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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만 주교의 성모님 이야기
이번 호부터 독자들에게 올바른 성모신심을 심어주기 위해 조규만(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주교가 평화방송을 통해 강의하는 성모님 이야기를 정리, 게재한다. 조 주교는 저서 「마리아, 은총의 어머니」(가톨릭대학교출판부)를 바탕으로 마리아 교의와 공경의 역사를 풀어나간다. 평화방송 라디오(FM105.3MHz)는 25일 오후 6시부터, TV(SKY-413)는 5월 중순부터 '조규만 주교의 성모님 이야기'를 방송한다.
(1) 성모님 향한 남다른 사랑
가톨릭교회는 왜 성모님을 공경하고 있으며, 얼마나 성모님을 공경할까.
교회 전례력을 보면 성모님에 관한 성월이 많다. 5월은 성모 성월, 10월은 묵주기도 성월, 1년 중 두달이 성모님과 관련된 성월이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마리아 공경」이라는 권고에서 "그리스도 다음으로 가장 높고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시는 그 분의 위치를 분명하게 드러내야 하는 원칙을 따르고 있다"(28항)고 밝혔다.
성모님에 대한 교회의 공경은 사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2000년 역사라 해도 틀리지 않다. 복음서들이 초기교회 그리스도 공동체가 어떻게 성모님을 공경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9장을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아래 요한과 사랑하는 제자, 그의 어머니가 함께 있었다. (예수는) "이는 내 사랑하는 어머니이시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때부터 요한은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고 했다.
로마 카타콤바에 가면 2000년 전에 그려진 성모님 그림을 벽화로 볼 수 있다. 그 시대에도 성모님에 대한 공경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도 성모공경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순교자들은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굉장히 강했다. 묵주기도를 바치는 매괴회가 설립돼 있었고, 교우들이 자신을 성모님의 종으로 바치고 특별한 보호를 구하는 성의회도 초창기에 설립됐다.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회 수호성인으로 정해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했을 때,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41년 8월 22일 성 요셉과 함께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구의 수호성인으로 승인해 주셨다. 이전까지 수호성인은 요셉이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도 성모신심이 남달랐다. 신부님이 당신 스승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라파엘호를 타고 중국으로 가다 풍랑을 만났지만 성모님께 전구해 살아남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1846년 우리나라에는 성모성심회가 설립된다. 1898년 명동성당이 원죄 없이 잉태된 성모님을 수호자로 성모님께 봉헌된다. 1953년 3월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인 푸른 군대가 우리나라에 진출했고, 그해 5월 레지오 마리애가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1954년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선포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다시 성모님께 봉헌된다. [평화신문, 2010년 4월 25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이지혜 기자]
(2) 성모님 공경, 다 이유가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활동하는 남녀 수도회를 보면 성모님과 관련된 수도회가 많다. 마리스타 교육 수도회, 노틀담 수녀회, 로사리오 성모 도미니코 수도회, 마리아 수녀회, 마리아의 딸 수녀회, 메리놀 수녀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도회 명칭을 통해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님을 얼마만큼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톨릭교회가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이유가 뭘까. 교황 바오로 6세는 교황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말씀하신다.
"마리아 공경이 거룩한 예배에서 매우 숭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예배는 하느님 백성이 수행해야 할 첫째가는 과업입니다. 교회가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흠숭하고 하느님의 모친 복되신 마리아를 비범한 애정으로 공경하며 순교자 및 다른 성인들을 경건하게 기념하는 이 전례를 보다 합당하게 부흥시키기 위해 본인은 앞으로 열과 성을 다할 것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신심이 발전되기를 바라는 이유는 이 신심이 교회의 참된 신심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는 하느님 흠숭과 성인 공경을 구분한다. 하느님에게는 흠숭지례(欽崇之禮)를, 성모님에게는 상경지례(上敬之禮), 성인에게는 공경지례(恭敬之禮)로 구분한다. 흠숭과 상경, 공경을 어떻게 구분할까. 개신교 신자들이 볼 때 하느님을 흠숭하고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잘 구별되지 않아 천주교를 '마리아교'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교리서에서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과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이렇게 해주십시오"하고 청한다. 그러나 성모님과 성인에게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한다. 우리는 성모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성모님과 성인이 우리를 위해 기도를 전구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신자 중에 성모님 공경이 지나쳐 오히려 하느님보다 성모님을 더 신뢰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훌륭한 어른을 공경하는 일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상숭배처럼 성모님을 신성화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해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많은 신자들이 성모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는 신학적 용어로, 센수스 피델리움(Sensus fidelium)이라고 하는데, 신자들의 신앙감을 말한다. 신학적 근거로서 교회 전통과 이성적 논리가 있지만 신자들의 느낌도 신학적 근거가 된다. 모든 신자들이 느끼는 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은 당연하다.
셋째, 성지 중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성모님의 태중이야말로 예수님이 지나간 흔적이자, 성지이다.
넷째, 성모님은 모범적인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성모님만큼 당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은 없다.
마지막으로 성모님을 공경하는 일이 옳다는 것을 성경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0년 5월 2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이지혜 기자]
(3) 성모님께 맞는 공경 드려야
개신교는 왜 그토록 성모 마리아 공경을 반대하는지, 가톨릭과는 개신교는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개신교는 교파가 많다. 가톨릭을 보는 개신교의 시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가톨릭은 이단이며, 그리스도교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보수적 정통 개신교가 그렇다. 두 번째는 가톨릭이 개신교와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단으로 볼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세 번째는 가톨릭은 이단이 아닐 뿐 아니라 개신교와 형제지간이며, 큰집이나 마찬가지라고 보는 관점이다.
보수적 개신교단이 가톨릭을 이단시하는 것은 가톨릭이 개신교와 다른 신을 믿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신격화하고 숭배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없는 교리를 가톨릭이 임의로 만들었다는 비판이다. 개신교는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 천주의 모친성, 승천설, 원죄 없는 잉태 모두를 부정한다. 가톨릭이 성경과 성전(聖傳)을 인정하는 반면 개신교는 성경만을 인정하기에 이교리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따라서 개신교가 보기에 마리아 공경은 우상숭배일 뿐이다.
가톨릭교회가 마리아와 관련된 교리를 선포하는 데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431년 에페소공의회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선포했다. 마리아가 여신이어서가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하느님이기에 그리스도를 낳은 분은 당연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후 1500여 년이 지난 1854년 교회는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하심을, 1950년에는 성모 마리아께서 승천하셨음을 교리로 선포했다. 이처럼 마리아 관련 교리는 하루 아침에 확립된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논쟁을 거친 결과이다.
우리가 마리아를 공경한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리아의 옷자락으로 가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다. 성모 마리아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격화해서도 안 된다. 동방박사가 예물을 드린 분은 아기 예수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성모 마리아가 공경을 받는 것은 동정녀라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동정으로 치자면 수도자들 모두가 동정이다. 또 단순히 죄 없는 삶을 살고, 승천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고 반문하면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하고 말씀하셨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것은 예수를 낳은 것도 낳은 것이지만 하느님 말씀을 듣고 온전히 따르는 신앙의 모범을 보인 분이기 때문이다. 몸으로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어머니셨다.
마리아는 당신 자신만 순종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예수께서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자신도 순종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순종하도록 이끄는 입장에 선 것이다. 모세가 하느님 말씀을 듣고 따르면서 백성들에게 하느님께 복종하라고 가르친 것처럼 성모 마리아도 먼저 순종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순종할 것을 가르쳤다.
성모님은 돌에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하느님 말씀에 순종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한 후에는 제자들과 마음을 모아 기도에 힘썼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순간부터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그리고 돌아가신 후에도 하느님께 충실한 삶을 살았다. 성모님이야말로 일생에 단 한 번도 은총을 잃지 않았다. 마리아는 승천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미래를 보여줬다. [평화신문, 2010년 5월 16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남정률 기자]
(4) 옳지 않은 사적 계시에 현혹되면 안돼
잘못된 성모신심과 올바른 성모공경에 대해 얘기하겠다. 우선 사적 계시를 중심으로 빗나간 성모신심 사례가 있다. 주로 탈혼 상태에서 하느님을 봤다든가, 성모를 만났다든가, 천당에 갔다왔다는 얘기 등이다.
그런 환시가 1950년대에 상주에서 일어난 적이 있다. 당시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는 조사를 한 뒤 "상주 황 데레사의 사적계시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고 공식 선언을 했다. 그게 1957년 1월 15일에서 21일 사이에 조사를 해서 발표한 건데, 그 이전인 1954년, 1955년에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 서정길 대주교께서 금지한 사항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었다. 1997년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에서 펴낸 「건전한 신앙생활을 해치는 운동과 흐름들」이라는 책자에서도 상주 황 데레사가 잘못된 사적 계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지적을 한 적이 있다.
