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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하는 기도 수행의 방법
오늘은 기도 수행하는 방법 혼자서 절에서나 집에서 기도하고 수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드리려 하고 혼자서 기도하고 수행할 수 있는 분들을 위해 이 법요집을 만들었는데 이걸 가지고 설명할 예정이니까 이책이 없으신 분들은 바깥에 비치되어 있으니까 하나씩 참고하시면서 이야기를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기도가 무엇인지? 수행은 무엇인지? 보통 절에오면 기도하러 간다 수행한다 이런얘기들을 혼욯해서 많이 씁니다. 기도라는 것은 빌기(祈) 빌도(禱)자를 써서 뭔가를 빈다는 이야기예요. 부처님에게 내 간절한 서원, 소원, 소망, 발심한 바, 내가 원하는 바를 부처님에게 빌어서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지해서 부처님께서 이런 어떤 가호가 있게 해주십시오 하고 원하는 바를 비는 것이지요.
세속적인 뭔가를 얻고자 하는 것, 이게 비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수행이라는 것은 빌어서 뭔가를 얻고자 한다기보다는 수행은 괴로움에서 벋어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은 괴로움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합니다.
나는 괴롭지 않고 삶이 행복하고 인생이 참 즐거운데 저는 수행을 안해도 되나요? 수행이라는 것은 자잘한 인생의 괴로움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사고팔고(四苦八苦) 라고 하는 사성제(四聖諦)에서 설명되듯이 늙고 병들고 죽는 근원의 문제 내가 늙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고 지금 죽을 병이 내 인생에 딱 찾아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내일 죽더라도 나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고 여여하다 그러면 전혀 수행 할 필요가 없죠. 그 사람은 지금 그대로 부처일 것이니까.
그런데 우리는 착각을 하는 것이 남들이 옆에서 죽어가는 것을 다 보면서도 나는 저런 사례는 아니겠지, 내가 저렇게 죽겠어? 안쓰러운 사람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영원할 것 같이 느끼는 거죠. 나는 천년만년 계속 살 것 처럼 느낍니다. 그게 어찌보면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게 우리 본성이기 때문에 그런거 같기도 해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껍데기가 몸뚱이가 나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이 뭄뚱이는 영원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런데 몸뚱이를 넘어서는 우리의 근원, 우리의 참된 참나라고 부르는 우리의 본질 본성은 죽을 수가 없는 것이죠.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을 수가 없는, 영원히 산다는 표현을 쓸 수도 없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이런 생사법이 아니기 때문에 불샐불멸하는 법이기 때문에 궂이 표현을 한다면 그야말로 전지전능하다고 하듯이 전혀 나고죽고 이런 것에 물들지 않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가 내가 영원히 살 것처럼 느끼는 착각이 참성품이 본래 그렇게 영원하기 때문에 그런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중요한 점은 우리는 결국은 늙고 병들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이 괴로움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지금은 잠시 행복하자 할 지라도 반드시 괴로울 수 밖게 없습니다. 그래서 이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생사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근원적인 중요한 점이죠.
조금씩 다른 비유를 들어보면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은 불생불멸하는 나고 죽고하는 생멸하는 존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멸이라는 하나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삶이라는 하나의 꿈을 꾸고있는 것이죠. 우리는 꿈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것이 꿈인줄 모르고 진짜라고 여기니까 여기 모든 것에 집착하고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사람이나 사람에 집착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꿈인줄 모르고 벌어지는 일인데 꿈속에서 보다 나쁜꿈을 꾸는 것보다는 좋은 꿈을 꿨으면 좋겠다.악몽을 꾸기보다는 뭔가 좋고 즐겁고 새롭고 행복한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것이겠죠.
꿈속에서 꿈속의 이야기를 바꾸는, 꿈의 내용물을 바꾸는 것, 꿈속의 스토리를 내가 원하는데로 바꾸고 싶다. 어차피 꿈꿀거라면 좋은꿈을 꾸자, 내가 원하는 뜻하는 바 대로 꿈을꾸자. 하는마음으로 하는 것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행이라는 것은 꿈속의 이야기를 바꾸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꿈에서 깨자는 이야기입니다. 꿈이라는 거대한 스토리에서 빠져 나가야지만 꿈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늙고 병들고 죽는 이야기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 더 이상 괴롭지 않은 것이라는 자각이 일어나기 때문에 꿈에서 깨기위한 것이 바로 마음 공부죠.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기에 성철스님이나 수행하는 많은 수행자들은 산속에 가서 은둔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불교 타 종교사람 들보다 욕을 먹는 것 중의 하나도 불교는 너무 출세간을 얘기하다 보니까 은둔의 종교 아니냐? 사회적 참여가 적은 거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도 하는데 참 조심스럽네요.
왜 조심스러우냐하면 사람들은 전부 꿈 속에서 꿈꾸는 것만 평생해왔어요. 꿈 속에서 꿈의 형태를 어떻게 바꾸면 좋을 것만 평생 다루어 보았지 꿈 깰것에 대해서는 하루도 생각해본적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꿈깨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면 욕을해요. ‘꿈을 아름답게 바꿔야지.’ 완전히 사로잡혀 혈안되어 있는 사람에게 딴 거 하자고 하니까 참 나쁜 놈이라고 하면서 욕을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꿈의 스토리를 바꾸려고 했다면 왜 출가를 했겠습니까? 한 나라의 왕자가 왕이 되어서 나라를 이끌고 이웃 나라도 통일을 시키고 그러면서 왕이 되어서 보다 아름다운 삶을 세상을 바꾸면 되었을텐대 그렇게 만든 세상 또한 결국에는 무너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오래가는 권력 오래가는 나라도 언젠가는 무너지게 마련이죠.
부처님께서 출가를 하셨을 때 그 국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또 왕족들이 보기에는 정말 거의 요즘 말하는 패륜아 그 이상 이었을 수 도 있습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공부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나라를 버리나? 그런데 꿈의 스토리를 바꾸는 것이 부처님의 목적이 아니었고 꿈을 깨는 것이 목적이었기때문에 그런것이죠.
그럼 꿈에서 꿈의 스토리를 바꾸는 것이 고귀하지 않으냐?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차피 꿈 속에 뛰어들었잖아요. 꿈 속에 세계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꿈을 꾸기 위해서 그 꿈을 꾸는 것 자체가 깨기 전까지는 거기서 내가 해야 할 어떤 삶의 몫인 거죠. 꿈 속에서는 꿈을 멋있게 꾸면 좋습니다. 꿈 속에서 무엇을 해도 좋고 무엇을 성취해도 좋고 어떤 삶을 살아도 괜찮다.
그러나 근원에서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 때 꿈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진짜라고 여기고 그래서 거기에 집착하고 좋은 것은 더 가지려고 애쓰고 싫은 것은 미워하면서 탐진치 삼독심을 일으키면서 온갖 것에 집착해 그로인해 괴로워 한다는 것이죠. 더 갖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내가 원하지 않은 것이 내 인생에 등장하니까 괴로워 하는 것이죠. 그 모든 괴로움은 꿈 인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걸 꿈인줄 모르는 것을 불교에서는 무명이라고 합니다. 12연기의 첫 번째 원인이죠. 괴로움의 첫 번째 원인 무명.
그리고 중간으로 가다보면 애욕과 집착이 있습니다. 어리석게 꿈인줄 모르니까 이걸 진짜라고 착각하니까 이걸 가지려고 집착을 하고 애욕을 하는 것이죠. 나도 진짜인 것 같고 세상도 진짜인 것 같고 내가 생각하는 의식도 진짜인 것 같은 거예요. 그게 무명행식명색육입입니다. 내 의식이 진짜있는 것 같고, 바깥 대상이 진짜 있는 것 같고 육입이라는 나의 감각기관이 진짜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거죠.
그것 때문에 속수애치유생노사라는 내가 세상을 접촉하니까 진짜로 내가 있어서 바깥에 있는 진짜 세계를 접촉하는 것 같고 내가 진짜 바깥에 있는 뭔가를 가지는 것같고 버리는 거같고 그러니 더 많은 집착심이 생기고 애욕이 생겨서 그로인해 생·노·병·사라는 괴로움이 연기한다 이게 12연기거든요.
불교의 목적은 꿈을 아름답게 꾸는 것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꿈속의 이야기가 너무 고되고 힘들면, 우리가 당장 먹을 때거리도 없고 누가 나를 괴롭히고 있고 당장 지금 해결해야 될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문제에서 너무 걸려있으면 수행할 정신이 없습니다. 수행하겠다. 내가 생·노·병·사를 해결하겠다. 생·노·병·사를 해결하기는 커녕 지금 당장 다음 끼니가 어려운 사람들 같으면 당연히 다음 끼니부터 해결해야겠죠. 자식이 몸져 누워있거나 부모님이 아프시다면 그것부터 해결을 해야될 겁니다. 내가 지금 몸이 아파서 너무 힘이든다 그럼 이몸부터 추스르고 병원부터 가야지 선방에 와서 아파죽겠는데 그러면 안되겠죠.
