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설화 [萬波息笛說話]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 불면 평온해졌다는 신기한 피리에 대한 설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날 신문왕(문무왕의 아들)은 동해에 작은 산이 떠 있다는 보고를 받고서 점을 치도록 하였는데,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의 영혼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보물을 내려주고자 한다는 풀이가 나왔다. 왕이 사람을 보내 바다를 자세히 살피게 하니 산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쳐져서 하나가 되더라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왕은 감은사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이튿날 정오에 행차에 나섰다. 순간, 대나무가 하나로 합쳐지며 천지가 흔들리고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더니 7일 동안 이어졌다.
날씨가 가라앉은 후 왕이 배를 타고 그 작은 산으로 들어가자 용이 나타나 검은 옥대를 왕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동해의 용이 되신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 장군께서 내리는 보물입니다” 왕이 대나무가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는 까닭을 묻자 용이 대답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대나무도 합쳐질 때 소리가 나는 법이니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나라에 좋게 쓰일 것입니다” 왕이 대나무를 베어 뭍으로 나오자 작은 산과 용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이 피리를 불면 가뭄에 비가 오고, 홍수에는 비가 그치고, 파도가 가라앉고, 바람이 그치며, 병이 낫고, 적병이 물러갔다고 한다. 이에 세상의 근심거리를 없애고 평안하게 하는 피리라고 해서 ‘만파식적’이라 불렀다.
만파식적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신기한 피리로서 그 피리를 지니기만 해도 적이 스스로 물러가고 나라 안에 평화가 찾아온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만파식적은 죽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삼십삼천의 한 아들인 김유신공이 신라를 지킬 보물로 내려준 것이며 동해변에 있는 조그만 산에 심어져 있는 대나무를 잘라 만든 피리로 동해의 바다용이 직접 당시 신라왕인 신문왕에게 바친 신기한 피리로 전한다.
이러한 만파식적의 설화는 바로 통일을 이룩한 왕과 그 통일의 과업을 계승해가야 하는 후계자의 왕위 교체시기에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왕족은 물론 당시 모든 사람들이 갈망했던 당시의 시대적 요구가 그대로 표출되어 창작된 이야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좁게 만파식적 설화는, 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에 이어서 즉위한 신문왕이 자신의 정치적 힘의 결핍과 외부 세력의 침입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고 지배층의 정통성과 동질성을 재확인하기 위하여 강력한 왕권을 상징할 수 있는 신물(神物)이 필요했고, 만파식적을 그 신물로서 고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즉위 초기에 발생한 김흠돌의 반란과 같은 일체의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려는 왕실의 소망을 만파식적의 설화 속에 담아낸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만파식적 설화는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받았다는 해로부터 몇 십년이 지난 해에 다시 등장한다.
그 내용은 부례랑이라고 하는 국선이 국경지대에 나갔다가 말갈족들에게 납치되는데, 같이 있던 화랑들 중 안상이란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달아난 사건이 일어난 때와 그 시기를 같이하여 만파식적이 분실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 태어난 세대의 화랑들이 그 이전의 용맹한 화랑정신을 잃고 있으며, 그것 못지않게 나라 안팎으로 긴장이 이완되고 국가기강이 해이해지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부례랑과 안상이 신라로 돌아오고 만파식적을 다시 찾는다는 것으로 그 끝이 맺어지고 있다. 7세기 말은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고구려유민들의 신라에 대한 압박이 더욱 거세어지던 시기로서 신라가 이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였다.
이 때 만파식적은 다시 평화를 보장해주고 신라의 안위를 책임지는 상징물로서 다시 한 번 더 널리 그 의미가 부각된 것으로 보이며 만파식적 설화가 다시 나타난 것은 이러한 시대상황과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파식적 설화는 그 이후에도 간혹 나타나는데 특히 8세기 후반에 만파식적에 관한 기록이 자주 소개된다.
이 때의 내용은 만파식적의 위력으로 일본이 감히 신라를 침공하지 못한다거나 혹은 일본이 만파식적을 비싼 돈을 주고 사고 싶다는 그런 내용이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 이 설화 역시 8세기 후반 신라와 일본의 긴장관계가 고조되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면서 만파식적이 존재하는 한 일본이 신라를 침공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켜주기 위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만파식적은 평화와 안정의 상징물로서 당시 널리 그와 관련된 설화가 제작되어 배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파식적 설화는 단순히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당시 신라가 겪고 풀어야만 했던 국정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을 풀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고뇌가 담겨 있는 상징물이라 볼 수 있다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안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는데, 다음해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오고 있다는 전갈이 있었다. 점을 친 일관은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이 왕에게 성을 지키는 보배를 주려는 것이니 해변에 가서 받으라고 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견대(利見臺)에서 바다에 떠 있는 산을 바라보다가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산의 모양이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그 위에 대나무 한 줄기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다음날 대나무가 하나가 되자 7일 동안이나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왕이 그 산에 들어갔더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가져와 바쳤다. 왕이 산과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합해지기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용은 그것이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라고 하며 대나무가 합해졌을 때 베어다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이라고 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 나오자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졌다. 왕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사에 두었는데, 이것을 불면 적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비가 올 때는 개이며, 바람과 물결도 잠잠해졌다. 그래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하고 국보로 삼았는데, 효소왕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나자 만만파파식적이라고 했다.
이 설화는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게 되는 신비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만파식적은 환웅의 천부인(天符印),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 이성계의 금척(金尺) 등과 같은 성격의 신성징표이다. 신문왕은 정치적 힘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 왕권의 정통성과 신성성을 확립하고 지배계층의 동질성을 재확인해야 했다. 따라서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룩한 아버지 문무왕과 김유신을 등장시켜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신물(神物)설화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설화는 〈삼국유사〉의 만파식적조, 백률사조(栢栗寺條), 원성대왕조(元聖大王條)에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신증동국여지승람〉·〈동사강목〉 등에도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