사를 가노라니 目?耳亦聾 눈은 침침하고 귀도 꽉 막힐 정도 濁浪奔崖垠 탁랑은 벼랑 밑둥을 무너뜨리고 征衣碎蒙茸 나그네 옷은 너덜너덜 찢어진다 不知天地? 천지가 얼마나 넓은지 모르니 ?測造化功 어찌 조화의 공을 헤아리랴 ?然土囊口 우람하여라 흙주머니 입구(골짜기) ??摩蒼穹 닭 볏 같은 계옹산(鷄翁山)은 푸른 궁륭(하늘)을 문댈 기세 ?道上七盤 돌길로 올라 일곱 번 굽어 도니 大?排天風 커다란 날개(산)가 하늘의 바람을 밀쳐내고 絶頂忽開豁 절정은 홀연 널찍하게 트여 白日當虛空 백일은 허공 한가운데 떠 있다 褒水出谷流 포수(강)는 골짜기에서 나와 흐르고 漢江繞其東 한강은 동쪽을 굽어 나가며 巴山跨秦蜀 파산(파령)은 섬서와 사천을 걸터타고 ??連上庸 구물구물 상용의 땅으로 이어진다 川原盡沃野 강 유역의 벌판은 모두 비옥하여 天府如關中 천연의 곳간이 관중(섬서 지역)과 같다 橘柚鬱成林 귤과 유자는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稻?亦?? 벼 이삭도 무성하다 襄陽大?來 양양(하북성)에서 큰 배가 와서 千里帆檣通 천리에 돛대 올린 배들이 통한다 當年號天漢 초한 전쟁 때는 천한(하늘의 강)이라 일컬었고 運歸隆準公 운세가 콧대 우뚝한 유방에게 돌아가매 將相得人傑 인걸을 얻어 장수와 재상으로 삼았고 驅策芟?雄 그 모책을 구사하여 뭇 영웅들을 베어버리고 一戰?三秦 한 번 싸워 삼진의 땅을 거두어 遂都咸陽宮 마침내 함양의 궁에 도읍을 정했다만 智勇久淪沒 지혜 있는 자들도 용기 있는 자들도 모두 세상을 떠나고 山川自?? 산은 절로 높고 강물은 절로 나직하다 跋馬向褒國 말머리를 되돌려 포국(섬서성 포성현)으로 향하니 日落烟?? 해는 지고 곳곳의 인가에서 연기가 뭉글뭉글 일어난다 왕사진은 산수의 경치를 묘사하면서 역사의 사실을 환기하면서 애상의 심리를 드러내었다. 즉, 이 시에서 그는 초한전쟁의 영웅들도 모두 사라진 역사의 무상함을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기세가 웅혼하다. 왕사진은 신운의 시를 추구했지만, 그가 말한 신운은 반드시 우아함만을 뜻한 것은 아니다. 이 시에서처럼 웅혼한 기세의 신운도 있다. 그런데 왕사진은 애상의 심리를 드러내지만 비장한 심사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산수의 험준한 기상과 역사의 굴곡진 흐름을 노래하면서 인간 내면의 복잡한 심사를 드러내었다. 역사를 통해서 산수를 묘사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한 것이다. 왕사진은 이처럼 역사를 가지고 산수를 묘사하는 것을 즐겼다. 김정희가 《정화선존》에 뽑은 〈우후관음문도강(雨後觀音門渡江)〉 시를 한 수 더 보기로 한다. 飽?輕帆?暮晴 가벼운 돛은 한껏 걸고 맑은 저녁에 나아가니 寒江依約落潮平 차가운 강물이 아련하게 썰물로 나직하다 吳山帶雨參差沒 오 땅의 산은 비를 머금어 들쑥날쑥 모습을 감추고 楚火沿流次第生 초 땅의 불빛은 강물을 따라 하나 또 하나 생겨난다 名士尙傳揮扇渡 백우선 흔드는 명사가 강을 건넌 이야기를 전한다만 踏歌終怨石頭城 석두성의 답가(踏歌)는 끝내 원망스럽구나 南朝無限傷心史 남조의 무한히 가슴 아픈 역사는 ??秦淮玉笛聲 애절하게 진회(秦淮) 지역 옥피리 소리에 담겨 있도다 이 시의 전반부는 비가 내리는 몽롱한 광경과 강기슭의 불빛을 묘사했다. 후반부는 진(晉)나라 때 오 땅 사람 고영(顧榮)이 진민(陳敏)이 난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 양쯔 강을 건넌 역사를 환기하고, 석두성(石頭城)의 지형을 묘사해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과거의 역사가 모두 진회의 옥피리 소리에 담겨 있다고 했다. 진회는 석두성 부근의 강물이다. 석두성은 송나라와 제나라의 도읍지인 건강(建康)의 별칭으로, 지금의 난징(南京)이다. 남조(南朝) 제(齊)나라의 저연(?淵)은 송(宋)나라 명제(明帝)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명제가 죽을 때, 그를 중서령(中書令)과 호군장군(護軍將軍)으로 삼아 상서령(尙書令) 원찬(袁粲)과 고명(顧命)을 받들고 어린 임금을 보좌하라는 유조(遺詔)를 내렸다. 그러나 소도성(蕭道成)이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제(齊)나라를 세울 때 원찬과 유병(劉秉) 등은 불복하였으나 저연은 소도성을 도왔으므로 제나라에서 영화를 누렸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 “가련하다 석두성아, 원찬처럼 죽을망정, 언회(彦回)처럼 살지 마세(可憐石頭城, 寧爲袁粲死, 不作彦回生).”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언회는 저연의 자(字)이다. 왕사진이 말한 답가(踏歌)는 곧 당시 백성들이 저연의 변절을 비난해서 부른 민요를 말하는 듯하다. 이 시에서 왕사진은 과거의 역사를 다루어 애수를 자아내되, 비장미를 추구한 것은 아니다. 산수를 방관하는 시선을 유지했다. 왕사진은 인간이 추억에 사로잡혀 끝도 없는 애상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다만 그렇게 애상을 경계했다는 것 자체가 애상의 문제를 깊이 생각했다는 증좌는 아닐까? 그의 수필집 《지북우담(池北偶談)》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人生最係戀者過去, 最冀望者未來, 最悠忽者見在. 夫過去已成逝水, 勿容係也. 未來茫如捕風, 勿容冀也. 獨此見在之頃, 或窮或通, 時行時止, 自有當然之道, 應盡之心. 乃悠悠忽忽, 姑俟異日, ?責他人, 歲月虛擲, 良可浩嘆.