그래서 이 기도하는 것도 당연히 중요합니다. 왜? 왜그러냐하면요. 아까 제가 꿈과 꿈깸을 애기했는데 이렇게 애기하니까 사람들은 아 꿈의 세계가 있고 꿈깨는 세계가 있구나. 이렇게 둘로 나누어서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법은 어디까지나 불이중도의 가르침, 불이법이 불법입니다. ‘번뇌즉보리’라고 했듯이 ‘생사즉열반’이라고 했듯이 생사가 곧 열반이고 꿈이 곧 꿈깸입니다.
꿈을 깬다고 했을때 그럼 깨닫고 나면 아 꿈에서 깨니까 그 사람은 여기서 팍 사라져 버리나?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그것이 아니라는 거죠. 꿈을 깬 사람도 지금 이곳에서 그대로 꿈을 꾸고 삽니다. 꿈 속의 스토리를 그대로 바꾸지 않고 이곳에서 산다는 것이죠. 왜그러냐 하면 꿈 깬 세계가 곧 지금 이 꿈 속의 세계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깨달음을 얻고나면 저 열반의 세계로 파라미타에서 저 멀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주부는 그대로 주부이고 학생은 그대로 학생이고 직장인은 그대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깨달음의 세계에 동시에 있는 것이죠. 두 개가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속이라고 해서 우리가 무시하거나 세속이라고 해서 하찮게 여길 필요도 없는 것이죠. 출세간과 세간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세간적인 기복적인 기도도 필요하고 출세간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나아가야하는 것이죠.
아까 비슷한 얘기로 세상을 바꾸는 것도 중요합니다. 내 삶을 바꾸는것도 중요하고 내가 꿈꾸는 것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고, 뭔가 세상에 불의가 있고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바꾸는것도 필요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일이다 하면 그것을 열심히 하는게 중요하고 본인의 직장에서 그 직장을 보다 아름다운 직장으로 바꾸고, 보다 훌륭한 직장으로 바꾸고 하는 것이 필요하죠. 자기가 소속된 집단, 소속된 단체가 보다 아름답고 보다 행복한 곳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다만 그것이 모두 꿈 인줄 안다면 더 없이 좋겠죠.
그런데 그것이 꿈인줄 모르고 세상을 바꾸려고만 애쓰면 내가 바뀌지 않은 채 내가 부처가 되지 않은 채 저 놈을 바뀌어야 돼 라고 했을 때 내가 상처를 받는 일이 생깁니다. 나만 상처 받은 일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지혜가 바탕이 된다면 더욱 더 좋은 사회 활동도 될 수가 있겠죠.
어쨌든 기도는 꿈속에서 꿈의 이야기를 바꾸는 것이고 그 또한 필요하다. 왜냐하면 내가 이 모습으로, 이 직업으로, 이런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온 것은 그 몫을 충실히 하는 것을 통해서 삶을 통찰하고 배우고 깨달으라는 것이거든요. 농부는 농부의 삶을 통해서 노병사에서 벗어나는 공부를 하는 것이구요 또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삶을 살아가면서 직장 속에서 온갖 괴로움, 아픔들을 겪으면서 야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어떤 모티브를 얻을 수 있는 것이죠.
내 주변에 힘들고 괴롭고 아파하는 사람들, 좌절하는 사람들 혹은 내가 좌절하는 시기, 또는 성공하는 시기 그 양극단을 다 경험해봄으로서 이 삶 속에서 이 꿈속에서 경험해봄으로써 성공도 경험해보았다가 실패도 경험해 봄으로써 성공도 물거품처럼 지나가는 것이었구나 나는 내가 성공했을 때 진짜 내가 엄청난 사람인줄 알았고,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고 거기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것도 그렇게 한순간 물건너 가는 것이구나.
‘성공과 실패가 다 한바탕 꿈이구나.’ 라는 사실을 보다 빨리 자각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보다 빨리 깨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의 근원적인 목표는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이 꿈에서 깨어나는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우주법계, 나와 둘이 아닌 법신 부처님께서 나에게 여러분들을 깨어나게 해주기 위한 자비로움으로서 이렇게 아무리 법문을 몇 번 했는데 법문을 법문대로 듣지만 집에가면 또 달라지니까 이 사람에게는 말로 해서는 안되겠구나 하고 조금더 자비심을 베풀어야 겠구나 법문을 해줘도 안돼네? 분명히 책을 읽게해 줬거든? 십년전에 부처님 말씀을 책으로 읽었는데 “어 좋은 말이네?” 이렇게 덮어놓고 딴 삶을 사는 거죠. 집착과 욕망의 따른 삶을 사는 거죠.
이렇게 힌트를 자꾸 부처님이 보내주는데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니까 그냥 말로 해서 안되니까 조금 더 저사람을 강력하게 뭔가 깨닫게 해주어야겠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고통을 선물해 주기도 합니다. 암이나 교통사고나 자식이 갑자기 성적이 뚝 떨어지는 거나 사고를 치는 거나 다양한 괴로움이라는 힌트를 우리에게 선물해 줌으로써 그걸 통해 깨달아야겠구나 라는 발심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죠. 그게 우리가 본래 해야 될 본연의 임무이기 때문에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게 초기경전에 보면요 부처님이 깨달아 부처가 되어야 하는데 부처님이 왕자로 있으면서 삼시전에서 온갖 궁녀들과 즐겁고 재미에 빠지고 세속적인 것을 공부하면서 거기서 월등한 능력을 발휘하고 그러고 있는거죠. 그때 초기경전을 보면 천신들이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천신들이
“야 저 고타마 싯타르타 저 친구가 저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빨리 깨달아서 공부를 해야되는데 왜 아직 저러고 있지? 저걸 가서 얘기를해줘야 하나?”
뭐 이러면서 이런 대화를 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빨리 보살이시여, 빨리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부처가 되십시오.”
하고 권유를 하는 장면들이 나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우주법계가 하는 본연의 일을 그런식으로 이야기처럼 꾸며논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것이 부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우주법계에서는 부처님께서는 계속헤서 속삭이고 있는것이죠. 무한한 자비심으로써 괴로운 일을 하나씩 툭툭 던져준 다음에 거기에 힘들어 하니까
“00씨 이것을 던져준 이유가 그렇게 괴로워 하라고만 하는게 아닙니다. 이괴로움을 통해서 깨어나라고 하는거니까 빨리 정신 차리십시오.”
하고 계속해서 무한한 자비로써 우리들 돌보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첫째 내가 세속적인 기도하는 발원하는 것이 있다. 그러면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도 보면 3•7일 기도를 하면서 온갖 발원한 내용들을 제가 읽어보면서 저는 그동안 수능기도를 그동안 해봤었기 때문에, 수능기도 발원하는 사람은 봤지만 3•7일 기도를 하면서 이렇게 온갖 다양한 많은 분들의 많은 다양한 발원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는데 정말 누구나 삶 속에서 바라고 꿈꾸고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취함으로써 삶에서 지금 내가 하고싶은 일, 내가 지금 나를 가슴 뛰게 하는 일 그것을 해야할 어떤 의무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비법인 것이 아닙니다. 출가해서 출세간만 추구하는 것이 정법이고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것이 비법인 것이 아니라는것이죠. 이것을 인도 마가마르기타 같은 곳에서는 카르마요가를 썼고 금강경에서도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고 해서 머무른 바 없이 마음을 내는것이야말로 참된 법이라고 했지, 집착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고 꿈꾸지도 않고,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지도 않는 것이 불법이냐? 그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모든사람에게 다 출가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왕에게는 왕의 길을 설해주었고, 주부에게는 주부의 길을 설해주었고, 모든 사람에게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야할 방식을 설해주었습니다. 육방예경 같은 것을 보면 남편이 아내에게 해야 할 길, 그래서 월급을 잘 갖다줘라, 심지어 때때로 목걸이 귀걸이 장신구 같은 거 명품백 같은 것도 하나 사다 줘라, 이런 다양한 세간적인 삶 속에서의 이야기를 하고 있단 말이죠.
