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傳說)의 고장 홍천(洪川)·정선(旌善)
1. 홍천에 전승(傳乘)되는 설화(說話)
홍천 백우산(白羽山) / 오음산(五音山) / 삼마치(三馬峙) / 쌍계사(雙溪寺) 대웅전
<1> 오음산(五音山) 삼마치(三馬峙)
삼마치(三馬峙) 고개는 홍천과 원주를 잇는 국도 중간쯤에 있는 큰 고개로 그 마루턱에 오음산(五音山)이 있다.
옛날 이 고을 사람들은 오음산에서 다섯 명의 장수가 태어난다는 속전(俗傳)을 믿고 이들이 행여 반역을 일으킬까 두려워 산골짜기에 구리를 녹여 붓고 쇠 창을 꽂았다고 한다. 예전 내려오는 이야기로 장수가 태어나면 나라에 반역을 일으키는 반역자가 된다는 속설(俗說)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골짜기에 구리를 녹여 붓고 쇠 창을 꽂아 장수의 혈맥이 끊겼던지 바위에서 검붉은 피가 용솟음치면서 다섯 가지 괴상한 울음소리가 사흘 밤낮을 그치지 않고 울려왔다.
사흘이 지난 저녁, 주인을 잃은 백마 세 마리가 나타나 애달프게 울다가 고개를 넘어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 뒤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산을 다섯 가지 울음소리가 났다고 하여 오음산(五音山), 말 세 마리가 울면서 넘어갔다는 언덕을 삼마치(三馬峙)라 불렀다고 한다. <峙-언덕 치>
<2> 쌍계사(雙溪寺) 전설
홍천의 내촌면(內村面)에 있는 쌍계사(雙溪寺)에 얽힌 전설로, 신라 서곡대사가 절터를 고를 때 계란을 묻어 닭이 울어야 명당(明堂)이라고 하면서 밤중에 계란(달걀)을 묻었다.
과연 새벽에 닭 두 마리가 홰를 치며 울어 쌍계사(雙鷄寺)라고 이름을 지었다가, 후에 두 줄기의 시내가 흐름을 보고 쌍계사(雙溪寺)로 고쳤다고 한다.
<3> 백우산(白羽山) 장수
옛날 홍천군 내촌면 백우산 기슭 매지골에 화전(火田)을 일구며 사는 초맹삼이란 어질고 착한 농부가 살았는데 화전민(火田民)이라 조상의 제사를 지내려면 이웃 동네에 가서 쌀을 몇 됫박 구해다가 제사를 올리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부인 허을란 역시 마음이 착하고 남편을 잘 공경하여 인근 사람들에게는 금슬(琴瑟)이 좋은 부부로 소문은 나 있었지만, 나이가 오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어느 해 가을, 일을 끝내고 잠시 쉬고 있는데 설악산으로 간다는 늙은 스님이 찾아와 시주(施主)를 청하자 마음이 착한 부부는 스님을 반갑게 맞아 강낭콩을 넣은 밀범벅을 대접한 후 농사지은 콩을 한 됫박 시주했다. 그랬더니 스님은 ‘나무아미타불’을 몇 번 되뇌고는 떠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듬해 봄, 신기하게도 부인의 몸에 태기(胎氣)가 있어 놀랐는데 가을이 되자 부인은 드디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아들을 낳아서 부부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일 뿐, 즐거운 일에는 슬픔이 따른다고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새로 태어난 아기가 백 일이 지나기도 전에 걷기 시작하고 기운이 장사였는데 더욱 이상한 것은 밤마다 살그머니 나갔다가 자정이 지나서야 옷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들어오는 것이었다.
부부는 차츰 겁도 나고 기이하여 하루는 몰래 뒤를 따라가 숨어서 아들이 하는 행동을 훔쳐보았더니 이게 웬일인가?
어린아이는 칼을 들고 무술 연습을 하는데 그야말로 신출귀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습이 비호(飛虎)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방바닥에 엎드려 밤새도록 통곡했다.
그 당시에는 장수를 낳으면 나라에 화를 입힌다고 하여 아이가 성장하여 힘을 쓰기 전에 부모의 손으로 죽여야 한다고 했다. 아이는 자라면서 무술이 점점 늘었고 그 소문은 동네에 널리 퍼져 나갔다. 장수 아이에 관한 소문은 널리 퍼져서 원주에 있는 감영(監營)에까지 들어가게 되자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부부는 아들을 죽이기로 했다.
어느 날 뇌성(雷聲)이 천지를 뒤흔들고 번갯불이 쉴 새 없이 번쩍이던 밤, 부부는 피눈물을 머금고 잠자는 아들의 배 위에 콩 두 가마니를 얹었다. 눈을 부릅뜬 아들은 말똥히 저주하는 눈빛으로 부모를 쳐다보자 콩 한 가마니를 더 얹어 아이를 죽이고 말았다.
장수가 죽자 장수를 따라 나타났던 용마(龍馬)도 울며 헤매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홍천 도관(道寬) 2리에 ‘우렁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그때 용마가 울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쉴 바위’라고 불리는 넓은 바위도 있는데 아기 장수가 쉬던 바위라 하고, 그곳에서 3km쯤 떨어진 곳에 ‘약세’라는 곳이 있는데 용마의 죽통과 말 발자국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한다.
장수를 모실 수 없게 된 용마는 슬피 울면서 헤매다가 크게 한번 뛰어 영월 땅에 떨어져 죽었다고 하는데 영월에는 용마의 무덤이 있었다고 하며, 아들을 죽인 부부는 시름시름 앓다가 오래가지 못하고 죽었다는 가슴 아픈 전설(傳說)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