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 선생 묘소 참배기
(보견회 3월 행사/2014.3.6)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오늘이 마침 경칩일이다. 잠자던 개구리가 땅 위로 튀어나오는 봄이다.
그러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제대로 실감나는 날씨이다.
오리역 3번 출구에 14명이 모여 60번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자리가 있어 모두 앉아서 가니 다행이다. 용인의 능원초등학교에서 하차하였다. 불과 20분만이다.
버스에 내려 안내도를 따라 들어가는 입구에 멋지게 휘갈겨 쓴 한자 행서체 붓글씨로 단심가가
표지석에 새겨져 있다.
"이 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외어 나가니 "아니 한문시를 우리말로 읽느냐"며 시비를
건다. "바로 해석하는 실력을 몰라보느냐"며 큰소리를 치며 웃었다.
11시경 벌써 문화해설사가 나와 있었다. 사전 부탁은 했었지만 도착해서 전화하려 했는데--
해설사는 경북출신으로 대구가 시집이라 고향사람이다. 고향까마귀를 만난듯 모두 반가워 한다.
성격도 명랑한데다 베테랑이라 똑 부러지는 해설로 인기를 끌었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자료를 프린트하여 왔다. 감사하게 받았다. 포은 정몽주에 관해 먼저 알아본다.
포은 정몽주(圃恩 鄭夢周)는 ?
정몽주 선생은 고려말(1337~1392) 충,효,인,의로 일관되게 생활한 대학자시며 과거에 세차례나
장원급제할만큼 천재로 당시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 잡으려한 정치가,왜,원,명나라에 사신으로
나가서 명성을 떨친 외교관이시며 성리학의 태두로 불리신 이색 선생으로 부터
"東邦理學之祖"라는 찬사를 받을만큼 성리학의 으뜸가는 학자이셨다.
또한 포은은 효자 가운데서도 처음으로 되는 생려효자였다.고려 공민왕이 <정몽주가 사는 집에
효자정려를 세워서 그 효성을 밝게 하여라>고 한 것이다.
고려, 조선 모두 합하여 생려효자가 여덟이 있는데, 포은 선생이 그 처음이다.
그의 관향은 경북 포항의 영일(迎日)이고 출생지는 경북 영천(永川)이다.
1337년 영천 우항리에서 부친 정운관의 아들로 태어났고 몽란,몽룡을 거쳐 청년기에 몽주로
이름이 바뀌었다. 네분의 임금을 모시면서 성균관 박사,성균관 대사성 예문관 대제학 문하찬성사
를 거쳐 이성계와 같이 공양왕을 옹립하고 예조정량,예문관 대제학,문하찬성사,수문하시중 등
많은 벼슬을 하였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자 단심가로 그의 충절을 지키다 이방원에 의해
1392년 4월 4일 개성 선죽교에서 순절하셨다.
시신은 우탁의 가문 양호당 우현보과 송악산 스님들에 의해 수습되었다.
올해가 그의 사거 622년째이다.
용인에 있는 정몽주 묘소와 서원에 관해 궁금한 것이 많았다.
왜 고향인 영천이 아닌 용인으로 천묘하였는가? 그를 죽인 이방원에 의해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천묘를 하게 되었는가? 영천의 임고서원,영일의 오천서원,용인의 충렬서원에서 경쟁적인 배향을
하는가?
유림에 의해 11개서원에 배향되고, 중종 때 사패지로 700정보(210만평)이나 영구 세습지로 받은
극진한 대우는 ? 증손녀 사위였던 이석형의 묘소와 비각이 왜 이곳에 있는가 등등--
정몽주 묘소
개성 인근 풍덕군(개풍)에 모셨던 묘소를 1406(태종6)년 3월 태종의 명에 의해 영천으로 천묘하게
되었는데 면례행렬이 지금의 수지 풍덕천 근처를 지나며 잠시 쉬는 사이에 명정이 휘몰아친 돌풍
에 날려 떨어진 곳이 지금의 용인 능원리이며 명당으로 판명되어 이곳에 안치하게 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부인 경주 이씨와 합장되어 있다. 15세기 초반 영일 정씨 동족촌이 이곳으로 이거하여
장남 중추원사 정종성,손자 정보 등 많은 정씨 묘소가 산재해 있다.
정몽주 비각을 지나 묘역에 들어서면 홍살문이 먼저 경계를 한다. 사악한 기운을 막아내기 위한 풍
수적 무기이다. 좌측으로 경모사,모현당 그리고 제를 지내기 위한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우측에는 유명한 포은의 단심가(丹心歌)와 그의 어머니가 지었다는 백로가(白鷺歌) 시비가 서 있다.
묘소로 오르는 언덕 아래 증손녀사위 저헌 이석형의 가문 연안이씨가 만든 연지(연못)가 있다.