왜 그럴까요? 삶을 통해 깨달아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넘어진 그 자리를 딛고 일어나는 것이거든요. 용광로같이 뜨거운 괴로움이 있을 때, 그 뜨거운 괴로움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거기에서 탈출하는 모티브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죠. 내가 서있는 그 자리가 내가 깨달아가야 할 그 자리인 것이지 이 자리를 버리고 다른 자리로 가야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바로 이 자리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아파하고 있고, 내가 뭔가를 원하는데 힘들어 하고 있고,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면 지금은 그것을 간절히 원해야 하는 때이기 때문에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성취되지 못해서 괴롭다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그게 왜 나쁜 일인가요? 좋은 일입니다. 그걸 지금 하기 위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고 다만 하나의 모티브라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그걸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 얻고자 노력하고 노력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결과는 내가 원하는 것을 꿈꾸는 것을 기도하는 것은 좋단 말이죠. 그것은 나쁜일이 아니라 좋은 일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걸 꿈꾸고 그걸 원하고 그걸 위해 기도하시라는 거죠.
그런데 핵심은 그 기도는 이루어 질 수 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 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기도가 이루어지면 내가 기도를 잘했나? 부처님이 나에게 가피를 주셨구나 해서 부처님께 감사하고,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부처님이 나를 미워하시나? 내가 뭐 좀 잘못됐나? 내가 기도를 잘못했나? 정성이 부족했나? 부처님께서 나만 미워하시나? 이렇게 생각을 한다 말이죠. 그런 일은 없다는것이죠.
제법실상, 삶은 내 인생이 벌어지는 그것이 진리이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있는 일 이외 다른 것이 진리가 아닙니다. 내 앞에 벌어지고 있는 그 일이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내다 A라는 것을 원하는 것은 좋은 일이예요. 상관 없어요. 그런데 나는 알지 못하는거거든요. 내가 원하는 것이 진짜 진리인지 아닌지를 나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진짜 부처님도 원하는 것인지, 진짜 진리도 원하는 것인지, 진짜 나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는 거죠.
학생들은 전부 다 백점 맞기를 원할 겁니다. 전부 다 서울대 가기를 원할 겁니다. 그런데 전부 서울대를 가야지만 이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것이냐? 그렇지 않죠. 어떤 사람 은 서울대가 필요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친구들은 지방대 아니면 대학교 못갈 수도 있을 것이고 또는 그냥 다른 대학을 갈 수 있을 것이고 저마다 자신의 삶이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5급 7급 공무원만 좋은 것이냐? 다들 공무원만 준비해서 그것을 합격해야지만 좋은 것이냐?
모두 다 그럴꺼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 친구는 공무원이 아니라 그냥 자영업을 하는 것이 길이거나 혹은 중소기업에 가서 혹은 작은 기업에 가서 그 기업을 아주 크게 일구는 일을 해야 되는 사람 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공무원시험을 보면 떨어지겠죠. 그런데 본인은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으니까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하면서 부처님을 원망할 수도 있지만 부처님은 더 큰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 사람은 지금 공무원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나 공무원준비를 하면서 공부했던 다양한 지식들이 나중에도 필요할 수 있기 때문에 또 이 공무원시험을 통해서 한 번 좌절하는 경험을 통해서 조금 더 성장하고 조금 더 성숙하고 조금 더 내면이 단단해질 수 있는 그런 어떤 지혜를 만들어 놓은 다음에 자신이 성공의 길을 가도록 하기위한 하나의 시나리오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모르다 보니까 당장 내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로워하는 것이죠.
핵심은 원하는 것은 좋다. 기도하는 것은 좋고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지기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기도의 핵심은 이겁니다. 기도는 하되 기도하는 바 대로 목적을 정하고 열심히 기도는 하되 그게 백프로 진실이라고 믿지는 마라. 내가 안다고 생각해서 내 인생이 이렇게 되어야지만 행복할 거야 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걸 백프로 믿지는 말라는 것이죠. 즉 기도의 성취에 대해서 과도하게 집착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되, 이게 응무소주이생기심이거든요.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 마음을 내되 마음 낸 거에 머물지는 마라. 과도하게 집착하지는 말라는 것이죠.
실제 과도하게 집착하는 마음을 가지고 ‘반드시 나는 서울대에 붙어야 돼.’ 라고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공부하면 ‘나는 돈을 벌어야해.’ 아니면 ‘여기에 취직해야 돼.’라고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그 일을 추진하면 그 일은 잘 안 될 확률이 더 높아집니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일체유심조’ 마음 내는 대로 현실은 벌어지거든요.
그런데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구요 우리는 ‘원하면 원하는 게 이루어진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라는 서양에서 나온 시크릿 같은 책을 보고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반야심경에서는 오온 다섯가지라고 했잖아요. 마음은 네가지, 수·상·행·식 네 가지거든요. 그런데 수·상·행, 행원, 원하는 마음은 네가지 마음 중에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행원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어떤 법칙이냐면 가장 중요한 것이 유이법 유이행과 무이행이 있습니다. 유이행은 한계가 있어요. 중생심입니다.
무이행이 참된 부처의 마음인 것이죠. 무이행은 뭐냐? 내가 간절하게 원하긴 원하되 원했는데 원하는 바없이 원한다는 것이거든요 그게 무이행이거든요. 무슨 말인가 하면 간절히 원하긴 했는데 결과에는 크게 집착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럼 원하지 않은건 아니예요.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걸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되도좋고, 안되도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죠. 그게 무위법입니다. 하되 함이없이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위행을 하지않고 유위행으로써 간절히 원하면서 이게 안되면 나는 큰일난다, 나는 여기 목숨걸었다, 나는 이거 아니면 죽어도 내 인생은 안된다, 내 인생이 무너질 거야 이런 집착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하면 내가 유이행을 했는지 무위행을 했는지 내가 집착하면서 이걸 원하는지 아니면 이걸 집착없이 원하는지를 알아보는 방법이 뭐냐하면 안 됐을 때 나는 어떨까? ‘나는 열심히 기도하지만 안돼도 괜찮아.’ 이런 사람은 참된 기도를 하는것이죠.
그런데 안되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너무 시달리고 걱정스러워서 안되면 어쩌지? 하는 마음때문에 과도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참된 기도를 하고 있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건 어떤 결과를 가져오냐 하면? 보세요. 한편으로는 ‘되야 돼.’ 하는 간절한 마음을 우주로 뿜어내고 있습니다. ‘되야돼.’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으로는 ‘안되면 어쩌지?’ 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또 뿜어내고 있는거예요.
되면 좋은마음을 뿜어내는 동시에 되지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마음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죠, 집착이 크면클수록 두려움도 커지죠? 집착이 크면 클수록 두려움도 커지니까 두려움을 우주로 뿜어내는 마음도 커지는 겁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커지면 두려워하는 현실을 끌어당기는 것과 똑같습니다. 원하기도 하면서 한쪽으로는 두려워함으로서 원하지않는 현실을 끌어오고 있는것이죠. 끌어당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원하는 마음보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커지게 되었을 때 두려워하는 현실이 벌어진다는 것이죠.
과도하게 집착하면 이루어지지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과도하게 집착하면 되면 좋고 안되면 스트레스 받잖아요. 그런데 과도하게 집착함 없이 나는 되면 좋을 것 같은데 나는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되면 좋은지 안되면 좋은지를 난 알수가 없어.
예를 들어 뭐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원했는데 그게 이루어지고 나서 돈을 한 몇억을 벌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몇억을 벌었는데 아침에 벌고나서 저녁에 죽을병 판정이 난다면 그 돈 번게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또 다른 계획이 있다는 것이죠.이 우주법계에는. 내 생각이 옳다라고 생각해서 무조건 이 일이 벌어져야 해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져야해 라고 하는건 내가 가진 오만이고 아상이고 에고이고 내가 일으킨 집착입니다. 무명이 발현된 것이죠.
어리석음이. 어리석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진짜라고 쫓아가는겁니다. 그런데 지헤로운 사람은 머리를 쫓아가지 않습니다. 법계의 법신 부처님을 믿고 법신부처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고 법신부처님을 따르지, 내 머리를 따르지 않느다는것이죠. 내 머리는 분명 망상이고 의식이니까 의식은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 무의식계라는게 봐서 일으킨 의식, 들어서 일으킨 의식, 모든 의식은 허망하다는 소리입니다. 무(無), 허망하다는 소리예요, 실체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실체가 아니고 진실아닌 가짜의 중생심을 쫓아가서 되겠냐? 법신 부처님을 믿고 따라야지. 그게 바로 불자거든요. 불자는 뭐가 불자냐? 내 생각이 옳다고 막 집착하고 고집하는게 불자가 아니라 부처님께 모든 것을 내맡길 줄 아는 것이 참된 불자라는 거죠.
