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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실크로드를 간 때가 2001년 8월이니 벌써 13년 전으로 희미한 기억속에 작은 순간 들로 남아있을 따름이다.
당시에는 거의 1년에 한두 차례씩 중국을 가곤 했다. 인터넷 중국여행동호회에 동행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더니 충주여상에 근무하시는 동업자 한분에게서 연락이 와서 같이 가기로 했다. 여행일정과 비자발급 항공권 구매도 전부 내가 맡아서 하기로하고 줄발 당일 아침에 강남 고속버스 터미날에서 만나 같이 출발하기로 하고 인천-서안 왕복 항공권과 서안-우루무치 편도항공권을 구입하였다. 일정은 서안에서 우루무치까지 항공편을 이용하여 이동한 다음 우루무치에서 투르판과 천산천지에 갔다가 서안까지 돈황 - 가욕관 -난주-샤허- 병령사석굴-천수의 복희묘와 맥적산 석굴을 들러 서안으로 와서 화산과 서안부근을 돌아보고 귀국하는 대략 18박 19일의 여정이었다. 그 당시는 고등학교에 근무했고 고등학교는 방학마다 보충수업을 실시하고 있어 20일 정도의 시간을 내는게 어려웠다. 다행히 연구부장과 동교과 선생님의 도움으로 내가 맡아야 할 보충수업 시수를 줄이고 한쪽으로 몰아서 시간을 낼수 있었다. 참으로 고마운 배려였다. 충주여상 선생님을 만나기로한 시간이 이른시간이어서 전날 서울에 와서 잠을 자야했다. 그래서 고속터미널 6층에 있는 캡슐형 숙소에 들어가 하루 밤을 자고 약속시간에 약속장소에서 충주여상 선생님을 만났다. 그런데 나는 나와 동년배거나 아니면 한두살 연하일거라고 기대를 했는데 막상 만나니 나보다 6살이나 연상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터미날과 인천 공항을 왕복하는 리무진 버스를 이용해 인천 공항에 도착하여 중국 서북항공 카운터에서 배낭을 붙이고 탑승을해서 서안 함양 공항에 도착하여공항과 서안 시내를 왕복하는 리무진 버스를 타고 서안 남문에 하차하여 풍화로 유스 호스텔을 찾아 도보로 이동하였다. 서안은 몇차례와봐서인지 내게는 아주 익숙한 도시였다.숙소에 들어와 짐을 풀고 식사때가 되어 주변에 있는 식당을 찾아 몇가지 음식과 고량주로 첫밤을 축하하고 무사한 여행을 기원하는 건배를 몇차례하고 얼큰한 기분에숙소로 돌아와 바로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아직 6시가 되기 전의 이른 시간이었다. 옆침대를 보니 벌써 일어나 산책을 나가셨는지 침대가 비어있다. 나중에 들으니 내가 깰까봐 아주 조심조심 나가셨다고 한다. 사실은 나도 여행시 특히 외국에 와서는 무척 일찍 일어나는데.....오늘은 대안탑과 섬서성 박물관에 갔다가 체크아웃을 하고
공항으로 가서 우루무치로 가야한다.그런데 숙소 주변에 마땅히 아침을 먹을만한 곳이 보이지 않아 아침을 건너 띠고 말았다. 우선시내 버스를 타고 중심가인 종루부근으로 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대안탑이 있는 안탑가에서 내려 걸어서대안탑을 찾아가는데 의외로 거리가 멀고 땡볕에 피할만한 그늘도 없어서 대안탑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지쳤다.
