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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당하신 어린 양
이사야 53:7~12
오늘 본문 말씀은 지난 주일 저녁에 살펴본 바 대속의 고난을 당하시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의 후반부입니다. 이사야 52장 13절로부터 53장 전체에 이르는 이 구절들은 그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음을 당하시어 그들을 의롭게 하시는 여호와의 종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을 잘 예언해주고 있습니다. 구주 예수님이 오시기 전 7백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하고 범죄하며 타락하여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에 멸망당하기 직전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그들에게 하나님은 장차 처녀에게서 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그가 구원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베푸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구원을 베푸는가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대속의 고난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실 것을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7절 이하에서는 여호와의 종이 고난당할 때 어떤 태도로 고난을 당하였는가와 그의 죽음과 장사 되는 과정을 예언해주고 있으며 그 후에 그가 그렇게 대속의 죽음의 고난을 당한 후에 맞이하는 지극히 복된 수고의 열매와 그가 받는 존귀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한 절씩 함께 살펴봄으로써 이 예언이 어떻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통하여 성취되었는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종은 곤욕을 당하였을 때에 괴롭고 힘든 중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고 잠잠히 인내하며 그 모든 고난을 견딘다는 것입니다. ‘곤욕을 당한다’는 이 단어는 ‘나가쉬’라는 말인데, 강요를 당한다는 말입니다. 압박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감독관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그들은 곤욕을 당할 때에 잠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곤욕을 겪으면서 여호와의 종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처럼 조용하게 그 모진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종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위하여 나흘 전부터 피를 발라 문설중에 바르고 그 고기를 집안에서 구워먹도록 준비된 어린 양을 연상시킵니다. 세례 요한이 자기 앞에 나와 세례를 받았던 나사렛 예수를 보고서 자기 제자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복음 1:29)
이라고 선포한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참으로 어린 양은 도수장으로 끌려갈지라도 주인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목에서 피를 다 쏟으면서도 말없이 순종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실 그 때에 대제사장 빌라도와 빌라도 총독 앞에서 그토록 많은 질문을 받으나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고 침묵하셨으니, 이로써 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길들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여호와의 종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습니다. 여기서 ‘곤욕’이라는 히브리어 ‘오체르’라는 단어로서 갇히고 투옥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체포되어 결박당한 채 이리 저리 끌려다니면서 비천한 노리개감으로까지 전락되었지 않습니까? 또한 ‘심문’을 당했다고 했는데, ‘심문’이라는 단어는 ‘미쉬파트’로서 재판을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께서 밤중에 체포되어 대제사장의 집안 뜰에서 불법적인 재판을 당하셨고 새벽에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을 당하고 빌라도 총독에게 끌려가서 재판을 받고 또 갈릴리 영지를 다스리는 헤롯 안디바의 궁전에 끌려가서 거기서 조롱을 당하는 재판을 당하고 또 다시 빌라도 법정에서 서서 불의한 재판을 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 곧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사형장인 예루살렘 서문밖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나갔습니다. ‘끌려감’이라는 ‘라카’라는 단어는 마치 엘리야가 하늘로 끌려감과 같은 전격적인 거친 힘이 작용되는 끌려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러한 곤욕을 당하고 심문을 당하고 사형 판결을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모든 과정이 폭력적이고 강압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 중에 이러한 여호와의 고난과 죽음을 보면서 그것이 마땅히 형벌받을 하나님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나요? 8절 후반절에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사랑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라고 반문하고 있으니, 그 당시 백성들 중에 여호와의 종의 고난을 백성의 죄와 허물을 인한 대속의 고난과 죽음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일행에 의하여 체포되고 빌라도 총독의 법정에서 불법적인 재판을 거쳐서 사형판결을 받고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 위에서 고통 당하고 죽음을 당했을 때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당연히 신성 모독의 죄를 범했고 이단의 괴수로서 죽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의 죽음을 대속적 죽음이라고 본 깨달음을 받은 자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기꺼이 무덤을 내놓았던 아리마대 요셉도 예수님의 죽음을 무죄한 분의 죽음으로만 보았고 대속의 고난을 예수님께서 당하신 것이라는 깨달음은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깊이 사색한 자가 없었습니다. 8절 초반부에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이라고 할 때에 ‘생각하다’는 히브리어 ‘쉬아흐’는 ‘깊이 묵상하다, 사색하다’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그 당시 동시대 유대인들과 제자들마저도 깊이 생각하여 묵상하지 아니한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적 고난에 대하여 자주 깊이 묵상하기를 힘쓰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원문은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이는 그가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의 종은 고통을 겪다가 죽음을 맞아 장사를 지내게 되는 국면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대속의 죽음으로써 그의 사명을 다 감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장례식을 계기로 여호와의 종을 영화롭게 하기를 시작하십니다.
