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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부산 범어사에서 발간하는 격월간지 <금정> 1,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화엄 구법만행>이란 제목으로 올해부터 연재하고 있습니다. 경전반분들이 화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올립니다. 어제 강의 내용이 많이 보일 것입니다.
화엄 구법만행1. 프롤로그
화엄과 의상
화엄은 평등이다
흔히 화엄을 가리켜 불교철학의 최고봉이라고 말한다. 불교의 여러 사상 중에서 가장 철학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를 달리 해석하면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도 된다. ‘철학적’이라고 쓰고 ‘난해하다’고 읽는 셈이다. 실제로 화엄사상과 관련된 책들을 읽다보면 화엄이 어렵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화엄의 어려운 용어들 속에서 헤매다가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혹여 화엄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화엄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어려운 것은 아닐까? 우리의 마음에 온갖 망상과 선입견 등으로 가득 차서 화엄을 어렵게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미리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고 화엄을 접근하면, 실제로도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 어려운 부분만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치 상대방의 단점을 찾겠다는 마음으로 사람을 보면 단점만 보이듯이 말이다. 이러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화엄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이 맑고 고요해야 한다. 흐르는 물에 얼굴을 비추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흐름이 멈춘 맑고 고요한 물에 비추어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처럼, 화엄 역시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해야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화엄은 곧 순수하고 맑은 눈에 비친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엄(華嚴)이란 무엇일까? 화엄은 글자 그대로 꽃(華)으로 장식한(嚴) 세계를 가리킨다. 이 세계는 온갖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파라다이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불성(佛性)이 모두 실현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를 화엄의 용어로 성기(性起)라 한다. 생각해보라. 우리 눈에 비친 모든 존재가 부처라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장미 부처, 소나무 부처, 잘 생긴 부처, 대머리 부처, 노동자 부처, 금정산 부처 등 모든 것은 부처로서 평등한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화엄의 눈에 비친 세계의 실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온갖 편견과 선입견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장미나 모란, 동백 등의 꽃은 매우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반면, 잡초는 이런 아름다운 꽃들이 자라는 데 방해되는 요소라 생각해서 없애려고 한다. 따뜻한 봄날이 돌아오면 <벚꽃엔딩>의 가사처럼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걷지만, 잡초는 사람들의 시선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오죽하면 가수 나훈아가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를 노래했겠는가? 화엄은 이러한 우리들의 시선이 왜곡되었음을 지적한다. 잡초 역시 부처로서 평등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이다.
화엄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낀 적이 있었다. 그래서 화엄과 관련된 강의를 하거나 글을 쓸 때면 이 이야기를 하곤 한다. 봄볕 좋은 어느 날 산에 오르다 뱀을 만난 적이 있었다. 어찌나 놀랬던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산 중턱에 있는 조그만 절에 올라갔다.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108배를 한 다음 잠시 명상에 들었다. 법당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시원하던지 내 마음에 쌓여있던 온갖 번뇌 망상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왜 그렇게 뱀을 보고 놀랐는지를 명상의 주제로 삼아 내 안을 들여다보았다. 흔히 우리는 뱀이 징그럽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상 징그러운 것은 뱀이 아니라 오히려 뱀을 징그럽다고 생각한 내 마음이 아닐까? 뱀이 징그럽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뱀을 보고 나도 모르게 놀랐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뱀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인지 몰라도 내려오는 길에 다시 뱀을 만났는데, 이번에는 뱀을 보면서 ‘안녕’ 하면서 손짓을 했다. 이런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일었다.
