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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의 연기성의 연구 初期佛敎의 緣起性(paticcasamuppada) 硏究 / 전재성
III. 연기의 보편적 원리와 특성
2. 연기의 일반적 원리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가장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연기에 관한 정의는, 원시불교에서 뿐만 아니라 아비달마 불교나 대승불교에서도 그 근본이 되는 연기사상에 대한 정의로, 인구에 회자되는 너무나도 유명한 다음과 같은 문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 정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에 관한 분석은 연기 자체의 개념에 대한 분석보다 소홀히 취급되었다.
1. imasmim sati idam hoti,
2. imassuppada idam uppajjati.
3. imasmim asati idam na hoti,
4. imassa nirodha idam nirujjhati
이 문장은 필자가 그대로 번역한다면 아래와 같아진다: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나므로 이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게 되며, 이것이 소멸하므로 이것이 소멸한다.”
여기서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이것’ 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적이며 자기동일적인 ‘이것’ 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구체적 수레를 ‘이것’ 이라고 할 때 초기불교의 경전상에서 수레의 단일한 실체성이 부정되고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듯이 이것이라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지닌 단일한 어떤 불변의 실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성을 지닌 사건으로서의 인과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잡아함경에서는‘이것’을 시사(是事)로 번역하고 있는 곳이 발견된다: “ 이러한 사건이 있으므로 이러한 사건이 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남으로 이러한 사건이 생겨난다(是事有故是事有 是事起故是事生)”
이러한 구나발다라의 해석은 ‘이것’ 이 어떤 실체라기보다는 사태나 사건임을 통찰한 예리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에서 모든 것은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 ‘사건’은 하나의 작은 시공적 한계를 차지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사건들은 물체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처럼 불투과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시공적 모든 사건은 다른 사건들에 의해서 겹쳐진다.”
여기서 파악하고 넘어가야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연기 소생의 인과성에 해당하는 것이 모두 동일한 이것(pali, idam) 또는 시사(是事) 의 반복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월칭의 정명구론의 법본과 서장본에도 보면,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나므로 이것이 생겨난다(sk. asmin sati idam bhavati, asyotpadad idam utpadyate: tib. ‘di yod pas ‘di ‘byun la, ‘di skyes pa’I phyir ‘di skye ba’o) ‘ 라고 되어 있다. 범본에도 인과에 해당하는 것은 모두 이것(ayam)으로 표현되어 있고 서장본에도 일반적으로 모두 이것(‘di) 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리스 데이비스는 여기에 관해 “이 문맥에서 이것은 동일한 대명사의 나열로 독자를 이끌어서는 안된다. 빠알리어의 서술방식은 우리식으로 두 용어를 구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아 두 용어이지 하나는 아니다” 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논리는 범어와 서장어 및 구나발다라의 한역에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 실제로 빠알리 문장이나 쌍쓰크리뜨 문장에서는 동일한 대명사의 반복은 분배의 의미를 지닌다. 즉 ayam- ayam 은 ‘이것- 저것’, asu – asu 도 ‘이것 – 저것’ 의 의미를 지닌다. 서장어서도 원래는 그러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서장대장경의 특성상 자귀번역에 충실하다보니 그렇게 번역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나라 말에서나 일상적 사용에서도 얼마든지 ‘이것은 이러하고 이것은 이러하다’ 고 관용적으로 쓸 경우 서로 다른 사태를 비교하는데 응용될 수 있는 것으로 이 때에는 내용적으로 인접한 것의 분배적 의미로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원전에 충실하게 서장어처럼 번역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틀렸다고 볼 수 없다.
극단적으로 월뿔라 라훌라가 지적하는 것처럼 A와 A 는 같은 것이 아니다. 두 개의 연속적인 순간은 같은 것이 아니며, 따라서 A와 A 사이에는 동일성도 차별성도 성립하지 않는 지속적인 무상의 원칙이 지배된다.
따라서 한문 번역본에는 일반적으로 연기에 관한 정의가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함으로 저것이 소멸한다(차유고피유 차기고피기 차무고피무 차멸고피멸)” 로 내용적으로 번역하여 ‘이것(idam)’ 을 이것 ’此’ 와 저것 ‘彼’ 로 나누어 분배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범어 문헌에서도 빠알리어의 범례를 쫓지 않고 한역처럼 분배적으로 설명한 곳이 있다. 예를 들어 단편적으로 발견된 연기경에서도 이것(idam)과 저것(asau)을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연생의 ‘이것’을 분배적으로 해석해 다시 한글로 옮기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기하므로 저것이 생기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게 되며, 이것이 소멸함으로 저것이 소멸한다.”
이 번역은 다음과 같은 깔루빠하나(Kalupahana, D.J.)의 영역과 일치한다: “ When this is present, that comes to be: from the arising of this, that arises. When this is absent, that does not come to be: On the cessation of this, that ceases.”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번역은 서장역이나 한역과 일치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빠알리 문장의 imasmim sati 에 해당하는 부분을 ‘이것이 있을 때’ 라고 imasmim asati 를 ‘이것이 없을 때” 라고 번역했으나 서장역은 ‘di yod pas 로 ‘이것이 있음에 의해서’ 로 되어 있고 한역은 일반적으로 此有故로 ‘이것이 있음으로’ 라고 되어 있다. 서장역은 어느 정도 인과관계 속에 원인(agent)의 조건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한역은 칼루파하나의 의하면 다음과 같은 원리 – A, 그러므로 B, B 왜냐하면 A – 를 대변하는 것으로 그것은 논리적 이유에 한정될 뿐 인과적 조건성은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한역은 인과적 스펙트럼에서 논리적이고 설명적인 이유를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주 드물지만 동진(東晉)의 승가제파가 번역한 중아함경의 설처경에서 인과적 조건성을 반영하도록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한역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만약 이것이 있으면, 곧 저것이 있고, 만약 이것이 생겨나면, 곧 저것이 생겨난다. 만약 이것이 없으면, 곧 저것이 없으며, 만약 이것이 소멸하면, 곧 저것이 소멸한다(약유차즉유피, 약생차즉생피, 약무차즉무피, 약멸차즉멸피)”
1) 若有此卽有彼의 원리
“만약 이것이 있으면 곧 저것이 있다” 는 의미는, 현대과학적인 의미로 본다면 아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 존재론적 관점에서 “만일 이것이 있으면” 이란 항목은 “저것이 있다” 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을 진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건에의 의존성은 인과적 법칙성에 고유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과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어떤 종류의 법칙에 의해서도 충족되는 최소한의 요구이다.
