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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0
201.춤추는 영혼
세상을 삼킬 듯
터져 나오는 함성
사람들은 미친 듯 몸을 흔들고
음악은 천장 끝까지 치솟는다
붉은 젊음이
횃불처럼 타오르고
달아오른 공연장
심장은 북소리처럼 울린다
이곳에는
남자도 여자도
나이도 신분도 없다
오직 몸의 파동
오직 음악의 흐름만이
이 밤을 지배한다
나는 어느새
생각을 잊은 채 서 있다
금발의 춤꾼이 회전할 때마다
공기가 출렁이고
몸들은 바다처럼 일렁인다
나는 그 물결 속으로
조용히 잠겨든다
음악이 더 높아지자
하늘과 바닥이 흔들리고
가슴 속 북이
점점 더 세게 울린다
춤은 마치
신을 부르듯
끝없이 솟구친다
비어 있던 마음에
환한 기쁨이 스며들고
보이지 않는 불빛이
외로운 영혼들을 밝힌다
땀과 감정이 흘러
몸들은 하나의 강물이 되고
세상이 천천히 돌며
내 마음도 함께 흐른다
사이키 조명 아래
넘실대는 인파
누군가는 쓰러지고
멀리서 사이렌이 울린다
응급차에 실려 가는 영혼도
아직 음악 속에서
춤추고 있으리라
이승과 저승
그 사이 어딘가에서
춤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음악도 아직 멈추지 않았다
202.먼 산만 바라보네
뜨거운 가슴에도
끝내 익지 못한 당신은
내 기억의 어디에도 찍히지 않은
푸른 절벽 하나로 남아 있다
봄의 문턱에 걸린 채
끝내 발을 떼지 못한 햇살 같고
겨울의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풀려나는 숨결 같다
나는
네가 지나간 자리마다
보이지 않는 그리움을 짚어 본다
비는 오지 않았는데
마음 한쪽이 젖어 있고
햇빛은 없었는데도
하루가 은근히 빛난다
우리는 어느 날
손을 스친 적은 있어도
서로의 체온을 알고 있고
많은 말을 나눈 적 없어도
하루는
네가 남긴 문장들로 채워진다
입 밖으로 끝내 나오지 못한 이름
그래서 더 오래
혀끝에 머물러 있는
삼키지 못한 한 모금 물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도 마시지 못하는
맑은 그림자 같은 것
오늘도 나는
아직 닿지 않은 풍경을
오래 바라본다
203.사람의 온기
사람은
돌아갈 보금자리가 있어야
저녁이 깊어도 길을 잃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도
창문에 걸린 작은 불빛 하나
먼 길을 접어
가슴에 넣어 준다
그 불빛을 향해
서로를 부르는 숨결이
하루를 완성한다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있어
낙엽 지는 날에도
마음은 끝내 흩어지지 않는다
문득 스쳐 가는 안부 한 줄
마른 가지 끝에서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푸른 소리를 낸다
보이지 않는 손을 잡고
사람은
외롭지 않은 쪽으로
조용히 건너간다
204. 발자국
발자국
눈 내린 길 위
먼저 지나간 온기가
얕게 꺼진 자리로 남아 있다
나는 그 위에 발을 얹는다
발과 발 사이
아직 식지 않은 것들
미끄러질 듯한 순간마다
이미 지나간 무게가 나를 붙든다
뒤돌아보면
겹쳐진 자리들 사이로
길이 이어지고
나는 지금 한 발을 남긴다
누군가
내 자리에 발을 얹을 때
잠시라도 흔들리지 않도록
205. 햇살
햇빛은
자기 이름이 없다
창문에 머물렀다가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손등 위에 내려앉아
잠깐
숨을 고른다
쥐려 하면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는 빛
그래서 우리는
조금씩
나누어 가진다
하루가 밝은 이유는
누군가의 몫이 아니라
서로의 빛이기 때문이다
206. 불빛
밤이 깊어질수록
빛은
더 또렷해진다
하나의 별처럼 서서
지나는 얼굴마다
잠깐씩 밝음을 건네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그 자리에 머문다
그 고요가
너무 오래 서 있는 것 같아
나는 잠시
그 곁에 서서
어둠이 아니라
빛 쪽에 나를 세운다
207. 구름 사탕
입 안에 넣는 순간
형태는 사라지고
달콤함만 남는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번져 가는 것
손끝에 남은
작은 끈적임까지
오늘이라는 하루가
나를 지나간
증거처럼
가볍게 빛난다
208. 포대기
말보다 먼저
등을 내어주는 사람이 있다
부르지 않아도
알아듣는 온기
가만히 기대면
세상은
조금 위로 올라가고
무게는
다른 이름으로
가벼워진다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
누군가의 하루를
말없이 등에 업고
함께 걸어갈 수 있을지
그 길이
조금 더
따뜻해지도록
209.경칩
봄인가 싶어
창가에
얼굴을 내밀었다
잔설이 지나간
나뭇가지에
연둣빛 봄은 어디 갔는지
삭풍에
봄은
꼬리를 감추고
뾰쪽한
코끝이 매워
손바닥이 달려오네!