사람이 살면서 가장 연연하는 것은 과거이고, 가장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미래이며, 가장 소홀히 하기 쉬운 것은 현재이다. 대저 과거는 이미 흘러간 물이 되었으니 얽매여서는 안 된다. 미래는 아득하기가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으니 바라서는 안 된다. 오직 이 현재의 시점에서 궁한 처지에 있건 달한 처지에 있건, 때를 얻으면 행하고 때를 얻지 못하면 멈추어, 절로 마땅히 그러한 이치와, 응당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을 두어야 한다. 그렇거늘 유유하거나 홀홀하거나 하여, 짐짓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세월을 헛되이 보낸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5.
왕사진은 예술에 특별한 감식력이 있어서, 조선 문인들도 모두 흠모했다. 이미 허균은 명나라 이반룡(李攀龍)과 청나라 왕사진을 좋아하여 그들의 시에 차운한 작품들을 여럿 남겼다. 순조 때 신위(申緯)는 〈관극절구(觀劇絶句)〉를 남겨 유명하지만 왕사진의 〈추류〉를 본떠 〈후추류(後秋柳)〉를 남겼다. 그밖에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박지원 등이 모두 왕사진의 영향을 받았다. 또 왕사진은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조선채풍록(朝鮮採風錄)》의 시를 약간 기록해 두어서, 조선 문인들의 호감을 샀다. 《채풍록》은 강희 무오년(1678, 숙종 4)에 일등 시위인 낭담(狼?)을 명하여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우리나라의 시를 채록하게 했을 때 오나라 사람 손치미(孫致彌)가 부사로 함께 와서 엮은 것이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왕사진의 영향으로, 지인들을 하나하나 추억하는 회인시(懷人詩)가 발달했다. 회인시는 오군영(五君詠)이나 존몰시(存沒詩) 등에서 비롯되었는데, 왕사진이 본격적으로 지은 이후로 청나라와 조선에서 모두 그 양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박제가는 20대에 동시대의 학자, 문인, 예술가를 노래의 대상으로 회인시를 지었다. 서시(序詩)에서 그는 “고매한 선비와 예술가를 따라다니며, 그림에 미치고 글씨에 탐닉하다니 나는 정말 바보로다. 종일 농담하며 거듭 배를 쥐고 웃지마는, 누가 알랴? 사자가 공을 놀리는 줄을(高人藝士鎭相隨, 畵癖書淫我自痴. 終日諧頻絶倒, 誰知獅子弄毬時).”이라고 했다. 박제가는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을 비롯해 강세황, 홍대용, 황윤석 등등을 거론하고, 중국과 일본의 예술가까지 거론했다. 박제가는 중국을 세 차례 여행하고 난 뒤 50명의 중국 지성인들을 소재로 〈속회인시(續懷人詩)〉도 엮었다. 19세기의 이상적(李尙迪)과 김석준(金奭準) 등 여항 문인들도 인생에서 두 번에 걸쳐 회인시와 속회인시를 썼다. 이상적은 역관으로 청나라를 오가면서 만난 사람들을 추억해 85명의 프로필을 시로 그렸다. 김석준은 1869년의 첫 번째 회인시를 《홍약루회인시록(紅藥樓懷人詩錄)》으로 출간했다. 김석준은 조선의 고관·학자·예술가에서부터 여항의 사우(師友)에 이르기까지 200여 명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다. 정조?순조 연간의 문인들은 왕사진의 신운설에 주목했다. 이서구(李書九)가 묘오(妙悟)를 중시한 것은 그 중요한 예이다. 또 대표적 관각문인 남공철(南公轍)도 왕사진의 시를 읽고 난 뒤, “근래에 왕어양의 시를 읽고 아주 좋아하여, 문득 먹 갈고 붓 잡아 한두 구절을 모방하려 했으니, 비유하자면 백 길 깊이의 우물에서 보통의 두레박으로 물을 길으려는 것과 같았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미칠 수가 없어 숨이 차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토로했다. 명대 복고파의 ‘모방’에 염증을 느끼고 문학을 경국(經國)의 이념에 종속시키는 것에 권태를 느끼고 있던 문인들에게 신운설은 대단히 참신한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남공철은 이렇게 말했다. 