가운데 자리에 포은의 묘소가 마치 왕릉의 규모로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일행은 그의 묘소 앞에서 머리를 숙여 재배를 하였다. 배와 흥을 두차례 절을 하면서 600년 전의
그의 나라에 대한 기개와 충절을 생각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
특이한 것은 상석이 둘이었다. 왕릉과는 달리 무인석은 없고 문인석이 양쪽에 그리고 행사 때
차양 줄을 매기 위한 둥근 돌이 있는데 이게 무어냐고 묻는 이가 많다고 한다.
포은 묘소 좌측 약간 위쪽에 손자 정보(鄭保)의 묘가 있고 포은의 묘소 우측에 저헌 이석형
(樗軒 李石亨)의 묘가 있다. 이석형(1415~1477)은 포은의 증손녀사위이다.
그러니 포은의 손자 정보(鄭保)의 사위이다. 1441년(세종23) 사마시에 합격 문과 장원급제후
14년간 집현전에서 여러관직을 거쳤다.사헌부 대사헌 등 요직을 거쳤으며 저서로 대학연의,
저헌집 등이 유명하다.
그의 선대로 올라가면 연안이씨의 시조 되는 사람은 통일 신라 시대 당나라 소정방을 따라온
이무(李茂)장군이다. 나와 당이 백제를 칠 때 중랑장으로 공이 컸다.
백제가 망한 뒤 당나라가 백제를 차지하려는 것을 막고 신라에 귀화하여 공신이 되었다.
나라로부터 연안백(延安伯)을 하사받았다. 연안이씨 가문은 이석형을 필두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8명의 정승,6명의 대제학이 42명의 판서가 나와 그 명성을 떨쳤다.
포은 묘역 입구에 연안이씨비각공원이 있고 거기에 저헌 이석형의 신도비가 있다.
충렬서원(忠烈書院)/임고서원(臨皐書院)/오천서원(烏川書院) 그리고 사패지(賜牌地)
포은을 절명케한 방원이 태종이 된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 충절이다. 그러다 보니
고려의 충신이지만 동방성리학의 종조란 그에게 영의증대광보국승록대부로 추증했고 익양부원군
으로 추봉했으며 문묘에 배향하고 숭양서원 등 11개 서원에 제향을 하게 하였다.
태종 6년에 영천으로 천묘하게 하였으나 결국 용인에 자리하게 되었다. 1517년(중종 12)에 태학생
들의 상소에 의해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문묘배양과 묘표를 세웠는데 처음에는
'문충궁 영의정대광보국승록대부 정몽주지묘'라고 새겼는데 다시 '고려수문하시중 정몽주지묘'
로 고려 때 직위로 고쳤다. 중종 12년 중종의 명에 의해 포은의 묘소를 향수산,무능치너머 죽전
까지 700정보(210만평)을 주고 산직이 5명을 두어 수호케 하였다. 세습해서 영구 사패지로 받았
다가 현재는 영일정씨 땅으로 세습되고 있다.과연 조선의 왕들이 앞다투어 그를 기리는 것은
성리학의 종조이고 그의 덕행을 높이 본받기 위함이다.
후세에 와서 그를 기리며 재를 올리는 서원이 경쟁적으로 행사를 벌이고 있다.
묘소가 있는 용인의 충렬서원, 그리고 관향인 영일의 오천서원, 가장 먼저 재건을 벌인 영천의
임고서원을 직접 가 보지는 않았지만 사진과 함께 자료로 살펴본다.
용인충렬서원
1576년(선조9)에 정몽주의 덕행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9년(광해1) 충렬(忠烈)이라 사액되었는데 그 뒤 정보(鄭保)와 이시직(李稷)을 추가 배향하였다.
1871년(고종8)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4년 복원되었다.
영일 오천서원
포항시 남구 오천읍 원리에 위치하며 1588년(선조21)에 창건되었으며 정습명(鄭襲明)과 정몽주
(鄭夢周)의 위패를 모셨다. 1613년(광해5)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1740년(영조16)에 정사도(鄭思道)
정철(鄭澈)을 추가 배향했고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엇다가 1975년 복원되었다.
정몽주의 시조는 영일 정씨임에도 정몽주 후손들은 오천정씨로 고집한다. 신라시대부터 오천현은
연오랑 세오녀가 살던 마을이고 오천이 고향의 뿌리임을 강조하는 것이라 함.
영천 임고서원
1553년(명종8)에 창건되었으며 정몽주의 위패를 모셨다. 1555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3년(선조36) 현재의 위치에 옮겨 건립되었다.
1643년(인조21) 장현광(張顯光)을, 1727년(영조3) 황보인(皇甫仁)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5) 흥성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65년에 복원되었다.
