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추적] 1799년 3월 7일. 한 신하가 왕과 맞서고 있었다. “신들은 죽으면 죽었지. 감히 그 명을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 심환지 “경의 말은 너무 지나치다.” : 정조
그는 섬돌 아래로 내려가 관을 벗었다.1) 왕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우의정 심환지. 그는 왕의 정적이었다. 그로부터 210년 후2) 이 사건에 숨겨진 놀라운 진실이 드러났다. 사건 하루 전날 왕은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강력히 아뢰고 즉시 뜰로 내려가 관을 벗고 견책을 청하라.” : 정조의 편지 그의 모든 행동은 왕의 사전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정적과 공모한 왕은 정조였다. 그는 왜 정적과 밀통했을까? <비밀편지 299통, 정조는 왜 政敵과 密通했나?> 참 놀라운 일입니다. 앞서보신 파직 사건은 모두가 정조의 치밀한 각본에 의한 연출이었던 겁니다. 정조는 자신과 정치적으로 정반대 입장에 있었던 당의 영수와 이 모든 일을 공모했습니다. 학문이 깊은 성군으로만 알려져 왔던 정조였기에 이런 막후정치는 우리를 더더욱 당황스럽게까지 하는데요. 지금껏 감춰져왔던 역사의 진실을 밝혀준 것은 바로 이 편지였습니다.
지난 2월 9일. 세상에 눈과 귀를 모은 발표가 있었다. 210년 전 조선시대 왕의 편지가 대량으로 공개된 것이다. 봉투까지 보존된 편지가 299통. 편지에 겉봉투엔 입구마다 도장이 찍혀있다. 박철상 고문헌 연구가 “옛날에는 편지를 쓰고 나서 이렇게 봉투에 넣은 다음에 이렇게 풀칠을 하고 그 다음에 이 위에다가 도장을 찍습니다. 다음에 다른 사람이 이렇게 열어 볼 때 봤다가 다시 붙이면 티가 나겠죠. 결국은 이제 일종의 지금으로 말하면 패스워드(Password) 기능이죠. 못 열어보도록... 그렇게 하는 것인데 이름을 봉함인이라고 합니다.”
봉함인은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는 단서가 된다. 바위틈에 핀 국화를 그린 조선시대의 수묵화. 이 그림의 편지에 봉함인과 비슷한 낙관이 있다. 만천명월주인홍, 봉함인의 문구와 일치한다. 그것은 정조의 호였다. 신하에게 299통의 비밀편지를 쓴 왕은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1752~1800)였던 것이다. 210년 전, 정조가 직접 쓴 편지엔 놀라운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초서로 흘려 쓴 한자들 속에 유독 눈에 띠는 글자가 있었다. 한글 ‘뒤?박?’이다. 모습이 초라하고 가냘프다는 뜻에 ‘만조’도 있다. 안대회 교수(성균관대 한문학과) “이 ‘만조하다’는 표현과 그 뉘앙스는 다른 한자어나 이런 것을 가지고 살리기가 굉장히 어렸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표현으로 대체는 가능하겠지만 이 표현을 그대로 살리기 어려운데 한자로 다른 것을 쓸 수 있겠지만 일부러 사용하지 않은 것이죠.” 한자의 음을 빌려 쓴 구어체 표현도 등장한다. 왕은 마치 대화하듯 격식 없이 편지를 썼다. 유머에도 능했다. ‘가가’는 웃음소리 껄껄을 뜻한다. “감독관 자리를 소론에게 돌리지 않는다면 또 무슨 욕을 먹으려나? 껄껄” : 정조의 편지.