문을 짓는 것은 모방을 싫어하며 깊이 심취함을 귀하게 여깁니다. 고금의 제가에게서 취하여 푹 젖어서 몸소 체득하여 두면, 종이를 잡고 글을 쓰게 되었을 때, 한 사람의 고인(古人), 하나의 명편(名篇)도 가슴속에 담아둔 적이 없지만, 손길 닿는 대로 고법(古法)에 맞아, 절로 아무개 아무 편의 흔적이 없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모방이란 마치 사람이 향기를 좋아하여 온몸에 향낭(香囊)을 찬 것과 같습니다. 이에 비해 푹 젖어서 몸소 체득함이란, 마치 사람이 하루 종일 향수 가게에 머물러 있으면, 옷과 띠에 향기 나는 물건을 하나도 걸치지 않았는데도 온몸의 향기로 사람을 맞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광수(申光洙, 1712~1775)의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歎關山戎馬)〉는 본래 그의 35세 때 한성시에서 2등으로 급제한 과시(科詩)이지만, 서도지방의 영시(詠詩) 또는 율창(律唱)이라고도 하는 시창(詩唱)을 통해 널리 노래되었다. 줄여서 〈관산융마〉라고 한다. 이 과시의 제목은 당나라 시인 두보가 전란으로 유랑하다가 악주(岳州)의 악양루(岳陽樓)에 올라 북방에 전란이 계속되는 것을 탄식하는 상황을 가상한 것이다. 신광수의 〈관산융마〉는 애상적 정조의 이면 짜기와 점층적 고조의 방식은 서도창에서 가성과 세성을 엮어가면서 감정을 고조시키는 창법과 교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이별의 정한, 소외의 감정을 증폭시켜 전달할 수 있었다. 그 시적 수법은 바로 왕사진의 신운시와 통하는 면이 있다. 그런데 왕사진의 신운설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사대부 문인들은 우환의식(憂患意識)을 벗어버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신위(申緯)는 신운설을 수용하면서도, 왕사진과는 달리 두보의 시에 주목하고 실사(實事)를 강조했다. 그는 “신운의 기준만으로 당나라 시를 모두 논할 수는 없으리니, 실사를 모르고서 어찌 진실을 알랴. 왕유?위응물?한유?두보 그 어느 누구도 폐기할 수 없으니, 이 모두 궤철을 같이하여 문호를 연 사람들이다.”라고 했다. 왕사진의 신운설은 조선의 시인들로 하여금 시적 흥회(興會)를 세련시키는 데 일정한 참조가 되었지만, 아류를 낳지는 않았다. 정약용은 왕사진의 ‘신운’이 함축적인 맛이 높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결국 현실감각이 결여된 작위적 애상으로 흐르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곧, 정약용은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라는 제목의 연작시 가운데 한 수에서 그는 “나는 한유의 〈산석(山石)〉 시구를 사모하나니, 어린 계집 웃음 살까 두렵다만, 억지 슬픔 꾸며내어, 애간장 부러 끊을 수야 없지(我慕山石句, 恐受女郞嗤. 焉能飾悽?, 辛苦斷腸爲)라고 했다. 여랑(女郞)은 원나라 시인 원호문(元好問)이 〈논시절구(論詩絶句)〉 제24수에서 북송 시인 진관(秦觀)을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원호문은 진관의 〈춘일(春日)〉에서 “정 많은 작약은 봄날 눈물을 머금었고, 무기력한 장미는 저녁나절 가지를 눕히고 있네(有情芍藥含春淚, 無力薔薇臥晩枝)”라고 한 표현과 한유의 〈산석(山石)〉 시를 비교하여 “비로소 저것이 계집애 시임을 알겠네(始知渠是女郞詩)”라고 논했다. 조선 후기의 많은 문인들이 왕사진의 신운을 수용하면서도 그 시 정신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왕사진은 시윤장(施閏章)의 오언시 가운데 아름다운 구절들을 뽑아서 〈적구도(摘句圖)〉를 만들었는데, 김정희는 옹방강(翁方綱)의 한시와 시론들을 추려 1830년경에 〈복초재적구(復初齋摘句)〉를 엮었다. 김정희는 비록 왕사진을 흠모했지만, 왕사진만 전공한 것은 아니다. 그는 청나라의 시학 가운데 옹방강의 기리설(肌理說)과 왕사진의 신운설을 함께 받아들였다. 왕사진의 신운론이 예술적 경지의 추상적 국면을 강조한 데에 비해 옹방강의 기리설은 사실적 국면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김정희는 그 둘을 종합하고자 한 것이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쯔보(淄博)에 왕사진 기념관이 있다고 한다. 또 장쑤성(江蘇省) 양저우시(揚州市) 옌푸로(鹽阜路) 북쪽 펑러하가(豊樂下街)에는 왕사진이 문인들과 시회를 자주 열었던 야춘원(冶春園)이 있다고 한다. 동양문고에서 《정화선존》 1책을 보고 난 뒤로는 문득 중국의 야춘원에 가 보고 싶어졌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도쿄의 거리를 걸으면서 왕사진을 떠올리는 것도 일종의 신운이라면 신운이라고 할 것이 아니겠는가.