210.불면증
잠을 부르려
마음을
텅 빈 방처럼 비워 두었는데
생각들은
심심해진 아이들처럼
눈꺼풀 틈을 비집고
슬그머니 놀러 온다
불을 꺼도
그 아이들은 돌아갈 줄 모르고
어둠 속에서 더 또렷해진다
잠은 문밖에서 서성이고
생각들만
신발도 벗지 않고 들어온다
아침이 오면
해야 할 일들이
문 앞에 수북이 쌓일 텐데
나는 지금 한 줌의 잠이라도
품에 안고 싶은데
생각들은
주인 없는 집을 차지한 손님처럼
내 자리를 밀어내고
정작 나는
내 머릿속에서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다
211.이런 사람
바람이 불면
이름보다 먼저
흔들리는 마음을 불러주는 사람
어둠이 내리면
별을 세기보다
가슴에 작은 등불 하나
조용히 켜주는 사람
내 슬픔의 끝에
햇살 한 조각 놓아두고
말없이 곁을 덮어
밤을 따뜻하게 하는 사람
비바람 깊은 날에도
작은 등불 하나로
내 길을 밝혀 주는
고마운 손을 가진 사람
낮은 곳으로 흘러
아이의 눈높이에 머물고
늙은 시간 곁에 앉아
이야기가 되어 주는 사람
그러다 문득
내가 무너진 날에는
아무 말 없이
내 이름을 지워 주던 사람
부르지 않아도
이미 내 안에 와 있고
이름 없이도
늘 곁에 머무는 사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더 애타게 부른다
내 안에서 오래
빛나고 있는 그 이름을
212.꿈속에 얼굴
사는 게 바빠
까맣게 잊고 있던
친구가 문득 보고 싶다
입가에 밴 이름도
이제는… 긴가민가
마른 겨울날
헛기침처럼
툭— 튀어나오던
별명도 낯설기만 하다
껌뻑이는 눈가에
한 땀, 한 땀
이어지던 얼굴들이
지친 눈꺼풀 위에
스르르… 내려앉아
안개비처럼 내린다
눈가에 껌딱지처럼 붙어있던
그리운 얼굴도
설익은 잠결 속에서
흔적 없이 풀리고
정겹던 이름도
아롱거리는 웃음 하나에
꿈결 속을 희미하게 떠돈다
아… 친구야
맑은 꿈속이라면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오늘도
가물거리는 얼굴 하나
끝내… 붙잡지 못한다
213.끝없는 세상을 걸어가다
가는 길 힘들다고
돌아서지 말아라
힘들지 않은 삶이
이 세상 어디 있으랴
입안에 맴도는 불평 하나
끝내 삼키지 못해
목울대에 걸린 채
하루를 넘기는 날도 있다
산다는 것은
구겨진 욕심 몇 장
주머니에 넣어둔 채
모른 척 걷는 일
이루지 못할 꿈일지라도
먼 데 두고
눈으로만 만지며 가라
보이지 않는 내일이
발끝을 밀어
조금씩 앞으로 간다
비는 등을 적시고
눈은 어깨에 내려앉아
발자국 위에
다시 발자국을 얹는다
산과 들의 잎들도
비를 삼켜 자라고
눈 밑에서도
복수초와 매화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피어난다
시퍼런 여름과
살을 에던 겨울도
등 뒤로 흘러
어느새 봄과 가을로 선다
손에 쥐었다 믿던 것들
바람처럼 빠져나가는 동안
우리는 잠시
살아 있을 뿐
영원을 붙잡으려 하지 마라
끝내 쥐고 있던 것들은
손등에서 먼저 날아가고
빈 손만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214.인생
바람 한 점으로 와
풀잎 끝에 맺힌 이슬로
잠시 빛나다가
햇살이 손을 대는 순간
이름도 없이 스며 사라지는 길
보이지 않는 시간의 지도 위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짧다 하면 가슴에 걸린 한숨이고
길다 하면 끝내 놓지 못한 그리움
이 여행은
붙잡는 손보다
놓아주는 손을 먼저 배운다
시간은 쥐고 있을수록
더 빠르게 새어 나가고
그래서 나는
비우는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하나씩 내려놓다
마침내 마음 하나 남기면
고맙다
살아 있는 동안
그 하나만으로도
숨이 따뜻해진다
이미 선물로 시작된 오늘
이 찰나의 들길 위에서
빛이라 부르기엔 작고
어둠이라 하기엔 아까운
나의 한 순간을 들어
누군가의 저녁에
작은 불씨로 놓아두고 싶다
그래서
사라지는 쪽이 아니라
남겨지는 쪽으로
조금 더 뜨겁게 살아가려 한다
215.지난날을 음미하다
갈바람이
잠시 스친 인연처럼
옷깃을 스친다
파랗게 트인 입술 위
붉은 웃음꽃이 피었다
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노을을 타고 오가던
코묻은 딱지들은
헤어짐의 여운 속
내일이라는 시간 속으로 잠긴다
끊어진 철길 위,
식어가는 보라빛 커피처럼
시간은 소리 없이
뒤돌아오지 않는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
보고픈 얼굴들은
차잔 위 물결처럼
일렁이며 흔들린다
하늘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푸른 미소를 띠고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 안에서 나는
흐른 시간의 조각을 주워
잠시 손바닥 위에 올려본다
216.비오는 창가에서
빗물은 창에 기대어
흘러가는 문장들,
나는 그 문장 속에
조용히 끼어들어
한 음절을 읊는다
지워진다는 것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더 깊이 번지는 일이라서
와이퍼의 망설임 사이로
당신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덜컹이는 버스 의자 위
아직 완성되지 못한
마음 한 줄, 숨을 낮추고
나는 그 침묵에 조금씩 젖어든다
이마를 기댄 유리 너머
벚꽃 냄새가
이름 없이 먼저 와 닿고
비는 하염없이 내린다
나는 그 풀린 길을 따라
늦게 도착하는 의미처럼
끝내 당신에게 닿지 못한
한 편의 그리움으로 남는다
217.여백에게
오늘은
조용히
너의 이름을 접어
가슴에 넣어 둔다
병실 창가에 기대면
햇빛 대신
네가 두고 간 걱정이
내 어깨에 내려앉는다
말없이 흐르는 시간은
우리 사이를 가늠하듯
길게 늘어지고 나는 느낀다
너의 하루가
작은 숨처럼
이미 이곳에 스며
내 생각의 밤을 밝히고 있기에
아프다는 말 대신
너는
내 마음을 먼저 읽고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기에
너에게 닿지 못한 말들을
가슴 깊이 묶어 둔 채
이 여백을 펼쳐두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른 말 하나
보고 싶다는 말을
조용히 끼워 둔다
우리는
수많은 여백 속에서도
멀리 있어도
끝내 같은 편에 있기에
218.입술 끝에 남긴 말
저녁이면
헐거워진 운동화 끈을
다시 묶는다
오늘을 흘리지 않으려
입 안쪽에 단단히 물고
아무 일 없는 얼굴을