이런 표현 방식은 요즘의 인터넷 언어와도 비슷하다. ‘가가’ 즉 껄껄은 크크나 허허와 같다. 유머는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정치현안을 ‘좋은 건더기’라고 표현하기까지 했고 때론 임금의 말이라곤 믿기지 않는 표현도 등장한다. “여기 보면 ‘진 호종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랑캐의 종자이다’라고 하는 표현인데요. 우리 말로는 ‘호로자식’이다 라고 하는......” 안대회 교수 “저도 이 표현을 보면서 상당히 놀랐습니다. 정조는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학자 군주로서 굉장히 점잖고 그런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어휘 사용하는 부분은 너무 거칠다.” 정조는 격정적인 인간이었다. 뜻을 거스르는 신하는 거침없이 비난한다.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과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이 감히 주둥아리3)를 놀리려고 한다.” 2백년 만에 공개된 정조의 편지는 이제껏 알 수 없었던 인간 정조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정조실록에는 이런 표현들이 눈에 자주 뜨입니다. 불인문지교(不忍聞之敎). 참아 들을 수 없는 왕의 말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욕이나 막말을 가르치죠. 지금까지 실록을 통해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는데요. 이번에 발견된 편지에는 욕설과 유머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인간 정조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헌데 과연 왕이 이처럼 격의 없이 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대상은 누구였을까요. 정조의 편지엔 받는 사람의 이름이 없다. 겉봉투에 신분을 짐작할 만한 문구가 있을 뿐이었다.4) 박철상(고문헌 연구가) “‘단규개탁’입니다. 의미상으로는 ‘단규가 열어봐라’ 이런 말입니다. 端揆라는 것은 문무백관을 통솔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인데요. 주로 좌의정이나 우의정을 통칭하는 말인데...” 몇 장의 편지엔 수신처가 표시돼 있었다. 그는 삼청동에 살고 있었다. 정조 당시 삼청동에 살았던 정승은 누구였을까. 경기도 용인시에 그 주인공이 잠들어 있다. 지난 1998년 이장을 하면서 2백년 만에 드러난 무덤. 관 뚜껑에 그에 이력이 쓰여 있었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세자의 스승을 맡을 만큼 학식이 뛰어났던 조선 후기 최고의 문신5).
그는 정조 말년에 우의정이었던 심환지(1730~1802)였다. 박현모 연구실장(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양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요. 그 하나가 ‘권모술수에 능한 노회한 역적이었다’라는 남인들의 평가가 많았고요. 또 하나가 ‘정치 원칙을 지키려 했던 보수주의자’......”
심환지는 41살에 급제 뒤늦게 관직에 진출한 후 정조 때 급격히 부상한 인물이었다.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두루 역임했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서 정조 사후엔 영의정에 이르렀다. 정조실록은 심환지의 정치적 성향을 벽파라고 적고 있다. 정조 당시의 정국은 크게 둘로 나뉘어 있었다. 이른바 벽파와 시파였다. 시파는 정조를 지지하는 오늘날의 여당 같은 세력이었고 벽파는 정조를 견제하고 비판하고 야당은 입장이었다.6) 두 세력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부른 시각에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다. 1762년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다.7) 시파는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며 동정하는 입장이었고 벽파는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이를 제거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다. 김성윤 교수(경북대 영남문화연구소) “벽파와 정조가 대립하게 된 계기는 분명 사도세자 문제이고 그 저변에는 정조의 개혁에 대한 의견 차이도 다소 존재합니다.” 심환지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정당화하고 정조의 정책을 비판했던 벽파의 영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오래 동안 정조 암살에 배후로 지목되어 왔다. 그가 어의 심인을 시켜 정조를 독살했다는 것이다.8) 1800년 6월 병석에 누운 지 보름 만에 사망했던 정조. 많은 사람들에게 왕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그 때문에 죽음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심환지는 왕의 건강을 책임지는 내의원의 수장이었다. 유봉학 교수(한신대 국사학과) “정조의 독살을 의심하는 그런 여론이 있었을 때 그 때의 時相은 당연히 심환지였죠.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가지고서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다’라고 하는......” 의혹을 부추긴 것은 당시 어의였던 심인이었다. 심인은 심환지의 먼 일가였다. 사람들은 심인이 일부러 약을 잘못 써서 왕을 죽게 만들었다고 믿었다. 정조에게서 299통의 비밀편지를 받았던 심환지. 그는 왕을 독살했다고 의심받을 정도로 첨예하게 왕과 대립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정조의 적수였던 심환지. 정조는 심환지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이런 당부를 했습니다. 편지를 다 읽고 난 뒤에는 이처럼 불에 태워버리던지(內之) 혹은 이처럼 찢어 버리거나(?去) 물에(洗去) 씻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의 존재 자체를 비밀에 부치라는 뜻인데요. 정조는 왜 이처럼 심환지와 밀통을 했던 걸까요. 정조23년 3월 7일. 조정은 격렬한 찬반논쟁에 휩싸여 있었다.9) 신하들은 왕에게 맞서고 있었다. 가장 강경하게 반대한 사람은 심환지였다. ‘신들은 죽으면 죽었지. 감히 그 명을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 심환지의 말. ‘경의 말은 너무 지나치다.’ : 정조의 말.