심경호 |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955년 충북 음성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일본 교토(京都)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저서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한국한시의 이해》 《김시습평전》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 등과 역서로 《불교와 유교》 《일본서기의 비밀》 등이 있음. 성산학술상과 일본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선생 기념 제1회 동양문자문화상 수상. 한국학술진흥재단 선정 제1회 인문사회과학 분야 우수학자.
/ 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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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글 〈고우야박(高郵夜泊)〉은 고우우박(高郵雨泊)이 맞습니다.
왕사진의 시는 무슨 이유인지 중국에서 자료를 얻기가 힘듭니다. 維基文庫에 漁洋山人精華錄 가 수록되 있고 전집은 있으나 주석이나 해석이 붙은 자료는 볼 수가 없습니다. 즉, 중국의 언론통제를 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선생님들 연구하시는 자료지 모자란 사람들이 읽을 내용이 아닌것 같습니다.
대만의 학자가 쓴 아래 논문 두편에 신운(神韻)에 대한 상세한 해설과 시가 있으나 한문을 몰라 볼 수가 없고 필요한 분은 구글에서 아래 제목을 검색하면 논문을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山水有神韻?王士禎的山水詩(上):遊歷與山水 / 黃雅歆? 國立臺北師範學院學報,第十七卷第二期(九十三年九月)35~64
王士禎的山水詩(下):神韻與山水 / 黃雅歆* 國立臺北?育大學學報,第19卷第1期(95年3月)23~50
漁洋山人精華錄 /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http://zh.wikisource.org/zh-hant/%E6%BC%81%E6%B4%8B%E5%B1%B1%E4%BA%BA%E7%B2%BE%E8%8F%AF%E9%8C%84
청장관전서 > 청장관전서 제34권 > 청비록 3(淸脾錄三) > 왕완정(王阮亭)
왕사진(王士?)의 자는 이상(貽上)이며 호는 완정(阮亭)인데, 뒤에 옹정(雍正 청 세종(淸世宗)의 연호로 여기서는 세종을 뜻함)의 휘(諱)를 피하여 이름을 사정(士正)이라 고쳤으며, 사정(士貞), 사징(士徵)이라고도 한다. 호는 어양산인(漁洋山人)이라고도 한다. 제남(濟南) 신성인(新城人)으로 순치(順治 청 세조(淸世祖)의 연호) 을미(1655, 청 세조 12)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강희(康熙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 때에 벼슬이 형부상서(刑部尙書)에까지 이르렀다. 시를 잘 짓는데, 대체로 청수(淸秀)하고 한아하며, 담백하면서도 유창하고, 시상(詩想)이 넓고 풍부하다. 늘그막에는 작품이 더욱 독특하여 해내(海內)의 시종(詩宗)이 된 것이 지금 1백여 년이 되었지만 어느 한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이 아주 존경하여 일반 서척(書尺)과 필화(筆話)에서도 어양이란 두 자만 나오면 반드시 도행(跳行)001]하여 쓴다.