겉에 걸어 둔다
입가의 웃음은
금 간 잔처럼 떨리고
뺨 뒤에는
식지 못한 시간이 고여 있다
사라지지 않는 온기
실밥처럼 따라붙어
옷깃을 여밀수록
살 속으로 파고든다
한마디는 끝내
입술을 넘지 못하고
목울대에 걸려
나는 초식동물처럼
나를 천천히 갈아 삼킨다
꽃비 내리는
금호강 길을
입안에 고인 말을
나는 조금씩 줄어든다
219.환성사 겹벚꽃
고요 내려앉은 무학산 자락
겹쳐 피는 것은
꽃잎만이 아니더라
아롱지는 연초록 숨결
인내의 꽃처럼 겹겹이 피어난다
분홍꽃잎 하나
간들바람에 휘청이다가
수줍은 새색시처럼
바람 눈치만 살피다가
문득 제 무게를 내려놓는다
환성사 천년을 건너온 숨결은
겹겹이 스며들어
내 눈가에 보이지 않는
참회의 물결로 남는다
대웅전 길게 드리운 연등 아래
목탁 소리 낮게 번지고
풍경 사이 막 피어난 꽃잎은
기도의 숨결로 간절하다
스쳐 간 계절이
켜켜이 접혀 있다가
문득 펼쳐지는 자리
내 안의 고요한 결들이
그 빛을 따라 흔들린다
향기만 남기고
꽃잎 위 한 겹의 빛
지울 수 없는
삶의 빛깔로 스며든다
220.흐르는 쪽으로
문턱마다
그림자를 세워
물의 길을 막지 마라
물은
되돌아서는 법 없이
늘 낮은 쪽으로 기운다
사람의 마음은
들물과 썰물 사이
가늘게 걸려 있다
혼자 흐르면
강도 제 길을 놓치고
물빛은 제 얼굴을 잃는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물결에 몸을 싣고
건너는 쪽으로 기운다
발자국 하나 놓일 때마다
흐름은 이름을 얻고
아침마다
비워 둔 길 하나 있어야
빛은 다시 돌아오고
부르는 목소리 하나 있을 때
비로소 내 이름도
물 위에 가만히 떠오른다
221.눈물
입을 굳게 다문 채
파도를 병 속에 가두듯
억지로 눌러 담으려 하지 마라
가슴 어딘가
금 간 유리처럼
보이지 않는 틈이
조용히 번지고 있다
소리 없이
눈 쌓인 담장이 내려앉듯
안쪽부터
버티던 것들이 스러진다
막아선 바람에도
되돌지 않는 길이 있듯
눈물 또한
제 길을 알고 있다
한 번 깊이
둑을 넘은 물처럼
휩쓸고 지나가야
비로소 잦아든다
비워진 자리엔
불 꺼진 방의 적막 대신
비 온 뒤 낮게 고인 숨 하나
다시 고여든다
222.오네 가네
스쳐가는 여념을
붙들어 세우려다
끝내 손끝에서 놓쳐버린
시간들
얼마나 오래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던가
푸른 물결이
하늘을 덮던 그 순간은
아직도 눈 안쪽에 머물러 있는데
어찌하여 당신은
한 점 그림자처럼
먼 물길로 흘러가 버렸는가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은
겨울의 땅에서도
말없이 꽃을 틔우는데
삶이라는 산이 높아
오르지 못한 것인지
하루라는 길이 길어
닿지 못한 것인지
세상은 본디
개똥밭이라 하여도
그 위를 굴러가는 것이
사람의 길이라면
흘러가는 세월 속
나도 한 점 바람이고
너도 한 점 바람인데
붙잡은들 무엇하랴
산에도 꽃은 피고
들에도 꽃은 피는데
내 마음 한켠
지지 않는 꽃 하나
그것마저 죄가 된다면
이 생은 너무도
가벼운 벌이 아니겠는가
223.가을비
갈색 창가에 비가 내린다
그리움도
소리 없이 따라 내린다
가을은
얇은 종이처럼 물들어가고
생각은 빗물 속으로 스며든다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먼 길을 돌아온
낯익은 그림자처럼 들리고
젖은 낙엽은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비의 가장자리에서
오래된 얼굴 하나씩 꺼내 본다
창밖은
끊임없이 흐르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이
희미한 갈색빛으로 젖어 있다
풀잎 위 빗방울이 흔들리고
어둠은 천천히 깊어진다
무거워진 마음 하나
비 속으로 조용히 풀려 내려간다
224.도착하지 못한길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구름에 걸린 산마루 하나 넘고
또 하나 넘으면
당신에게 닿을 수 있습니까
얼마나 더 헤매야 합니까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깊은 곳
이름조차 잠겨버린 그 어둠 속을
몇 번이나 돌아야
당신을 볼 수 있습니까
되돌아보면
사라지지 않는 장면들
씹을수록 쓰디쓴 기억이 되어
가슴 한쪽을 오래 물고 놓지 않습니다
묶여 있습니다
생각이라는 사슬에
한 뼘 남짓한 매듭 하나
풀리지도 끊어지지도 못한 채
언젠가,
아주 작은 햇살 하나 스며들어
늦은 눈 녹듯
아무 일 없던 듯
스르르 풀리면 좋겠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압니다
무거운 하루를 뒤꿈치에 달고
절뚝이며 돌아서지 못한 채
토라진 길 위를 걷고 있는
당신을 압니다
훗날
걸어온 길이 너무 멀어져
끝내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 당신은
혼자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잘난 척 모르는 척
바람 속에 구름 숨듯
보일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시간들
불러도 대답 없는 그 이름이
아지랑이처럼
눈앞에서 자꾸만 흐려집니다
225.커피 한잔에
창가에 기대어
커피 한 잔 마주하면
쏜살같이 흘러간 시간 너머
잠들어 있던 네 모습 하나
은은한 향기처럼 피어난다
따뜻한 한 모금마다
가슴 깊이 숨은 그리움은
잔잔한 물결 되어 번지고
흔들리던 마음 끝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천천히 식어 가는 커피 속에도
미처 전하지 못한 네 마음 하나
늦은 저녁 창가에 머문 별빛처럼
오래도록 가슴에 스며든다
226.고사목
산 끝에 버려진
한 줌의 저녁빛처럼
메마른 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껍질 벗긴 시간 위로
말굽버섯 하나
낡은 달처럼 기대앉아
고요한 집을 짓는다
바람 한 번 스치면
금세라도 부서질 듯한 몸,
그러나 속 깊은 어둠에서는
아직 지지 않은 불씨 하나
조용히 숨을 고른다
썩어간다는 것은
끝내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제 몸의 마지막 티끌까지
누군가의 흙이 되어주는 일
고사목은 오늘도
침묵의 불꽃으로
천천히 자신을 태우고 있다
227.오지랖
겨울바람 스미는 날이면
어머니는 해진 저고리 앞자락을 여며
먼저 내 가슴부터 덮어 주셨다
사람의 마음에도
그런 자락 하나 있어
추운 등을 보면
먼저 다가가 덮어 주고 싶어진다