신비 체험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하지만 하느님과 만남을 통해 얻게 된 메시지를 어떻게 전해주느냐는 별개 문제다. 가령 토마스 데 아퀴노 같은 대학자 성인께서도 「신학대전」을 집필하던 중에 하느님을 체험했는데 그 이후엔 집필을 포기했다. 그래서 「신학대전」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 이유는 토마스 데 아퀴노같은 대석학도 하느님을 만난 뒤에 그 체험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계시와 진리, 신비에 대해서 인간 이성으로 남김 없이 다 알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는 계시를 통해 알려주신다고 가르친다. 그 계시에는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가 있다. 공적 계시는 교회가 모두 승인할 수 있는 성경과 예언자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사적 계시는 한정된 지역에서 특별한 상황에 새롭게 무엇인가를 강조하기 위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사적 계시는 항상 공적 계시의 내용에 부합할 때만 정당하다. 공적 계시를 사적 계시가 보충해야 한다거나, 공적 계시를 수정하기 위해 사적 계시가 있어야 된다는 주장을 교회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사적 계시가 올바른지 판별해야 한다.
또 기적이나 사적계시를 성역화시키는 성모신심으로 나주 윤 율리아 사례가 있다. 나주 윤 율리아가 모시는 성모상이 1985년 6월 30일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1991년 5월 16일부터 2002년까지 21차례에 걸쳐 이 사적 계시의 절정을 이루는 성체 기적 현상이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에 당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 1998년 1월 공지문을 통해, 또 2001년 5월 당시 광주대교구장 최창무 대주교도 '나주 윤율리아와 그 관련된 상황들에 대한 교구의 입장' 발표를 통해 자칭 '성모동산'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행해지는 모든 집회와 의식은 가톨릭 신앙행위와는 무관한 것임을 재확인했다.
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베이사이드 성모 발현, 일명 미카엘회라는 운동도 있는데 이 또한 그 신빙성이 희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최근 우리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 중에 '가계치유를 위한 기도모임'이 있는데, 이 가계치유에도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사적 계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왜 성모 마리아께서 발현하셨는지를 묻는 일이다. 발현에서, 사적 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지의 내용이다. 메시지가 계시나 진리, 교회 교리에 위배되면 그것은 올바른 발현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성모 마리아의 메시지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0년 5월 23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오세택 기자]
(5) 구약에 드러나는 성모 마리아 신비
오늘은 구약성경과 성모 마리아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성모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마리아를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알아야 한다. 신약에도 마리아와 관계된 이야기가 많지 않지만 구약에는 마리아가 하느님 구원 계획 안에 깊이 감춰져 있어 마리아라는 이름을 직접 거론하는 구절은 없다.
하지만 구약에서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나오고 그 메시아를 낳은 어머니에 관한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구약에서 성모님과 관련된 내용은 창세기 3장 15절에 잘 나와 있는데, 이를 원복음, 최초의 기쁜소식이라 한다.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추방되지만 그들을 타락시킨 뱀은 여인의 후손에게 머리를 짓밟힐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인은 즉 하와, 마리아를 암시하며,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후에 교부들은 아담과 하와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진 관계를 순명의 모습을 보이신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되돌리는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을 때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같은 말을 했다. 하느님에 대한 두 분의 순명이 아담과 하와가 틀어놓은 역사를 되돌린 것이다.
이사야서 7장 14절도 한 처녀가 아이를 잉태하고 그 탄생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예고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를 성모와 메시아 탄생 예언으로 본다. 예언은 말한 이가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 예수님을 체포한 가야파는 "민족을 위해 한 사람이 희생되는 게 잘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사가는 이를 예수님 한 분으로 온 세상이 구원된다는 예언으로 해석하지만 가야파는 뜻을 모르고 예언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려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고 십자가에 쓴 글도 그대로 이뤄졌다.
미카서 5장 1절에는 메시아 탄생이 더욱 구체적으로 나온다. 베들레헴 한 여인으로부터 메시아가 태어난다고 하는 예언은 앞의 이사야 예언에 대한 응답이다. 또 베들레헴의 옛 지명인 시온은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며 이들은 오랜 바빌론에서의 노예생활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데 이바지한 이들이다.
이들은 타국에서의 고된 생활에도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지키며 우리나라 선비처럼 청빈하게 산 사람이다. 현지 문화에 타협하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난한 삶을 택했다.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라는 마태오복음 말씀은 바로 시온 사람을 지칭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참 뜻은 돈과 명예보다 하느님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메시아를 잉태하고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마리아는 시온의 딸의 전형이며 또 다른 모습으로는 교회가 세상을 다시 재건하게 될 모델이 될 수 있다.
구약에는 이 밖에도 마리아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구절이 많다. 마리아의 동정성을 나타내는 '불타는 가시덤불'이나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계약의 궤' 역시 그 중 하나다. 마리아야말로 하느님의 아들을 모셨던 썩지 않은 계약의 궤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구약에는 마리아의 이름이 분명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메시아 탄생과 그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언급하는 구절들을 볼 수 있다. 감춰져 있던 성모 마리아의 신비가 점차 드러나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0년 5월 30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백영민 기자]
(6) 신약성경에서 드러나는 성모님의 역할
바오로 사도가 바오로 서간에서 성모님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찾기 쉽지 않다.
"그러나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4-5).
바오로 사도가 성모님에 대해 암시적으로 표현한 부분이다. 마리아라는 이름도 없고,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는 이 한마디 말뿐이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심을, 여인으로부터 태어나셨다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인에게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한 인간의 어떤 나약성을 지닌 인성을 말한다. 하느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인에게서 태어나 우리와 똑같은 나약함을 지닌 존재가 되셨다는 점이다. 참된 인성을 지니게 됐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여인으로부터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많은 신학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성모님에 관한 모든 신학적 진술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고 언급한다. 교부 바실리오는 하느님의 아들이 성모님을 통해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 성모님으로부터 인성을 얻게 됐다는 '~를 통하여'(from)라는 전치사가 중요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 탄생과 관련해 필리피서 2장 6-11절을 들 수 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중략)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에서 '종의 모습'이라는 표현을 통해 마니피캇(성모님의 노래)에선 여종으로 표현한다.
바오로 사도는 글에서 성모님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에게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은 예수가 인간이 되는데 성모님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바오로 사도에게 마리아의 동정이나 교회가 발전시킨 마리아에 관한 언급은 찾아 볼 수 없지만, 적어도 예수님 강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성모 마리아에 관한 신비가 출발점으로 제시되고 있다.
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인 마르코 복음 안에도 성모님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먼저, 성모님과 친척들이 군중과 이야기하는 예수님을 붙잡으러 가는 이야기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0-21).
여기는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없지만 예수님의 친척이 언급된다.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중략)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셨다. (중략) '이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1-35).
이 대목에서 개신교 신학자들은 예수님도 당신 어머니와 형제들을 배척했는데 가톨릭에서는 왜 성모님을 공경하냐는 입장을 보인다. 그러나 이 대목이야말로 예수님이 당신 어머니가 자신을 낳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어머니야말로 하느님 뜻을 행한 분으로서 "내 어머니다"고 하는 것을 반어법으로 말한다.
이 세상 어떤 여성도 하느님 말씀 듣고 따라도 예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인 마리아 외에는 없다. 예수님의 "누가 내 어머니이냐?"는 말은 당신 어머니를 겨냥해 드러내는 말씀이다. 철저히 성모 마리아를 위해서 사용된 언어다. [평화신문, 2010년 6월 6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이지혜 기자]
(7) 예수님 뒤에는 항상 성모 마리아가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마르 6,1-6).
이처럼 예수님은 고향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다른 말씀과 비교해보면 마태오복음 13장에는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표현이 있다. 루카복음에는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마르코복음은 왜 '그 목수가 아닌가?'라고 했을까? 마르코복음에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없다. 요셉의 아들 혹은 목수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려면 그 앞에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설명하는 대목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 어린 시절 언급이 없기 때문에 바로 목수로 불린 것이다.
예수님의 형제들로 표기된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마리아의 자녀들인지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학자들 간에도 여러가지 설명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명단이 마리아의 자녀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요셉의 전처 소생들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형제들이라는 단어가 굳이 친형제만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배다른 형제거나 사촌지간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형제들이 마리아의 자녀라고 불리워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예수님 유년기에 형제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도 이상하다. 또 이 4명 형제들 가운데 야고보와 요셉은 다른 마리아의 아들로 나타나고 있다. 가령 마르코복음 15장에는 "그들 가운데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라고 적혀 있다.
마태오복음은 마르코복음보다 마리아에 대해 더 많이 다루고 있다. 특히 예수님 유년기를 이야기하면서 그와 관련된 마리아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증언자로 마리아를 내세운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마리아, 예수님의 공생활과 관련된 마리아로 나타난다.
제일 먼저 마태오복음 1장 1-18절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온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을 낳고…(중략)". 이 족보를 가만히 보면 아주 재미있는 점이 발견된다. 여성의 이름이 거론된다는 것이다. 당시가 남성 중심 사회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여자들이 거론된 것은 매우 주목할만하다.