그런데 그 추곡(秋谷) 조집신(趙執信)[자(字)는 신부(伸符)이며, 산동(山東) 익도인(益都人)인데 벼슬은 좌춘방(左春坊)의 좌찬선(左贊善)이다.] 만은 풍정원(馮定遠 정원은 청 나라 풍반(馮班)의 자)의 시로 종장(宗匠)을 삼아 《담룡록(談龍錄)》을 지어 어양(漁洋)을 헐뜯었다. 옹정(雍正)ㆍ건륭(乾隆) 연간에는 왕준(王峻)[자는 차산(次山)이며, 강남(江南) 상숙인(常熟人)인데, 벼슬은 어사(御史)였다. ] 이란 자가 있어도 이따금 왕어양을 배척하였으나, 이는 바로 하루살이 같은 무리인데 어떻게 어양을 흔들 수 있단 말인가. 젊을 때에 목재(牧齋 전겸익(錢謙益)의 호)에게 소중히 여김을 입어 학문이 날로 늘어가는 한편 명망도 날로 높아졌다. 목재가 말하기를, “이상(貽上)의 시는 문장력이 풍부하며 내용이 알차서, 시대를 보고 감탄한 작품은 두릉(杜陵 두보(杜甫)의 별호)보다 애절하며, 정의에 대한 시는 의산(義山 이상은(李商隱)의 자)보다 감정이 풍부하다. 그 글 얘기를 하는 데에는 ‘전(典)ㆍ원(遠)ㆍ해(諧)ㆍ칙(則)’의 네 가지가 있는데, 유파(流波)를 거슬러 근원(根源)을 탐구함은 평원(平原 조식(曹植)의 봉호(封號))의 유칙(遺則)이며, 중류(衆流)를 절단(截斷)함은 저산(?山 석교연(釋皎然)의 호)의 미언(微言)이며, 위체(僞?)를 구별하여 제거해서 갈수록 스승이 많아짐은002] 초당(草堂 성도초당(成都草堂)에 은거했던 당 나라 두보(杜甫)를 가리킨다)의 금단(金丹)이요 대약(大藥)이다.” 하였고, 담포(憺圃) 서건학(徐乾學)은, “선생은 시에 있어서, 한 자(字)의 선택도 반드시 정밀하게 하고 한 마디의 말도 반드시 고결하게 한다. 비록 지론이 광대(廣大)하여 남북조(南北朝)와 송(宋)ㆍ원(元)ㆍ명(明) 시대 제가(諸家)들의 시를 모두 취택하였으나 선발(選拔)함에 있어서는 매우 신중을 기하여 당(唐) 나라 사람의 성조(聲調)와 율격(律格)을 그대로 지켰다.” 하였으며, 우산(愚山) 시윤장(施閏章)은, “선생은 시를 논함에 있어 동향(同鄕)에서는 우린(于鱗 이반룡(李攀龍)의 호)을 존중하지 않았고, 당 나라 사람에 있어서도 자미(子美 두보(杜甫)의 자)를 종습(踵襲)하지 않았다. 그의 시는, 특출한 것만을 체득하여 뛰어난 시상(詩想)은 삼당(三唐)003]에서도 특수한 것을 터득하였는데, 위로는 위(魏)ㆍ진(晋)의 시문학에 소급하였고, 넓게는 제(齊)ㆍ양(梁)의 시문학까지 채택하였는가 하면, 그 밖에 많은 시가류(詩家流)와도 접촉을 가져, 기쁜 일, 권장한 일과 단순한 시구(詩句)들 가운데서 훌륭한 것은 언제나 입으로 읊조리며 감탄한다.” 하였고, 귀우(歸愚) 심덕잠(沈德潛)은,
“어떤 사람이 ‘어양(漁洋)은 달제(獺祭)004]의 공부만 너무 많고 자신의 정신[性靈]은 도리어 서책(書冊)에 파묻힌 바가 되었다. 그래서 이아(爾雅)005]에는 여유가 있으면서도 망창(莽蒼 웅혼(雄渾)하고 유원(幽園)함을 뜻함)한 기상과 주절(?折 힘차고 굴곡(屈曲)이 있는 문장력을 뜻함)한 힘은 이따금 옛사람만 못한 것이 있다. 두보(杜甫)의 시가 비장(悲壯)하고 침울(沈鬱)하였던 것은 늘 난리(亂離)를 겪으면서 마음으로 체득한 데서 온 것이다.’ 하였다. 나는 그 말에 대하여 ‘그것은 그렇다. 그러나 「안일 속에선 기교한 작품을 쓰기 어렵고 괴로움 속에선 좋은 작품을 내기 쉽다.」고 말하지 않는가. 어떻게 태평성세에 생활한 자로 하여금 병이 들지도 않았는데 억지로 신음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하였다. 이상의, 전겸익(錢謙益)ㆍ서건학(徐乾學)ㆍ시윤장(施閏章)ㆍ심덕잠(沈德潛)의 품평(品評)을 볼 때 그 시의 대략을 알 수 있다. 참으로 훌륭하지 않은가. 이강산(李薑山 강산은 이서구(李書九)의 호)의 말에, “우리나라 사람은 마음이 거칠고 안목이 좁아서 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다 청(淸) 나라에 대해서는, 인격의 현부와 시품의 고하는 불문하고서 덮어놓고 오랑캐라는 구실로 말살(抹?)하려고 한다. 과연 이런 식이라면 사실, 조맹부(趙孟?)ㆍ 오사도(吳師道)ㆍ양재(楊載) 같은 이들도 중국 풍아(風雅)의 종주(宗主)가 될 수 없고 끝내는 몽고(蒙古)ㆍ 여진(女眞)의 출신(出身)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역적인 거리가 겨우 한 의대(衣帶)를 격(隔)할 정도에 있으면서도 이상(貽上) 같은 이를 지금까지 어떠한 사람인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가령 이상(貽上)이 만주(滿州) 출신으로 팔기(八旗)006]의 계통에 소속되었다 하더라도 시를 잘 한다면 그 시만 좋아하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굳이 오랑캐라는 이유로 배척을 하면서 시까지 무시해야 하는가?” 하였다. 나는 이상의 시를 너무도 좋아하여, 명(明) 나라 3백 년 동안만 이처럼 올바른 시[正聲]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송(宋)ㆍ원(元) 시대에도 그와 필적할 만한 시는 찾아볼 수 없다. 