대안탑은 당나라 고종이 어머니를 위해 건립한 사찰인 대자은사 내에 있고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에 왕복하였고, 서유기의 원전이 되는 대당서역기를 저술한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의 모델이 되는 현장스님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번역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곳으로 지금은 매일 밤에 화려한 중국스러운대규모의분수쇼를 하는 곳이다. 땡볕속에 대안탑과 대자은사를 돌아보느라 지친 몸으로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숙소인 인민대하 공우로 돌아와 체크 아웃을하고 택시를 타고 민항 사무실 앞으로 가니 공항리무진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버스를 타고 함양공항으로 와서우루무치행 서북항공 민항기데스크에서 탑승 수속을하고 나니 시간이 좀 남았고 아침과 점심을먹지 않아 무척 배가 고팠기에 공항내에 있는식당에서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공항이라 그런지 음식 가격이 거의 시중의 곱절이었다.우루무치 공항에 도착하여 공항리무진을 타고 시내로 이동하는데 안내원 또는 가이드로 보이는 사람이 숙소를 소개하겠다며 어느 호텔로 가느냐고 묻기에 홍산반점에 간다니 지금은 홍산반점이 없다는 얘기를 하는것같았지만 무시하고인민공원 앞에 내려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홍산반점을 물으니지금은 철거되고 없다고 대답한다.조금난감해졌다. 홍ㅇ산반점이 비교적 저렴해서 그곳에 투숙할 작정이었는데 예산이 풍족하다면 선택의 폭이 넓겠지만 그렇지도 못하고 일행이 있으니 내 마음대로 정하기도 곤란한 상황이었다.博格多(보게다)빈관이 저렴하다고 들었는데 찾아가보니 도미토리는 지하에 있어 도저히 편하게 잠을 잘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호테을 찾아 시내를 배회하다 우루무치 역까지 오게 되었다.역이 좋은 점은 시내 대부분의 지역이 버스 한번에 갈수 있고 돈황으로 가는 기차도 우루무치 역에서 출발하니 짐을 들고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역부근을 둘러보니 역 바로 옆에 아구(아시아-유럽) 빈관이 있어 프론트에 가서 흥정을 하니 표준방(스텐다드 트윈)이 1박에 인민폐 110원(한화 2만원 내외)이였다. 2박을 예정하고 구내 여행사에 다음날 투루판 1일 투어를 신청하였다.투루판 왕복과 화염산, 포도구, 소공탑, 고창고성,카레즈의 입장료와 포도구 내에서 점심식사를 포함해서 1인당 150원(한화2만 8천원)이었다.출발은 내일 아침8시였다.숙소를 찾느라 피곤하기도 해서 호텔내 식당에서 맥주 1병씩과 저녁을 먹고 잠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아직 6시가 조금 않되었는데 아직 창밖이 캄캄하다. 생각해보니 이곳은중국에서도 시쪽이라서 해가 늦게 뜨고 늦게 지는 곳곳이라서 시간도 북경시와 신장시가 시용되는데 북경시로 6시이면 신장시로서는 새벽 4이니 사실 한밤중인 셈이다. 오늘 출발하기로 한 8시도 북경시라면 별문제가 없지만 만일 신장시라면 북경시로는 한낮인 10시에 출발하는 셈이다. 우루무치 여 광장에 나가보니 아예 이불을 가져와 펴고 자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역 광장에 있는 매점에서 소룡포를 한통 사서 아침을 해결했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모닝커피를 한잔 마시며 여유를 한껏 부리다가시간이 거의 되어 프론트에 내려가니 우리가 타고 갈 차가 현관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차를 타고보니 우리 두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관광객은 전부 중국인이었다. 우루무치를 출발하여 투루판으로 가는 길은약 150킬로정도의 거리로 전부 포장이 되어 있었고 바람이 엄청 강하게 불고 있었다. 이지여의 바람이 얼마나 센지 달리던 열차가 바람에 탈선되어 뒤집어진 일이 있었다는게 현지인의 설명이었다.그래서 그런지 중간에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엄청나게 많았다. 또 중간에 의외로 소금을 생산하는 공장이 몇개 눈에 띄였다.신장은 세계에서 바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내륙지방으로 유명한데 소금공장이라니 조금 아이러니 했지만 지각변동 이전에는 바다였기에 비록 내륙 담수호 이기는 하지만 다량의 염분을 함유하고 있어서 소금 생산이 가능하다는 말에 이해가 갔다.