원문에 보면, ‘그의 무덤을 악인들과 함께 두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애초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종의 무덤을 악한 자들의 무덤들 가운데 두려고 작정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의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들의 계획대로 놔두지 아니하시고 그를 부자의 묘실에 두기로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예언대로 본래 예수님의 시신은 사형판결을 받아 십자가 형에 처해진 자들을 묻는 곳 곧 시신을 인도해갈 가족도 없는 나그네 같은 사람들을 묻어주는 공동묘지나 사형틀에 매달린 저주받은 자들을 매장하는음산한 공동묘지에 아무렇게나 매장하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 아리마대 요셉의 마음을 감동하고 공회의원 니고데모의 마음을 감동하여서 예수님의 시신을 왕과 같이 지극히 존귀하게 장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니고데모가 내놓은 많은 향품으로 예수님의 상한 몸을 잘 감쌌고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이 잘 만들어놓은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시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시신을 존귀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존귀한 장례식을 치르면서 악인들의 무덤자리로 가지 아니하고 부자의 묘실에 안치된 까닭은 바로 ‘그가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9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악인들의 무덤에 갈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0절로부터는 여호와의 종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의 사역이 어떠한 아름답고 복된 열매를 맺게 될 것인가에 대한 예언과 그 종에 대한 하나님의 복된 평가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10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 말씀은 히브리어 원문에 ‘붸 야훼’로 시작합니다. 해석하면 “그러나 여호와께서는”입니다. 즉 이렇게 여호와의 종이 사람들에게 온갖 오해와 미움과 박해를 받고 죽음에 넘겨지고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에 대하여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당연히 단호하게 산 자들의 땅에서 끊어내어 무참하게 죽여 없애야 한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과 달리 그의 죽음을 보고 계심을 밝히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그 여호와의 종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것일까요?
10절 상반절에서 밝히기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이라는 것입니다. 원문으로 보면, 여호와께서는 그 종이 상함받고 질고를 당하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종의 모든 고난과 죽음과 사람들로부터 비천히 여김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과 의지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고난을 하나님은 제사의 예물로 보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이라는 말씀이 그러한 뜻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그의 영혼 그의 전 존재를 하나님의 제단에 속건 제물로, 화목 제물로 드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속건 제물, 화목 제물입니까? 여호와의 종 본인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형벌받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속건 제물이요 화목제물로 여호와의 종이 자기 영혼을 대신 드린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수없이 성전 제단에 드려진 어린 양과 소와 염소의 제물들은 바로 그 백성의 죄 때문에 드려진 것들인데, 이제 바로 그 모든 제물의 본체가 바로 여호와의 종의 고난과 죽음의 피 흘리심이라고 하나님은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6절에서 이미 밝히고 있듯이, 여호와의 종의 죽음은 대속적인 죽음이요 속건 제물, 화목제물인 것입니다.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스라엘의 명절 중에 7월 10일의 대속죄일에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보내졌던 속죄 양, 아사셀 염소가 온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에 보내져서 거기서 결국 짐승에게 잡아 먹혀 죽음으로써 백성의 죄를 없앴던 것처럼, 하나님 백성의 죄를 담당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타오르는 십자가 제단 위에 그의 영혼과 몸 전체를 다 내어드려 그들의 죄를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속건 제물로 여호와의 종이 자기를 속건 제물로 하나님의 제단에 자기 영혼을 드리면 어떠한 결과가 나타날까요?
10절 후반절에 세 가지로 그 결과를 말해줍니다.
