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꼿꼿하고 검푸른 나무 줄기 사이로 자작나무가
좌우로 휘어져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어떤 아이가 그걸 흔들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흔들어서는
눈보라가 그렇게 하듯 나무들을 아주 휘어져 있게는 못한다
비가 온 뒤 개인 겨울 날 아침
나뭇가지에 얼음이 잔뜩 쌓여있는 걸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면 흔들려 딸그락거리고
그 얼음 에나멜이 갈라지고 금이 가면서
오색 찬란하게 빛난다
어느새 따뜻한 햇빛은 그것들을 녹여
굳어진 눈 위에 수정 비늘처럼 쏟아져 내리게 한다
그 부서진 유리더미를 쓸어 치운다면
당신은 하늘 속 천정이 허물어져 버렸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나무들은 얼음 무게에 못 이겨
말라붙은 고사리에 끝이 닿도록 휘어지지만
부러지지는 않을 것 같다.
비록 한 번 휜 채 오래 있으면
다시 꼿꼿이 서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리하여 세월이 지나면
머리 감은 아가씨가 햇빛에 머리를 말리려고
무릎꿇고 엎드려 머리를 풀어던지듯
잎을 땅에 끌며 허리를 굽히고 있는
나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얼음 사태가 나무를 휘게 했다는 사실로
나는 진실을 말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나는 소를 데리러 나왔던 아이가
나무들을 휘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시골 구석에 살기 때문에 야구도 못 배우고
스스로 만들어낸 장난을 할 뿐이며
여름이나 겨울이나 혼자 노는 어떤 소년
아버지가 키우는 나무들 하나씩 타고 오르며
가지가 다 휠 때까지
나무들이 모두 축 늘어질 때까지
되풀이 오르내리며 정복하는 소년
그리하여 그는 나무에 성급히 기어오르지 않는 법을
그래서 나무를 뿌리째 뽑지 않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나무 꼭대기로 기어 오를 자세를 취하고
우리가 잔을 찰찰 넘치게 채울 때 그렇듯
조심스럽게 기어 오른다
그리고는 몸을 날려, 발이 먼저 닿도록 하면서
휙하고 바람을 가르며 땅으로 뛰어 내린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자작나무를 휘어잡던 소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도 돌아가고 싶어한다
걱정이 많아지고
인생이 정말 길 없는 숲같아서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근지러울 때
그리고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
한 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면
더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이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다시 와서 새 출발을 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운명의 신이 고의로 오해하여
내 소망을 반만 들어주면서 나를
이 세상에 돌아오지 못하게 아주 데려가 버리지는 않겠지
세상은 사랑하기에 알맞은 곳
이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자작나무 타듯 살아 가고 싶다
하늘을 향해, 설백의 줄기를 타고 검은 가지에 올라
나무가 더 견디지 못할 만큼 높이 올라갔다가
가지 끝을 늘어뜨려 다시 땅위에 내려오듯 살고 싶다
가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좋은 일이다.
자작나무 흔드는 이보다 훨씬 못하게 살 수도 있으니까.
◈프로스트 [Robert (Lee) Frost] / 미국의 시인
1874. 3. 26 미국 샌프란시스코 출생~ 1963. 1. 29 보스턴 사망.
일상적인 언어와 익숙한 리듬, 평범한 생활에서 취한 상징과 뉴잉글랜드 지방 생활의 평온함을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프로스트는 지극히 복잡한 사람이었습니다.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인정이 많고 적극적이며, 남을 돕는 일에 열심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우애관계는 1909년 프로스트가 뉴햄프셔 데리빌리지 핑커턴 아카데미에 있을 때 그 제자였던 존 바틀릿과 맺은 친교가
대표적입니다.
이 우애는 바틀릿이 죽을때까지 계속되었으며 마거릿 바틀릿 앤더슨의〈로버트 프로스트와 존 바틀릿:그 우정의 기록(1963)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데리의 농장시절에도 프로스트는 자질이 별로 없는 농부였습니다.
그후 그는 자기가 너무 게을러 농부로 성공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곤 했습니다.
데리의 농장으로 가기 전에 이미 그는 열정적인 식물학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결과 농장경영보다는 농장에 심었던 각종 식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아이들이 식물학에 관한 흥미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자라자, 그는 산책 길에 아이를 데리고 자기 농장보다 더 먼 곳까지 다녀
오곤 했습니다.
〈소년의 의지〉에는 농사보다는 식물에 관심을 보인 시가 더 많습니다.
프로스트는 계속 농장 일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농사일을 직접 하는 것은 잘 하지 못했으나 농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고, 뉴욕에서 출간된 2권의 시집에는
농부다운 목소리로 노래한 시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프랭코니아에 농장을 산 지 몇 개월이 못 되어 그는 애머스트대학의 교수직을 받아들였고 가족과 함께 매사추세츠로
이사했습니다.
그후 수년 간 프랭코니아의 농장은 별장일 뿐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타관을 떠돌면서 시 낭송회를 열 때도 시와 연설에서 자신을 뉴잉글랜드의 농부라고 소개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비록 프로스트가 농사일을 잘하는 농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농부가 되고자 했던 그의 욕망만이 시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결론지으면 안 됩니다.
농장은 그의 동료 교수들과 그의 독자들과의 사교에 별장 이상의 역할을 했습니다.
프로스트에게서 자연은 종교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넓은 풀밭 건너고 농장 숲을 지나, 때로는 그보다 더 멀리 친구 농장까지 돌아다니기 좋아했고, 이웃은 프로스트가
그들 농장을 방문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러한 산책이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고 새로운 시를 발견하게 했습니다.
그의 걸음걸이는 식물학자와 꼭 같았고, 그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들꽃의 이름을 댈 수 있었습니다.
1939년 부인이 죽던 해에 그는 버몬트 립턴의 브레드로프 영어학교 근처에 상당한 규모의 농장을 샀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오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