그래서 참되게 기도하다보면 처음엔 간절히 내 아들 서울대 가길 원하면서 기도를 하다가 기도하시게 되면 마음의 집착이 점점 비워져요. 왜냐면 기도를 하면서 염불을 하던 독경을 하든 진언을 외면서 하나에 집중을 하고 거기 마음을 고요히 하고 집중을 하다 보니까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번뇌 망상이 줄어들고 내가 본연의 마음 본연의 참 성품과 가까워지니까 저절로 집착심이 내려놔지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를 제대로 하시는 분들을 보면 나중에 처음엔 반드시 되지 않으면 안될꺼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엔 간절함은 있으나 과도하게 집착하지는 않게됩니다. 이게 집착하느냐? 선호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서울대를 선호는 하는데 집착은 안하는것이죠. 야 너 지방대가는거 보다는 서울대 가라, 인서울해라. 그걸 우리 모두가 선호한다. 선호는 하는데 과도하게 집착은 안하니까 여기 못가면 딴 데가면 되지 그런 마음으로 공부하게 되는 것이죠. 내가 특정한 것을 선호는 하지만 과도하게 집착하지는 않는 마음으로 여유있는 마음으로 비뀝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두려움이 사라져요. 안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온몸이 저절로 릴렉스가 됩니다. 이완이 되고 그러면서 마음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열리니까 아들만 보면 “너 또 게임 하고있냐? 지금 공부안하고 네가 몇등인지 아냐?” 맨날 혼만 내다가 마음이 열리니까 집에 딱 들어갔는데 아들이 게임하고 있으면 ‘좀전까지 공부하다가 힘들어서 잠깐 머리 식힐라고 게임 하나보구나.’ 라고 생각해요. TV보면 ‘아이고 그래 TV보면서 놀면서 해야지.’
제가 얘기들어보니까요 공부를 어마어마하게 잘하는 분들의 부모님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까 명문대 명문고 특목고 이런데 가는 사람들 중에 의외로 꽤 많은 인원이요 약간 정신적인 스트레스문제 정신적인 문제 이런것들을 안고 있는 친구들이 의외로 있답니다.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거의 폭발하기 직전인 것 같이 보이는 아이들, 그러다가 난독증이 오는 아이들, 그러면서 정신적으로 스트레스 받은 것이 안에 막 분노로 쌓인 아이들, 부모님에 대한 분노로 폭발하기 직전일 것 같은 아이들, 쉬게 해 주지 못하게 하는거죠.
그렇게 일주일 동안 고생했으면 그래조 한 나절이든 하루이틀이든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좀 하고 좀 쉬고 놀고 즐기고 이렇게 해 주면서, 모든 것은 밤이 있으면 낮이 있잖아요. 들숨이 있으면 날 숨이 있고 봄여름이 있으면 가을 겨울이 있거든요. 균형이 맞아야 된다는 거예요. 공부하는 시간이 있으면 쉬는 시간이 있어야 됩니다. 낮에 일하고 밤에 쉬어야 되는 것처럼. 그런데 공부하고나서 또 공부하고 나서 또 공부하는 일이 초·중·고등학교 내내 계속되니 아이들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있으니 공부가 제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기도를 해서 마음이 열리고 나면 아이들에게 나중엔 너가 서울대를 가도 좋고 인서울해도 좋고 지방대를 가도 좋고 너가 하는 것이라면 엄마는 응원한다. 너의 길이 그것이 좋은 길이다. 너의 길을 응원한다. 나는 지금까지 너에게 공부하라고 시킨 것은 너 스스로 공부 안한 것을 나중에 후회할까봐 그동안 엄마가 너에게 이렇게 했던 것이지 실제 진심은 너에게 크게 기대하거나 한거 없다. 그러니 너가 좋은대학을 가던 안 좋은대학을 가던 상관없으니까 그러니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봐라. 아빠 엄마는 아무 상관이 없다. 마음이 열리니까 그런말이 나올 수가 있는것이지 그러고나면 그 아이가 얼마나 마음의 스트레스가 덜 하겠어요?
마음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인지협착이라고 했듯이 마음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집착을 하게되고 몸에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마음이 딱 좁아져요. 비좁아지고 긴장이되고 정신도 긴장이되고 정신이 긴장이되고 몸과 마음이 긴장이되니까 이해력이 확 떨어집니다. 마음이 열린사람에 비해서 이해력이 완전히 떨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많은 연구에서 명상을 하고 났더니 아이들의 이해력, 기억력, 또 공부의 학습능력 이런 것 들이 월등히 좋아진다고 하는 것이 완전히 마음의 집착을 놓아지게 되었을 때 마음이 활짝 열리니까 이해력이나 공부의 실력도 확실히 높아지게 됩니다. 당연합니다.
그래서 수능시험보기 직전 만이라도 엄마가 마음이 릴렉스가 되고 나서 아이에게도 그렇게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해 주면 아이가 안 그래질 것 같지만 아이들 입장에서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해보면요 꼭 몇 프로는 그런 아이들이 있어요. 내가 시험 못보는 것은 상관없는데 부모님이 충격받을까봐 그게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정말 너무너무 괴롭다.
아이들에게는 아직 성장해서 사회생활 안해 본 아이들에게는 부모님이 온 우주전체와 또 같습니다. 부모님에게 인정받는 것이 온 우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니 부모님이 그런 스트레스를 주면 이 온 우주가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마어마한 부담감이죠. 좀 편안하게 해줘야 이 친구가 의식이 열리고 그러니까 옛날에 공부했던거조차 나중에 시험볼 때가 되면 다 기억도 나고 나중에 시험을 잘보지않겠어요?
그런데 집착을 하면 할수록 상황이 꼬일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을 벌어야해! 벌어야해! 하는 집착이 크면 클수록 돈벌기위한 집착이 생기고 돈 못벌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생겨서 돈을 벌기위해서 꼼수를 쓰게됩니다. 소비자들에게 안 좋은 재료로 음식을 제공하게 되고 조금더 돈을 벌기 위해서 삿된 생각이 자꾸 끼어들게 되는 것이죠. 전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자비심도 없어지고 지혜가 없어집니다.
모든 것의 핵심은 원하되 과도한 집착없이 원하라는게 불법의 핵심입니다. 그렇게 했을때는 원하는 것이 나를 깨닫게 합니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를 깨닫게 합니다. 생사 즉 열반이라고 했듯이 내가 살아가는 모습 이것 자체가 나를 깨닫게하는 삶의 주제가 되는 것이죠. 삶 자체가 공부의 장이기 때문에.
그래서 개인적인 세속적인 소원을 세우면 참된 불자가 아니냐? 그렇지않습니다. 개인적인 바라는 바 열심히 해야하는 것 이죠. 열심히 추구하고 열심히 원하고 열심히 에너지 넘치게 열정을 가지고 삶을 살아야 하는 겁니다. 무소유 무소유 이걸 잘못 받아 들여 가지고 “야 소유 다 필요없어 열심히 사는거 다 필요없어. 한가하게 조용히 맘 편하게 조용히 시골가서 농사나 짓고 그게 최고야.” 이렇게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릴렉스하게되면 저절로 열정이 피어나고 에너지가 넘쳐납니다. 삶이 즐거워지기 시작하고 “안되면 안돼!” 하는 스트레스 긴장이 없으니까 일을 하면서 즐겁게 하는거예요. 되도 좋고 안되도 좋으니까. 직장 상사에게 인정을 받아도 좋고 안받아도 좋으니까. 당연히 릴렉스가 되니까 더 일에 열정이 붇습니다. 집착없을 때 훨씬 더 큰 열정이 붙어요. 왜냐하면 긴장감이 없어서 이완이 되어야만, 마음이 열려야지만. 여기서 생기는 열정은 어떤거냐면요 나를 넘어섭니다. 나 라는 에고의 갇히지 않은 아상이 딱 놓여진데서 오는 힘입니다.
에고가 어떤 일을 하면 ‘내가 어떤 일을 해서 일을 성공해서 누구에게 인정받아야지!’ 이런 생각으로 하게되면 스트레스 받으면서도 야근이라도 하면서 입으로는 욕이라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일을하고 그러면서 인정받아야하고 인정받고 나서도 찝찝하고 이럴 수도 있는데 내가 좋아서 하면 어떤 일이 생기냐하면요.
저보고 지금 가라고 하면 지금 가고싶지 않은데요. 십년전에 제가 인도 히말라야에 갔을 때 그때는 제가 히말라야 인도가 너무너무 그리운 겁니다. 부처님의 성지를 너무 가고싶고 그때 당시는 너무너무 간절해서 그게 딱 주어져서 제가 내 인생에 또 다시 언제올지 모르는데 담아와야 안되겠나? 신도님들에게도 보여드리고 해야지. 다음달 초에 제가 인도 히말라야 네팔 다녀온 사진을 보여드리면서 설명드릴려고 하는데요
‘부처님 성지를 갔다와야 부처님생애를 가르쳐드릴 때도 좀 참고도 해야지.’ 온갖 생각으로 카메라에 렌즈, 이걸 담으려면 노트북이 있어야 되잖아요. 짊어매는 걸망에 노트북까지 넣어가지고 그런데다가 제가 제대로 공부하면서 다녀야하니까 인도 부처님 관련된 책, 열 몇권을 넣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무겁게 짊어지고 인도를 떠나면서 이거 미친짓인지 싶더라고요.