당시 정조는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죄로 유배를 갔던 한 왕실의 종친을 사면하려 했다. 이 논쟁의 주인공은 화완옹주, 정조의 친 고모였다. 화완옹주는 오빠 사도세자를 모략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 중에 하나였지만 정조는 고모의 환갑을 맞아 모든 죄를 용서하려 했다. 박현모 연구실장(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비록 사도세자, 내 생부를 미워했지만 생부는 이걸 용서하려 했다’ 그래서 말하자면 ‘사도세자의 그 마음을 살려서 내가 내 고모를 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하들은 완강했다. ‘정성이 부족하여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물러가서 처벌을 기다리겠나이다.’ : 심환지의 말. 심환지는 대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관을 벗었다. 벼슬을 내놓더라고 결코 물러섰을 없다는 뜻이었다. ‘우의정의 행동은 너무나도 지나친 것이다. 관을 벗지 말고 즉시 전(殿)에 오르도록 하라’ : 정조의 말.10) 심환지는 끝내 거역했다. 정조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우의정 심환지를 파직(罷職)하라.’ 사건 하루 전날,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냈다(1799년 3월 6일 하루 전 편지). ▶ 왜 정적(政敵)에게 편지를 썼나? 왕은 심환지의 행동 하나하나까지 지정해 주며 대신들 앞에서 자신에게 맞설 것을 주문했고 이후 자신이 내릴 처분까지 미리 일러두었다.11) 유봉학 교수 “모든 사람이 가장 극렬한 반대자라고 생각하는 심환지로 하여금 반대하는 몸짓을 취하도록 이렇게 함으로 해서 그 반대 여론을 이제 잠재우게 되는 것이죠.” 심환지는 정조의 각본에 따라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얼마 후 영중추부사로 조정에 복귀한다. 이 역시 정조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12) 김문식 교수(단국대 사학과) “그러니까 쫓겨났다고 했을 경우에도 그 사건이 지난 뒤에 심환지를 다시 등용을 하게 되고 정조는 정조로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천명하는 길이 되니까 그건 두 사람에게 다 유용한 방법인거죠.” 정조는 편지를 통해서 국정현안들을 논의했다. ‘은혜를 널리 펴기 위해 설치한 본뜻이 뒤집혀 도리어 원망을 부르는 단서가 되었으니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어찌 심히 분통스럽지 않겠는가?’ 1797. 10. 5 정조가 분노한 것은 정리곡 문제였다. 1795년 정조(19년)는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을 맞아 수원화성행궁에서 잔치를 열었다. 일찍 남편을 여읜 체 아들 하나만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심이었다. 정조는 60세 이상 노인들을 초청해서 국가적인 경로잔치를 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줬다. 그것이 정리곡이었다. 그런데 이를 이용해서 부정 축재를 하는 관리들이 있었다. ‘듣자하니 정리곡이라고 하면서 2, 3전씩 돈을 주고는 일곱 말의 쌀을 거두어들이거나 또는 몇 전의 돈을 주면서 가을에 2, 3냥의 돈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정조는 분노했다. 심환지에게 편지를 써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것을 주문했다.13) ‘자전(혜경궁 홍씨)의 은덕을 널리 베풀려 하는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마음을 막아서 행해지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민간에 폐해를 끼치는 실마리를 제공하게 하다니 생각이 이미 미치면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14) : 심환지의 말. 심환지는 왕의 분노를 대신 표출했다. 그런 그를 정조는 대신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치하하고 상까지 내렸다.15) 두 사람의 사전조율은 상상을 초월했다. 1797년 12월 1일 편지엔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 “사직 상소의 주지는 다음과 같이 하라. ‘신은 다른 재주가 없고 간절히 한 마음으로 성상의 뜻을 밝히고 성상의 덕을 높이는 것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자 그럼 여기에 해당하는 승정원일기를 찾아보겠습니다. 여기 (1797년) 12월 4일 자 승정원일기에 심환지가 올린 상소가 실려 있습니다. ‘신은 다른 재주가 없고 간절한 한 마음으로 성상의 뜻을 밝히고 성상의 덕을 높이고자 하였습니다.’”