비록 당 나라의 극성 시대에 올려놓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잠삼(岑參)ㆍ저광희(儲光犧)ㆍ위응물(韋應物)ㆍ맹호연(孟浩然)의 수준보다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었는데 시를 아는 이들은 나의 말을 지나친 말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강산(李薑山)은 이상의 시를 마음에 그리고 힘써 추구하여 등당입실(登堂入室)007]하게 되었다. 나는 이강산을 추대하여 우리나라의 어양(漁洋)이라 하면서 기증한 시에, 강산의 시는 맑고 곱고 애절도 겸해 / 薑山明澹目硏哀 위체의 시가는 구별하여 제거했네 / 僞體詩家別有裁 얼굴에는 글 기운이 훤히 떠오르누나 / 眉字上升書卷氣 왕어양의 시풍이 이 나라에 왔네 / 漁洋流派海東來 하였다. 이상국(李相國 이의현(李宜顯)을 이름)의 《도공집(陶公集)》에 비로소《잠미집(蠶尾集)》은 왕사진(王士?)의 저서인 줄 알았으나 그 시가 어떠한 것인가는 알지 못하였다. 이사천(李?川 이병연(李秉淵)의 호)은 일찍이 소자(邵子)의 상선본(相選本) 3책(冊)을 갖게 되어 장중(帳中)의 비보(?寶)로 삼았었다. 그래서 이사천의 시가 비루한 습관에서 초탈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이사천이 죽은 수십 년 뒤에 그 책이 돌아다니다가 이강산(李薑山)의 소장(所藏)이 되었다. 《대경당전집(帶經堂全集 왕사진(王士?)의 문집)》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는 20여년이 되었으나 그 책을 소장한 자는 두세 집에 불과하였으며, 저자가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서 그 책을 빌려보고서는 너무도 방대한 데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떡 벌어져 진작 보지 못한 것을 무척이나 한탄하였다. 거기에 대한 시에, 부럽네 중국의 훌륭한 일은 / 好事中州空艶? 요봉의 문필과 완정의 시였네 / 堯峯文筆阮亭詩
하면서, 드디어 영재(?齋 유득공(柳得恭)의 호)ㆍ강산(薑山)ㆍ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호) 등에게 자랑을 하였는데 모두들 몸에 배도록 저작(咀嚼 글 뜻을 깊이 완미(玩味)함)하고 이목(耳目)에 유렴(濡染)되어서, 그 영향을 받아 이 천지간에 왕어양(王漁洋)이 있음을 아는 이는 차츰차츰 그를 추앙하게 되었다. 지금 겨우 5~6년이 되었으나 그 표장(表章)한 공(功)은 나도 사양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강산(李薑山)의 시에, 속된 사람 자황009]하여 흠찾음은 능하나 / 俗子雌黃巧索瘢 풍류가 없어서 보잘 게 없네 / 風懷蕭颯不成看 중국의 훌륭한 일을 누가 부러워하는가 / 中州勝事誰空? 동쪽 이웃 이무관010]이 제일 걱정일세 / 愁殺東隣李懋官 하였다.
이상(貽上)의 전 부인은 장씨(張氏)인데, 추평인(鄒平人)으로 강남(江南) 진강부(鎭江府)의 추관(推官)인 장만종(張萬鍾)의 딸이며, 도찰원좌도어사(都察院左都御史)로 시(諡)가 충정공(忠定公)인 장연등(張延登)의 손녀이다. 숭정(崇禎) 말경(末頃)에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의 호) 선생이 항해(航海)하여 경사(京師)에 조회갈 때 제남(濟南)으로 갔었는데, 그 당시 장어사(張御史)가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었다. 선생이 장만종을 통하여 장어사를 만나볼 수 있었는데, 장 어사가 한 번 보고 마음을 쏟아 《조천록(朝天錄)》 1권(卷)을 서문까지 지어서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이상이 늘 선생을 표장(表章)하였으며, 일찍이 절구(絶句)의 논시(論詩)를 지어 고래(古來)의 시인(詩人)을 언급한 것이 30여 수가 되는데, 그 선생을 논함에 있어서, 맑은 구름 이슬비 오는 소고사 앞에 / 澹雲微雨小姑祠 국화 피고 난초 시든 팔월이라네 / 菊秀蘭衰八月時 조선 사신의 말을 기억해 보니 / 記得朝鮮使臣語 과연 동국에서 시를 알고 있구나 / 果然東國鮮聲詩 하였는데, 그 머리 부분의 두 구(句)는 선생의 시로서, 선생의 문집에 기재된 것을 상고하면, 미우(微雨)는 경우(輕雨)로 되어 있고, 국수 난쇠(菊秀蘭衰)는, 가국 쇠란(佳菊衰蘭)으로 된 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대체로 이상(貽上)은 시에 있어서 말 한 마디로 천하의 선비를 경시(輕視)도 하고 중시(重視)도 하는데, 선생에 대해서는 이렇게 훌륭하게 추켜세웠으니 선생의 풍류와 문체는 후세에서 충분히 상상해 봄직하다.