그 무거운걸 짊어지고 인도에 딱 내렸는데 더워서 죽을 것 같은거예요. 더워서 죽을 것 같고 무거워서 죽을 것 같고 그리고 제 스타일이 미리 공부하고 가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그냥 부딛혀 보자는 스타일이 거든요. 죽지않는다. 나는 나를 믿는다. 부처님이 알아서 이끌어주신다. 큰 계획만 세우지 세부적인 계획은 안 세우고 부딪히는 스타일이 거든요. 그리고 계획을 안 세워놓으니까 첫째날 둘째날 딱 이틀 죽겠더라고요.
처음 이틀. 처음 이틀동안 그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인도 델리 시내를 걸어다니는 데 계획했던 대로 안되는 거예요. 언뜻 처음 잠깐 본 것가지고 했더니 책대로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너무너무 힘들어서 그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한 이틀을 그 더운 속에서 정말 몇바가지 땀을 쏟은 것 같애요. 신기하게도 그 첫째날 둘째날 몸으로써는 제 인생에서 최고로 힘들었던 날이었거든요. 마음은 날아갈 것같이 가벼웠습니다. 정말 마음이 그렇게 행복하고 가벼운게 없었습니다. 너무너무 좋았어요. 즐거웠습니다. 그 무거운 게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너무나도 행복했죠.
제가 어떤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갑자기 오후 7시에 들었던 적이 있었어요. 오후 7시에 컴퓨터를 켜고 원고를 쓰기 시작했는데요, 마침 그 다음날 그 다음날 이 삼일 동안 큰 바쁜일이 없었을 때였습니다. 정말 거의 밤을 새고 제대로 잠을 못자면서 이틀 삼일밤을 막 샜는데 이상하게 이틀이 지났는데 하나도 피곤하지가 않은거예요. 그러고 완전히 몰입을 하니까 시간 가는 것을 모르겠고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제가 머리로 이렇게이렇게 힘들게 힘들게 만들었던 책보다 그렇게 한 이틀 삼일만에 뚝딱 했던 책이 반응은 더 좋았던 것 같고 더 많이 팔렸던 것 같고.
지금 드리고 싶은 말씀은 뭐냐면요, 내가 아상이나 에고가 주도가 되어서 하기싫은데 억지로 하거나 뭔가 내가 이걸 잘하면 어떻게 될 건대 하는 생각을 가지고 하거나 판단을 가지고 하거나 결과에 집착을 가지고 하게 되었을 때는 열리지 않고 이완되지 않기 때문에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즐거워서 내가 좋아서 내 열정이 꿈틀거리고 내 가슴이 뛰는 일, 내가 좋아서 하는 일, 내가 행복해서 하는 일은요 즐거움이 있구요, 열정이 있구요, 에너지가 낭비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써도써도 에너지가 계속해서 막 생겨나는 것 같은 무한한 에너지가 막 솟아납니다.
여러분도 그러실 때가 있잖아요. 정말 힘든 일이 있는데도 아무도 모르게 항상 즐거워요. 그게 우리의 근원이 가진 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힘을 내버려 둔 채 집착과 욕망과 잘해야된다는 생각, 아상과 에고 그것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보니 그것이 나를 움직이고 있다보니 삶이 스트레스 받고 힘든일이 자꾸 생겨나는 것이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기도하는 삶을 살되 결과에 대한 집착없이 살게 되면 삶 자체가 저절로 릴렉스가 됩니다. 삶이 하루하루가 정말 재미있고 즐거워집니다. 정말 즐겁고 재미있어져요. 왜? 내가 원하는게 없으니까 삶이 원하는데로 나는 살아가도 좋으니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니까. 이렇게되면 이렇게 돼서 좋고, 저렇게되면 저렇게되어서 좋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게 없는게 아니예요. 나는 원한다. 그리고 또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선호한다. 되고 안되고는 어차피 내 일이 아니니까. 내 일이 아니잖아요.
죽고 살고가 내 일입니까? 내가 돈을 5억 10억을 벌지 말지가 나에게 달린 일 일까요? 그런 거 같으면 전부 다 돈 벌고 싶으면 다 벌 수 있게요? 나에게 달린 일이면? 그것은 법계에게 달린 일입니다. 나에게 달린 일이 아니예요 사실은. 그 결과는 내 일이 아닙니다. 법계에서 알아서 하는 일이지. 죽어라고 죽어라고 공부해도 머리가 안 따라주는 사람은 서울대 못가는 겁니다. 원한다고 되는게 아니예요. 그 결과는 그냥 맡겨야되는 것이죠.
그러면 서울대를 못 갈 저 같은, 저는 아무리 죽어라고 공부해도 죽어도 서울대 못 갈 머리였는데요 제가 서울대를 갈려고 막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저는 그렇게까지 괴롭지 않았습니다. 왜? Ok 나는 서울대는 아니야. 나는 공부로는 성공 할 수는 없어. 인정을 해놓으니까 그것으로 스트레스 받지 않죠. 나보다 공부 잘한다고 그렇게 스트레스 받을 필요 없어요. 내가 아니다 싶은 것에 대해서는 딱 포기하는 것이죠. 즐겁게하되 아닌 것은 딱 포기하는것이죠. 아닌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집착을 했을 때는 그 사람은 너무 힘들고 너무 스트레스 받고 하루하루가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삶이 사는데로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이지 내 생각이 사는대로 사는 게 지혜로운게 아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지금 내가 원하는게 옳은지 그른지 모르지만 그러나 난 지금의 내 의식 수준에서 난 이걸 원해.’ 그렇게는 그건 좋다는 거죠. 기도 하라는거죠.
그래서 기도를 하는 것이구요 그렇게 결과에 집착없이 기도를 하다보면 나중에 저절로 결과에 집착없이 살아가니까 마음이 저절로 비워져요. 저절로 비워지니까 저절로 집착이 소멸되니까 저절로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저절로 수행이 되어버립니다. 기도와 수행의 간격이 사라져버립니다. 집착이 사라지니까 저절로 수행이 되는 것이죠. 괴로움이 사라지니까.
그래서 제가 기도하는방법, 수행하는방법, 기도가 곧 수행이고 수행이 곧 기도라는 것이죠, 우리가 기도를 특정한 형식을 가지고 할 필요는 궂이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특정한 형식을 통해서 하는 이유는 그 형식을 통해서 내가 기도하는 바를 명확히 할 수가 있고, 또 부처님전에 고 함으로써 내 안에 있는 본래진리 본래 지혜에게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고 그렇게 명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실제로 양자물리학에서도 그런 표현을 합니다. 이 세상은 불성의 바다를, 양자물리학에서는 양자스프라는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라고 그래요. 양자라는 자체가 뭐냐면 바깥에 물질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한 단위, 물질의 최소단위. 모든 최소단위를 얘기하는데 최소단위의 세계의 법칙을 연구하는 게 양자물리학인데 양자물리학에서는 양자스프가 있다는 거예요. 온 우주전체가 양자스프로 가득차 있다는 겁니다.
이 양자스프의 특성은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더라. 무엇이든 다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무한 가능성의 공간이고 그 공간의 특징은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말처럼 확실한게 아무것도 없더라. 겉에 드러난 물리법칙의 세계는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데 양자의 세계는 확실한게 아무것도 없는 세계더라 하는겁니다. 확실한게 아무것도 없어서 어떤 하나의 확률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양자의 세계를 보니까 우리는 여기 있다가 뿅하고 갑자기 부산에 나타나는게 불가능하잖아요. 그런데 옛날 만화나 이야기 같은거에보면 슈퍼맨들이 짠하고 없어지면 저쪽에서 짠하고 나타나고 그러잖아요. 그게 양자의 세계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들이 어느정도의 근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런 생각들이 올라오는 것이죠. 양자는 어떤 쌍둥이 양자가 있을 때 이것이 수백 수천킬로 떨어져있어도 마치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더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 양자는 갑자기 도약을 한다는겁니다. 순탄한 인과적인 순서로 살아가다가 갑자기 도약을 해서 여기서 갑자기 부산에 딱 나타난다는 것이죠. 갑자기 일을 하던 사람이 위대한 존재로 도약을 한다던지 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그것도 비극소성으로. 시간이 걸리지 않더라는 겁니다. 도약이라는 것은 문득 일어나더라는 거죠.