정조는 심환지가 올린 상소의 내용을 네 부분에 걸쳐 미리 적어 주었고 심환지는 이를 그대로 반영해서 상소를 작성했다. 장유승 번역위원(한국고전번역원) “공식적인 기록에는 공론화된 사안의 처리 결과만 나와 있을 뿐이고 이렇게 사안이 제기 되기 이전에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조율하는 과정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정조 어찰은 사건의 내막, 정조의 숨은 의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에 대해선 서신 왕래가 더욱 빈번했다. 정조는 상소의 초고를 받아 다시 고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왕의 생각은 심환지의 입을 통해 국정에 반영됐다. 두 사람은 뗄 수 없는 정치적 협력자였다. 정조는 심환지와 다양한 국정현안에 대해서 사전조율을 통해 처리를 했고 심환지도 또한 임금과 합의한 사안에 대해선 충실하게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헌데 좀 이상합니다. 심환지는 분명 정조와 정치적인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이었는데 왜 왕의 뜻을 따랐던 걸까요. 수원 화성 박물관. 이곳에 정조에 또 다른 편지가 있다. 김준혁 학예팀장 “여기 보시면 ‘우규개탁(右揆開坼)’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우규(右揆)’는 곧 우의정을 이야기 하는 것이죠.”
1789년 우의정에게 보낸 정조의 친필 편지. 이것 역시 비밀 편지다.16) 그런데 이 편지를 받은 우의정은 심환지가 아니었다. 채제공(1720~1799),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을 주장해온 시파 남인세력의 지도자였다. 김준혁 학예팀장 “정조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죠. 왜 그러냐면 영조가 사도세자가 죽었을 때 정조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채제공은 사심이 없는 신하다. 너의 유일한 충성스런 신하다’ 이렇게 이야기할 정도로 정조에게 있어서 채제공은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심환지는 채제공에 대해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두 사람은 정치적 맞수였다.17) 당시 조선은 100년 동안 당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남인, 소론, 노론 각 정파는 정권을 잡을 때마다 피의 보복을 반복했다. 사대부들은 당파에 따라 편을 지어 서로를 감시하고 비난했다. 왕이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시빗거리가 되는 상황. 정조는 자신을 지지하는 남인 영수 채제공은 물론 반대당파인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도 두루 편지를 보냈다. 당쟁을 뚫고 소통하기 위해 정조는 편지를 썼다. 김문식 교수 “정조가 당대 정국을 구성하는 각 정치 세력과 일정한 소통 망을 갖추고 있었다고 봐야 될 겁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필요에 따라서 끊임없이 의견을 교환하고 또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각 정파의 입장도 정조가 수용하는 이런 조정과정이 막후에서 계속 이루어졌던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 정적(政敵)은 왜 왕을 따랐나? 정조에겐 여러 개의 정보망이 있었다. 정조는 각 당파의 지도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세를 파악했다.18) 그리고 정보들을 통합해서 통치에 활용했다.19) ‘남인(南人)과 소론(少論)의 분위기는 매우 두려울 정도이다. 속내를 알 수 없으니 매우 근심스러운 일이다. 윤함이라는 자가 또 상소한다고 하는데 어찌 이렇게 함부로 올리는 일이 있단 말인가. 만류할 수 있다면 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이로춘이 상소한다는 소문도 정말인가 그에게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라.’ - 1799. 2. 3 정조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고 있었다. 김문식 교수 “각 정치세력으로부터의 정보는 국왕에게로 집중이 되었다. 그럼 결국 국왕이 가장 최고의 위치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일부를 제한적으로 각 정파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한적으로 흘려보내면서 각 세력들을 이끌어갈 수 있게 되는 거죠.” 