이 족보에는 타말, 라합, 룻, 바세바 등 여성 4명이 나타난다. 학자들 간에 왜 이런 여인들 이름이 나오는지 논란이 있었다. 이들 여성의 공통점을 죄녀라고 꼽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마리아와 무슨 관계인가? 이들은 모두 비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영위했다. 많은 학자들은 정상적인 이스라엘 여성들(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이사악의 아내 리브라 등)도 많은데, 왜 이방인이 포함된 이런 이들의 이름이 족보에 올라왔는지 의아해한다.
이는 하느님이 어떤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느님 뜻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의 경우 선택권이 상대 조건에 따라 바뀐다. 상대가 멋있는지, 예쁜지 등 조건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지만 하느님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사랑하신다. 실제로 예수님이 제자를 선발한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마태오복음 1장 18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라며 예수님 탄생을 다루고 있다. 성모님의 잉태는 성령에 의한 것이다.
마태오복음 1장 1-12절을 보면 동방박사의 방문이 나와 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라고 표현돼 있다. 또 마태오복음 2장 13-23절에는 "아기와 아기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줄 때까지 거기 있어라"고 나와 있다. 요셉의 아들이라는 표현 대신 아기와 아기의 어머니로 표현된다.
또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 항상 뒤에 머물던 마리아를 보여준다.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을 앞에 두고 뒤에 머물러 계신다. 마태오복음은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평화신문, 2010년 6월 13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이서연 기자]
(8) 루카 복음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알려주는 복음서는 루카와 마태오복음이다. 두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공통된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마태오복음은 복음서를 쓴 마태오가 가부장적 전통이 강한 유다인이었던 까닭에 다분히 남성 중심이다. 따라서 마리아보다는 요셉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의사였던 루카가 쓴 루카복음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의 증언자로 드러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느님 아들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이들은 사도들이다. 그들은 부활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하느님 아들임을 결정적으로 깨달았다. 이는 예수님 공생활 이후 이야기다. 아기 예수가 하느님 아들임을 증언하는 이는 다름 아닌 마리아다.
예수님 탄생과 관련해 루카복음과 마태오복음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마리아와 요셉은 둘 다 나자렛 출신으로 약혼한 사이며, 요셉은 다윗 가문의 후손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했으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했다는 사실 등이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 잉태를 알려주는 루카복음 1장 26-38절은 마리아가 어떤 분인지를 잘 알려주는 굉장히 중요한 자료다. 특히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는 인류 역사를 바꾼 장면이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 아버지 하느님께 바쳤던 기도, 즉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와 꼭 닮았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하라는 것이다. 마리아와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해 바뀐 역사를 다시 되돌려 놓았다.
루카는 복음서에서 요한 세례자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을 은근히 비교한다. 물론 둘 다 기적적 탄생이다. 다만 요한 세례자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늙은 엘리사벳이 잉태한 반면 예수님은 동정인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 어느 것이 더 기적적일까. 또 요한 세례자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하느님이 보낸 천사의 말을 의심하고 벙어리가 됐지만 마리아는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 마리아의 믿음이 즈카르야보다 훨씬 더 깊다는 것을 암암리에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마리아의 순종은 목숨을 걸고 받아들인 신앙이다. 마리아 당시 처녀가 애를 갖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일이었다. 지금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를 받아들였다.
동정 잉태라는 기적이 말하는 핵심은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잉태할 수 있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또 아무리 하느님이라고 해도 죽어서 흙먼지로 돌아간 이들을 어떻게 부활시킬 수 있냐고 묻는다. 동정 잉태나 부활 모두 신화라는 주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인들은 하느님은 할 수 없어도 생명공학은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남성의 정자 없이 잉태시키는 처녀생식 기술이 그런 예에 속한다. 하느님이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한꺼번에 다 들을 수 있겠냐고 반문한다. 첨단기술인 네비게이션 시스템은 인공위성을 통해 모든 차량에게 갈 길을 동시에 알려준다. 첨단과학은 할 수 있어도 하느님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첨단과학을 뛰어넘는 분이다. 결론적으로 동정 잉태가 말하고자 하는 초점은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도 하느님께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루카복음 1장 39-45절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장면이다. 루카는 여기서 우리가 마리아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다고 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뤄지리라고 믿은 분이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1,28)라고 했다. 가브리엘 천사와 엘리사벳이 한 말에 나타난 의미만으로도 마리아는 공경을 받는 데 부족함이 없다.
우리는 어려움이 닥치면 기도를 한다. 내 뜻을 이루고자 하는 기도가 많다. 그러나 기도는 내 뜻이 아닌 하느님 뜻대로 해달라는 것이어야 한다. 하느님 뜻이 더 나은 해답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하느님께서 내 뜻을 이루도록 도와달라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대로 해달라는 것이어야 한다. 마리아가 그랬다. 돌에 맞아 죽어도 상관 없으니 하느님 뜻대로 하라고 했다. 그것이 신앙이다.
루카복음에 나타난 마리아는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오도록 하는 데 필요한 신앙의 자세를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루카복음 1장은 마리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자료이자 마리아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성서적 근거다. [평화신문, 2010년 6월 20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남정률 기자]
(9) 루카 복음에서의 성모님: 마리아의 노래와 예수님 탄생
우리는 루카복음에서 마니피캇(Magnificat), 곧 마리아의 노래(루카 1,46~55)를 들을 수 있다. 마리아 노래가 과연 성모님이 지은 것인지 여부는 학자들마다 논란이 분분하지만, 마리아 노래는 구약의 사무엘 상권에 나타나는 사무엘 어머니 한나가 부르는 '한나의 노래'(1사무 2,1-10)와 닮아 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와도 비교해 볼 수 있다.
이 노래에서 우리는 성모님의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정말 하느님 때문에 떨리고 설렌 적이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을 간절히 원하고 찬미하고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나 싶다. 그렇지만 성모님은 하느님 때문에 마음속에 늘 설렘을 갖고 살았다.
구원은 불행한 상황에서 역전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마리아 노래는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노래'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여기에 '보잘것없는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곧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 아나빔(anavim)을 뜻한다.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서 저자는 산상설교를 통해 각각 '마음이 가난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라는 단어를 썼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나빔'이라는 표현을 썼다. 아나빔은 게을러서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통을 지키고자 다른 나라 문화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실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재물에 대해 초연할 수 있었던 마음이나 자세에 있다. 재물도, 권력도, 재주도 없고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라고는 오로지 하느님밖에 없다는 믿음의 사람, 맘몬 곧 재물보다는 하느님을 선택하는 사람이 바로 아나빔이다. 어쨌든 마리아의 노래는 불행한 처지에서 역전되는 구원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또 베들레헴에서 예수님 탄생(루카 2,1-7)을 보게 된다. 베들레헴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열두 부족에게 땅을 분배할 때 유다 부족이 갖게 된 땅이어서, 유다 출신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 등록을 해야 했다. 루카복음 사가는 특이하게 등록 당시 아우구스투스 황제나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15년라는 표현을 등장시켜 세계사적 연대기 안에서 하느님 구원 계획과 구원사를 바라보려고 한다.
이어 천사가 목동들에게 예수님 탄생을 알리고 뵙는 목동들의 경배(루카 2,8-20)가 나온다. 목동들 경배에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는 천사들의 찬미가 나온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방법은 뭘까.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을 반듯하게 살 때 우리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
또 예수님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셨다. 평화는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할아버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 풍랑 이는 바다에 뜬 배 안에서 주무시는 예수님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모습을 본받을 수 있었으면 한다. 폭풍이 이는 바다에 떠 흔들리는 배 안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는 이유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우리를 평화롭게 해준다.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내어맡기는 믿음 안에서만 이를 수 있는 평화다.
루카복음 2장 21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할례와 작명을 보게 된다. 신약에 등장하는 요한 세례자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또한 이름이 지어져 있었다.
이어 성모님은 요셉과 함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한다(루카 2,22-24). 성모님은 모세나 주님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다. 성모님은 정결례나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제물로 바치라는 주님의 율법에 그대로 따랐다.
시메온의 예언(루카 2,25-35)은 예수님이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 곧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성모님이 칼에 찔리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대목이다. 이는 성모님 역시 신앙의 어두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예언하는 것이기도 하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예언이기도 하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함께 고통과 고난의 길을 겪었다. 성모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누구보다 그리스도를 따른 분이었다. 또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낸 한나도 예언을 통해 아기 예수에 대해 이야기한다. [평화신문, 2010년 6월 27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오세택 기자]
(10) 루카 복음에서의 성모님 : 하느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어머니
우리는 루카복음에서 하느님 말씀에 마음 설레하며 온 힘을 다해 순명하는 성모님을 살펴봤다. 겸손한 자세로 어려운 이들을 배려하며, 모든 일에 지혜롭게 대처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런 인격적 모습과 달리 성모님에 대해 허황된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학자나 외경은 원죄의 결과가 출산의 고통인데, 원죄 없으신 성모님은 그 고통을 겪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수님 탄생을 전하는 부분에 직접 언급은 없지만 성모님 역시 모든 어머니가 겪는 출산의 고통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출산의 고통과 노동은 결코 원죄의 결과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는 인간과 모든 동물이 번성하라는 하느님 축복으로 나타난다.