누군가는
쓸데없이 남의 바람까지 막는다며
오지랖 넓다 웃지만
생각해 보면
세상은 너무 오래
제 어깨만 감싸 안은 채 살아오지 않았는가
한때는
남의 눈물 한 방울에도
옷고름 풀어 건네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음의 자락들이 너무 짧아져
서로의 추위를 보고도
모른 척 지나가는 저녁이 많다
오지랖이 넓다는 건
어쩌면
남의 아픔까지 품으려는
가슴의 둘레가 넓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228.이름 하나
살아가는 일이
젖은 장작더미를 등에 지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일이라서
나는 오래도록
한 사람의 이름을
주머니 속 잔동전처럼 묻어 둔 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겨울 저녁이 오면
목 끝에 걸린 마른기침처럼
그 이름 하나
툭, 툭
입술 밖으로 굴러나왔습니다
하얀 메모지 위에
모래바람 지나간 자리처럼
그 이름을 몇 번이나 적어보지만
피로에 젖은 눈꺼풀이 내려앉으면
글자들은 이내
빗물에 번진 먹물처럼 흐려지고
나는 끝내
휘어진 갈대 줄기 같은 글씨로
당신을 남겨 둡니다
한때 환하던 웃음도
저녁놀 속 해바라기처럼
천천히 고개를 떨구고
꿈속에서조차
희미한 그림자 하나 되어
멀리 흔들립니다
그래도 가슴 가장 깊은 곳에는
아직 꺼지지 못한 불씨 하나
밤하늘 끝에
늦게 도착한 별빛처럼
가늘게 떨고 있습니다
세월은
손등의 핏줄처럼 마르고
강물 위 물비늘처럼 흩어져 가도
한 번 마음 밭에 묻힌 이름은
들풀의 뿌리처럼
비바람 속에서도
쉽게 뽑혀 나오지 않습니다.
229.보리개떡
해는 지붕 끝에 걸려
식은 재처럼 천천히 빛을 접고
빈방 안에서는
배 속에 갇힌 북소리 같은 허기가
자꾸 저녁을 두드렸다
어머니는
새벽별이 지기도 전에
푸성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먼 오일장 길을 나서셨다
떠나시기 전
솥 안에는 둥글한 보리개떡 몇 덩이,
마치 어린 해님처럼
우리 몫의 온기를 남겨 두셨다
하지만 철없던 형제의 허기는
봄눈처럼 쉽게 녹지 않았다
깔깔 웃으며 집어 먹던 손끝마다
저녁 한 끼까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어둠이 문턱까지 밀려오자
동생 울음은
빈 항아리 속 바람소리처럼 길어졌다
나는 찬물 한 바가지로
돌덩이 같은 허기를 눌러 보았지만
속에서는 메마른 바람만
갈빗대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연기 끊긴 아궁이는
눈 감은 산처럼 싸늘히 식어 있고
골목 끝 어둠마다
어머니 발자국 하나쯤
별빛처럼 금세 나타날 것만 같아
문밖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한참 뒤 돌아오신 어머니는
젖은 어둠을 등에 지고
삐걱 문을 여셨다
거친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우리 얼굴을 가만히 쓸어내리시고
팔리지 못한 푸성귀 몇 단은
등 뒤로 슬며시 감추신 채
아무 말 없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셨다
마른 솔가지 타는 냄새가
캄캄한 방 안에 번져 오고
꺼져 가던 우리 눈빛에도
조용히 불씨 하나 살아났다
그날 밤 꽁보리밥은
목 안에서 까슬하게 넘어갔지만
어머니 손끝에 밴
장터의 찬바람과 땀 냄새까지
함께 삼키고 나니
서러운 허기마저
눈물 속에서 천천히 풀어졌다
우리는 말없이 숟가락을 움직였다
행여 어머니 마음까지 다칠까 봐
울음도 삼킨 채
세월이 오래 흐른 지금도
보리개떡 냄새만 스쳐 오면
나는 가장 먼저
어둠 속에서
우리 배고픔보다 더 저리게
가슴 앓고 계셨을
어머니의 마음을 떠올린다
그리고 늦게야 알았다
가난은
배를 비우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당신의 마음을 태워
우리의 저녁을 밝히고 계셨다는 것을
230.먼저 내민 손
얼마나 더 닫힌 마음 안고 살겠소
바람 한 철 붙든들 영원이 되지 못하는 것을 사람의 삶 또한 저녁 안개처럼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데
돌처럼 굳은 마음으로 눈 감은 나무처럼 서 있으면 햇살이 스쳐도 꽃은 피지 않습니다
기다림은 문밖 발자국만 헤아리고 먼저 내민 손 하나가 얼어붙은 시간을 녹여 냅니다
주지 못한 마음은 녹슬고 베풂은 메마른 우물에 맑은 물길 하나 여는 일
사랑은 봄비처럼 내려와 메마른 가슴에도 연둣빛 숨을 틔우고
미움은 바람 따라 흩어져도 끝내 남는 것은 다정히 건넨 마음의 온기
누가 먼저이길 바라며 등 돌린 채 서 있기보다 어깨 한번 토닥이면 굳은 마음도 노을처럼 천천히 풀립니다
모든 것은 순간입니다 아프던 이름조차 세월 속에서는 희미하게 지워져 갑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조금 더 따뜻한 쪽으로 함께 걸어갑시다
짧은 생의 불씨 하나 서로의 가슴에 조용히 옮겨 붙이며
231.걱정
걱정은
비 오기 전
혼자 우산을 펴 보는 일
오지도 않을 먹구름에
마음을 먼저 젖게 하고
길도 나지 않은 밤길 위에
발자국부터 그려 넣는 일
아무리 붙들어도
내일은 내일의 문으로 오는데
걱정은 결국
빈 새장 속에서
날아갈 그림자만 키우는 일이었다
232.길 야옹이
골목 끝
까만 바람 같은 아이 하나
살고 있었다
허름한 담벼락 아래
어미 곁에 바짝 붙어
잠들던 작은 고양이
눈이라도 마주치면
낙엽처럼 후드득 달아났고
세상은 너무 넓은데
아이 몸은 아직 너무 작았다
저녁이 되면
긴 그림자 하나
말없이 밥그릇을 놓고 갔지만
아이의 하루는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 따라 자꾸 흔들렸다
어미는 골목마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듯
작은 울음으로
밤길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비 오는 밤
작은 숨 하나
젖은 발자국처럼
조용히 사라져 갔다
이제는
차가운 골목이 아니라
따뜻한 별빛 아래서
바람처럼 가볍게
겁내지 말고
마음껏 뛰어다니기를
두 손 모아
오래 기도했다
233.바다
바다는
밤새 접어 둔 마음을
새벽 물결에 띄워 보낸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는
끝내 부치지 못한
그리움의 편지.