정보는 반대 세력을 견제하는 데에도 이용했다. ‘경은 갈수록 입을 조심하지 않는다. ~~~ 매번 입을 조심하는 일 한 가지만은 탈이 생기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경은 생각 없는 늙은이라 하겠다.’ - 1799. 4. 10 은근하면서도 단호한 압박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적으로 보살피고 따뜻하게 배려했다. ‘부인은 쾌차하였는가? 삼 뿌리를 보내니 약으로 쓰도록 하라.’ - 1796. 11 정조는 심환지의 외아들이 오랫동안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자 300등 안에만 들면 합격시켜주려고 까지 했다. ‘(경의 아들이 이번 과거에) 3백 등 안에 들지 못하였으나 앞으로 긴 세월이 있으니 어느 때인들 합격 못하겠는가? ~~~ 내가 굳이 이번에 합격시키려 한 것은 경이 더 늙기 전에 자식이 과거에 합격하는 경사를 보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1799. 10. 1
왕은 벼슬을 버리고 금강산에 가는 심환지에게 작별의 시를 지어주고 여행길에 건강을 해치지 말라고 음식과 약재까지 보냈다. 박현모 실장 “‘약과 음식을 있는 대로 다 보내라’라고 하면서 또 혼내기도 하기도 그러거든요. 측근을 길들이는 방법이기도 하고 마음을 얻어가는 것이죠. ‘아, 나는 사적인 믿음이 있구나’” 정조는 신하들을 때론 냉철히 견제하고 때론 인간적으로 감싸 앉았다. 정조에게 편지는 소통의 통로였다. 정조는 심환지 뿐만이 아니라 각 당파의 여러 신하들과도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이런 사실만 두고 본다면 정조는 권모술수에 능한 왕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과연 정조는 왜 이처럼 다양한 정치세력들과 막후접촉을 했던 것일까요. 국립청주박물관. 이곳에 또 다른 왕의 비밀편지가 있다. “이건 효종 대왕께서 우리 선조께 내린 북벌 밀찰입니다.”
1695년 정조의 5대 할아버지 효종은 이조판서 송시열에게 편지를 썼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효종은 송시열과 이를 비밀리에 논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따로 만나는 것이 알려지는 부담이었다.20) 왕은 대신 편지를 썼다. 송영달(90, 송시열 13대 사손) “두 분이 청나라를 정벌하는 일로 ‘독대(獨對)’하셨습니다. 독대하신 후에 ‘계속해서 독대를 하면 세상 사람들의 의심을 사고 하니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씀도 있고......” 효종은 비밀 유지를 위해서 세자가 직접 편지를 전달하게 했다. 이 편지의 뒷부분엔 정조의 글이 실려 있다. 임금이 되던 해에 이 편지를 본 정조는 친히 그 감상을 적었다. ‘임금과 신하가 함께 의리를 밝히고 사업을 바르게 하였다.’ 정조는 효종과 송시열을 ‘물고기와 물의 관계’라고 표현했다. ▶ 정적(政敵)인가 동지(同志)인가? 정조 개혁의 중심이었던 규장작. 규장각 정문이 어수문이다. 정조에게 신하는 물이 없으면 살수 없는 물고기처럼 꼭 필요한 존재였다. 때문에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이 정당하다는 벽파의 의리까지 받아들였다. ‘의리라 하는 것은 임금과 신하가 함께 천명해야 하는 것이다. 아랫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윗사람이 억지로 하라고 시킬 수 있겠는가?’ - 1800. 윤 4.14 심지어 벽파의 장점을 살리라는 주문까지 했다. ‘벽파(僻派)의 장점은 옳지 않은 점을 보면 힘껏 말하고 통렬히 배척하는 것뿐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후로는 잘못된 일에 대해서 바로 말하는 것이 어떠한가?’ : 정조 박현모 연구실장 “자기의 생각을 다 표면에 드러내서 정적을 다 쓸어버리지 않고 끌어안고 가는 것이죠. 사실 정조는 연산군보다 더 심각한 심적인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연산군은 어려서 잘 몰랐지만 나중에 알았지만 정조는 11살 때 눈 번히 뜨고 아버지 죽는 것을 보잖아요.” 뒤주에 갇혀 굶어 죽어가는 아버지를 목격했던 아들, 그것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였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모두에게 아버지의 억울함을 인정받는 것이었다.21) 정조는 이를 위해서 사도세자를 위해 죽은 한 승지를 기리고자 했다.22) 1300년 전통의 온천도시 온양. 이곳에 정조가 사도세자를 세운 비석이 있다. 정조는 아버지가 화설 쏘던 자리에 친필을 새긴 비를 세웠다. 박노을 소장(온양아산향토사연구소) “이 영괴대는 장헌세자(사도세자)가 몸에 부스럼이 있어 가지고 백약이 무효고 영 낫지 않고 그러니까 어의에게 특별 진단을 한 번 받은 모양이에요. 그랬더니 온천수욕을 하면 효험이 있다고 받아가지고......”