출산한 성모님이 나자렛으로 귀향하는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기 예수는 하느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성장 과정을 거친다. 모든 아이가 엄마에게 많은 것을 배워가듯 아기 예수도 배움이 필요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인간적 성장 과정 없이 쑥쑥 자라는 것과 달리 예수님의 성장 과정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소년 시절(루카 2,41-54)을 보면 예수님이 부모를 따라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가는 모습이 나온다. 파스카는 '건너 뛰다'라는 히브리어에서 유래됐다. 원래 유목민의 축제인 파스카는 질병이 자신들이 키우는 가축을 건너 뛰게 함으로써 재산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된 의식이었다. 나중에 모세는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파스카 예식을 이용한다. 이는 노예의 삶에서 자유인의 삶으로 건너 뛰려는 더 발전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훗날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통해 거행하는 파스카 예식은 한층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재산을 지키거나,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현재의 문제가 아닌 유한의 삶에서 무한의 삶으로 건너 뛰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 파스카 축제에서 헤어진 아들을 애타게 찾던 부모에게 소년 예수가 한 말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성모님의 입장은 어땠을까? 여느 부모 같으면 화를 냈을 텐데, 성모님은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했다. 정말 화가 나도 곰곰이 되새기는 성모님. 소년 예수를 대하는 성모님의 인격적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라는 성경구절을 보면 예수님이 결코 겉만 인간의 모습을 한 하느님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루카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공생활에서의 모습은 마태오ㆍ마르코복음에 겹쳐 나오기도 한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러 왔다는 제자들 말에 각 복음은 어법의 차이를 보인다. 루카복음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기록했고, 마태오ㆍ마르코복음에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는 표현이 더 나와 있다.
그리스 사람인 루카 성인은 철저한 남성 중심, 제자 중심에서 벗어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직접적 표현을 쓰지 않았다. 반면 마태오ㆍ마르코복음은 '누가 내 어머니냐'라는 반문을 뒤에 씀으로써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상에 어떤 남성과 여성이 아무리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따라도 예수님의 어머니, 아버지가 될 수는 없다. 예수님의 어머니, 아버지는 오직 성모님과 요셉 성인 뿐이다. '내 어머니'라는 말마디는 예수님께서 항상 자신의 어머니인 성모님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다른 복음에는 나타나지 않고 루카복음(11,27-28)에만 나오는 기록을 살펴보자. 군중에게 연설하시는 예수님께 한 여인이 '선생님의 어머니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답하신다. 개신교는 여기 나오는 '오히려'를 예수님에게 젖을 먹인 여인은 행복하지 않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여인으로서 성모님이 갖는 이중적 행복의 의미라 볼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누가 내 어머니고 형제냐?'라는 표현이 어머니 성모님을 무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성모님은 예수님에게 육체적 어머니인 동시에 하느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어머니라는 뜻이다. [평화신문, 2010년 7월 4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백영민 기자]
(11) 사도행전,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성모님 :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성모님
사도행전에서 성모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를 살펴보겠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던 예수님의 어린시절 이야기는 마태오ㆍ루카 복음 등 세월이 갈수록 더욱 자세히 드러난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바로 성모님의 증언이다.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성모님 모습(사도 1,12-14)을 보면, 성모님은 예수님이 승천한 다음에도 그 제자들과 함께 지냈고, 제자들이 자신의 집에 성모님을 모셨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교회가 이미 사도시대부터 성모님을 공경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초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사도들의 임무는 무엇일까?
당시 사도들은 신자들이 봉헌한 모든 재산을 공동 관리하며 생활했다. 오늘날의 수도생활과 비슷하다. 하지만 사도들을 따르는 제자들이 늘어나면서 공동 재산을 분배하며 살아가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는 사도들 본연의 임무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천명했다. 재산관리, 경영 등은 부수적인 일이라고 정의하고, 이런 일을 담당할 보조자 7명을 선발했다.
사도들이 중시한 '기도'의 정의에 대해 알아보자.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이자 만남이다. 어떤 성인은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기도를 하느님과 만남이자 대화라고 할 때,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한 가지 목적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목적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서로 친해지기 위한 친교의 목적이다. 문제 해결을 위한 '청원 기도'보다 하느님과의 친교를 나누기 위한 기도가 더욱 중요하다.
이를 가장 잘 실천하신 분은 바로 성모님이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끝까지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다.
이제는 요한복음에서 성모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를 살펴보겠다.
요한복음 1장을 보자.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13-14절).
이처럼 요한복음 사가는 예수님이 성모님 동정을 통해 탄생하심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출생과 달리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것임을 알려준다.
본격적으로 살펴 볼 부분은 카나의 혼인잔치(요한 2,1-12)다.
"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하였다.(중략)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은 누구의 믿음에 의한 것인가? 바로 성모님의 믿음이다. 성모님은 끈질기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줄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지십시오'하며 따르는 모범을 보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함께 간 제자들은 그 모습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됐다. 이 믿음은 철저하게 잔칫집에 술이 떨어졌을 때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는 성모님 배려에서 얻게 된 것이다.
탈출기에서 모세가 하느님 말씀대로 모든 명령을 행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도 하느님이 시키시는 대로 해라'고 했던 것도 성모님 모습과 닮아 있다.
이처럼 성모님이야말로 우리를 위해 기도를 가장 잘 중재해주시는 분이다. 모든 신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기도가 성모송이다. 성모님이야말로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잘 보여주시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10년 7월 11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이서연 기자]
(12) 요한복음에서의 성모님 : 사랑받는 제자의 어머니 되심
요한복음에 성모님에 대해 나오는 대목은 카나의 혼인잔치(2,1-12)와 사랑받는 제자와 함께 계신 성모님(19,25-27)이다.
19장 25-27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고 나온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성모님을 모신 건 제자들이었다. 공관복음인 마르코, 루카, 마태오복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성모님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르코복음 15장 40-41절을 보면,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고 돼 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있을 때 그분을 따르며 시중을 들던 여자들이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활동할 때도 남성뿐 아니라 여성 제자도 함께 뒤를 따랐던 모양이다. 마태오복음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십자가를 지켜본다. 루카복음에는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따라온 여자들이 멀찍이 서서 모든 일을 지켜봤다.
성모님이 제자들과 함께 살게 된 것은 사도행전에서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이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겼기 때문에 제자들이 성모님을 함께 모셨다는 것과 일치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의 역할은 단순히 어머니로 그치지 않는다. 구약에서 인간의 최초 어머니였던 하와가 뱀의 유혹으로 죄에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뱀의 머리를 짓밟는 여인, 메시아를 낳을 여인의 역할까지도 담당하고 있다. 나중에 이 부분은 묵시록 12장에 용과 싸우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사랑받는 제자와 성모님 사이에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신학ㆍ영성적 의미의 어머니와 자녀 관계는 2차적이다. 1차적 뜻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때문에 내가 어머니를 잘 모실 수 없으니까 이제부터 나 대신 우리 어머니를 잘 보살펴 달라는 이야기다.
예수님은 부모에 대한 효도에 결코 무심하지 않았다. 일부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와 관련해 예수님이 성모님을 무시했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결코 그런 적이 없다. 그가 가장 걱정한 것은 죽은 다음 어머니를 보살펴 줄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이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그러면 너에게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겠다"고 하니, 여인은 "두레박도 없으면서 어떻게 물을 주겠냐"고 했다. 예수님은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고 했다. 이는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만 알았을 뿐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7장 5절을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고 나온다. 제자들과 합류해 함께 기도하지만 예수님 생전에는 예수를 믿지 않았던 부류들이다. 형제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부류로 나오지만 마리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부류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평화신문, 2010년 7월 18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이지혜 기자]
(13) 요한묵시록에서의 성모님 : 교회 모범이시며 하느님이 어머니
요한 묵시록 12장을 보면 '여인과 용'이라는 제목으로 성모님과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도 성모님을 상징하는 여인이 뱀과 싸운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성경 첫 권과 마지막 권에 성모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우연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묵시록 12장은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때 독서로 읽혀지는 구절이다.
묵시록 12장에 나오는 여인과 용의 대결은 교회가 악과 맞서 싸우는 것의 묵시문학적 표현이다. 여인은 교회이자 하느님 백성이다. 용과 싸우는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에 함께하는, 교회의 모델이 되는 성모 마리아다.
지금까지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를 살펴봤다. 결론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성모 마리아는 다음과 같은 분이다.
성모님은 먼저 혈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인 동시에 인간인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믿음으로도 예수님의 어머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낳은 것은 물론 하느님을 철저하게 믿고 따랐다.
성모님이 복된 이유는 엘리사벳 성녀 말씀처럼 성모님께서 하느님 말씀이 이뤄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이니 당신 뜻대로 이뤄주소서'라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 신앙이 성모님을 공경하는 첫 번째 이유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바로 이 믿음이다.
성모님이 예수님을 동정으로 잉태했다는 사실은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계시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에겐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하느님의 전능성을 드러내는 가장 큰 표징이다.