투루판은 해발고도가 마이나스로 세계에서 가장 지대가 낮은 곳이며 여름철 기온이 40도 이상까지 올라가는 더운 지방이기도 하다. 하지만 습도가 낮아 그늘에만 들어가면 별로 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수건을 물에적셔 머리에 쓰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뽀송뽀송하게 말라버린다.그래서인지 목욕을 하지 않아도사람들이 버틸수 있는것 같다. 중국인들은 일생에 목욕을 세번만하면 된다는(태어나서 한번, 결혼 전날 한번, 죽어서 염습할 때 한번)우스개 이야기와 더불어 한국사람과 일본사람, 중국사람을 돼지우리에 넣었을때 뛰쳐 나오는 순서는?
1.성질 급한 한국 사람
2. 깔끔 떠는 일본 사람
3. 여기가 압권임 : 세번째는 돼지(더러운 중국인과 같이 있을 수 없어서)
4. 중국 사람은 돼지우리에 코를밖고 드르릉 드르릉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고 함
소공탑과 화엄산을 들러 포도구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양고기 볶음밥이었는데 정말 느끼함의 극치였다. 기억에 남는 곳은 카레즈로 천산에서 눈이 녹은물의 증발을 막기 위해천산에서부터 거의 100킬로 이상을 지하에 수로를 만들어 투루판이나돈황 등 오아시스까지 물을 공급했다고하니 자연의 장애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고 할수 있다. 광서성과 귀주성의 산지를 개간해서 만든 다락논과 더불어 참 의미가 있는 유적이라고 생각된다.오후 5시가 조금되지 않아 우루무치로 귀환해서 역에서 내려 이도교 야시장을 사전에 답사하러 나갔다가 한국 유학생을 만났다. 방학인데도 귀국하지 않고 실크로드를 여행중이라고 했다. 만난 김에 해결하지 못한 내일밤 돈황으로 가는 기차표를부탁해서 잉워침대표를 구할수 있어서 한시름을 놓았다.
고마운 유학생과 작별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잠시 기운을 차린 후 이도교 야시장으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시내의 이면도로 하나를 야간에는 차량통행을 막고 식탁과 간이 의자를 놓고 여러가지 간단한 음식을 파는 간이식당으로 운영되는데 약 300미터 이상의 도로가 전체가 식당으로 변하는 곳이었다.
한집에 자리잡고 훠꿔(샤부샤부)와 고량주를 시켜 거하게 저녁과 술을 마셨다. 버스가 떨어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와 낮은 벼게를 높이베고 잠이 들었다.다
다음날도 전날과 거의 비슷한 시간에 잠에서 깨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역광장 간이 식당에서 소룡포로 아침을 해결하자 할일이 없어 모닝커피를 마시고 천산천지로 가기 위해서 인민공원으로 갔다.인민 공원 앞 광장에는 천산 천지에 가는 관광객을 모객하는 관광버스가 거의 20여대가 모여있었다.천산천지까지 왕복 교톨편과 천산 천지 입장료를 포함해서120원으로 약2만3천원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버스가 먼저 가는지 도대체 알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빈자리가 없이 사람을 다 채워야 출발하기 때문에 정말 치열한 눈치 작전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많이 타서 빈자리가 거의 없는 버스가 유리하지만 여기도 꼼수가 숨어 있는 경우가 있다. 관광버스 측에서 일부러 사람들을 동원해서 자리를 채워 곧 출발할것 같이해서 승객을 태운 다음 사람들이 타는 숫자만큼 타고 있던 사람을 내리게 해서 승객을 유혹하기도 하고 지금 출발하는 듯 천천히 차를 움직여 사람들을 태운 후 인민공원 후문으로가서 다시 대기하며 사람들을 태우다가 다시 정문으로 와서 또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 대기하는 경우도 많아서 결국은 "복 불복" 게임이 되고 많다. 한참을 뺑뺑이 돌다가 겨우 출발을 했다. 천산천지 입구에는 유목민들의 이동식 숙소인 '게르'가 몇개 설치되어원하는 사람들에게 숙박비를 받고 투숙을 시키는것 같았다.'게르'는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에 몽고인들의 이동식숙소인'파오'라고설명되어있는것인데 '파오는 '布'의 중국식 발음으로'포'는 천막이라는 일반명사가 되기 때문에 '게르'가 정확한 명칭이다.