당시 온양엔 왕실 사람들이 요양하러 오는 행궁이 있었다. 1760년 사도세자는 종기 치료를 위해 이곳에 왔다. 임위는 당시 사도세자를 수행했던 비서였다.23) 그는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자 식음을 전폐하다가 따라 죽었다. 임위를 충절을 기리는 것은 곧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었다.24) ‘그 훌륭한 충성과 절개가 어두운 하늘의 별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천 년 뒤에도 뜻있는 선비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할 것이니 융숭하게 보답하는 도리에 따라 벼슬을 높이는 은전을 베풀어야 합니다.’라는 등의 말을 덧붙여 글을 짓는 것이 좋겠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이는 벽파의 당론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심환지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의 뛰어나고도 특출난 충성과 절개는 혼탁한 세상을 비추는 해와 별이라고 할 만한 바 천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도 뜻있는 선비들은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 심환지의 말. 벽파의 영수는 정조의 뜻에 따랐다.25) 마침내 반대파까지 사도세자를 인정한 것이다. 박현모 연구실장 “벽파의 영수인 심환지가 그 문제를 제기해서 ‘추증하자’ 이것은 굉장히 범국가적인 범정파적인 입장에서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을 한 것이다.” 심환지는 당파를 넘어 왕에 협력했다. 정조는 그런 심환지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이 편지는 정조 대왕께서 제7대 조부이신 심환지 대감께 보내신 친필 편지입니다.” 임의를 추증한지 40일 후 정조는 심환지에게 다시 한통의 편지를 보냈다. 연말을 맞아 대신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연하장이었다. ‘경이 70세가 되니 이 어찌 장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신들의 장수를 축복하는 이 편지의 마지막에 정조는 자신의 새로운 호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궁궐 곳곳에 현판을 걸어 그 호를 지은 뜻을 알렸다. 만천명월주인옹. 그것은 정치가 정조의 이상이었다. 김영봉 교수(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그 뜻은 ‘모든 물에 비친 밝은 달의 주인 노인’이라는 뜻이죠. 내천자를 썼지마는 강물이나 호수 이런 모든 물을 뜻하고요. 그 물에 반사되는 달, 이게 바로 만천명월입니다. 그 주인이 바로 (정조) 자신이라는 것이죠.” ‘달은 하나뿐이고 물의 종류는 일만 개나 되지만 물이 달빛을 받으면 앞 시내에도 달이요. 뒤 시내에도 달이어서 달과 시내의 수가 같게 되므로 시냇물이 일만 개면 달 역시 일만 개가 된다.’ 정조. 그는 이 이상을 몸소 실천했다. ‘사람은 각자 생김새 대로 이용해야 한다. 대들보감은 대들보로 기둥감은 기둥으로 쓰며 나는 그에 맞추어 필요한 곳에 이용하는 것이다.’ 신하에 좋은 점만 보고 나쁜 점은 버리는 것, 그래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는 것, 그것이 정조가 생각하는 진정한 탕평(蕩平)의 길이었다. 김문식 교수 “각 세력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을 합니다. 그리고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국왕을 중심으로 해서 각 세력들이 동등하게 들어와서 정국을 운영하고 있다.” ‘만천명월주인옹’. 세상의 모든 시내를 비추는 밝은 달. 당파에 관계없이 모든 신하를 아우르는 임금은 정조가 추구했던 가장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번 어찰은 이런 정조의 신념이 어떻게 정치의 구현됐는지 그 실체를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중요한 증거가 됐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것이 분명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299통의 편지 가운데 가장 많은 관심을 끈 것은 정조가 죽기 13일 전에 보낸 마지막 편지였다. 안대회 교수 “정조가 심환지한테 보낸 299통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 이 대목에 보면 자기가 오랫동안 약을 옆에 놓고 자기 스스로 달여 먹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13일 뒤에 정조가 죽었습니다.” ‘독살설하고도 관련이 있는 내용입니까?’ “(소설)‘영원한 제국’이라든지 일부 야사에서는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라고 얘길 하는데요.’” ▶ 독살설(毒殺設)의 진실은? 말년에 정조는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26) ‘항상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고생스럽다. 나는 갑자기 눈곱이 불어나고 머리가 부어오르며 목과 페가 메마른다.’ - 1800. 4. 17 ‘귀의 뿌리와 썩은 이의 씨앗이 번갈아 통증을 일으키니 그 고통을 어찌 형언하겠는가?’ 