성경이 묘사하는 성모님 모습은 다양하다. 후대에 쓰인 성경일수록 성모님에 대한 언급이 많다. 초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데 예수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예수님의 어린 시절 증언자로서 성모님 비중이 커진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데 무관한 분이 아니셨다. 또 예수님 공생활에 방해가 되기를 원치 않으셨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하시는 동안 항상 뒤에서 예수님을 지켜보셨다.
성경에 나타난 성모님은 교회의 모범이 되는 모델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인류의 빛」(교회헌장)은 8장에서 성모 마리아를 다루며, 교회는 성모님이 걸어 가셨던 길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청이 세계 주교들에게 공의회에서 무엇을 다루면 좋은지 물었을 때 절반 이상이 성모님을 다루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성모님을 예수님과 교회와 분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 헌장에서 다룬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공의회 문헌으로 '마리아 헌장'이 나올 수도 있었다.
성경은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 그리스도의 어머니 등 어머니로 표현했다. 문제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이다. 초창기 교회 때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논란이 생겼고, 교회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페소공의회(431년)를 열었다.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하면 성모님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낳은 여신(女神)이 되기 때문이다. 에페소공의회는 예수님이 하느님인지 아닌지를 논의했고,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라고 결론지었다. 성모님은 여신이 아니고 하느님인 예수님을 낳은 분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불러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성모님은 은총이 가득하신 분, 하느님 사랑을 충만하게 받은 분이다.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 승천 등은 성모님이 은총을 가득 받은 분이기에 선포될 수 있는 교리다. 성모송은 가브리엘 천사와 엘리사벳 성녀가 성모님께 한 말을 합한 것이다. 성경에 분명하게 나오는 내용이다. 따라서 성모송에는 개신교가 이의를 제기할 대목이 없다.
성모님에 대한 교회 가르침은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가톨릭이 성경과 상관없이 별도로 만든 게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진술들은 성모님께서 초기 교회 공동체부터 공경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성모님 공경은 이처럼 성경에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톨릭은 개신교와 논쟁에서 떳떳하게 대응할 수 있다.
조규만 주교의 성모님 이야기
(14) 교부들의 가르침에 나타난 성모님 : 마리아의 동정 출산은 하느님 기적
가르침과 성덕에 있어서 모범이 되고 교회 교리를 정립한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을 교회는 '교부' 혹은 '교회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교부학에서 교부는 8세기까지 교회에 가르침을 준 주교와 사제들을 주로 지칭한다. 그래서 토마스 데 아퀴노는 13세기 신학자이기에 교부라고 부르지 않는다. 또 교회 가르침을 올바르게 전해줬다는 정통성을 확보해야 하고, 교회에서 인준을 받아야 하며, 성덕이 출중하고 거룩해야 한다.
이 교부들을 교회는 지역적으로, 시대적으로 구분한다. 지역적으로는 로마를 중심으로 문헌을 라틴어권에서 남긴 이들을 라틴 교부라고 부르고, 그리스권역에서 활동한 교부들을 그리스 교부 혹은 동방 교부, 시리아어권 교부들은 시리아 교부라고 부른다. 시대적으로는 서기 100년께에서 300년 사이를 초창기, 300년에서 450년까지를 중기 혹은 전성시대 교부들, 450년에서 700년까지를 말기 혹은 쇠퇴기 교부라고 부른다.
당시 교부들 이름을 보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들이 많다. 유스티노, 이레네오, 이냐시오, 안아티오키아의 이냐시오, 클레멘스, 치프리아노, 요한 크리소스토모, 다마소, 레오 등이다. 또한 성인은 아니지만 오리게네스, 테르툴리아누스처럼 유명한 교부들도 있다.
저자는 모르지만 책으로만 교부들 가르침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디다케(Didache)」라는 책은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이라는 말이 있지만, 저자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바르나바의 편지(Letter of Barnabas)」라는 초기 그리스도교 그리스어 저술도 있고, 「솔로몬의 송가(Odae Salomonis)」 같은 찬미가도 있지만 이 역시 지은이를 알 수 없다.
당시 교부들은 초대 교회공동체에 문제가 생기거나 이단이 등장하면 답을 찾다가 신학을 발전시켰다. 교부들은 325년 니체아공의회에서 성부와 성자와 관계에 대해, 381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성령과 삼위일체에 대해, 431년 에페소공의회에서 '하느님의 모친' 성모 마리아에 대해, 451년 칼체돈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결합돼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놓고 논박하고 답변을 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교부는 「에페소교회에 보내는 편지」, 「스미르나교회에 보내는 편지」 등을 통해 성모에 관한 가르침을 남긴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교부는 특히 교부들 가운데 최초로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을 주제로 내세우면서 하느님의 신적 모성과 성모의 동정성에 대해 언급했다. 예수 수난과 죽음이 신비인 것처럼 동정 탄생도 신비로서 사람들에게는 감춰져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외경인 「야고보복음」, 「토마스복음」 등에도 동정성에 관한 대목이 있다. 「야고보복음」은 특히 성모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야고보복음」의 내용을 정리하면, 마리아가 3살 때 성전에 봉헌된 이야기를 비롯해 요셉이 사제들로 말미암아 배필로 선출된 이야기, 대사제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고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이야기 등이 나타난다.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이 두려워하면서 고민하자 천사가 꿈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임을 알려주며 마리아를 보호하는 이야기, 사제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요셉을 문책하고 마리아에게 쓴 물을 먹이면서 결백을 시험하는 이야기, 베들레헴 방문, 동굴에서 출산, 동방박사들의 방문, 동방박사들 이름도 나온다. 어떤 부분은 성경과 겹치고, 어떤 부분은 너무 황당하게 꾸며져 성경에서 제외됐다.
「야고보복음」 같은 외경을 보고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마리아는 하느님 구원 계획에 의해 미리 선택됐고, 성모가 예수를 잉태한 것은 하느님 은총이며, 마리아 동정성은 하느님 섭리에 의해 요셉에 맡겨져 있다는 점이다. 또 마리아의 예수 잉태가 요셉과 관계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점은 마태오복음이나 루카복음에서도 똑같이 언급한다. 또 출산 때도 동정이 보존됐다는 것은 동정 출산이 하느님의 기적이며 하느님의 행위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 유스티노 교부는 당시 하와와 성모 마리아를 대조하면서 이방인 티폰과 성모에 관한 논쟁을 벌인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명함으로써 인류를 하느님과 등지게 했지만,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하느님과 관계를 회복시켰다는 것이다. 유스티노 교부의 대조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새 아담, 혹은 둘째 아담이라고 표현하고, 성모를 새 하와, 혹은 둘째 하와로 표현하기도 한다. [평화신문, 2010년 8월 1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오세택 기자]
(15) 초세기 교부들의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의 모습 : 인간이 하느님께로 돌아가도록 도와줘
교부들이 표현한 마리아
초세기 교부들 문헌에서 나타나는 성모님 모습을 보자.
사르디나의 멜리토 주교는 부활절 강론에서 예수님을 순수한 어린 양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묵묵한 어린 양, 희생된 양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리아를 양으로 비유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를 시사하는 것이다.
멜리토는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강생, 수난과 죽음, 영광의 부활과 승천 세 가지 측면으로 구분한다. 마리아의 동정성은 강생, 즉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모성에 있어서 본질적 신비를 잘 나타내고 있다. 비잔틴 전례와 동방교회 역시 이런 마리아를 십자가 아래 꿇어앉아 있는 어린 양으로 묘사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성부와 말씀과 성령은 한 분이며 어디에서도 동일시된다고 했다. 동정 어머니 역시 한분이라고 강조한 클레멘스는 마리아를 교회라고 부르면서 '주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는 '교회는 동정인 동시에 어머니이며, 사랑이 충만하고 거룩한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한다'고 전했다. 이는 훗날 교부들에게 마리아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밀접한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주제가 된다.
로마의 히폴리토는 '마리아는 순금으로 입혀진 궤입니다. 그 내부는 말씀으로 인해, 외부는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며 마리아의 완전함을 극찬했다. 마리아는 하느님 아들의 강생과 인간 구원의 신비에 본질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가 사용한 '동정성의 첫째'라는 표현은 예수 탄생 이후 마리아의 동정성에 관한 첫 번째 언급으로 간주된다.
신앙고백인 신경에도 2세기부터 동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를 나타내는 부분이 있다. 히폴리토가 전하는 초기신경에 나온 마리아의 동정성은 사도신경에도 나온다. 니체아-콘스탄티노플신경(381년)도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시어,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화하셨고, 사람이 되셨고'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마리아와 하와의 비교
리옹 주교 이레네오는 마리아의 동정성을 교회 신앙에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생각했다. 그는 예수님이 여느 인간처럼 정상적 출생과정을 거침과 동시에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특별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동정 탄생은 인간이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사건으로서 마리아의 순결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함과 유사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인간 역사는 창조에서 구원, 즉 하느님께로 계속 진행ㆍ발전한다는 이론을 자신의 신학으로 정립하고자 했다. 창조된 세상이 아담의 잘못으로 타락했는데, 그 잘못을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히 처음으로 되돌린 것이 아니라 제2의 창조로 불릴 만큼 훨씬 뛰어넘는 관계로 성립시켰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담과 대조되듯 마리아는 하와와 대조된다. 그의 대조 이론은 후에 교부들에 의해 계속 발전되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에도 수용되고 있다.