가이드의 인솔대로 강이식당에 들아갔는데 가격이 일반 시중의 곱절 이상이다. 독점이라는 측면과 가이드 또는 여행사에 지불하는 몫까지 포함된가격이기 때문일거라는고 짐작된다 하지만 배가 고프니 울며 겨자를 먹을 수 밖에동행한 선생님과 둘이서 "어향육사:생선향이 나는 돼지고기 채로 썰은 볶음"과"토두사:토두는 감자를 말하고사는 채로 썰은것을 의미해 토두사는 감자채볶음이다. 이 두가지 음식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거의 실패가 없는 요리이다 토두사에 볶은 고추장을 얹으면 우리 입맛에 꼭 맞는 매콤한 감자채 볶음이 된다.정말 아쉬운 점심을먹고 천지까지 걸어가니 유람선이 있어 타니 천지를 가로질러 도교 사원과 만년 설산인 보게다봉이 잘보이는 뷰포인트를 들러 약 30분 정도 돌아보는 코스였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잔잔한 호수에 투영되는 천산의 모습은 한마디로 환상적이었다.
오늘은 돈황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위해 오후 6시 이전에 역으로 나가야 하는데 돌아가는 버스가 제시간에 갈지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하는 수 없이 일찍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먼저 출발했는데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는법 제대로낚시에 걸렸다. 버스가 중간에 작은 도시의 터미널로 들어가 사람이 가득차기를 기다리는데 언제 출발할지가 부지하 세월 이었다. 기다리다 분통이 터지는데 같이 타고 있는 중국인들은 익숙한지 아니면 항의를 해도 소용이 없으니 체념을 했는지 대들거나 항의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 기차를 놓치면 일정이 꼬여서 큰 문제가 되기에 비상수단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차에서 내려 번허판을 사진찍고 수첩을 꺼내 차의 번호를 적는 시눙을하며 마치 경찰에 신고라도 할듯이 제스추어를 취하니 버스기사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듯하기에 기차표를 보여주며 빨리가자고 언성을 높이니 할수 없다는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출발을한다.우루무치 터미널에도착해서 바로 택시를 잡이타고 역으로 와서 호테 체크아웃을하고 역으로 와서 다행히 늦지 않게기차에 탈수 있었다.
중국여행의 어려운 점이자 재미이기도한 점이 이런 불확실성이 아니까한다. 후일담이지만 우리나라에 돌아와 고속버스나 시외버스를 탈때 규정된 시간에 1분의 오차도 없이 출발하는 걸 보고 무진장 행복해 했던 기억이 난다.
기차는"잉워:딱딱한 3층 침대로 우루무치에서 돈황이 있는유원 역까지는11시간 정도 걸린다.기차를 타고가는 중간에 차창밖으로 보이는타크라마칸 사막의 석양의 아름다움은 여행의 모든 어려움을 싱쇄하고도 남았다. 어떤 여체의 아름다움과도 비길만한 부드러운 곡선미를 자랑하는황금빛 모래 구릉을 한줄로 걷는 낙타를 탄 대상의 실루엣과 구름 한점 없이 맑은 코발트빛 하늘은 아라비안 나이트의 신비한 세계로 이끌어가는 듯한 환상에 빠지게한다. 침대에 누워 일정한 간격으로 느껴지는 진동을 헤아리다 잠에 빠졌다.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뜨니 열차 승무원이 침대 표찰과 기차표를 교환해주러 왔다. 중국 철도 여행시 침대 칸의 좋은 점이 내릴 역을 지나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보통 내리기 30부 전에 승무원이 침대표찰과 승차권을 교환해 주러 온다. 잠이 들었으면 깨우기 때문에 이때 일어나 간단하게 세면을하고 짐을 챙겨 내리면 된다.
유원역에 내린시간은 새벽 5시 정도였다.