백승호(서울대 박사과정 정조 어찰 분석팀) “임금의 건강문제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급 정보인데 이것을 심환지에게 알려줬다는 것은 그만큼 심환지를 각별히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심환지의 손자가 할아버지의 일생을 정리한 가장27)에 따르면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언제나 경에게 마음 속 생각을 그대로 말하였고 경도 사실대로 말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편지는 대부분 극도로 예민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정조는 끊임없이 비밀 유지를 강조했다. 그러나 심환지는 정조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것은 심환지가에서 받은 날짜를 일일이 다 기록을 한 것입니다. 받은 시간까지, 날짜, 시간까지...’ : 연구 교수의 말. 오히려 편지를 받은 날짜와 시간까지 꼼꼼하게 남겼다. 김문식 교수 “심환지가 어떠한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이 정조의 어떤 의중을 따라서 한 행동이라는 증거로서 자신의 어떤 알리바이로서 남겨놨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을 겁니다.” 정조의 명을 거스르고 모든 편지를 남긴 심환지. 그는 누구보다 왕의 병세를 잘 알고 있었다. 오랜 화병에 종기까지 겹친 정조의 병세는 심각했다.28) 당시 정조의 치료를 담당한 어의 중에 한 사람이었던 심인. 심환지의 먼 일가인 그는 훗날 정조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처벌당한 인물이었다. 일부에선 심인을 어의로 천거한 사람이 심환지라고 주장했다.29) 김성윤 교수(경북대 영남문화연구소) “정조 이전에도 많은 독살 사건이 있었고요. 정조 자신만 해도 첫 아들(문효세자)이 독살을 당했고 그 생모(의빈 성씨)도 독살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독살이라는 문제가 사실은 당시 정치에서 그렇게 낯선 문제는 아닙니다.” 마지막 편지를 받은 지 13일 후(1800년 6월 28일 정조24년), 심환지는 정조의 처소를 찾았다. ‘밤 사이에 성체는 조금 어떠하십니까?’ : 심환지 ‘물시계가 멈춘 후에 잠을 조금 잤다.’ : 정조 그날 저녁 무렵 정조는 세상을 떠났다.30) 이후 심환지의 맞수였던 시파의 남인들은 심환지가 어의 심인을 시켜 정조를 독살했다고 주장했다. 유봉학 교수 “영남 남인들 같은 경우에 정조의 죽음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는 그런 여론이 있었다는 것은 의당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실제로 당시에 그랬습니다. 그래서 영남지역에서 남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동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심환지는 정조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심환지의 <가장>은 이렇게 기록한다. ‘살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자주 정조를 생각하며 옆에서 말리지 못할 정도로 슬피 울었다고 한다.31) 심환지는 정조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30년 동안 임금과 신하로 각별한 의리를 지켰다고 말했다.32) 김문식 교수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가까웠던 게 사실인 것 같아요. 편지 곳곳에 나오는 친밀감을 보여주는 표현이라든가 개인의 신상에 대해 굉장히 잘 알고 있다라든가 또 그런 가족을 챙기는 모습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봤을 때 일대일의 인간으로서는 굉장히 신뢰가 구축돼 있던 것 같고요. 다만 정조라는 입장과 심환지라는 입장에서 개인의 입장만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이 있는데 그 정치적 입장은 완전히 일치할 수 없지요.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구상하는 탕평정치 속에 심환지가 대변하는 벽파의 입장이라는 것이 일정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비중을 정조가 도외시 하지 않았다.” 정치적 적수이자 인간적 동지였던 두 사람. 그들이 남긴 299통의 편지는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정조정치의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가고 있다. 오늘날까지 정조를 둘러싼 독살설이 끊이질 않고 있는 것은 정조의 죽음으로 인해서 멈춰서야 했던 개혁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일 것입니다. 200년 전 정조의 편지는 생각이 서로 달라도 인정하고 함께 했던 참 정치의 이상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 저작권은 KBS <역사추적>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1) ‘階下免冠’ 계단 아래서 관을 벗었다. 2) 2009년 2월 9일. 3) 喙 : 새부리 훼. 4) 端揆(단규), 開坼(개탁). 5)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원임 규장각제학 문충심공지구. 6) “‘임금의 시(時)’를 배반하고 ‘당사(黨私)의 벽(僻)’으로 나아갔다. 