·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놓고 볼 때 결과인 저것은 원인인 이것에 의해서 개괄된 조건이 충족될 경우에만 일어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인과 결과는 존재상의 계기를 이룬다. 즉 원인은 결과보다 존재상으로(existentially prior to effect) 이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 원인과 결과에서의 즉(卽)의 의미는 결과는 원인에 어김없이(lack of exception) 뒤따른다는 인과관계의 항상적 연접을 지칭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집합으로 이루어진 단일한 원인에 의해 어떤 사건의 단일한 결과가 연관된다는 원인과 결과의 일대일 대응관계인 유일성의 원리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분석에 따르면 약유차즉피유는 시간의 개념을 배제한 사건의 논리적 관계만을 나타낸다. 즉 상호관련의 법칙만을 제시하는 것이다. 김동화 박사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의 관계를 동시적 상호관계로서 공간적인 상의상자(相依相資)의 논리적 관계라고 정의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하지만, 시간의 개념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에 유위해야 한다. 또한 사사끼겐준이 주장하듯이 논리적인 교호성 Aßa B 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으나 원인의 존재상의 우선성은 결코 망각되어서는 안된다.
상호관련의 법칙이 인과법칙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어진 사건이 다른 사건의 변화에 의해 산출된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 단지 두 사건의 결합법칙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지레의 두 지렛대는 정확히 결합되어 있지만 인과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상호의존하는 두 갈대묶음을 기계적이고 정태적인 질료의 의존관계가 아니라 변화하는 두 사건의 의존성이 성립하는 쌍조건적인 인과관계의 성립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로서 불교에서는 엄밀한 실제적 인과관계는 아니지만 상호연관의 범주가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연기의 범주 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약유차즉유피는 빠알리어 원문의 의미를 보충하여 “만약 이것이 있으면, 곧 저것이 있게 된다” 라는 뜻으로 “있다” 와 “있게 된다” 의 동시적이면서도 존재상의 계기가 인정되는 상호관련의 수반성을 내포하는 넓은 의미의 인과관계로 받아들인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설일체유부의 사상가인 중현은 차유고피유의 개념속에 인과적 연결관계의 본질적인 것이 표현되어 있어 그밖의 다른 원리는 과잉적인 것으로 보았다.
설일체유부의 기초경전인 아함은 현존하는 빠알리 니까야와는 다른 부분적으로 현존하는 쌍쓰크리뜨 아함인데, 거기서 차유고피유, 즉 약유차즉유피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yadutasmin satidam bhavity”
중현에 의하면 이 첫번째 원리 즉 약유차즉유피는 조건성보다도 함께 생성되는 병발(幷發)의 수반적 원리인 구생(俱生)의 관계를 지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약유차즉유피의 관계를 단순히 정태적인 논리적 관계로 환원시키지 않고 논리적 관계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과정적인 구체적 존재의 수반적 생성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탁월한 측면을 지닌다. 이것은 아유차즉유피가 약생차즉생피의 고려하에 설명되어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그 다음의 연기원리인 약생차즉생피를 다소간 잉여적으로 만드는 결함을 지닌다. 붓다고싸의 청정도론에서는 인연(인, hetu 와 연, paccay은 초기불교에서나 남방의 아비달마불교에서나 모두 동일한 의미로 쓰였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데서도 입증되는 것이다.
“원인이 된 뒤에 조건이라고 불리우며, 원인의 상태이므로 조건이라고 불리운다.”
이 정의는 원인의 조건성(원인이 된 뒤의 조건)과 수반성(원인의 상태로서의 조건)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이러한 조건성과 수반성이 합해서 상호 연관에서의 원인의 존재상의 계기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원인의 조건성과 수반성 가운데 수반성이 압도적일 경우에는 상호작용의 관계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성립한다.
지구와 돌멩이를 비교해서 두 질량 가운데 어느 하나가 나머지 다른 것보다 훨씬 작다면, 보다 큰 질량을 작은 질량의 가속도의 원인이라고 조건적으로 간주하여, 큰 것에 대한 작은 것의 반작용은 무시할 수 있지만, 이러한 인과관계는 분명히 상호작용의 한 측면으로 원인의 압도적인 수반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변증법론자들이 주장하는 상호관계를 인과관계에서 회생시키지 않으면서 원인의 존재상의 계기를 보존하기 위해 원인의 결과에의 수반이란 원리에 주목할 것이다. 이로서 원인과 결과가 수반할 경우 상호적 인과관계와 인과적 되먹임(Feedback)의 원리마저 넓게 연기의 원리적 측면에 수용하게 될 것이다.
첫댓글 집성제를 빼고는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되지 않습니다.이글 이해 되십니까?^^
안돼요. 노력은 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