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5일 월 己丑일
천간에 기토가 나타나 갑기합을 이룸. 본연의 빳빳함을 잃고 흐리멍텅해진 갑의 날.
축토는 정화, 기토, 경금의 입고지. 축이 오셔서 소중한 상관, 정재를 무덤으로 데려가버렸다.
***
서울 다녀왔다.
두꺼비 집을 내려 모든 게 정지된 집구석. 텅 빈 냉장고만 고적하게 돌아가고
말라 꼬부라진 식물과 후텁한 공기와 먼지 낀 바닥을 보며 ‘여기 어딘가? 나는 또 누군가' 했다.
배가 고팠지만 냉장고를 다 치웠으니 바로 꺼내 먹을 것도 없고
낼 혹은 모레 새벽이면 또 떠야하니 다 먹어치우지 못할 바엔 뭘 할 수도 없는 상황.
내 집에서 일당 가사도우미처럼 청소하고 환기하고, 목적한 일을 해치웠다.
영해 석달 살이를 적어도 올해는 넘겨보리라 결심한 때문에 빈 집에 후배를 월세로 들이기로 한 거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타인에게 나의 집을 통째로 넘겨주는 것도 속살을 다 드러내는 일이라
한번도 생각지 못했는데 요즘 콘셉트가 일생에 한번도 안해 본 일 하자는 것인지라 저질러 버렸다.
내 허접한 살림으로 채워진 집에 다른 한 사람의 살림이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서랍장이며 붙박이 장 한 칸을 비워내야 하는데
켜켜로 쌓인, 이사 때도 못 버리고 끝내 끌고 다니는 옷가지들.
쳐다도 보지 않는 묵은 살림살이들을 이번 기회에 다시 뒤집어서 마구 버렸다.
재활용과 쓰레기 봉투를 몇 개씩 채우고
바닥 청소까지 마쳐놓고 시스템에어컨 아래 문명의 이기를 즐기며 기절!
모든 인수인계와 구두 계약을 다 마치고 월요일 동틀 무렵
엄마 사진 하나 품고 다시 내 집과 이별했다.
‘너를 얻어 정말 하늘을 날 듯 기뻤고 쓸고 닦고 애정을 새겼는데 이리 무심하게 정을 떼는구나.
이것도 우리 인연이 치러야하는 값이다’ 혼자 생각했다.
그리고 예약한 버스가 나를 실어 또 다른 둥지로 데려다주었다.
안동을 지나며 그 사이 장한 녹음으로 울창해진 산과 숲, 쨍한 하늘이 눈물겹게 반갑다.
영덕에서 넘어오는 길, 축산, 성내리, 고래불, 대진, 창수 익숙한 이정표가 깊은 안도감을 준다.
그렇게 영해 터미널에 도착하니 동네 행사라도 있었는지
인근 마을 할매들이 모두 나와 전선 위 참새처럼 쪼로롬이 앉았다.
알록달록 멋을 낸 복색에 한 미장원에서 뽑아낸 듯 똑같은 뽀글이 빠마,
저마다 챙긴 까만 봉다리와 손수레며 등짐.. 그랬다. 오늘은 영해 오일장.
장에 사러왔거나 팔러왔거나 용무를 다 마치고
그늘막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아 게슴츠레 졸며 집에 갈 차편을 기다리는 할매들.
집에 도착하지마자 낑낑대며 끌고 온 가방 던져놓고 나 역시 직행 한 곳은 오일장터.
정오에 다다른 시점이라 자칭 상추전문가 아줌마의 채소 노점도 사라졌고
단팥빵아저씨의 빵 수레도 없지만 바로 직진 한 곳은 우무채 넣어주는 콩국 노점.
패트병에 콩국 담아주는 아저씨는 본인은 원래 군밤 전문인데
밤은 가을을 기약해야 해서 콩국을 만들어 판다며 간맞추느라 매번 고역이라 하신다.
그래도 그 간이 딱이라 감사하며 콩국 한 병 든든하게 옆구리에 꼈다.
돌아다녀보니 오늘 시장의 대세는 단연 토마토, 어딜 가나 토실토실 잘 영근 토마토가 왕지를 이뤘다.
그러고 보면 1년 내 먹어야하는 나의 사과는 지금이 입고지.
개신개신 숨만 유지하는 저장사과 밖에 없다.
일조량이 많아 사과 산지라는 말은 아직 내겐 전설이다.
장에서 좋은 사과를 찾기도 힘들고 찍히고 멍들고 구멍 난 흠과도 몸값이 비싸다.
지금이 사과의 보릿고개. 곧 여름사과 아오리가 나오면 울며 겨자먹기로 사야하는 저장 사과와 이별할텐데.
애기 주먹 만한 살구며 천도도 나왔는데 초록사과는 아직 생지에 등판하지 않으셨다.
하여 왕지의 세력 뽐내는 토마토를 한 바구니 가득 3천원에 사고
쌓아놓고 파는 양배추도 한 통 2000원이란 놀라운 가격에 샀다.

바로 튀겨 파는 수제어묵이며 닭강정은 패스, 메인 시장 통을 나와 내친김에 만두 찐빵가게를 들렀다.
주문한 김치만두가 다시 쪄지는 3분 동안 두 손 가득 들었던 까만 봉다리를 정리하는데
주인아저씨가 그렇게 무겁게 비닐 봉다리를 들면 손 아프다며 골판지를 갖고 와 손잡이를 만들어주신다.
이런 난생처음 받는 배려라니...

원래 월요일이 노는 날인데 자신은 마누라도 없어서 여관방에 박혀있기가 갑갑해 그냥 문 열었단다.
어쩌다 말을 트고 말았다. 안물안궁ㅠㅠ
암튼 골판지 손잡이 덕택에 수월하게 집까지 왔는데 허리가 꺾일 것처럼 너무나 허기가 진다.
하여 장본 것들 다 봉다리 째 던져두고 1/4쪽 남은 양배추를 채 썰고
냉장고에 있던 마지막 멍든 사과와 채소 칸에서 죽어가던 토마토를 썰고 아몬드 한줌 던져넣고
기성품 드레싱을 뿌려 샐러드 만들고 아직 따뜻한 만두와 술빵, 콩국까지 챙겨서
방바닥에 널부러져 영해 첫 끼니를 해결했다.

일회용 식기에 상도 없이 차린 나 하나를 위한 만찬. 역시 이렇게 먹어야 진짜 집에 돌아온 실감이 난다.
부엌은 바리바리 던져둔 비닐봉지에 싸온 짐에 난리통이지만
밥은 늘 감동이고 위로이고 내가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새벽부터 나부댄 덕분에 다 저녁엔 온 몸이 부어 나무둥치 같았다. 억지로 무거운 몸을 끌고 산보를 갔다.
그래도 축은 나의 천을귀인. 이름값을 다했다. 이 풍경 하나로...
그래, 나는 집에 왔다.



첫댓글 글작가여 사진작가여?? ㅎㅎ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영해일기는 언제까지 가능하신건지요?
내일 일은 모르지만 영해 머무는 시간까지는 지속하고 싶습니다. 마음은 그러합니다.
며칠 글을 쓰지 않으셔서 "서울에 가셨나~" 짐작은 했습니다만~
매일 보다가 고작 사나흘 못 봤을 뿐인데
그 시간이 허리가 꺽일것 같은 허기를 참아가며 음식을 준비하던
그 시간만큼 길게 느껴지는 건
저 만의 느낌일까요? ㅎ
아마도 사랑에 빠졌나봐요 ㅋ
허락하는 그 날까지 영해 일기를 보고 싶습니다~^^
댓글도 일품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