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48. 숭유억불 넘어선 조선불교
성리학 앞세운 핍박 500년 감내하며 미래 준비
# 조선불교의 올바른 이해
조선 불교를 말할 때 대개 쇠퇴와 침체를 먼저 언급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불교가 지닌 사상과 문화, 의식 등 모든 방면에서 조선시대 불교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대로부터 고려를 거쳐 발전을 거듭해온 불교가 현재에 전해지기까지는 조선시대의 매개적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조선은 왕조 건국의 이념을 성리학으로 내세우면서 건국 초부터 억불시책을 단행하였다. 불교 배척은 조선왕조 전 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수많은 사찰과 승도는 통폐합되거나 환속당했고. 그나마 존속하였던 사찰과 승도는 양반관료제 사회 하에서 온갖 수탈을 겪어야만 했다.
배불시책은 건국 직후부터 시행되지 않았다. 개창자 태조는 호불의 입장에서 고려불교를 계승하는 조처를 취하였으나, 태종의 즉위와 함께 본격적인 배불이 전개되었다. 이후 16세기 중반 중종 대까지 계속된 배불의 결과 성내의 스님은 격감하고 각지의 사찰에는 스님이 사라졌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보우(?~1565)와 함께 승과를 부활하고 선교 양종체제를 재확립하는 등 불교는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조선시대 불교사에서 문정왕후와 보우에 의한 불교의 중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때 부활된 승과를 통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배출되면서 조선후기 불교의 위상을 격상시켰다. 또한 이들의 법맥이 광범위하게 계승되어 조선후기 불교를 이끌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0년대의 범어사. 18~19세기 전국의 사찰에서는 각종 계가 번성하면서 조선후기 사찰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시켰다.
조선후기 불교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야는 왜란과 호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지켜낸 의승군의 활동이다. 의승군의 활약은 불교의 위상을 재고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전공을 세운 의승장이 고위관직에 임명되는 등 불교계는 국난의 위기에서 오히려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찾게 되었다. 유교정치 체제하에서 천대받던 불교가 국난극복에 큰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불교계는 사회적 기반을 다시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의승군의 활동이 가져온 부정적인 측면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출가집단이라는 특성은 일반사회보다 강한 조직적 결속력을 갖게 마련이고, 이러한 측면이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하는 의승군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양난 이후에도 국가에서는 승도를 공역에 징발하는 등 국가의 사역집단으로 변질시켰던 사실은 의승군이 초래한 역기능이었다. 이제 승도는 각지의 산성 축조와 방비에 동원되어 다시 한번 침체의 길에 빠졌다. 당시 불교계에 대한 인식은 양질의 노동력을 소유한 사역집단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승군이 차출되면서 고단한 노역에 스님은 이탈하고 사원은 점차 황폐화될 수밖에 없었다.
# 조선 사찰의 고단한 일상
조선시대 불교의 경제적 상황도 배불의 정치적 측면과 맞물려 매우 어려운 입장이었다. 건국 초 신왕조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사원소유의 전지와 노비는 압수되었고, 점차 불교계는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스님의 신분은 천민에 가까운 양인 취급을 받거나 아예 천민이라 할 정도로 격하되었다.
스님은 이러한 신분적 천시를 받으면서 제반 잡역에 동원되어 온갖 수탈을 감당해야만 하였다. 잡역 중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것은 종이를 만드는 지역(紙役)이었다. 사찰의 지물 공납은 이미 조선초부터 있어 왔으나 대동법의 실시 이후 대폭 증가하였다. 이전에는 공물로서 종이를 직접 징수하였으나,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에는 종이 대신 쌀로써 상납해야 했다. 민간의 닥나무 재배는 곡물 재배로 변해갔고, 지물 생산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국용지의 공급원으로서 사찰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현종 대에 전라도의 경우 큰 사찰은 1년에 80여 권, 작은 사찰은 60여 권에 달하는 지물을 바치게 하였다. 전국의 사찰은 국가의 지물생산소로 전락하거나 각종 공물의 공급처가 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지리적인 여건상 닥나무가 자라지 않는 양산 통도사, 의성 고운사, 영변 만합사 등에까지 지물 공납이 할당되기도 하였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사찰에서는 별도로 지물을 매입하여 납부하는 불합리한 사례도 있었다.
왜란.호란 의승군 활약 계기로 명종 즉위 승과 실시 ‘재도약’
사찰계 232건 형성 재정 구축 … 경제기반 확충.신행활동 병행
사찰은 이러한 공역과 함께 지방관리나 유력자들에 의한 사사로운 징발과 수탈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깊은 산중에 위치한 사찰은 각종의 진귀한 산채와 산과, 수공품의 조달이 가능하였고, 이는 양반관료들의 집중적인 탐학의 대상이 되었다.