우리가 중생이 견성성불하는 그 순간 문득 돈오하듯이 도약이 일어나더라는겁니다. 즉 내가 병이 있어서 시름시름 앓는 죽을 병이 걸려서 고생하는 인과의 차원에서 살다가 정말 순수한 기도가 온 우주법계를 감동시키게 되었을 때 갑자기 도약이 일어나는 거죠. 병이 갑자기 나을 수 있는도약. 가난하단 의식으로 가난하게 살던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될 수도 있는것이죠. 양자도약이 가능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같은 어리석은 중생들이 갑자기 부처가 되는 것도 중생이 부처가 되는게 가능하다는건 뭐겠습니까? 모든게 가능하단 소리입니다.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게 더 어렵지 여러분이 빌게이츠처럼 수백조 버는게 더 어렵겠습니까? 부처가 되는게 훨씬 더 어렵죠. 부처가 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은 양자도약의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것이 양자얽힘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양자의 차원에서 서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연기법과도 비슷한 이야기인데 서로 연결되어 있다가 내가 간절히 마음을 내었을 때 어떤 특정한 마음을 내었을 때 연결되어져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이 온 우주법계와 연결되어져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더라는 것이죠.
이런겁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보니까 내가 아파요. 몸이 아픈데 간절히 기도를 하고있습니다. 집착없이 기도를 하고 있어요. 집착없이 기도하고 집으로 가던 어느날 갑자기 버스에서 라디오가 나왔는데 라디오에서 내가 아픈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이건 이렇게이렇게 하면 좋고 이런 사람은 딴사람은 이렇게이렇게 얘기하는데 사실은 이러이러한 생활방식 때문에 그러니 이러이러한 생활방식을 바꾸고 이러이러한 게 좋다. 그래서 그대로 했더니 감쪽같이 나았다.
양자얽힘이라는 연기법적인 세계가 내가 기도했는데 내가 기도한 마음을 어떻게 알아듣고 라디오채널이 갑자기 버스기사가 확 돌리게 만들어서 그 채널에서 그 정보가 나에게까지 오게 만드는 일이 말도 안되는 일이잖아요. 내가 어떻게 그런걸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양자얽힘의 세계에서는 그게 가능하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 모든 인연따라 그것도 마음에서 인연이 연기한다는 것이죠. 마음에서 연기한다. 유심연기가 그것입니다. 마음에서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마음에서 기도한 내용을 현실에서 만나기 시작해요. 마음에서 물질세계가 연기된 것이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마음이 주인이 되어서 세상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이 책을 보시면 목차를 보시면 제4편 개인기도 수행법이 있는데요 기도수행방법이 특정하게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종단에서 정해놓은 것도 없고 그러나 보편적으로 많은 스님들이나 많은 절들에서 하는 기본적인 방식은 우리가 법회하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예불하거나 법회하는 방식과 비슷해요.
처음에 법회를 하든 예불을 하든 항상 삼귀의를 하죠? 여러분도 처음에 절에 오면 삼배를 하듯이. 법회시작할 때 삼귀의를 하고 예불을 하고 아침예불 시작할 때 처음 시작이 예불이죠? 즉 처음 기도의 시작은 귀의삼보, 삼보님께 불 법 승 삼보에게 귀의하는 것이 첫 번째 순서입니다. 귀의하는 방법은? 이 방법을 크게 어렵게 생각 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간단하게 삼배만 해도 좋습니다.
삼배를 하고나서 기도를 시작해도 좋고 아니면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해서 49쪽에 적어놓은 것처럼 삼귀의 노래를 하셔도 좋구요 아니면 염불송으로 나무볼타부중 광림법회하면서 일배를 하고 나무달마부중광림법회 나무 승가부중광림법회를 거불로써 하셔도 된다. 삼배만 하셔도 되요. 어떤 형식을해도 되고 아니면 읽어도 좋습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하고 반배하고 삼귀의를 먼저하고 삼귀의를 좀 갖춰서 하고싶다 하면 예불문을 하면됩니다.
예불은 부처님께 예배한다는 것인데 부처님께 귀의불법승 한다는겁니다. 예불문은 귀의불법승한다는 뜻이예요. 그래서 시아본사 석가모니부처님과 불타야중 모든 시방삼세에 계신 모든부처님, 모든법, 모든 스님들게 귀의한다는 얘기이고 스님들을 여러 개로 나눠놓은게 예불문이에요.
보살님들 먼저 예를 들면 대지문수 사리보살 문수보살등 보살님들께 먼저 지극한 마음으로 귀명하고 또 영산당시, 부처님당시 부터 부처님께서 부촉해주신 모든 10대제자와 16의성인들, 500의 성인들, 혼자 깨달은 독수성 내지는 1200명의 수많은 아라한 모든 자비로운 성자들 성스러운 현자들 그런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서건동진 급아해동, 인도에서 부터 중국을 거쳐서 한국에 이른 스님들까지 역대의 법의등불을 밝히신 제대조사 천하종사 수많은 조사스님 일체미진수, 티끌 같은 수 많은 선지식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귀의 불법승을 구체화시킨게 삼귀의 예불문이기 때문에 처음 기도를 시작할 때 삼귀의 혹은 예불을 하시면 되겠구요.
그다음에는 참회문을 먼저하는데 처음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은 참회기도를 먼저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것을 발원하려고 해도 과거의 티끌, 과거의 죄업, 이런 것들이 많으면 트라우마, 마음속의 죄의식 이런것들이 쌓여있으면 그것이 걸림이되고 장애가 되어서 바른 길을 밝혀주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참회기도를 해서 내가 지나온 삶에 대해서 완전히 용서해주고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완전히 참회함으로써 죄의식을 말끔히 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행되어야 할 일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스스로의 잘못을 완전히 용서하고 스스로 참회함으로써 기도할 준비가 되는 준비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참회기도는 너무 오래 게속해서 할 필요는 없구요 짧게하고 끝내는 게 좋다. 왜냐하면 죄이식을 계속 강화 시킬수도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죽을 때까지 참회기도 하겠다.” 할 필요없어요. 죽을때까지 참회기도 하겠다 하는 사람은 내 스스로 만들어놓은 죄의식을 죽을 때까지 쥐고 있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참회기도를 먼저 하시면 되구요. 참회기도의 방법으로 여기다 전통적으로 많이 하는 한문참회문을 적어놨고 한문 참회문만 보통 많이 했는데 해석한 본을 뒤에 적어놨습니다. 이걸 염불하듯이 독송하듯 읽으면서 마음으로 참회하시면 되겠다.
그리고 참회한 다음에는 혹은 참회를 미리 다하신 분들 아니면 참회기도를 많이 하신 분들은 삼귀의하고 바로 발원문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래서 발원문은 본인이 발원하는바를 하나의 발원문으로써 완전히 만들면 가장 좋겠구요 본인이 발원문을 만들기 어렵다 싶은 분들을 위해서 56쪽에 일상발원문에서 제가 적어놨습니다. 보통 발원문에는 귀의와 참회와 발원과 회향이라는 크게네가지 부분이 담겨있어야 되는데 여기 그 네가지를 다 담아서 일반적인 발원문을 적어 놨으니까 발원문을 기본적으로 독송하되 57쪽 중간에 보면 줄쳐진 부분이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이 기도를 통해 꼭 이루고자 하는 소원이 있사오니’ 그 뒷장 58쪽에 보면 예시를 적어놨는데요
‘저의 아들 00생 00가 금년 수능시험에서 합격합으로써 이 사회의 큰 빛이 될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이런 식으로 내 개인의 발원이 세상에 회향이 될 수 있도록 이렇게 예를 들어서 발원문을 본인 스스로 적으시면 됩니다. 그때그때 발원기도가 바뀌면 그때그때 다른 것을 적어놓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발원문을 먼저 하고 그 뒤에 가족을 위해 가장 많이 쓰이는 가족을 위한 발원문이나 혹은 부모님에 관한 발원문 혹은 학업성취발원문 이런 것들을 적어놨으니까 참고하시면 되겠구요
그다음 발원문을 한 다음 기도하는 내용을 부처님께 고하는 것이죠. 내가 이러이러 한 것을 발원합니다. 발심합니다하고 부처님께 고하는 순서를 가지고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기도 수행에 들어가는데 발원문할 때 먼저 부처님께 고하지만 기도 수행에 들어가서는 중간중간 계속해서 기도한 내용을 떠올릴 필요가 없습니다.
염불 조금 하다말고, 금강경 독송 조금 하다말고 중간에 ‘혹시 부처님이 잊어버리셨을지 모르니까 다시 자꾸자꾸 중간에 인풋을 시켜드려야 기억하시겠지?’ 하고 조금 기도하다가 부처님 안잊으셨죠? 우리아들 서울대? 기억하세요 이러고 또 조금 기도하다가 또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이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내가 알면 부처님은 무조건 압니다. 내가 알면 무조건 부처님은 아는 거지 부처님과 나를 둘로 나눠놓고 ‘부처님 기억하실까? 안하실까?’ 내가 간절하면 부처님도 간절한 겁니다. 내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많은 생각을 막 하고 그걸 자꾸 되뇔 필요가 없다. 그래서 수행하는 순서는 오로지 마음을 비우고 기도 거기에만 몰입하고 많은 번뇌망상 생각들을 버리고 그거에 집중한다는 것이죠.