길게 누운 너럭바위는
밀려온 시간에 몸을 깎이며
늙은 기억의 무릎이 된다.
부서진 하루들이
파랗게 밀려와 쌓이면
바다는
멍든 가슴으로 운다.
234.시월 삼십일의 일기
오색 단풍 눌러쓴 오솔길 끝에서
가을은 오래 묵은 편지처럼
조용히 접혀가고 있었다
배롱나무 붉은 숨결 번지는 양지마다
가슴 한켠에 매달려 있던
늦은 슬픔 하나
낙엽의 마지막 발자국처럼
소리 없이 떨어져 나갔다
달빛에 젖은 눈가에는
은빛 물비늘 몇 점 떠다니고
웃음을 숨긴 입가에는
막 피어나는 동백꽃 한 송이처럼
수줍은 미소가 번져갔다
가을 향기 스미는 바람 따라
물결 위 나란히 떠가는 원앙처럼
그 아이도 이제
자기 사랑의 강물 속으로
천천히 흘러간다
서른하나의 숫자는
햇살과 그늘을 번갈아 품은
한 그루 감나무 같았다
기쁨은 붉게 익어 달리고
서운함은 가지 끝에 매달린
늦은 이슬처럼 흔들렸다
혹여 세상 바람에 마음 다칠까
돌부리에 여린 발끝 채일까
마음 깊은 방 한켠에는
비단 구름 같은 길 하나 깔아두고
언제든 돌아와 쉬어가라며
말 없는 등을 내어주었다
차마 꺼내지 못한 걱정들은
동여맨 새끼줄처럼 가슴 아래 묶여 있었고 아버지의 침묵은
겨울 강 밑바닥의 물살처럼
깊고 느리게 흘렀다
무쇠처럼 얹혀 있던 세월의 어깨를
저녁 노을 아래 천천히 벗어놓고
새털처럼 가벼워진 마음 하나
꽃향기 번지는 바람에 실어 보낸다
오늘
한 사람의 계절을 품어 키운
나무 한 그루, 환한 꽃길 속으로
꽃 한 송이 짝을지어 떠나보낸다.
235.함께라면
전깃줄에 앉은 참새들
콩알 같은 눈을 반짝이며
나란히 나란히
작은 음표처럼 흔들립니다.
짧은 목은
시계추처럼 오르내리고
짹짹짹 웃음소리는
골목길 햇살이 부서지는 소리 같습니다.
혼자 있는 마음은
비가 그친 운동장 끝
뒤집힌 우산 하나처럼
괜히 축축하고 쓸쓸했습니다.
잠깐이라도
그 곁에 기대고 싶어
주머니 속 핸드폰을
돌멩이 하나 꺼내듯 만져 보았습니다.
하지만 참새들은
내 마음도 모른 채
빈 가지의 떨림만 남기고.
바람이 접어 올린 꽃잎처럼
포르르 하늘로 흩어졌습니다.
나는 그때 알았습니다.