<목민심서>에 당시의 사찰이 겪었던 비참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양반이 반나절을 즐기기 위해 사찰에 찾아오면 노승들은 삼일 동안 쉬기를 잊어야 했다. 하루는 휘장을 치고, 하루는 잔치에 참여하며 나머지 하루는 청소를 해야만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1837년(헌종 3) 은해사에서는 “관의 부역이 너무 심하고 빈객이 끊이지 않아 스님들은 온 힘을 다 쏟아도 여유가 없다”고 하였다. 19세기 중엽 법주사에서는 국가의 의승역과 잡역은 물론 메주.산채 등의 산물을 바쳐야했다. 양반관료가 행차할 때는 절에서 가마를 메야했고, 심지어 향교와 서원, 향청 등의 관리들도 버젓이 특산물을 요구하였다. 사대부들의 이러한 요구는 당연시되었고, 경내에서 음주와 소란, 사냥 등의 무법행위도 자행하였다.
# 사찰계 통한 자구책 모색
조선후기의 불교계는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곤궁을 탈피하기 위해 스님들은 환속하거나, 사찰을 비우고 관아와 지방관리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 산중 깊숙이 은둔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1790년(정조 14) 금강산의 대찰 장안사에는 불과 4~5명의 스님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스님이 떠나간 사찰은 폐사되기 일쑤였고, 조선시대의 사찰 중 15.5%만이 1910년대 초까지 온전히 유지되었다는 분석은 배불의 심각성을 여실히 반영한다. 사찰에서는 지역이나 각종 잡역을 면제받기 위하여 관아나 권세가에 호소하였고,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스님들도 생겨났다.
조선후기 불교의 경제활동은 궁핍한 사찰재정을 유지하기 위한 긴박한 필요에서 전개되었다. 점차 사찰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전문적으로 식리행위를 추구하는 스님이 등장하였고, 영조 연간에 이르면 ‘부자스님(富僧)’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재화를 소유한 스님도 존재하였다. 그런데 사찰의 경제행위는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고, 생산에 참여할 스님 수가 어느 정도 확보된 대찰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거주승이 단출한 군소사찰에서는 경제활동이란 엄두도 못 낼 처지였다. 이러한 경제적 배경에서 사찰계가 성립하였다.
기림사 염불계대성공비.
사찰계란 불교신앙을 바탕으로 수행과 신앙심을 증진시키거나 사찰 재산, 전각, 혹은 의식용품 등을 마련하기 위해 결성한 모든 조직체를 말한다. 뜻을 같이하는 승속이 약간의 금전을 계금으로 출자하여 목돈을 마련한다. 이 돈으로 전답을 매입하여 절에 시주하거나, 몇 년 간 식리하여 여기서 생기는 이자를 절에 시주하였다. 대부분의 계가 참여자격을 제한하지 않으므로 승도가 적은 사찰이라 하더라도 신도가 함께 참여하여 계를 결성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파악된 조선후기의 사찰계는 모두 25종 232건이다. 갑계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염불계.불량계.등촉계.문도계.청계(廳契).지장계 등의 순서이다. 이들을 크게 나누면 신앙활동으로서의 계와 보사(補寺)활동으로서의 계로 구분되는데 대부분 보사라는 경제적 동기가 결성의 기본 목적이었다. 갑계는 사찰계 중에서 가장 많은 69건이 활동하면서 사찰의 재정확충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갑계가 수행한 보사활동의 범위는 재원이 필요한 모든 불사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때로는 노동력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많은 사찰에서 절의 운영을 전적으로 갑계에 의존할 정도로 그 역할이 컸다. 19세기초 범어사에서는 “갑계가 있어 절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사찰계는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18~19세기 전국의 거의 모든 사찰에서 각종의 계가 번성하면서 조선후기 사찰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시켜 나갔다. 사찰계가 성립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경제적 이유임이 분명하지만, 여기에는 신앙적 배경도 아울러 작용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조선후기 사찰계의 최초 사례는 1564년(명종 19) 무렵에 결성한 사명대사의 갑회이다. 회(會)는 계의 이칭이다. 이 갑계는 사명당을 위시한 20대 초의 동년배 출가승도들이 수행을 독려하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하였다. 즉 조선후기 최초의 사찰계인 갑계는 경제적 목적이 아니라 신앙과 수행을 위해 결성되었다. 이처럼 신앙적 목적을 지닌 사찰계는 이미 조선중기부터 전개되고 있었다.
이후 조선후기가 되면 보사활동을 위한 경제적 목적이 계성립의 주류를 이루지만 사찰계의 원형은 이처럼 수행과 신앙을 위한 목적에서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후기의 적지 않은 사례를 통해 신앙과 수행을 위한 계가 활동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찰계는 조선시대의 배불이 가져온 경제적 궁핍을 극복하고 아울러 집단적 결속을 통해 수행과 신앙을 고취하기 위한 이중의 목적을 지니고 활동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찰은 조선시대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전각과 불상, 불화 등과 같은 유형적 문화뿐만 아니라 범패와 염불, 예불의식 등 많은 것들이 조선시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는 현대불교의 전형을 형성할 만큼 꾸준한 내적발전이 이루어졌던 시기였고, 그 밑바탕에 사찰계의 활동이 있었다.
한 상 길 /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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