중국의 넓은 땅이 실감이 나는 일 중 하나가 돈황에서 느낄수 있다.돈황역에서 돈황시내 까지가 50킬로 이상 떨어져 있어 시내까지도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한다. 역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택시를 150웡 부르는 걸 120운에 흥정해서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그런데 사막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일직선으로 뻣어있어 기사가 운전을할 때 핸들을 조작할 필요가 없었다. 혹시 할일이 없는 기사가 잠이 들지 않았다 가끔 살펴 봐야할 정도였다.
가는 도중 기사가 자꾸 말을 붙이는데 잘 들리지는 않지만 추측 컨대 호텔을 소개해주겠다는것 같았다. 호텔을 소개해주고 호텔쪽에서 소정의 소개비를 받겠다는 속셈인 것 같았다. 필요없다고 거절을 하자
그 다음으로는 택시를 이용한 이일 투어를 권했다. 그래서 오늘은 피곤해서 우선 하루는 잠을 자야겠다고 거절하자 무척 실망한것 같이 돈황에서 투숙한 숙소는 사주빈관(沙州賓館: 오아시스 호텔이다. 사실 돈황자체가 오아시스에서 형성된 도시이다. 호텔비는 1박에 130원 정도로 우리나라의 모텔급 호텔이다.일단 객실에 들어가 샤워를하고 눈을 붙혔다. 눈을 뜨니 벌써 오후에 접어들고 있었다. 우선 주변 정찰이 필요해 밖으로 나오니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눈을 부시게 한다. 돈황은 오아시스 도시이지만 의외로 그늘이될 만한 나무가 별로 없었다. 우선 비천빈관에 가서 마고굴 투어버스를 알아봤다.매일 오전 9시 전후해서 마고굴을 왕복하는 투어버스가 있어서 내일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멀지 않은곳에 장거리 버스 터미널이 있어서 가서 시간표를 보니오전 9시 정도에 가욕관으로 가는 직행버스가 있어서 가욕관으로 갈 때 장거리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다시 시내 중심지로로 걸어나와 돈황시장으로 갔다.시장의 규모는 컸지만 더위 때문인지 아직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막고굴의 대표적인 벽화인 비천상을 작은 조각품으로 제작한 기념품이 가장 많이 띠었고 푸른 옥으로 만든 술잔인 야광배가 그 다음으로 많이 있었다. 아직은 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중이라 돌아다니기를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와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한참이 지나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8시이다. 그런데 아짇 서쪽 하늘에는 해가 쨍쨍하다.서쪽지방이라서 잌지방은 9시나 되어야 해가지고 해가 진 다음에야 사람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는 것 같았다. 9시가 지나 호텔을나오니 그때서야 사람들이 시내 중심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돈황시장에는 야시장이 개설되어 있엇고 상인과 호객꾼 관광객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나무로 만든캐스터네츠를 연주하며 마치 랩을 하늠 듯한 사람이 사람들의 관심의 표적이 되고 있었다. 야시장 에서 저녁을 먹으며 고량주 한잔에 대충 얼큰해져숙소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아침식사 후 비천빈관으로 가서 막고굴행 관광버스를 왕복에 30원을 지불하고 막고굴로 갔다 이른 시간이지만 벌써 막고굴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막고굴은 자유 관람이 아니라 30명 정도의 인원을 한명의 안내인이 인솔하여 단체로 관람을하는데 보통 10개 정도의 석굴을 보여주는 방식이며 석굴도 문이 잠겨 있어 안내인이 문을 열고 들어가 설명을하고 나오면서 다시 문을 잠궈 개인적으로 관람은 불가능 했으며 실내에서 사진 촬영도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석굴내의 벽화도 산화가 되기도 했고 후대에 다시 덧칠한 것도 많이 보였다. 한시간정도의 막고굴 관람을 끝내고 주차장으로 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비천빈관에서 시내로 돌아오다가 명사산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명사산으로 갔다.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하여 입장을하자 낙타가 낙타 몰이꾼과 같이 기다리고 있엇다. 안내판에 1인40위안 2인 60위안이라고 적혀 있기에 기왕이면 조금 싼 것을 택해 2인 60원을 선택하니 낙타 몰이꾼이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짓는것 같았다. 알고보니 2인 60위안은 낙타 한마리에 두 사람이 같이 타는 것으로 아이를 동반한 경우나 남녀 연인들이 타는게 보통인데 성인 남자 둘이서 낙타 한마리를 탄다고하니 조금 이상하게 보인것 같았다. 그래서 그 이후로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인 한국어도 사용하지 않고 명사산과 월아천 투어를 했다.