혼자 드는 마음은
젖은 솜이불처럼 무겁지만
함께 드는 마음은
봄볕에 말린 운동화처럼
따뜻하고 가볍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36.새봄
손등이 튼 자리마다
겨울이 숨겨 둔 금이 갔다
찬바람은 뼈 가까이 숨어
말하지 못한 시간들을
유리처럼 얼려 두고
어느 아침
덜 여문 햇살 한 조각이
담장 끝에 걸터앉아
잠든 꽃눈의 이마를 두드린다
터진다는 것은
상처가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오래 갇혀 있던 빛이
제 몸의 문을 여는 일
봄은 발소리 없이 와서
마른 가지마다
연둣빛 숨결을 매달아 두고
보슬거리는 햇살은
비보다 먼저
마음 구석의 먼지를 적신다
골목 끝 돌아온 젖은 바람 속에서
꽃들은 저마다의 입술을 열어
환하게 허물어지며 피어난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얼음 속에 갇혀 있던 것들이
제 이름을 되찾는 일이라는 것을
237.아내
커다란 통돌이 앞에 서면
아내는 집 안의 계급장을 모두 단다
젖은 옷감 사이를 뒤적이며
주머니 속에 숨어 있던
나의 작은 밀항자들을 끌어낸다
구겨진 지폐 한 장에도 출처를 묻고
먼지 묻은 동전 하나에도
긴 심문을 세운다
세탁물은 빙빙 도는데
내 속마음도 함께 휘말려
탈수 버튼 앞에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인다
아내의 손끝은
수색등처럼 밝아서
끝내 감춰 둔 비상금의
숨소리까지 찾아낸다
그날이면 내 지갑은
바람 드나드는 빈방이 되고
아내는 압수한 하루의 전리품을 들고
문지방을 가볍게 넘는다
그러나 밤이 오면
아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듯한 신권 몇 장을
내 빈 지갑 속에 눕혀 둔다
마치 메마른 우물 바닥에
몰래 물 한 바가지
부어 두는 사람처럼
나는 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단속반도
세상에서 가장 오래 버티는 살림꾼도
결국은 아내라는 것을 아! 네 나는 안다
238.함께하는 세상
촛불 하나는
제 그림자 하나도 다 지우지 못한 채
막다른 골목 바람 속에서
작게 흔들리고
생각 하나는
길 잃은 새처럼
어둠의 모퉁이를 맴돌지만
작은 불씨들이
서로의 추운 밤 가까이 모이면
닫혀 있던 길 끝에도
희미한 발자국 하나씩 살아난다
손을 맞잡는다는 건
세상을 환히 밝히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외로운 밤을
조금 덜 춥게 건너는 일
바람 앞의 작은 불씨일지라도
나 또한 누군가의 저녁 한쪽에
오래 머무는 등불이고 싶다
239.풀꽃 편의점
산중턱
주말마다 문을 여는 작은 가게
남루한 사내의 눈빛이
비탈 끝 저녁에 오래 머문다
날개 잃은 메아리 하나
산등성이를 돌고 돌아
귓가에 조용히 걸터앉고
돗자리 위 먹거리들은
햇살 한 줌 품은 채
나지막이 숨을 고른다
구경 나오던 조각구름도
바람의 등을 떠밀려
먼 하늘로 흘러가고
산그림자 하루를 접어
산허리로 스며들 즈음
주섬주섬 물건을 거두는 사내의 어깨 위로
저녁 바람 하나 조용히 내려앉는다
함께 있다는 것은
환한 불빛이 아니라
저무는 하루 곁에
말없이 앉아주는 일
산길 따라 내려온 발자국이
빈 주차장 한켠에 닿으면
허리춤 전대 속 동전 몇 닢
늦은 가장의 웃음처럼 가볍게 흔들리고
그 작은 쇳소리 하나
멀리 집 안쪽
시장 바구니를 들고 섰을 아내의 저녁에
희미한 불빛 하나 켜진다
240.기다리는 사람
세상에는
아무 말 없이도
등불처럼 서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길을 잃고 돌아오는 마음 하나
늦은 발걸음 하나까지
조용히 품어 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어붙은 강 밑에서도
봄이 몰래 숨 쉬고 있다는 뜻입니다
메마른 가지 끝에도
초록의 피가 다시 돌고
꺼져 가는 마음속에서도
작은 불씨 하나 살아남는다는 뜻입니다
기다림은
누군가를 붙잡는 일이 아니라
돌아올 자리를 오래 비워 두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사람은
긴 밤 끝에서도
끝내 불을 끄지 않는 사람입니다
241. 달리는 풍뎅이
이모는 금빛 풍뎅이 한 마리 길들여 온 듯
반들반들한 등을
담장 곁 볕 속에 세워 두었다
햇살이 재빛 등껍질 위를 미끄러질 때마다
이모 입가에도
윤기 어린 웃음이 번졌다
나는 숲 가장자리 아이처럼
발끝으로
그림자를 눕히며 다가갔다
손끝 하나 얹어 보려는데
이모 눈빛이 먼저 날아와
내 손등 위에 얇은 빗장을 걸었다
혹시라도 먼지 한 톨 내려앉아
풍뎅이 날개 결 흐트러질까 봐
이모는 느린 숨결 같은 눈빛으로
차 둘레를 천천히 돌았다
자동차 한 대가 아니라
이모가 오래 품고 닦아 온
금빛 자존심 한 마리가
볕 속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242.홍매화
두류공원 길섶
매화 향이
혀끝에서 천천히 녹았다
오래 입안에 물고 있던
엿가락 하나
봄빛으로 풀어지는 저녁
겨울을 건너온 가지들은
마디마다 말이 없었으나
끝내 숨기지 못한 붉음이 잔기침처럼 툭, 툭 꽃망울을 밀어 올렸다
잎조차 오기 전인데
몇 송이 꽃 먼저 몸속 불씨를 켜고
연둣빛 오기 전 세상에
가만히 봄의 체온을 새겨 넣었다
나는 그 아래 잠시 서서
턱에 걸려 있던 웃음을
늦게야 귀까지 번지게 했다
243.새벽 발걸음
밤이 덜 깬 창문에
푸른 숨 한 장 걸려 있다
새벽은 아직
젖은 이불 끝을 물고 놓아주지 않고
등뼈에 매달린 피로는
식은 재처럼 방바닥에 눌어붙어 있다
대충 얼굴만 훔친 하루가
입안으로 들어오면
덜 씹힌 모래알처럼
서걱서걱 목구멍을 지난다
누군가 건네준 미지근한 온기 하나
주머니 속 오래된 동전처럼 닳아가도
나는 그 작은 체온을 쥔 채
금 간 어둠 위를
뚜벅뚜벅 건너간다
골목의 긴 그림자가 접히고
도로 끝에 번진 붉은 빛이
젖은 눈가에 스며들면
오늘을 살아낸다는 일은
꺼지지 않으려
가만가만 숨을 고르는 불씨 하나라는 걸
늦게야 알게 된다
그리고 하루는
새 떼 지나간 하늘처럼
어느새 비어 있다
아래는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더 간결하고, 그림이 또렷하게 떠오르도록 다듬은 버전입니다.
244.찌렁이
비 온 다음 날
흙은 촉촉한 이불이 된다
그 속에서 찌렁이 가족이
꿈틀꿈틀 잠에서 깨어난다
“우리 여행 가자!”
