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在琮 / 陵洞春秋 주간
출처 : 陵洞春秋 (안동권씨 종친신문)
• 12지에서의 신묘(辛卯)
태초 인류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을 경외하며 주위의 거석수(巨石樹)나 큰 동물의 초자연적인 힘을 숭배하여 그 특성을 본받으려했다. ‘12지(支)’의 동물의 ‘띠’도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런 풍습은 지역에 따라 다른데, 태국(泰國)에는 코끼리띠가 있고 중국의 소수 민족에는 개미띠도 있다. 우리의 12간지 짐승에도 본받아야 할 덕목이 있다. 이제 맞는 2011년, 신묘(辛卯)의 신辛은 10간 중 제8위이고, 묘卯(토끼)는 12지의 짐승 중 넷째인데 이 토끼의 덕목은 만물의 생장, 번창, 풍요를 상징하여 그 해 농사의 풍요를 염원함과 관계가 있다.
시간적 개념으로 이 묘는 오전(午前) 5시부터 7시 사이인데, 이래서 아침밥은 묘반(卯飯), 아침 잠은 묘수(卯睡), 식전의 해장술은 묘음(卯飮) 등의 용어를 낳았다. 묘는 방위로 정동(正東)을 가리키고, 달은 음력 2월 뇌천대장(雷天大壯)이다. 육십갑자(六十甲子) 세차(歲次)로는 27번째 경인(庚寅)에 이어 28번째이다. 토끼의 덕목은 또한 자애롭고 남을 존중하는 기품임을 ‘별주부전(鼈主簿傳)’에서 엿볼 수 있고, 19세기 민화(民畵)에서는 계수나무 아래 방아를 찧는 모습으로 평화로움을 나타낸다. ‘귀묘도(龜卯圖)’에서는 토끼가 거북의 등을 타고 용궁(龍宮)에 가는 모습이 또한 순박하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한비자(韓非子)는 ‘국사를 맡은 자는 권력으로 강제하기보다 백성이 스스로 나서서 일하게 하는 토끼같은 덕의 중요성’에 무게를 두었고, 프랑스의 혁명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귀가 큰 토끼는 남의 말을 경청하고 싸움보다 평화를 좋아하는 선(善)의 상징이라 했다. 이렇게 토끼는 동서양에서 다 서민의 표상이며 상서로운 동물로 인문사(人文史)에서 통하고 있다.
• 우리 역사에서의 토끼
우리나라 역사 기록에 토끼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구려 6대 태조왕(太祖王) 25년(서기 77) 10월 부여(夫餘)에서 긴 꼬리와 뿔 셋이 달린 토끼를 바치자 이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여겨 나라에 사면령을 내렸다는 기록이다. 고구려 국내성(國內城)의 장천(長天) 1호분에는 현실(玄室) 천장에, 왼쪽 원 안에 해를 상징하는 삼족오(三足烏)가 벽화로 새겨져 있고 달을 상징하는 토끼가 오른쪽 원 안에 있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평양의 덕화리 2호분에는 서쪽 천장 그림에, 둥근 달 안에 토끼와 두꺼비가 있는데 모두 토끼의 다산과 평화를 상징하는 민족성의 발로로 볼 수 있다. 신라에서는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 잡혔다가 풀려나는 일을, 토끼가 용궁을 탈출하는 설화로 빗대어 ‘삼국사기’에 전하는데, 이는 김춘추를 지혜로운 토끼로 부각시킨 것이다. 후백제 견훤(甄萱)의 아버지 아자개의 본거는 경북 문경의 가은인데, 이곳에서 길을 잃어 곤경에 빠진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토끼가 안내해 무사케 했다 해서 지금도 불정역 맞은편에 토천(兎川)이라는 지명이 있다. 그리고 고려 ‘청자투각칠보향로(靑瓷透刻七寶香爐)’의 받침다리가 토끼인데 이는 부부애와 다산으로 자손의 번창을 상징한다. 전남 순천 선암사(仙巖寺) 법당 문에 새긴 그림은, 달의 계수나무 아래 토끼가 떡방아를 찧고 있다.
거북과 경주하는 토끼는 인내력과 끈기가 모자라는 동물로 묘사되어 왔는데, 요즘은 인식이 바뀌어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낮잠을 자지 않는 모습으로 등장해 전천후 능력의 토끼로 더욱 사랑받고도 있다. 우리의 민화 중에 큰 호랑이 앞에서 작은 토끼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림이 있다. 이에는 서민과 양반의 평등과 평화를 추구하는 뜻이 있다. 또 경북 상주지방에 효자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신령께 빌었더니 토끼가 나타나 간을 내주었다는 설화가 있는데, 이는 토끼가 희생(犧牲)의 상징으로 등장한 예이다.
토끼해에 출생한 유명인으로는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을 비롯해 삼국사기를 지은 고려의 김부식(金富軾), 조선의 생육신의 김시습(金時習), 근현대의 지석영(池錫永)ㆍ한용운(韓龍雲)ㆍ안중근(安重根)ㆍ양주동(梁柱東)ㆍ이은상(李殷相) 등이 있다.