대표적인 기도수행하는 방법은 경전독송, 진언바라밀 주력수행이 있구요. 그다음 염불수행 절수행 또 명상과 참선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경전독송을 할 때는 72쪽에 보시면 욈쪽에 경전독송 수행하는 방법을 간단히 해 놨는데 각종 수많은 경전들을 독송해도 되고 긴 졍전은 며칠씩 하루에 20분씩 끊어서 하셔도 좋다.
중간에 경전 독송을 하구요 .
그리고 어떤 경전을 독송하시더라도 처음에 정구업진언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개경게 개법장진언 이 네 사다라니를 외우고나서 중간에 경전 독송을 하구요 맨 마지막에 끝 날 때에는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라는 회향게, 이 모든 수행의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회향합니다 하는 회향게를 하면서 독송수행을 마칩니다. 그래서 여기는 많이 대표적으로 읽히는 경전들을 위주로 적어놨구요,
여기 아마 「자비경전」「최상의행복경」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에서는 덜 읽히지만 남방불교에서는 반야심경처럼 많이 읽히는 경전입니다. 그래서 적어놨으니까 참고로 하시면 되구요 금강경은 보통 한문으로 외우시는 경우가 많아서 한글은 너무 오래걸려서 주로 많이 한문으로 외우셔서 제가 한문으로만 넣어놨구요,
특별히〔불교경전독송3집〕이라고 해서 대소승불교의 모든 경전들 중에서 우리 기도하고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일상 속에서 도움이 될만한 부처님가르침의 핵심의 가르침들을 뽑아습니다. 뽑아서 여기 한글로 해석해 놨구요. 금강경 한문으로 독송하는 시간정도가 딱 됩니다. 한글로 〔불교경전독송3집〕을 독송하면 20분정도가 걸려요. 그래서 다른 하나의 경전을 독송하는 것도 좋지만 대소승불교의 핵심적인 경전은 한글로 독송하셔도 좋다.
독송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요. 많이들 질문하시는게 경전의 뜻을 이해하며 독송해야되요? 아니면 이해하지않고 그냥해도 되요? 라고 물어보는데 한문으로 금강경을 독송하는데 뜻을 이해하면서 독송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한문 독송을 하는 데 그렇게 뜻을 이해하면서 하겠습니까? 신묘장구대다라니 뜻을 생각하지말고 했는데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뜻을 이해할 수가 당연히 없겠죠.
경전을 독송할 때는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면 되는데요. 첫 번째는 한글로 독송하면서 한글 경전의 의미를 음미하면서 독송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주로 간경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해요. 그래서 경전의 뜻을 음미하면서 독송하는 방법이 있어요. 그런데 지혜를 증장하는 방식이죠. 그걸 위해서 제가 〔불교경전독송3집〕이라는 부분을 따로 뽑아서 만들어 놓았구요.
두 번째는 그것만 독송수행이 아니라 한문으로 금강경이나 한문으로 경전을 독송하면서 뜻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그 경전에 소리집중해서 그 소리가 똑똑히 내 귀로 들리도록. 그러니까 내용은 의미가 중요하지 않죠. 내용은 중요하지 않고 경전이라는 밝은 부처님말씀의 에너지를 방편삼아 경전소리에 집중함으로써 공부가 되는 건대요. 이 두 번째 방법이 경전독송이나 주력수행이나 염불수행이나 절수행에 다 포함되는 건대요.
선에서는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도가 무엇입니까?” 그러면
“마른 똥막대기다.” “마삼근이다.” “차나 한잔해라.” 이런 말을 쓰잖아요? ‘마른 똥막대기다.’ 했는데 마른 똥막대기가 뭔지 머릿속으로 그려서 왜 마른똥막대기가 부처지?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전혀 선과 어긋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마른 똥막대기’ 라는 말 뜻을 따라가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컵이라고 해도 좋고 ,물수건이라고 해도 좋고, A4용지라고 해도 좋고 말이 나오는자리, 그 소리를 듣는 성품 그것을 확인하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말이 나오는 지는 중요하지 않는거예요.
“도가 무엇입니까?” “마이크 다.” “A4용지다.” “축원카드 다.”
뭐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왜? 그 축원카드에는 별 볼일이 없으니까.
손가락을 통해 달을 가르키려고 하는 것처럼 이 말을 톨해 말 너머의 본성을 가르치려고 하는 거에요. 듣는 성품, 들리는 성품, 보는자, 보는 성품 즉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금강경의 내용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한문으로 “금강경 여시아문 일시불 제사비불…” 하면서 이 소리를 나도 모르게 내고있는데 도대체 이 소리가 나오는 출처가 어디냐? 어디서 이소리가 나오고 어디서 이 소리를 똑똑히 듣고 있느냐? 듣는놈이 누구냐? 이 소리를 내는 놈이 누구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보는 것이죠. 그래서 염불하는 놈이 누구냐? 경전 독송하는 놈이 누구냐? 하고 화두처럼 들고 이 독송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경전 독송하되 그 뜻을 따라가지 않더라도 경전 독송하는 그 소리를 똑똑히 들으면서 아무런 생각, 번뇌망상을 독송하는데만 집중하면서 번뇌망상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오로지 도대체 이게 누구인가 하는 마음으로 독송을 해 나가는겁니다.
다음엔 주력수행인데 주력수행도 마찬가지겠죠? 주력수행은 뜻이 없습니다. 왜 뜻이 없겠습니까? 뜻을 헤아리지 말라는 것이죠. 뜻을 헤아리지 말고 오로지 그 진언에 마음을 모으라는 것입니다. 「신묘대다라니」를 하든 「광명진언」을 하든 「불설수지길상다라니」를 하든 이것을 하면서 이 생각, 뜻을 헤아리려 애쓰지 않고 또 진언은 뜻을 헤아리지도 못하게 하니까 더욱더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생각을 딱 가로막게 하는 좋은 수행방법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진언을 독송함으로써 이 독송하는 자가 누구인지? 이 소리가 일어나는 자가 누구이고? 소리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곳이 어디인지? 독송하는 자가 누구인지? 이것을 확인하는 마음으로 하는겁니다. 그래서 생각과 번뇌 망상을 버리고 그 소리에 딱 집중하는 겁니다. 아무런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이걸 처음부터 끝까지 게속해서 ‘이걸 독송하는 자가 누구일까? 이걸 독송하는 자가 누구일까? 하고 계속 되뇌이는 것을 죽은 화두라고 부릅니다. 송화두라고 부르고. ‘나는 누구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누구일까?’ 계속 되뇌이는 것을.
그냥 한번 탁 질문을 하고 나면 내가 지금 궁금하니까 화두를 들고 앉아 있는거 아니겠어요? 내가 이걸 확인하고 싶으니까 이짓을 하고 있는거 아니겠어요? 그럼 저절로 화두가 들린거예요. 저절로 수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로지 온갖 생각, 망상을 탁 내려놓고 오로지 그 소리에 집중해서 그 소리와 하나가 되는 거죠. 번뇌망상 딱 내려놓고 하나가 되는 마음으로 독송을 한다.
그리고 세부 방법으로는 진언다라니를 할 때 지금 말씀드린 것을 앞에 적어놨구요 옆면있는 부분에. 이것을 신묘장구대다라니처럼 긴 것을 다라니라고 부르고 짧은 것을 진언이라고 부르는데요 긴 것을 할 때는 경전독송하는 것처럼 사다라니를, 정구업진언부터 개법장진언까지 외고나서 하고 끝날 때 회향게를 읽어주기도 합니다. 그냥 하기도 하구요. 진언은 짧은거니까 그냥 곧 바로 진언만 반복해서 독송할 수도 있다.
염불도 마찬가지입니다. 염불도 경전은 경전의 권위를 방편으로 삼고 진언은 진언이란 어떤 소리에너지를 방편으로 삼고 석가모니부처님은 부처님의 명호라는 거룩한 에너지를 방편을 삼아서 어떤 명호를 외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만약에 석가모니부처님은 더 좋고, 아미타부처님은 염불 중의 왕이고, 관세음보살님은 보살이니까 부처님보다 약하지만 내 옆에 가장 가까운 분이니까 이러고, 지장보살님은 나를 죽고나서 지옥에 안보내주니까? 이런식으로 해석해서 하는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게 구분하는건 하나의 방편이니까 방편으로만 알고 계시고 해서 방편에 맞게하는건 필요하겠죠.