해박한 해설사의 장묘문화와 풍수지리에 관해 설명을 듣다가 단체사진을 남겼다.
약간 늦은 허현을 다른 해설사를 붙여 참관케 하고 일행은 점심식사를 하러 인근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모처럼 불고기로 맛있는 식사를 하였다. 소주도 잘 팔린다. 여 해설사 세명이 동참하여 여기
저기서 보견회에 관해 설명이 이어진다. 그녀들도 무척 궁금한 모양이다. 70이 넘은 노친네들이
유적에 관해 높은 관심에 놀라는 눈치이다. 날씨는 비록 추웠지만 뜨거운 학구열로 추운줄 모르고
많은 지식을 얻었다. 식후에 인근에 있는 재단법인 한국 등잔박물관을 관람키로 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마 유일한 등잔 박물관이 아닐까 싶다.
재단법인 한국등잔박물관
해설사가 친절하게 박물관까지 따라가서 박물관 학예사의 설명을 듣게 해 주었다.
멀리서 보니 건물 외관이 마치 수원에 있는 공심돈을 닮았다.
입구에서 14명 입장료를 끊었다. 성인 5천원인데 경로라 2천원이 할인된단다.
예쁜 아가씨 해설사가 찬찬하게 설명을 이어간다. 1,2층이 전시관이고 촛대는 주로 2층에 있고
별관에 농기구도 전시되어 있다고. 1997년에 이 건물이 세워졌는데 초대 관장은 수원에서 산부
인과를 하던 김동휘원장이셨다. 아하 ! 그래서 건물을 수원의 공심돈 모양으로 건축하였구나--
개인적인 취미로 등단을 수집하던 것이 업이 되고 병원안에 전시품을 모아 처음엔 마치 고물상
같았다 한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 근세에 이르기까지 등잔과 촛대 그리고 세계의 램프까지
엄청난 수집량이다. 종기형에서 호형 등잔이 있고 온돌문화인 우리나라 방의 구조상 등잔대
높이가 40~50cm나 되는 것이 많다. 심지가 두개인 쌍심지.네개인 사심지도 있고 공부하는 서등
(書燈),타워등도 있다. 등잔의 장식이 화려한 것은 부자등이다.특히 아름다워 눈에 띈 것은 고사
리말림형 유기등잔이었다.
나무,토기,철물 심지어 한지로 만든 것도 있다. 지승공예란 한지를 잘게 찢어 노끈을 만들어 꼬아
엮어 만들고 옻칠로서 마감한 수공예품이다. 찢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무늬를 만들 수 있고 한지
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볍고 견고하며 방수, 항균 효과까지 지니고 있다. 이렇게 원래의 용도와
외적 아름다움이 합쳐진 종합 예술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모양도 가지가지이다.
고려때는 불교의 영향으로 염주형이 유행했고 왕실에서 사용된 등잔은 당연히 화려한 공예작품
이다. 진품명품에 나올 고가의 공예품들이다. 공예품과 도자기에 관심이 많은 집사람에게 구경
시키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농기구 전시장에서는 우리나라 농기구가 다 모여 있다. 현재 관장은 김동휘 초대관장의 아들로
73세인 김형구씨다. 마침 농기구 전시장에서 만나 그들 부자가 일구어낸 등잔박물관의 뒤안길과
애환, 어려움도 들었다. 우리가 어릴 때 보던 것이지만 이동수레를 설명하면서 시가로 따지자면
수억원의 가치란다. 3억원을 호가하는 석등을 기증받기 까지의 재미난 얘기도 들었다.
이러한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고집스런 지킴이 덕분에 우리는 쉽게 옛 문물을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아쉬운 작별을 하며 그의 노고에 다시한번 찬사를 보냈다.
오늘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60번 버스를 타고 다시 죽전쪽으로 향한다.
버스 기사의 말이 생각나 웃음이 번진다. "어디 종친회 가시는 길입니까?"
아마 늙수레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버스를 타는 경우가 없는 모양이다.
경칩날 비록 날씨는 꽃샘추위로 움츠러드는 날씨이지만 유익하고 즐거운 탐방을 마쳤다.
보람을 느낀다. 참석해주신 회원님들께 감사를 드리며 스폰서를 맡아준 박호 동문께 고마움을
전한다. 다음달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경비정산
전월이월 2,245,120원
이자수입 2,850원
회비(14명) 280,000원
박물관 입장료 42,000원
해설사 음료등 5,000원
현재 잔고 2,480,970원
*식대는 박호 회원이 스폰서하였음(204,000원)
참가회원 : 강순중/고초근/김능태/김민효/김수철/문의용/박상보/박준천/박 호/오상평/이이춘/
최문택/최상탁/허 현 14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