• 토끼해에 경사가 많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위례성(尉禮城)에서 기원전 18년 계묘(癸卯)에 왕위에 올랐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15년(475)에 평양으로 천도했고, 백제 문주왕(文周王)은 원년(475)에 웅진(熊津공주)으로 천도했는데 모두 토끼해였다. 토끼해에 일어난, 문화적으로 중요한 사건은 신라 승려 혜초가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지은 것이 성덕왕(聖德王) 26년(727)인 정묘(丁卯)이고,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지은 것은 경덕왕(景德王) 10년(751) 신묘였다.
문익점(文益漸)이 원(元)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것이 공민왕(恭愍王) 12년(1363) 토끼해였다. 1087년 팔만대장경의 완성, 1447년 세종대왕 치세에 석보상절(釋譜詳節)과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편찬한 것도 토끼해였다. 주세붕(周世鵬)이 우리나라 최초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사림의 기반을 닦은 것도 토끼해였다.
효종 2년(1651) 신묘 토끼해에는 호서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해 부세제도(負稅制度)를 혁신했다. 영조 23년(1747) 정묘에는 세조의 찬탈을 반대하다 죽은 사육신死六臣이 신원되어 노량진에 묘비가 섰다. 임진란에 불탄 경복궁 근정전(勤政殿)과 경회루(慶會樓)가 1867년 중건된 것도 토끼해이고, 일제하에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어 당시 좌우파로 갈렸던 독립운동 단체가 협력하게 된 것도 토끼해인 1927년 정묘였다. 지난해 경인에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사변 등으로 어수선했던 게 다 신묘의 새해에 말끔히 씻겨 7대 무역 대국이 6대 5대 무역대국으로 올라가며 국운이 융성하기를 기원한다.
나라의 존망과 관련된 사건도 토끼해에 있었는데 고려 인종仁宗 13년(1135) 묘청(妙淸)의 난과 조선 인조(仁祖) 5년(1627)의 정묘호란 같은 국난도 있었다. 중종 14년(1519)에 개혁정치를 주도하던 조광조(趙光祖)의 죽음을 부른 기묘사화(己卯士禍) 또한 토끼해에 있었다.
• 토끼 관련 속담
우리 속담에서 토끼는 꾀가 많고 영리한 이미지에서부터 겁많고 약한 동물, 사냥감으로 단골이면서도 재빠르고 성질 급한 동물 등으로 나타난다.
‘교활한 토끼는 굴이 셋’이라는 말은, 꾀많은 토끼가 굴 셋을 연결시켜 비상시의 안전을 도모함을 뜻한다.
‘토끼는 용궁을 가도 살길이 있다’는, 토끼가 거북에게 속아 용궁에 갔지만 꾀를 내 살아 돌아왔 듯이 곤궁한 처지에도 갖은 궁리로 해결책이 나온다는 말이다.
‘성질 급한 토끼가 먼저 죽는다’는 성급하면 화를 먼저 당한다는 소리이고, ‘토끼는 잠자다 잡힌다’는 잠이 많으면 재주가 많아도 헛일이라는 뜻이다.
‘가는 토끼 잡으려다 잡은 토끼 놓친다’,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 놓친다’는 분에 넘치는 욕심을 내다 손해를 본다는 말이다.
‘바다에 가서 토끼 찾는다’는 연목구어(緣木求魚)나 같은 소리이고, ‘토끼 덫에 여우 걸린다’는 작다고 깔보다 실수한다는 뜻과 적은 밑천으로 큰 이득을 얻게 된다는 뜻이 같이 들어 있다.
‘토끼 잡으면 사냥개 삶아먹는다’는 이용가치 없어지면 폐기된다는 뜻으로 교토사주구팽(狡兎死走狗烹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달리던 개를 삶는다)에서 온 말로 요즘도 정치권에서 툭하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토끼 사냥에 호랑이 가죽 쓴 여우가 날뛴다’는 앙심이나 야심을 품은 사람이 앞장서 설침을 뜻하고, ‘범 없는 산에서 토끼가 왕 노릇한다’는 주인이 없어지면 하인이 주인 노릇을 한다는 뜻이다.
‘토끼 꼬리 만하다’는 토끼 꼬리처럼 짧고 작은 것이고, ‘토끼의 뿔이고 거북이의 털이다’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말한다.
• 토끼해의 꿈
인간은 우주선을 타고 달에 발을 들였고 인공위성으로 시시각각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손금 보듯 들여다보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정서로는 아직도 달나라 계수나무 아래서 떡방아를 찧는 토끼의 모습에 향수를 달랜다. 배고프던 시절 절구통 속의 흰 쌀가루가 ‘뭐 나오라 뚝딱’ 하면 끝없이 나오는 화수분을 상상하면서 주린 배를 쓰다듬지 않았던가.
상상의 떡, 그림의 떡도 그 주인은 각자가 ‘나’였으니 말이다.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떡방아였을 테고 늘 병마에 시달리던 우리에겐 그것이 또 ‘약방아’로 모습해 다가왔다. 그래서 달은 우리에게 무병장수의 상징인 동시에 ‘금도끼로 찍어낸 계수나무를 옥도끼로 다듬어 지은 초가삼간’, ‘양친부모 모셔다가 한 간은 먼저 부모에 드리고 한 간은 내가 살자’는 염원을 노래하던 바였다.
오늘 신년원단에 어린아이들 모아놓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며 풍요롭고 평화로운 우리 세상을 꿈꾸어보는 것 또한 옛적에 비하면 꿈만 같은 현실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