이레네오의 '마리아-하와' 대조 이론을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하와와 마리아 모두 행위했던 순간 처녀였다 △천사(악마)에게 메시지(좋은 메시지와 나쁜 메시지)를 받았다 △마리아는 하느님께, 하와는 뱀에게 순종했다 △그들 행위는 그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등이다.
이레네오는 사도 바오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했던 '구원의 원인'을 마리아에게 적용하고, 아담에게 적용했던 '죽음의 원인'을 하와에게 사용한다. 또 마리아를 '처녀 하와의 변호자'로 칭하며 모든 여성의 구원자로 묘사하고 있다. 한 인간이 하느님의 구원역사 계획, 다시 말해 인간이 하느님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마리아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후에 이레네오가 마리아를 '구원의 원인', '그리스도의 동반자',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칭한 데 이어 '공동 중재자ㆍ구속자' 등으로 표현한 것은 많은 논란이 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결정적으로 중재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다. 그분이 하시는 일에 마리아가 도움을 준 것일 뿐,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어떤 선택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임에도 사람은 항상 남의 탓을 한다. 아담은 자신의 죄를 하느님 탓으로 돌리고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핑계를 대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정했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평화신문, 2010년 8월 15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백영민 기자]
(16) 초세기 교부들 중 오리게네스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 모습 : '믿음의 어둠' 겪은 하느님의 어머니
오리게네스 교부는 초세기 200년께에 사셨던 대학자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발전하는 데 큰 공헌을 한 학자로 언어와 문화, 철학에 대해서도 해박했다. 그는 성경을 공부할 때 본문의 문자적 의미뿐 아니라 상징적ㆍ영성적 의미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총이 가득하신 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도들이 불신앙을 겪는 동안 주님의 어머니는 그러한 불신앙으로부터 보호되었는가? 주님의 수난 동안 그분이 그러한 불신앙을 겪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분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일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만일 모두가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었고 속죄되었다면'(로마 3,23) 마리아도 그 순간에 불신앙을 겪었다는 것이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시므온이 그런 예언을 한 것입니다."(오리게네스의 '루카복음에 관한 강론' 중)오리게네스 교부는 시므온이라는 예언자가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이 아이 때문에 장차 가슴에 칼을 꽂는 아픔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한 예언은 성모님이 신앙의 어둠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다시 말해 시므온은 어머니 아픔은 아들이 겪는 아픔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예언했다고 오리게네스는 해석한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이를 '믿음의 어둠'으로 표현했다. 성모님은 완벽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조차도 믿음의 어둠을 겪었다. 성모님도 믿음의 어둠을 겪고 살아가신 분이다.
성모님을 완벽한 존재로 꾸미는 일에 조심해야 한다. 성경은 그 분을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고 한다. 은총이란 말은 하느님의 사랑ㆍ총애를 의미한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총애를 잃지 않으신 분이지만, 우리와 똑같은 나약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신 분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서슴없이 불렀다. 후에 에페소공의회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맞지 않다는 이견이 있었지만, 오리게네스 교부를 비롯한 많은 교부들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했다. 이 명칭은 성모님이 여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모가 낳은 예수님이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오리게네스 교부가 성모님에 대해 첫 번째로 주장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의 모성과 동정성은 신앙에서 필수적 요소라는 점이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경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는 표현은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믿지 않는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동정녀의 잉태라는 기적
당시 반대자들 중에는 예수를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 생각했던 이들도 많았고, 심지어 로마 판테라라는 군인의 성폭행으로 낳은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이사야서 7장 14절에 나오는 이사야 예언으로 이를 반박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여기서 표징은 기적이다. 여성(여인)이 아이를 낳는 게 기적이 아니라, 동정녀가 아이를 낳는 게 기적이라는 의미에서 여성을 동정녀로 번역하는 게 타당하다. 오리게네스는 사람들은 남자 아버지에게서 여성을 통해 태어나지만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는 것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판테라라는 이름 자체는 파르테노스라는 희랍어인데, 이 말은 동정녀, 처녀라는 뜻이다. 오리게네스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니냐고 반박한다. 또 원죄 없는 예수님의 잉태를 보증하기 위해서도 동정녀이신 성모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타당하지 않느냐는 논리를 제시한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성모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완벽한 제자라고 했다. 성모님이야말로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 뜻에 따라 하느님 말씀을 잉태하셨고, 그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분이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성모님의 성덕을 많이 찾아냈다. 성모님의 노래 '마니피캇'에는 구원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믿음, 희망이 잘 드러난다. [평화신문, 2010년 8월 22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이지혜 기자]
(17) 초세기 4~5세기교부들 가르침 속에 나타난 성모님 모습 : 영광스러운 성모님, 영원한 동정녀로
교부들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는 4~5세기 교부들의 성모님에 대한 생각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300년 께부터 450년 사이를 교부들의 황금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중요한 성인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
4개 공의회 잇따라 개최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큰 공의회 4개가 열린 것을 주목해야 한다.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를 시작으로,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431년 에페소 공의회, 451년 칼체돈 공의회가 잇따라 열렸다.
일련의 공의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 모두를 지닌 존재로 논의됐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는 그간 많은 학자들의 논쟁, 이단들에 대한 단죄 등 아픔을 겪고 만들어진 것이다.
니케아 공의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공포(313년)한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그동안 그리스도교는 박해를 받으며 지하에서 활동했으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칙령을 내림으로써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 교리 문제로 나라가 반쪽이 되는 걸 원치 않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주교들에게 한데 모여 교리에 대한 의견을 하나로 모을 것을 주문했다. 이에 따라 열린 것이 니케아 공의회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주교였던 알렉산드리아노를 수행한 부제로 공의회에 참가했던 아타나시오 성인은 아리우스파에 대항해 끝까지 싸움을 펼친다. 반대파에 의해 7번이나 귀향을 떠나는 고난에도 불구, 아리우스파와 투쟁하면서 얻어낸 결론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는 아리우스라는 사제가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기 때문에 예수를 하느님 아들로 주장하는 것은 모순된다"고 말한 것과 대치되는 것이다.
당시 교회 주류는 니케아 공의회 결정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 아들이고, 아버지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 분이라는 견해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논의는 콘스탄니노플 공의회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아타나시오 교부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악마의 세력에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고 언급했다. 그는 성모님에게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서슴없이 사용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됐기 때문이다. 인간이 소중한 이유는 하느님 자녀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당시 교부들은 이런 부분에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는 행위가 성모님을 통해 이뤄졌음에 주목했다. 성모님이 그리스도와 한 쌍을 이루는 신부로 묘사되기도 했다는 것이 이에 대한 방증이다.
성모 승천
디디모라는 교부는 "누구보다도 영광스러운 성모 마리아는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으며, 아기 예수를 낳은 후 영원히 손상되지 않는 동정녀로 남았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이 시대 교부들은 동정성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당시만 해도 동정을 생물학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많았지만 디디모는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녀, 예언의 은사 등으로 강조하며 다른 시각으로 접근했다.
에피파니오라고 하는 교부는 성모님 죽음에 대해 많이 언급했다. 그는 요한 묵시록에 나타난 것처럼 성모님 육신이 하늘에 올라가는 영광을 누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입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 당시에는 여성 사제직에 관한 논쟁이 많이 오고갔음을 알 수 있다. 성모님께 사제직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여성 사제직에 대한 논란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공헌을 한 카파도치아 교부인 바실리오, 니싸의 그레고리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는 성모님이 예수님을 잉태한 것에 대해 단순히 파이프에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중간 도구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고 강조했다.
성모님은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신앙의 모범이 되신 분이다. [평화신문, 2010년 8월 29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이서연 기자]
(18) 암브로시오 주교 가르침 속에 나타난 성모님: 영적으로도 동정이신 성모님
초대교회 교부들이 성모 마리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이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초창기 교회 학자들의 성모 공경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번에는 암브로시오 주교와 그의 제자 아우구스티노 성인, 그리고 에페소공의회가 이해한 성모님을 살펴볼 차례다.
334년에 태어나 374년 이탈리아 밀라노교구장이 된 암브로시오 주교는 성모님의 믿음이 사제 즈카르야보다 뛰어남을 찬양했다. 그는 하느님 구원 계획이 성모님에게서 시작됐으며,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했다. 성모님이 여신이어서가 아니라 성모님께서 낳은 예수님이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흠숭과 성모 공경 구분
암브로시오 주교는 또 성모님의 동정성을 강조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고,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는 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 동정을 통한 잉태라고 봤다. 당시 동정으로 사는 수도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성모님이 동정이라는 사실은 동정 수도자들의 모범이 되고, 그들의 수도생활을 격려하는 데도 큰 의미가 있었다.
그에 따르면 성모님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동정이다. 많은 이들이 육체적 동정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영적 동정이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과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구분돼야 한다고 말했다. 흠숭은 오직 하느님만이 받으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와 동정녀들의 모범인 성모님을 공경해야 한다.