흙길을 따라
천천히 천천히 기어간다
비가 씻어 준 길 위로
햇살이 반짝이고
바람이 살랑인다
햇살을 만나면 찌렁이는
검은 옷을 벗은 듯
몸을 길게 쭉— 펴 본다
따뜻한 햇빛 목욕
흙냄새 섞인 웃음
하늘에서는 뭉개구름이
살짝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지나간다
245.생각의 길
하루는
저무는 석양처럼
조용히 접히고
또 하루는
불꽃처럼 붉게
일어난다
생각 속에서
‘마지막’이란
끝이 없는 길 위의 표지처럼
처음부터
없었던 듯하다
모든 것은
멈춘 시계가 아니라
흐르는 강물처럼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
서둘러
먹구름 같은 생각 속으로
들어가지 말 것
가까운 나조차
안개 낀 산길처럼
잠시 사라질 수 있다
생각들은
스쳐가며
발자국 없이 흐려지고
결국 남는 것은
조용히 흐르는 시간뿐이다
245.생각중에서
하루는
저무는 석양처럼
조용히 접히고,
또 하루는
불꽃처럼 붉게
일어난다.
‘마지막’이란
끝이 없는 길 위의 표지처럼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은
멈춘 시계가 아니라
흐르는 강물처럼
이어지는 과정일 뿐이다.
서둘러
먹구름 같은 생각 속으로
들어가지 말 것.
가까운 자신도
안개 낀 산길처럼
잠시 사라질 수 있다.
생각들은
지나가며
발자국 없이 흐려진다.
246.어버이
부모가 되어 돌아보니
할미꽃처럼 굽은 어머니
등 뒤에는
어린 내 투정들이
갯바위 따개비처럼 붙어 있습니다
허리 한 번
마음 놓고 펴 보지 못한 채
자식을 위해
온갖 거센 파도를 맞으며
더 깊이 구부러진 새우등이 되었는지
나는 어느새 훌쩍 자라
둥지를 떠난 뻐꾸기처럼
동구 밖 해바라기처럼
이제나저제나
어머니를 서성입니다
효도폰에
가뭄처럼 드문 전화 한 통에도
“그래, 바쁘지
어쩌다 전화했노”
먼저 안부를 묻는 어머니
“살은 좀 쪘나
밥은 잘 먹고 있나”
그 말 끝마다
가슴이 먼저 젖어 듭니다
어릴 적엔
먹을 것이 없던 날이 많았는데
지금은
먹을 것이 넘쳐나도
이상하게도
허기가 더 자주 찾아옵니다
어머니는 오늘도
자식의 밥 한 끼를
평생의 걱정처럼 안고 삽니다
247.여름의 문장
햇살이 가까이 내려와
어깨 위에
망설임 없이 앉는다
비는 아직 오지 않고
공기는 오래된 유리처럼
작은 금을 품은 채 버틴다
사람들의 말은
계절보다 먼저 달아나고
계절은 그 뒤를 따라온다
나는 이름 붙지 않은 시간 속에
조용히 서 있다
담쟁이 넝쿨은
벽의 숨을 더듬으며
밤새 푸른 균열을 만든다
닫히지 않은 한 문장이
여름의 끝을 밀어 올린다.
248.겨울 창가
바람은
풀리지 않은 목도리 끝처럼
허공을 오래 흔든다
저녁은
꺼져가는 불씨 하나 품은 채
창가에 웅크리고
회색 그림자 하나
가로등 어깨에 기대어 떨고
유리창 안에는
늦게 돌아온 시간들이
입김처럼 번진다
굽은 골목을 닮은
생의 문장들이
차가운 유리 위에
서리꽃처럼 번질 때면
겹겹의 날들은
마른 양파껍질처럼 바스라지고
고요한 마음 하나
창틀에 얇게 내려앉는다
눈은
세상의 소음을 덮으려
하얀 이불을 펴고 있지만
빗물은 끝내
젖은 새의 울음 같은 소리로
바람의 등을 붙잡은 채
긴 밤을 건너고 있다
249.백 살은 살아봐야 알 일
오늘 한 장 넘기려 했는데
달력이 먼저 손끝을 빠져나가고
내일쯤 숨 돌리려 했는데
계절 하나가 슬그머니
등 뒤에 와 앉는다
한 달은
골목 어귀를 어슬렁거리던 바람 같더니
어느새 일 년이 되어
삼백예순닷새를 한입에 삼켜 버린다
십 년쯤은
먼 산에 걸린 구름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면
신발 밑창처럼 닳아 있다
해야 할 일들은
아직도 산맥을 이루고
시간은
강물처럼 등을 떠민다
어느 날 문득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큰 목소리로 기침을 한다
백세시대라지만
환갑은
징검다리 몇 개 건너듯 지나가고
칠순 언덕에 서면
자식들과 손주들이
따뜻한 밥 한 끼를 차려 놓고
주머니에 작은 햇살 몇 닢 넣어 준다
팔순쯤 되면
주름마다 묵혀 둔 이야기들이
잘 익은 감처럼 툭툭 떨어지고
세월 자랑도
웃음 속에 천천히 풀릴 것이다
구순에는
숟가락 들 힘 남아 있고
제 그림자 따라
제 발로 걸을 수만 있어도
그것이 곧 축복이라 말할 테고
백 살은
아직 건너지 않은 강이다
강 건너에 무엇이 있는지는
끝내
살아본 사람만 안다
250.가을꽃
가을은
꽃잎으로 피지 않고
저무는 빛으로 익어간다
달콤한 향기 대신
먼 들녘을 건너온 바람 끝에
은은한 그리움 하나 매달아 두고
화사하게 피어나지 않아도
낙엽은 마지막 숨까지
붉은 체온으로 길을 덥힌다
피어 있는 순간보다
조용히 내려앉는 시간이
더 깊은 꽃이 되어
빈 가지 사이로
귀가하는 새 한 마리
저녁 하늘에 낮은 울음 남기면
갈바람 지난 자리마다
흩어진 잎들은
한철 사랑의 편지처럼 물들고
송골송골 맺힌 꽃망울보다
노을에 젖어드는 단풍 한 잎이
더 오래 마음을 흔든다
그래서 가을은
사라지는 계절이 아니라
아름답게 늙어가는 법을 가르치는
한 송이 늦은 꽃이었다
251.가을
숲길 아래
가을은 지금
붉은 편지를 접고 있을까
나뭇잎마다
저녁노을 한 장씩 숨겨 두고