산을 오를 때와 달리 뱀에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법당에 앉아 명상을 하면서 뱀에 대한 선입견을 마음속에서 지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맑고 고요한 마음으로 뱀을 있는 그대로 보았기 때문에 징그럽거나 무서운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작은 경험을 통해 화엄이란 모든 존재를 편견 없이 평등하게 대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화엄의 눈으로 보면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들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만든다는 이야기도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법성(法性)의 시인, 의상
이러한 화엄사상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한 인물이 의상(義湘, 625~702)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의상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화엄종의 2조인 지엄(智儼, 602~668)에게서 수학하였다. 지엄의 문하에는 뛰어난 두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법장(法藏, 643~712)과 의상이 그 주인공이다. 스승은 두 제자에게 각각 닉네임을 하나씩 주었는데, 법장에게는 문지(文持)라는 이름을, 의상에게는 의지(義持)라는 이름을 주었다. 법장은 글에 뛰어난 반면 의상은 화엄의 깊은 뜻을 통달했다는 것이다. 지엄이 의상을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의상이 중국인이었거나 아니면 신라로 귀국하지 않았다면 화엄종 3조의 자리는 법장이 아니라 의상에게 돌아갔을지 모를 일이다.
의상은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신라 조정에 알리기 위해 급히 귀국을 하였다. 그리고 화엄의 평등사상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전국에 걸쳐 많은 사찰을 짓게 된다. 이를 가리켜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 한다. 그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인문학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그것이 바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다. 흔히 <법성게(法性偈)>로 불리는 이 저술은 80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의 <화엄경>을 210자로 압축해놓은 한 편의 아름다운 시이다.
이 아름다운 진리의 시를 책으로 만날 수 있지만, 해인사에 가면 이 시와 함께 걸을 수도 있다. 해인사 앞마당에는 <법성게>를 모형으로 만들어놓았는데, 미로와 같은 법성(法性)의 길을 걷다 보면 화엄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음속에 있는 온갖 망념이 소멸되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법성게>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디자인 면에서도 매우 뛰어나다. 또 다른 이름인 <해인도(海印圖)>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시는 바다의 도장을 표현한 그림이다. 그림 자체가 정사각형 모양의 직인을 닮아있지만, 이 직인은 단순한 도장이 아니라 존재의 참 모습을 담고 있는 해인(海印)이다. 해인이란 곧 우리 본래의 마음을 가리킨다.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 바다를 찾게 되면 마음이 확 트인다. 또한 바다는 온갖 보배로운 것으로 가득 차있어서 어부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된다.
어디 그뿐인가? 고요한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를 상상해보라. 밤새 몰아치던 폭풍우가 물러가고 바다가 고요해지면, 갈매기가 나는 모습이며 하늘에 떠있는 태양도 모두 비출 수 있다. 이처럼 온갖 망념이 소멸된 우리의 본래 마음을 맑고 고요한 바다에 비유한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진리의 성품, 즉 법성(法性)이다. 의상은 해인의 눈에 비친 존재의 참 모습을 한 편의 시속에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법성게>는 중앙의 법(法)자로부터 시작해서 210자가 한 줄로 연결되어 미로처럼 돌고 돌아 불(佛)자로 끝을 맺는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서로 연기적(緣起的)인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법성게>가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것은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과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의 사섭법(四攝法)을 의미한다. 또한 이 사각형은 54개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54명의 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보살의 구도행을 표현한 것이다. 중앙에 불(佛), 법(法), 중(衆, 僧)이 일렬로 되어있는 것은 삼보를 나타낸 것이다.
<법성게>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이지 멋진 의미를 담은 그림이라는 생각이다. 의상의 스승인 지엄이 자신의 72도(圖)보다 이 일도(一圖)가 낫다고 극찬한 것은 결코 격려성 멘트는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 화엄종의 중흥조라 불리는 명혜상인(明慧上人, 1173~1232)은 화엄종 조사의 행적을 6권의 두루마리의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여기에는 지엄이나 법장이 아니라 신라의 원효와 의상이 등장하고 있다. 화엄조사회전(華嚴祖師繪傳)이라 불리는 이 그림은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고산사(高山寺)에서 보관하고 있다. 의상의 화엄사상과 감화력이 얼마나 높게 평가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화엄 도량에 펼쳐진 하나인 세계
몇 해 전 8주에 걸쳐 <법성게>를 강의한 적이 있었다. 영화 <화엄경>도 감상하면서 재미있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깨친 눈에 비친 존재의 실상을 어설픈 지식으로 풀면서 체험적인 한계를 느끼기도 하였다.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진리의 세계는 오직 깨쳐서 알 바지 다른 경계가 아니기(證智所知非餘境)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매월당 김시습도 이 대목에 주석을 달련서 이런 멘트를 남겼겠는가.