354년에 태어나 387년 34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세례를 받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저서 「고백록」에서 "늦게야 님을 사랑하게 됐습니다"고 고백했다. 이는 세례 받을 때 체험을 반영한 것이다. 보통 죽을 때가 돼서야 절실하게 다가오는 하느님을 34살에 사랑하게 된 것은 결코 늦은 것이 아니다. 그런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모님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모님은 평생 동정이셨다고 말했다. 성모님이 동정인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잠긴 문을 통과해 제자들을 만난 것과 같은 기적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 성모님은 교회의 한 구성원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신비체인 교회에서 성모님도 구성원인 동시에 다른 구성원들의 모범이 되는 분이다.
'하느님의 어머니'로 불려
그는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여신을 숭배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어서였다. 대신 그리스도의 모친이자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하느님 구원 사업에 적극 협력한 분이 바로 성모님이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자신을 회개로 이끈 어머니 모니카 성녀를 생각하면서 성모님을 더욱 친근하게 여겼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 성모님은 하느님 구원 섭리로 예정된 분이다. 하느님이 성모님을 택하셨다. 오늘날 사제가 지니는 권위도 하느님이 사제를 선택하셨다는 데서 나온다. 사제 개인이 똑똑하고 잘나서가 아니다. 하느님 섭리는 그런 것이다.
431년 열린 에페소공의회에서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에 대한 문제가 논의됐다. 네스토리우스는 "피조물인 거룩한 동정녀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닌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치릴로는 이 주장을 반박했고, 갑론을박 끝에 공의회는 치릴로 주장을 받아들여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불러도 무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논쟁은 451년 칼케톤공의회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고 결론지으면서 일단락된다.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냐 아니냐는 논의는 사실 예수님이 하느님이냐 아니냐는 논의의 연장에서 나온 것이다. 초세기 교부들은 이단과 맞서 싸우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확립해나갔다. 성모님에 대한 교리 또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정립됐다. [평화신문, 2010년 9월 5일, 정리=남정률 기자]
(19) 교부들의 후기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의 모습: 인간을 위한 중개자이신 어머니
교부들은 하느님의 어머니, 즉 성모의 신적 모성과 동정성에 대해 논의했고, 드디어 교회는 553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를 통해 공식 교의로 선포한다. 교부시대 후기에 들어서 교부들은 성모의 무죄한 잉태, 무죄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성모께 드리는 찬미가 '아카티스토스(Akathistos)'도 이 시기에 쓰였다.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에서 나온 「올바른 성모신심」 부록으로 아카티스토스를 수록했는데, 이 찬미가를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콘스탄티노플의 젤마노 주교, 세르지오 주교 등이 성모 찬미가를 지은 후보자로 꼽힌다. 특히 마리아에 대한 강론을 많이 남긴 젤마노 주교는 성모신심이 탁월했고, 그의 글은 마리아 공경 혹은 마리아에 관한 회칙에 많이 인용됐다.
8세기께 기록에 보면, 비잔틴 전례 사순 제5주 토요일을 '아카티스토스 토요일'이라고 불렀는데, '아카티스토스'라는 말은 '앉지 않는다'는 뜻이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서 불렀다는 의미로 '아카티스토스'라고 불렀다.
이 시기 뚜르의 주교 그레고리오는 특별히 성모의 중재기도로 이뤄진 기적들에 대한 이야기를 서방 교부로는 최초로 알렸다. 그는 성모께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이 모였고, 성모를 무덤에 안장하자 성모의 영혼과 육신이 분리돼 영혼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성모 승천에 대해 말한다.
리비아 주교였던 테오테크노 역시 성모승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부활하고 승천한 예수의 육신은 성모에게서 왔기에 성모 승천은 당연하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위해 하늘나라에 가서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고 했다면, 성모를 위해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는 것은 더 당연하다는 것이다.
성모 승천
또 구약성경에 에녹이나 엘리야 승천 이야기가 나오는데 성모는 에녹이나 엘리야보다 더 순수하고 오점 없는 영혼을 지니신 분이기에 더 그러하다는 입장이다.
처음으로 자신을 일러 '종들의 종(Servus Serviorum)'이라는 표현을 쓴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성모 마리아는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진 위대한 산"이라 표현하며(이사 2,2 참조) 성모의 발현과 성모 중재기도의 효과에 대해 언급한다.
스페인 시빌리아 주교 이시도로는 처음으로 성모를 성령과 관련시킨다. 성모를 "성령의 물이 흘러넘치는 새로운 땅"에 비유한 그는 "시메온의 칼은 성모님의 순결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크레타 주교였던 안드레아는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죄인들의 피난처라는 부분을 강조했다. 성화 파괴자들에게 많은 박해를 받은 안드레아 주교는 성모의 인격과 성덕, 중재 역할에 대한 좋은 강론을 많이 남겼고, "성모 마리아는 원죄로부터 자유롭게 된, 오점 없이 깨끗하신 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여기서 성모의 거룩함은 그분의 내적 풍요로움과 덕성, 하느님과 관계 안에서 이뤄지는 특별한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언급한다.
성모의 자비는 물론 하느님의 자비에는 비교할 바는 없지만, 성모께서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예수의 자비를 보면 어머니의 자비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성모는 예수를 잉태하면서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시킨 중개자라는 것이다. 그분의 중개는 율법과 은총 사이에서도 이뤄지고, 구약과 신약 사이에서도 이뤄진다. 성모의 또 하나의 역할은 이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과 연결시키는 중재자로서 어머니의 역할로 나타난다.
은총 가득한 성모님
또 교부시대 막바지를 살아간 다마스쿠스 요한 주교는 성모는 하느님께 선택되셨고, 구약성경에 예언돼 있던 분이며, 그분의 탄생은 하느님 은총으로 이뤄졌고, 그분은 영적으로 충만한 분이라고 강조한다. 성모 승천의 특권을 출산 시 동정성의 신비와 연결시키고, 성모는 인간을 위한 중재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하느님에 대한 흠숭과 성모에 대한 공경을 구별한다.
교부들의 마리아론에 대해 학자들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신적 모성이 그 핵심이라고 평가하면서 교부들의 마리아론은 늘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마리아론은 항상 그리스도론과 관련해 언급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평화신문, 2010년 9월 12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오세택 기자]
(20) 교부들의 중세기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 모습: 성모 승천과 무죄한 잉태 논쟁 활발
8세기 중엽부터 루터 종교개혁 이전까지인 중세기 교부들의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 시대는 이미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요, 동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했다는 것이 제2차 니케아공의회(787년)에서 확정된 시기라서 이와 관련된 내용은 더는 언급되지 않는다.
중세기는 베르나르도, 알베르토, 토마스 데 아퀴노, 보나벤투라, 둔스 스코투스 등 대 신학자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성모님에 관한 논의는 주로 원죄에서 자유로운 성모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와 마지막 생애, 즉 승천에 관한 것이었다. 또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성모 마리아의 역할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던 때이기도 하다.
베네딕도회 베다 주교는 성모가 천사와 많은 사람에게 찬양을 받았다는 점을 주목하고 그분은 어느 여인보다 고귀한 분이라고 찬양한다. 성모를 하느님의 어머니, 예수 그리스도 인류 구원사업의 첫 번째 협력자라고 말하지만 결코 여신은 아님을 강조한다.
베다 주교는 비잔틴교회가 성모를 여왕으로 찬양했던 것과 달리 지상에서의 그분 삶의 겸손을 찬양하고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로 특별한 권한을 지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해 많은 이들에게 축복과 찬양을 받았지만 결코 지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하느님 뜻에 마음을 쏟았던 겸손과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다. 베다 주교는 하와에게서 교만을 보고 성모에게서 순종을 본다고 비교해 설명한다.
성모, 우리의 어머니
그는 더 나아가 성경에 근거해 성모와 교회의 유사점을 끌어낸다. 성모와 교회 모두 동정이요, 어머니라고 강조한다. 또한 성경(루카 1,41)에 근거해 성모가 엘리사벳을 방문할 때, 요한 세례자가 모태에서 성화됐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성모가 주님의 어머니로 당연히 원죄로부터 성화됐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뛰어난 마리아론 학자이며 서방교회 마리아론에 많은 영향을 준 암브로시오 아우트페르트는 마리아의 승천 축일, 봉헌 축일 등에 관한 많은 글을 남겼다. 당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축일보다 성모승천, 정결례 축일 등이 더 강조됐다. 그는 성모를 순교자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더 나아가 예수를 사랑하는 데 멈추지 않고 모든 이들을 사랑한 우리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중세 후기 성모의 승천과 무죄한 잉태에 관한 논쟁은 더 활기를 띈다. 이 시대 대부분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원죄없이 태어나신 분으로, 이 세상 어떤 이도 원죄를 면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성모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으며, 원죄없이 태어나신 분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반면 프란치스코회 둔스 스코투스는 성모가 원죄없이 잉태됐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둔스 스코투스를 지지하는 프란치스코회와 토마스 데 아퀴노를 지지하는 도미니코회 간 대결로 치닫게 했다.