정조실록. 7) 壬午禍變(임오화변). 8) 여유당전서. 9) “‘안된다’ ‘된다’ 논쟁하다.” - 정조실록. 10) 정조실록.11) ‘강력히 아뢰고 즉시 뜰로 내려가 관을 벗고 견책을 청하라. 그러면 일의 형세를 보아 파직할 것이다.’ 12) ‘그 뒤에 다시 임명하는 방법도 생각해 놓은 것이 있다.’ 13) ‘경이 곧바로 행동하는 것이 어떠한가?’ 1797. 10. 6 14) 정조실록 1797. 10. 7 15) ‘심환지에게 표범 가죽을 하사하였다.’ 정조실록. 16) ‘(동봉한 문서는) 되돌려 보내는 것이 좋겠다.’ 17) 채제공은 ~~~ 흉당이다. 18) ‘요사이 소식이 없으니 다시 독촉하도록 하라.’ - 1800. 3. 3 19) ‘지금 보고를 받아보니’ - 1800. 2. 9 20) ‘근일에는 인심이 흩어져 독대하는 일을 마음으로 몹시 싫어하니’21) ‘엎드려 땅을 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목메어 울먹였다.’ - 정조실록 1800. 1. 17 22) 죽은 승지 ‘임위’를 가르친다. 23) ‘당시 온양 행궁에 올 때 어가(사도세자)를 수행했다.’ - 1798. 10. 14 24) ‘그 훌륭한 충성과 특출난 절개’ 25) ‘임위에게 좌찬성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이라 하다.’ - 정조실록 1798. 11. 1 26) ‘나는 뱃속의 화기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27) 손자가 쓴 심환지 일대기. 28) ‘등 쪽에 또 종기 비슷한 것이 났는데 지금 거의 수십 일이 되었다.’ - 정조실록 1800. 6. 14 29) 순조실록. 30) ‘저녁 여섯이 경에 임금이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하다.’ - 정조실록 1800. 6. 2831) ‘슬픔이 이르면 아무 때나 방에서 우니 곁에 있는 사람들이 울음을 그치라고 권하지 못하였다.’ - 심환지 가장. 32) 심환지 가장.
정조·연산군, 그들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정조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연산군은 어머니를 잃었다는 불우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정조는 성군으로 추앙받는 왕이 된 반면 연산군은 폐주가 되고 말았다. 왜 그들은 이렇게 판이한 인생길을 걸어갔을까? 훌륭한 어머니의 대명사인 신사임당의 아들이었던 이이는 왜 사회불안에 시달려야 했고 ‘화목한 대가정’을 위해 동분서주했을까?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이자 개혁주의자였던 허균은 왜 ‘은둔’과 ‘공명’ 사이에서 하릴없이 방황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했을까?
반면에 연산군은 건강한 인격자인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아니라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며 유년기를 보내야만 했고, 마마보이인 아버지 성종이나 과부였던 대비들은 연산군에게 건강한 영향을 줄 수 없었다. 또한 끊임없이 살해의 위험을 당했던 연산군은 사람, 세상에 대한 신뢰감을 형성할 수 없었고 이것이 그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만든 주요한 원인이 됐다. 정조는 전략가(INTJ)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개혁에 대한 원대한 청사진을 그릴 수 있었고 강철 같은 의지로 개혁을 줄기차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
이 책에서 분석했듯이 얼마 전에 공개된 ‘심환지에게 보낸 299통의 비밀편지’에서도 이러한 그의 성격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반면에 연산군은 어린아이(ENFP)라는 성격인 데다 심리적으로도 불안 문제가 심각해 예술분야 등에서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지만 조선왕실의 엄격한 문화, 지도자로서의 역할과는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이 책을 보면 심리학의 눈을 통해 조선시대를 살다 간 네 인물의 인생과 내면세계를 가감 없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나는 이 책이 심리학적 분석을 통해 그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에도 나름대로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심리학적으로 사도세자는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폐비 윤씨는 심리적으로 건강한 여성이었다. 허균도 혁명을 도모한 적이 없었다. 나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역사학과 심리학의 적절한 만남이 창조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새삼 확인했다. 이제 그 결과의 타당성에 대한 판단과 검증은 심리학계와 역사학계 그리고 독자들께 맡긴다.
김태형 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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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책을 벗 삼아 원문보기 글쓴이: 문화재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