“말해 보려 하지만 미치지 않으니(欲言不可及), 나무 아래에서 잘 생각해보라(林下好商量).”
깨침의 세계, 화엄의 세계가 언어와 문자를 떠나있다고 하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 또한 우리들이 사는 세계이다. 이성과 논리의 겸손을 마음에 새기면서 <법성게>를 요약하면, 모든 것은 서로 깊은 관계 속에서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에 개체 속에서 전체를 보고 전체 속에서 개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각각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전체의 조화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 <법성게>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소식이다. 이러한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관계 속에서 참다운 사랑과 자비는 가능할 것이다.
몇 해 전 귀농한 친구의 딸기 농장에 놀러갔다가 비닐하우스 안에서 날아다니는 벌을 보고 무척 놀란 적이 있다. 딸기를 수정시키기 위해 벌들을 풀어놓은 것이었다. 만약 벌이 없다면 우리는 맛있는 겨울딸기를 먹을 수 없을 것이다. 벌과 딸기는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기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로 존재했던 것이다. 이것이 존재의 참 모습이라고 화엄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딸기를 먹을 때마다 벌을 떠올리면서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딸기 속에서 벌을 볼 수 있는 마음, 그것이 곧 <법성게>에서 의상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닐까싶다. 이를 확대한다면 우리가 입고 있는 옷에서 어느 이름 모를 중국 노동자의 땀방울을 볼 수 있으며, 우리가 매일 먹는 밥 속에서 여러 나라와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농부의 시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고마움과 미안함, 연민은 이럴 때 나오는 것이 아닐까?
화엄은 단순한 철학적 관념이 아니라 우리들 삶속에 녹아있는 생생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고도의 철학적인 체계 속에서 형성된 화엄사상을 일반 백성들에게 알리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의상의 고민도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은 백성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관음신앙이나 미타신앙과 접목하는 것이었다. 깨친 눈으로 보면 <법성게>에서 강조하는 진리의 성품(法性)은 아미타불이나 정토의 세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의상이 창건한 부석사나 낙산사와 같은 화엄 도량에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이 주불로 모셔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칫 관념적으로 흐를 수 있는 화엄을 백성들이 삶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글은 의상이 화엄사상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창건했던 화엄십찰을 순례하면서 화엄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모색하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삼국유사> 의상전교조(義湘傳敎條)에는 부석사와 범어사를 비롯한 6개의 사찰만 기록되어 있으며, 최치원(崔致遠)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는 10개의 사찰이 나온다. 두 기록 사이에 서로 일치하지 않는 곳도 있으며, 십찰을 꼭 10개의 사찰이 아니라 전국에 걸쳐 세웠다는 만수(滿數)의 의미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지금 다시 뱀을 만난다면 나는 또 다시 놀랄 것이다. 당시의 맑고 고요했던 마음에 다시 온갖 망념이 들어찼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들 삶의 실존이다. 며칠 동안 계속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였다. 화엄 도량을 순례하기 전에 내 마음도 하얀 눈처럼 깨끗하게 세팅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화엄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담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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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아침 내리는 비로 건조함을 달래고 대지는 만물의 모태가 되어 마당에 한구루 매실나무가 발화를하니
이몸에 어느듯 봄이
자리했네요 잘다녀갑니다 만행저두
만행거사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건안하셨지요..^^
거사님께서 봄소식을 전해주시는군요.
올 봄도 마음엔 평화, 입가엔 미소 가득한 날들이길 소망합니다.
일야 두손 모아 _()_
들을 때마다 새롭고 재미나고 그러곤 또 잊고
그래서 다시 듣고 읽고 ..........
그러면서 2015년 봄을 맞았으니 남은 계절도 그렇게 보낼듯 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_()()()_
보살님께서 감로수를 내려주셨군요..^^
따뜻한 봄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야 두손 모아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