한편 이 시대 대중들의 마리아 신심은 하느님을 엄격한 아버지로, 성모를 자애로운 대왕대비로 간주하는 외경에 바탕을 둔 허황된 성모 신심이 횡행했다.
토마스 데 아퀴노의 스승인 알베르토는 당시 예수와 성모를 동격으로 이해하는 분위기에 경종을 울린다. 하느님과 인간인 성모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음을 역설하며, 성모가 하느님 은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 은총이 전해지는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모의 동정
가장 모범적 신학자인 토마스 데 아퀴노 역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성모의 원죄없는 잉태에 반대 의견을 보이고 있다. 성모가 구원자의 모친이 됐을 때 원죄가 사해졌다는 것이다.
성경은 지극히 거룩한 성모가 출산 전은 물론 출산 후에도 동정이라고 말한다. 이는 성자의 권위를 위해, 그 어머니의 영예를 위해서도 합당한 일이다. 동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으로서, 인간으로서 완벽성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다. 또 혼인한 동정녀에게서 아이가 태어나야 혼인도, 동정도 중요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0년 9월 19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백영민 기자]
(21) 르네상스 시기 교회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의 모습 : 개신교가 바라보는 성모공경과 연옥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의 성모님에 대한 생각을 살펴본다. 근대는 유럽이 새로운 국면을 맞은 시기로, 인문주의와 인본주의라는 새로운 문화의 꽃을 피웠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성모님을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상으로 그렸다. 중세 모든 철학이 신에 대해 집중했다면 인본주의는 사람에 대해 집중했다. 인본주의자들은 마리아 신심과 성인 공경을 미신행위로 여겼다. 여기에 마틴 루터와 칼빈 등 종교 개혁자들이 가세했다.
영국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을 중심으로 하는 옥스퍼드 운동은 성모 신심에 큰 영향을 줬다. 옥스퍼드 운동(1833~1845)은 옥스퍼드대학교 젊은 교수들이 가톨릭 전통을 회복함으로써 영국 국교회를 쇄신하고자 한 운동으로, 이 운동을 통해 교회 내부적으로 수도원 부활 등 가톨릭 전통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가시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1854년 '원죄 없으신 마리아 잉태' 교의가 선포되고, 1950년 마리아 승천에 대한 교의가 선포되는 배경이 됐다.
에라스무스라는 학자는 성모 신심이 미신에 가까운 행위라고 비판했다. 진정한 종교 신심도 아니고 윤리적 내용도 결여된 겉치레식 신심이라는 것이다.
마틴 루터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으로 나뉜다. 정신적 병약자라고 하는 이도 있고, 경건한 신앙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는 기도하고 고행하는 수도자 모습을 보여줬다. 그에게 하느님은 무서운 하느님이다. 루터가 세운 교회의 핵심 슬로건은 '믿음만으로, 은총만으로, 성경만으로'다. 가톨릭교회 믿음은 행실로 보여주는 것이다.
개신교는 성모 공경을 반대하지만 루터가 처음부터 성모 공경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일본인이 쓴 「루터와 마리아」를 보면 루터가 성모님 찬미가(마니피캇)에 대해 해설한 부분도 있고, 그가 가톨릭을 떠나기 전 성모님에 대해 강론한 것도 찾을 수 있다.
마틴 루터의 성모 공경
그는 성모 마리아의 완전한 동정성을 받아들였고, 마리아가 충만한 은총을 지녔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전적으로 성모 마리아의 덕성이 아닌 하느님 은총이라고 생각했다. 개신교 신자들은 우리도 은총을 받으면 성모님처럼 될 수 있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루터는 자신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마리아에게 중재기도를 할 것을 권유했고, 자신의 교회에서 예수 탄생 예고 축일을 지내길 원했다. 루터는 에페소공의회가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다'라고 결정한 것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이 공의회는 신앙에 어떤 새로운 것을 정한 것이 아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신앙은 이미 처음부터 교회 안에 있었다. 복음과 성경에 포함돼 있는 것이다."
그는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에도 상당히 접근해 있었다. "마리아는 출산 전, 출산 중, 출산 후에도 온전히 정결한 동정녀였다. 마리아는 원죄로부터 구원된 정결하고도 거룩한 처녀다. 하느님의 선물로 꾸며진 그의 영혼은 원죄로부터 정결하다."
그는 성모승천대축일 강론에서 "마리아는 교회 어머니요, 교회 원형이다. 교회 구성원일 뿐 아니라 구원 사명을 부여받은 교회 대표다.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다"라고 했다.
개신교가 가톨릭과 다른 점은 연옥에 관한 관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루터의 95개 조항에는 대사(大赦) 논쟁이 있는데, 이는 개신교에서 '면죄부'로 잘못 알려져 있다. 대사는 고해성사의 사죄 교리와 연옥에 대한 교리, 통공의 교리가 서로 맞물린 상태에서 베풀어지는 것이다.
고해성사로 죄의 사함을 받지만 죄에 대한 대가는 보속을 통해 치른다. 그러나 보속의 효력은 전적으로 보속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죄가 고해성사를 통해 사해져도 남은 보속은 연옥에 가서 치르게 된다.
개신교, 연옥 인정하지 않아
우리는 연옥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과 기도의 공로를 다른 영혼을 위해 돌릴 수 있다는 교리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교회가 전ㆍ한대사를 베풀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개신교는 연옥을 인정하지 않기에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없다. 연옥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아픔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기쁘게 만나기 위한 정화 과정이기도 하다. 지옥이 하느님과 결별을 의미한다면, 연옥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사랑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0년 10월 3일,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리=이지혜 기자]
(22) 르네상스 시기 종교개혁 주장론자들의 성모 신심 : 올바른 성모신심 세우기 노력
18세기 유럽은 인간 지성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지성주의와 계몽주의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 당시에도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지나치게 강조한 이들이 있었고, 이를 우상 숭배라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대다수 계몽주의자들은 성모 신심을 이성적 균형이 결여된 행위라고 규정하고, 그리스도교 본질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시기에 마리아론은 철저하게 무시됐다. 많은 지역의 기도서들에서 마리아 축제들은 예수 탄생 예고 축일, 주님봉헌 축일, 방문 축일, 승천 축일 정도만 남고 삭제됐다. 또 계몽주의자들은 성모송을 경시하고, 묵주기도는 쓸데없는 반복기도라고 혹평했다.
이뿐 아니라 일부 주교들은 스카풀라와 묵주를 제거하도록 명하고, 성모 신심 서적 발행을 금지시켰다. 당시 스카풀라와 묵주를 자신을 악에서 구해주는 부적처럼 여기는 이가 많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성모 신심에서 미신적 요소가 제거되는 것까지는 긍정적 비판으로 볼 수 있지만 신심 자체가 전부 무시되는 일은 온당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 시대 성모 신심을 주도했던 몇몇 인물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성모 신심의 대가인 성 루이 몽포르는 레지오 마리애의 수호성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계몽주의자들이 성모 신심을 반대하는 것에 저항하며 올바른 성모 신심을 전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레지오 마리애가 창설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펴낸 「성모님에 대한 참된 신심」이라는 책은 현재 레지오 단원 필독서로 읽히고 있을 정도다.
항구한 신앙과 신뢰 필요
그는 △ 성모 공경이 그리스도께 대한 공경을 감소시키거나 △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경심 없이 형식적 신심행위 자체에 빠져 하느님 은총을 간구하고 △ 자신의 유익을 구하거나 재난을 피하기 위해 마리아에게 의지하고 기도하는 행위 등이 잘못된 신심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올바른 신심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듯 성모에게 완전하게 의지하는 자세, 역경이 닥쳐도 변하지 않는 항구한 신앙과 신뢰를 가질 때 가능하다고 말했다.
성 알폰소 로드리게즈도 성모 신심을 옹호했던 이다. 그는 「마리아의 영광」이라는 책을 통해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든 은총이 거쳐 나오는 중개자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구원을 위해서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느님 나라는 정의의 나라요, 성모 마리아의 나라는 자비의 왕국이라는 중세기 개념을 반복해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성모 마리아에게 전지전능의 지위를 부여하기도 했다. 심지어 하느님께서 성모 마리아를 자신과 같게 만들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는 모두 하나요, 같은 희생으로 봉헌됐다고 주장해 반발을 샀다. 이와 같은 과장은 당시 이성 지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간주된다.
요한 밥티스 반 케트비흐는 1720년 중세 많은 작가들을 인용, 성모 신심을 옹호하는 방대한 책을 펴냈다. 그는 성모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공동 구속자'라고 주장했다. 성모 마리아가 구세주를 낳았고, 우리 구원을 위해 구세주를 십자가에 바쳤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서만 죄인들에게 회개하는 새로운 마음이 주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우리 위해 기도하는 분
이런 주장에 대해 학자이자 도서관 직원이었던 무라토리는 성모 마리아는 여신(女神)이 아니며 죄를 사할 권한은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성모 마리아가 변호자로 불리고, 공경받아야 함은 마땅하지만 죄를 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또 성모 마리아의 역할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지 하느님께 명령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를 위해 전구할 수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전구를 앞지르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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