먼저, “그가 씨를 보게 되며”라고 하였습니다. ‘씨’라는 히브리어 ‘제라’로서 하나님 백성들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데리고 밤하늘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5:5 말씀에 보면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손이라는 단어는 바로 히브리어 ‘제라’라고 ‘씨’라고 말한 ‘자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믿는 참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종이 그의 대속의 고난을 다 감당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속건 제물로 자신의 생명을 드리게 되면 마침내 여호와의 종은 그의 씨 하나님 백성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의 백성, 곧 하나님의 참 백성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 그의 창에 찔린 옆구리로부터 태어난 것입니다.
또한 “그의 날은 길 것이요”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의 장수를 예언한 것이요 곧 그의 영생 불사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불멸의 생명을 예고한 것입니다.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말씀 곧 메시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의 몸이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시되, 사망을 삼켜버린 불멸의 영생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이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고, 그의 나라를 함께 상속하는 우리도 바로 이러한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종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 죄인의 구원과 의로움과 하나님 백성의 세워짐과 모든 악의 정복과 완전한 공의와 공법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신 뜻들이 그의 대속의 죽음에 의하여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온전한 구원과 회복의 역사가 바로 여호와의 종의 대속의 고난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어지는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여기서 여호와의 종 자신도 자기 영혼의 그 수고한 결과를 보고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기 직전에 큰 소리로 외치신 말씀 곧 “다 이루었다”는 한 단어 문장은 바로 이러한 흡족한 만족의 표현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도 비록 부족한 종이요 불충한 종이지만 우리가 이 땅에 남은 생애 최선을 다하여 수고한 것을 보면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함으로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이제 하나님께서 그 종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을 의롭다고 평가하시면서, 자기 종 곧 여호와의 종이 가진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고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지식과 그의 대속의 고난으로 인하여 죄악이 속량되고 의롭게 되어 그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참 백성은 이와 같이 여호와의 종의 모든 사역에 전적으로 빚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 없이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죄사함을 받지 못하며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대속의 사역을 통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할렐루야.
마지막 구절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처럼 여호와의 종의 대속의 고난에 대한 노래는 그 마지막에 하나님의 존귀케 하심과 영광스럽게 하심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은 사람들에게는 천대를 받고 비천히 여김을 받고 배척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끌려가서 끊어졌지만, 하나님은 그 연약하고 비천한 그를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 곧 노략물을 나누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종은 지극히 높여질 것입니다. 존귀해질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존귀한 자로 높여질 것입니다. 세상 만물을 통치하는 임금의 자리에 앉혀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 예수는 부활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고 그의 백성들의 임금과 구주로 높여졌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이른 대로, 모든 무릎이 그에게 꿇게 되었고, 모든 입이 모든 만물, 모든 천사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여호와의 종이 영광스럽게 된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밝히십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받았음이라”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종 우리 구주 예수님은 두 명의 강도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면서 비천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된 것이 바로 이 구절의 성취라고 마가복음 15:28 말씀에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 개역개정판에는 마가복음 15:28 말씀이 생략되었고 난하주에 “어떤 사본에는 29 ‘불법자와 함께 인정함을 받았다 한 성경이 응하였느니라’가 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된 다수사본에서는 이 구절을 맹백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용된 다수사본이 옳은 사본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는 범죄자 중 하나로 여김을 받았지만 그렇게 하신 것은 예언된 오늘 본문 말씀을 이루려고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의 구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기도한다는 단어는 히브리어 ‘파가’인데 이 단어는 중재하다는 뜻입니다. 중보 기도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접촉을 가지면서 응답받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과거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는 것과 같이 효력 있는 중보 기도입니다. 이사야 59:15,16 말씀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히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재자’ 곧 오늘 본문의 ‘파가’하는 사람은 단순한 기도를 즐기는 많은 사람과 달리 하나님과 깊은 접촉을 갖는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간절한 중보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지금도 우리 구주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과 충성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고 버림당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올라가면 우리는 이렇게 우리에게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여호와의 종 우리 구주 예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죽음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도다”(계시록 5:12)
할렐루야. 참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시고 그의 택한 백성들을 피로써 값을 주고 사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토록 모진 고통과 고난을 참으시고 자기를 버리고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영원히 찬양합시다. 그를 영원히 사랑과 충성으로 섬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