약 2시간정도 걸리는 투어를 마치고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문제는 반바지에 반팔 차림으로 사막의 강렬한 햇빛에 두시간 정도를 보냈으니 몰골이 아주 튀긴 세우가 되었다. 햇빛에 노출된 부분은 아예 화상을입아 부어 오르기 까지 했다. 따가워서 누울수도 업드릴수도 없는 상태가 되였다. 하는수없이 화상 연고라도 사서 발라야 하는데 도대체 말이 통해야 약을 살수 있을것 아닌가. 화사입은 부위가 쓰리고 따가워 참을수가 없어서 일단 가까운 약국으로가서 약사에게 벌겋게 부어오른 피부를 ㅂ여주니 알아보고 화상연고를 주어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해서 열을 식힌후 화상연거를 바르니 그래도 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호텔앞 과일 노점상에서 멜론을 한통사고 마트에가서 간식거리와 포도주를 한병 사와 조촐하게 술자리를 갖고 쓰린 상처를 조심하며 잠들었다.
오늘은 서천불동과 돈황고성, 그리고 돈황시 밧물관을 가기로 하고 택시를 교섭하여 서천불동과 돈황고성 두곳을 왕복하는데 100원을 주기로하고 우선 서천불동으로 갔다 서천불동은 막고굴과는 달리 황량한 벌판에 거대한 웅덩이가 파여진곳에 있어 모르면 찾아가기 힘들어보였고 관리가 거의 않되 불상이나 벽화의 보존 상태가 엉망이었다.서천불동에서 다시 돈황고성으로 갔는데 중간에 중국군들이 군사 훈련을 하는 모습이보였다. 벌판에 숙영지를 만들고 갖가지 트력, 장갑차, 전차까지 동원한 대규모의 군사훈련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한국전쟁(중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 미국에 대항하여 북조선을 돕기위한 전쟁이라고 부른다.) 당시 벌떼처럼 밀려 오는 중국군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돈황고성은 드라마 촬영을 위해 조성한촬영지 였는데 귀국후 청해진을 개척한 장보고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해신 중에 돈황 고성의 모습이 자주 보이기도 했다.
돈황시내 중심가에서 택시에서 내려 동행은 숙소로 돌아가고 나는 돈황시 박물관으로 갔다. 시박물관으로는 작지 않은 규모로 실크로드와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다가 해가진 다음 야시장 길거리간이식당에서 저녁식사와 돈황의 마지막밤을 한잔의 고량주로달렌다음 낮에 보았던 발맛사지집을 찾아가 90분에50위안을 주고 쌓인 피로를 풀고 숙소로 돌아와 잠이들었다.
아침식사후 체크 아웃을하고 장거리 버스 터미날로 가서 기요관행 직행버스를 타고 4시간을 가서 가욕관으로 이동했다.
첫댓글 덕분에 재미있게 읽었네~!
무열친구는 중국 여행에 대한 기초 정보가 많아서 혼자서 여행해도 걱정이 없겠다.
참고로 여행 진행 지도와 날짜별로 정리해주면 이해가 쉽겠다.
(난 한 번도 가보지 않아서 지명이 머릿속에서 겉돌아서... ㅎㅎㅎ)
무열친구 이렇게 장편의 좋은글에 감사!!! 이 글을 쓰면서 힘들었을 친구의 모습을 그려본다.
대단하다!!! 이렇게 글을 올린지 하루만에 조회건수가 200을 넘고 있으니 카페 "신기록" 인듯~~~
수고 스럽지만 나와같이 친구의 글을 기다리는 친구들을 생각 해 가끔 좋은 글 올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