이상이 찬한 《지북우담(池北偶談)》에 《조선채풍록(朝鮮採風錄)》의 시가 약간 기록되었는데, 《채풍록》은 강희(康熙) 무오년(1678, 숙종 4)에 일등(一等) 시위(侍衛)인 낭담(狼?)을 명하여 조선(朝鮮)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우리나라의 시를 채록(採錄)하게 하였을 때 오(吳) 나라 사람 손치미 개사(孫致彌愷士 개사는 손치미의 자)가 부사(副使)가 되어 《조선채풍록》을 찬하였다. 이상의 ‘손개사(孫愷士)의 남귀(南歸)를 전송하다.’라는 시에, 어명을 받들어 부상011] 밖으로 / 啣命扶桑外 만리의 뱃길을 돌아갔구나 / 曾歸萬里舡 봄 조수를 타고 압록강 건너 / 春潮浮鴨綠 옛길인 점제012]로 나아가네 / 古道出?蟬 시들이 유헌013]에 채집되면 / 詩備?軒採 그 이름 속국에 전하여지리 / 名從屬國傳 잠시 동안 포직014]에서 돌아오게 되었으나 / 暫須還?直 청전015]은 생각할 수 없게 되었네 / 未可戀靑氈 하였다. 《채풍록》가운데서 특히 선생의 시를 초(抄)하여 《지북우담》에도 실었는데, 삼추의 바다 언덕에 처음 기러기 찾아왔고 / 三秋海岸初賓雁 밤 깊은 하늘에 객성이 빛나네 / 五夜天文一客星 석교는 이미 진 시황에게 끊겼는데 016]/ 橋石已從秦帝斷 성사는 한 나라 사신이 통과하였지017] / 星?猶許漢臣通 물가 성머리에 새벽 달 비치는데 / 五更殘月水城頭 영사018]하는 어떤 사람이 홀로 배에 있는가 / 詠史何人獨倚舟 동해로 가는 길 찾지 않고 / 不向南溟覓歸路 북두에 의지하여 신주019]를 바라보네 / 還倚北斗望神州 남쪽 상인 북쪽 길손 백사장에 모였구나 / 南商北客簇沙頭 발을 친 화익선020]은 어느 곳 배이던가 / ??靑簾幾處舟 죽지가를 부르며 소매 잡고 지나니 / 齊唱竹枝聯袂過 달 밝은 온 성안이 양주 같구나 / 萬城明月似楊州 한 유(類)의 시는 모두가 청완(淸婉)하여 읊을 만한 것들이다. 일찍이 원유(元裕)의 《중주집(中州集)》의 예를 모방하여 《감구집(感舊集)》 8권을 편찬했는데, 거기에도 선생의 시를 수록하였다. 병술년(1766, 영조 42)에 사은사(謝恩使)가 연경(燕京)에 갔었는데, 일행 중에 마침 선생의 방손(傍孫)인 김재행(金在行)이 있어 전당(錢塘)의 엄성(嚴誠)ㆍ반정균(潘庭筠)을 만나자, 귀국(貴國)에 김상헌(金尙憲)을 아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사실대로 대답하니, 반정균은 감개하여 얼마 있다가 그의 상자 속에 보관하고 있던 《감구집》 1부를 내어주고, 또 선생의 시에 차운(次韻)하여, 헤어질 때 우리에게 주었는데, 김재형도 시를 기중하니, 엄성이 크게 칭찬하면서, “이 시는 비록 왕어양(王漁洋)에게 보여주었더라도 어떻게 감탄하였을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상(貽上)과 강산(薑山)은 모두 갑술생(甲戌生)이었다. 그래서 강산의 시에, 갑자가 세 번 돌아 / 三回花甲始周天 금속의 정신이 앞뒤에 태어났네021] / 金粟精神降後前 새로운 시를 갖고 보니 슬픔만 더하는데 / 獨抱新詩增?望 해낭022]이 병신년 것을 쓰려고 않네 / 奚囊羞寫丙申年 하였는데, 《대경당집》의 첫 권의 기록이 병신년에서 시작되었고, 이강산의 ‘두포어영(荳浦漁?)’도 마침 병신년이었다. 그래서 이 시에서 병신년이라고 한 것이다. [주D-001]도행(跳行) : 글을 쓸 때에 경의(敬意)를 나타내는 구절(句節)은 평두(平頭)보다 한 자 또는 두어 자쯤 높이 올려서 쓰는 것을 말한다. [주D-002]위체(僞體)를 …… 많아짐 : 두보(杜甫)의 희위육절(?爲六節)에 “위체를 구별하여 제거하니 풍아에 가깝구나. 갈수록 많은 스승 이것이 너의 스승이네[別裁僞體親風雅 轉益多師是汝師]” 한 데서 온 말로, 진체(眞體)가 아닌 위체(僞體)를 제거하여 선현(先賢)의 풍아(風雅)에 가까워짐을 뜻한다. [주D-003]삼당(三唐) : 당대(唐代)를 시학(詩學) 연구상의 분류로, 초(初)ㆍ성(盛)ㆍ중(中)ㆍ만(晩)의 사기(四期)로 나누어 사당(四唐)이라 하는데, 삼당(三唐)은 초ㆍ성ㆍ중만을 말한 것이다. [주D-004]달제(獺祭) : 시문(詩文)을 지을 적에 좌우에 참고서를 많이 펴 놓음을 뜻한다. 