49제 동참하러왔다가 관세음보살 할 필요는 궂이 없잖아요? 남들 하는대로 따라 해주면 되니까.
그런데 이게 불이법입니다. 차별이 없어요. 관세음보살을 하든, 아미타부처님을 하든. 그러니까 숭산스님이 관세음보살이 발음이 안된다는 외국인 제자에게
“그럼 너 발음 잘되는 거 해라. 코카콜라 코카콜라 반복해도 괜찮다,” 라고 한 이유가 무슨소리가 중요 한게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에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 사람들은 이런얘기를 하죠.
“옴마니반메훔은 온 우주의 모든 소리를 다 응축해놓은 강력한 에너지가 있는 소리다. ”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신묘한 힘이있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이걸 독송만해도 힘이깃든다.”
이것은 하나의 꼬시기위한 방편이죠. 본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방편으로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본질에서는 불이법입니다. 다 똑같습니다,. ‘아’ 나, ‘어’ 나, ‘너’ 나, ‘나’ 나, ‘관세음보살님’이나 ‘석가모니부처님’이나 ‘코카콜라’나 ‘시계’나 ‘똥’이나 ‘오줌’이나 다 똑같았단 말이죠. 하나의 소리 파동일 뿐이예요. 불이법으로서는. 그러니까 어떤 하나를 선정해서는 꾸준히 하셔도되고. 그런데 여기선 관세음보살님했는데 딴절에 가서 아미타부처님을 하면 거기선 그거 열심히 하면 되고.
그래서 제가 어느 하나만 특별히 이것만 좋으니까 이것만 열심히 하십시오 하고 얘기 안하고 다양한 방법을 설명해 드리니까 알아서 선택하라는 겁니다. 본인이 근기에 맞춰서 선택해서 해도 된다는 것이죠,
그 다음에 절수행 할 때도 염불하면서 절수행하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염불하지 않고 절하는 동작, 내가 절하는 움직임, 절하면서 일어나는 마음,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하면서 천천히 몸과 마음을 관찰하면서 절하는 방법이 아주 좋은 방법이구요, 그 다음에 염불하면서 절을 할 수도 있구요.
그 다음에 108배 참회문도 있고, 여러 가지 부처님 명호를 외면서 108배하는 방법도 있고, 그런데 요즘 나오는 108참회문을 함께 독송하면서 하는 방법도 있는데 제가 엣날부터 다양한 버전의 108참회문이 세간에 많이 나와 있는데 다 들 해보니까 뭔가 모르게 조금씩 부족한 느낌도 들고 뭔가 모르게 그런 게 있어서 옛날부터 108배하면서 마음공부를 함께 할 수 있는 어떤 발원문을 하나 만들면 좋겠다라고 하는 생각만 해 오다가 이번에 법요집을 만들면서 새로 제가 다 썼습니다.
그래서 다른 걸 참고해서 썼는데 이렇게 108배마음공부 발원문을 독송하면서 지극한 마음으로 자성의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하면서 귀의합니다 부분에서 일배를 하고 또 그 다음 읽고나서 마지막 참회합니다라는 말에서 일배하는 식으로 108배하는 방법도 있다. 그래서 지금 저희도 3ㆍ7일동안 매일 아침 10시30분에 이것을 같이 기도하고 있는데 해보니까 좋더라고요. 그런식으로 절수행도 하시면되고.
그 다음에 명상수행 참선수행은 여기 제가 쭉 적어놨는데요 시간이 너무 많이 돼서 한 번 여러분들이 한번씩 읽어 보십시오. 제가 일상 평소에 많이 법문에서 했던 내용들이 많이 적혀있고 참선하는 법에 대해서 적어놨으니까 그런 방식으로 명상 참선을 하시면 되겠고 제가 밴드나 카페에도 올려놨으니까 참고로 보시면 되고요.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148쪽으로 돌아오면 개인기도 하는 방법을 쭉 적어놨구요, 초심자들은 예를 들면 삼귀의, 참회문, 발원문, 반야심경, 우리말천수경, 최상의행복경, 광명진언21독, 염불하면서 108배 절수행, 사홍서원, 회향게 이런식으로 기도해도 좋다. 그리고 수능기도 발원자들은 이런식으로 해도 좋다. 하는식으로 적어놨는데 이것만 가지면 수십가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염불을 한 10분하겠다. 진언을 20분동안 하겠다. 혹은 나는 바라밀을 100번 200번하겠다. 이런식으로 몇 번으로 해도 좋고 10분 20분 30분, 시간으로 정해서 해도 좋고 그런식으로 내가 참선도 10분 하겠다 이런식으로 시간을 정해서 하셔도 좋고 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절을 꼭 108배 해야되는게 아닙니다. 108배를 궂이 안 맞춰도 전혀 상관없어요. 난 10분을 하겠다, 20분을 하겠다. 하고싶은 만큼 하겠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방법을 보시면 자신의 근기에 맞춰서 10분, 20분, 30분, 50분, 1시간, 2시간, 3시간… 마음대로 조절해 가면서 수행을 할 수가 있으니까 그리고 또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시겠다면 매일 10시30분에 3•7일 기도를 하고 있으니까 함께 동참하셔서 같이 한 번 해보시는 것도 한시간 반동안 이것을 조합해 가면서 하고있어요. 지금 이번 3•7일 동안은 다양한 수행의 방법을 가르쳐드리기 위해서. 그러니 한번 참석해보시면서 함께 기도수행을 해보는 것도 좋고 또 혼자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절에서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수행하면 당연히 훨씬 기도의 힘이 더 있구요, 옛날에 어떤 스님에 표현에 의하면 함께 기도를 하면 훨씬 기도의 파장? 감흥? 가피 이것이 훨씬 더 크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셨는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의 마음이 모여도 강력한데 함께하는 마음이 더구나 부처님전에서 함께 하는 마음이 모이게되면 더 큰 기도의 힘이 되니까 함께 기도하실수 있는분들은 10시30분까지 이번달 28일까지 하고 있으니가 함께 동참하셔도 좋으실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오늘은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저희들이 지은 바 이 공덕이 일체의 중생들의 공덕이 되어 모든중생 빠짐없이 성불하옵고 위없는 불국토를 이뤄지이다()()()
수고하셨습니다.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_()_
수행은 괴로움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합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근원의 문제 내가 늙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고 지금 죽을 병이 내 인생에 딱 찾아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내일 죽더라도 나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고 여여하다 그러면 전혀 수행 할 필요가 없죠. 그 사람은 지금 그대로 부처일 것이니까.
내가 지금 몸이 아파서 너무 힘이든다 그럼 이몸부터 추스르고 병원부터 가야지 선방에 와서 아파죽겠는데 그러면 안되겠죠.
제법실상, 삶은 내 인생이 벌어지는 그것이 진리이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있는 일 이외 다른 것이 진리가 아닙니다.
내가 안다고 생각해서 내 인생이 이렇게 되어야지만 행복할 거야 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걸 백프로 믿지는 말라는 것이죠. 즉 기도의 성취에 대해서 과도하게 집착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되, 이게 응무소주이생기심이거든요.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 마음을 내되 마음 낸 거에 머물지는 마라. 과도하게 집착하지는 말라는 것이죠.
불자는 뭐가 불자냐? 내 생각이 옳다고 막 집착하고 고집하는게 불자가 아니라 부처님께 모든 것을 내맡길 줄 아는 것이 참된 불자라는 거죠.
제가 서울대를 갈려고 막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저는 그렇게까지 괴롭지 않았습니다. 왜? Ok 나는 서울대는 아니야.
@무멍나 삶이 사는데로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이지 내 생각이 사는대로 사는 게 지혜로운게 아니다.
그러나 참회기도는 너무 오래 게속해서 할 필요는 없구요 짧게하고 끝내는 게 좋다. 왜냐하면 죄이식을 계속 강화 시킬수도 있기 때문에.
본인이 근기에 맞춰서 선택해서 해도 된다는 것이죠,
절을 꼭 108배 해야되는게 아닙니다. 108배를 궂이 안 맞춰도 전혀 상관없어요.
난 10분을 하겠다, 20분을 하겠다. 하고싶은 만큼 하겠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방문 12일만에 녹취 하나 완성. 정말 고맙습니다. 성불하십시오. _()_
@무멍나 응원해주신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정묘화 법우님! 너무 수고 많으셨습니다. 처음 녹취하시기가 많이 힘드셨을 것인데요. 감사 감사드립니다.
스님의 부드러운 목소리, 정확한 발음, 좋은 법문으로 과외받는 듯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감로의법문을 해주신 법상스님께 삼배의 예를 올립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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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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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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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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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드립니다~
좋으신 법문 감사합니다.조금 요약해서 해주셔쓰면 헙니다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