수달은 포획한 고기를 먹으려 할 때에 먼저 좌우에 늘어놓고 제사를 지낸다는 고사에서 전용(轉用)된 말이다. 《呂覽 孟春紀》 [주D-005]이아(爾雅) : 문장과 언어가 올바르고 우아(優雅)함을 말한다. [주D-006]팔기(八旗) : 청(淸) 나라 태조(太祖) 때, 정해진 병제(兵制)인 팔기병(八旗兵)을 가리킨다. 《淸會典 八旗都統》 [주D-007]등당입실(登堂入室) : 마루를 거쳐 방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순서를 밟아 학문을 닦으면 깊은 경지에 이르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論語 先進》 [주D-008]요봉(堯峯) : 청(淸) 나라 왕완(汪琬)의 호이다. [주D-009]자황(雌黃) : 황색(黃色)의 물질인데, 시문(詩文)을 첨삭(添削)할 때 자황을 썼으므로, 자구의 수정을 말한다. [주D-010]이무관(李懋官) : 무관은 이덕무(李德懋)의 자이다. [주D-011]부상(扶桑) : 동해(東海) 중에 있는 신목(神木). 전하여 해가 돋는 동쪽을 가리킨다. [주D-012]점선(?蟬) : 한(漢) 나라 때 설치한 현명(縣名)으로 평양 서남쪽에 있다. 《漢書 地理志 下》 [주D-013]유헌(?軒) : 천자(天子)의 사자(使者)가 타는 수레. 《應邵》 風俗通 序에 “주(周)ㆍ진(秦)에서는 언제고 8월이면 유헌(?軒)의 사자를 보내어 이대(異代)의 방언(方言)을 구(求)했다.” 하였다. [주D-014]포직(?直) : 관리(官吏)가 연일(連日) 숙직함을 가리킨 말이다. [주D-015]청전(靑氈) : 푸른색의 모포. 곧 가보(家寶)를 뜻한다. [주D-016]석교(石橋)는 …… 끊겼는데 : 진 시황(秦始皇)이 해상(海上)에다 석교(石橋)를 만들 적에 해신(海神)이 기둥을 세워주었으므로, 진 시황이 그를 고맙게 여겨 해신을 만나보려고 하자, 해신이 말하기를 “내 형상이 추하니 내 형상을 그리지 않기로 약속만 한다면 만나드리겠소.” 하므로, 진 시황이 석교를 타고 30리를 들어가 해신과 만났는데, 진 시황의 좌우에서 몰래 해신의 다리를 그렸다. 그러자 해신이 크게 성내어 “황제가 나와의 약속을 저버렸으니 빨리 가시오.” 하므로, 시황이 곧장 말을 타고 나오는데, 말 뒷다리가 석교에서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석교가 무너졌다고 한 고사이다. [주D-017]성사(星?)는 …… 하였지 : 한(漢) 나라 장건(張騫)이 황하(黃河)의 근원(根源)을 탐사(探査)하려고 뗏목을 탔다가 자기도 모르게 하늘로 올라가 견우(牽牛)ㆍ직녀(織女)의 두 별을 보았다는 고사이다. [주D-018]영사(詠史) : 역사적인 사실을 주제로 하여 시가(詩歌)를 지음을 말한다. 진(晉) 나라 사상(謝尙)이 가을 달밤에 원굉(袁宏)과 뱃놀이를 하면서 영사시(詠史詩)를 읊었다는 고사이다. 《晉書 袁宏傳》 [주D-019]신주(神州) : 중국(中國) 사람들이 일컫는 중국의 미칭(美稱)이다. [주D-020]화익선(??船) : 익(?)이라는 물새의 형상을 선수(船首)에 새긴 배. 이 새는 풍파를 잘 견디어 내므로 이 새를 장식한다고 한다. 《淮南 本經訓》 [주D-021]금속(金粟)의 …… 태어났네 : 불경(佛經)에 의하면,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전신(前身)의 이름이 금속여래(金粟如來)라 하는데, 이백(李白)이, 자신은 금속여래의 후신(後身)이라 자칭하였다. [주D-022]해낭(奚囊) : 시종(侍從)이 시초(詩草)를 넣어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 당(唐) 나라 이하(李賀)가 명승지(名勝地)를 구경하며 얻은 시를 해노(奚奴)가 주머니에 넣어 다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唐書 李賀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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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