바람의 손끝으로
천천히 불을 밝히고 있을까
귀를 대면
멀리서 계절이 걸어오는 소리
마른 풀잎 하나도
작은 종처럼 떨리고
산 그림자 깊은 곳에서는
그리움 몇 마리
서둘러 겨울 쪽으로 날아간다
생각은 어느새
굽은 산길 허리를 붙들고
구름보다 먼저
성큼성큼
가을 속으로 들어간다
252.낙엽
꽃이라 불리지 못해도
낙엽은
늦게 피는 가을의 입술이다
달콤한 향기 대신
젖은 흙 냄새 같은
그리움을 품고
한 잎 두 잎
세상 쪽으로 내려앉는다
피어 있을 때보다
떠나는 순간이 더 아름다운 것은
저마다
마지막 빛 하나씩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짙어가는 가을날
길모퉁이에 옹기종기 모인 낙엽들은
다 지나간 계절이
남겨두고 간
따뜻한 인사 같다
253.파
도마 위에 누운 파는
푸른 냄새로
저녁상을 깨운다
라면 속에서도
부침개 가장자리에서도
국물 깊은 곳에서도
파는 늘
제 향 하나로
세상을 데운다
어느 늙은 할아버지의
굽은 허리에도
파 잎 같은 세월이 흔들리고
도레미의 ‘도’는
돌아가는 길 끝에서
다시 첫마음을 만난다
254.벽시계
온종일
벽에 매달린 새 한 마리
똑딱똑딱
시간의 열매를 쪼아 먹는다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것은
시간이란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그렇게
시곗바늘 끝에서
조용히 마르고 있다
255.모과
울퉁불퉁한 모과 하나
가을의 주머니처럼
향기를 숨기고 있다
반듯한 것들 사이에서
못생김은 오히려
오래 기억되는 얼굴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세월의 곡선마다
늦은 햇살이
노랗게 스며 있다
가지마다 매달린 모과는
저녁 무렵
하나둘 켜지는
가을의 신호등 같다
256.할머니 자동차
할머니는 오늘도
바퀴 달린 작은 계절 하나를
밀고 간다
손자 손때 묻은
낡은 유모차 안에는
강아지 한 마리와
늙은 햇살이 타고 있다
횡단보도 위를
천천히 건너는 동안
바쁜 자동차들도
숨을 한 번 접어 넣고
조용히 기다린다
세상은 가끔
가장 느린 걸음 앞에서
먼저 길을 배운다
257.군위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에서
황금 들녘 끝에
바람이 오래 묵은 이름들을 흔든다
나는 잠시
세월의 짐을 벗어 둔 나그네처럼
낡은 평상 끝에 마음을 걸쳐 본다
한때는 하늘 끝까지 닿을 듯
차곡차곡 쌓아 올렸던 날들의 탑도
저녁 햇살 한 줌에
허물어지는 모래성 같고
손금처럼 품어 키운 자식들은
철새처럼 제 계절을 찾아 날아가고
서랍 깊숙이 숨겨 둔 재물은
늙은 나무의 마른 잎처럼
쓸 곳을 잃은 채 바스락거린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주파수의 별이 되어
엇갈린 밤하늘을 떠돌고
마음의 주소마저 흐려진 자리에서
나는 문득
가을 들판의 숨결에 귀를 기울인다
억새는 지나온 기억들을
되새김질하듯 흔들고
바람은 오래된 상처 위에
조용히 풀씨를 뿌린다
이제는
무언가를 더 움켜쥐기보다
천천히 비워진 마음 한 칸에
노을 한 장 들여놓고 싶다
삶도 결국
잠시 쉬어 가는 숲길 하나였음을
황금빛 들판이 말없이 가르쳐 준다
258.잡을 수 없는 그림자
마음은 늘
잡히지 않는 강물의 그림자였다
나는 내 빛으로
그대의 깊이를 헤아리려 했으나
사람의 속마음은
저녁 안개처럼 손끝에서 흩어진다
우리는 모두
다른 향기를 품은 계절이 되어
평행선 같은 하루 위를
끝없이 스쳐 지나간다
세월은 바람의 얼굴을 하고
등 뒤에서 몰래 지나가는데
나는 자꾸만
사라지는 그림자를 붙들려
허공에 손을 뻗고 있었다
욕망은 카멜레온의 눈빛처럼
빛 따라 색을 바꾸고
기다림은 가파른 산길이 되어
숨 가쁜 발목을 붙든다
그러나
마음이란 원래
머물지 못하는 구름 같은 것
나도 나를 다 모르는데
어찌 그대의 바다를 다 안다 하랴
스쳐 가는 것은
강물처럼 흘러가게 두고
변해 가는 마음 또한
계절의 일이라 여기면
어느새 삶은
햇살 따라 고개 드는 해바라기처럼
가난한 영혼의 들판에도
조용한 웃음을 피워 올린다
259.가을비
갈빛 창가에
가을이 젖은 어깨를 기대어 선다
빗방울 하나마다
잊고 살던 그리움이 매달려
조용히 유리창을 두드린다
젖은 바람은
낡은 추억의 골목을 돌아
내 마음 깊은 곳에
서늘한 물결을 풀어 놓는다
나는 떨어지는 빗물 속에서
오래 묵은 고독을 씻어 내고
대지는 젖은 숨결로
새로운 내일의 싹을 틔운다
비는 밤새
희미한 별빛처럼 내리고
희망은 연둣빛 잎사귀 되어
어둠 속에서도 자라난다
갈잎 끝에 맺힌 물방울은
상처 입은 계절의 눈물 같고
메마른 대지는
그 눈물을 품어 다시 살아난다
어둠은 깊어도
가슴속 작은 불씨 하나
빗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채
붉게 타오른다.
260.전쟁의 그림자
들판 끝,
붉은 해가 마지막 피를 접으면
산짐승들조차
어둠의 품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나눈다.
그런데 인간의 밤은
검은 재를 뒤집어쓴 하늘 아래,
별들의 눈꺼풀마저 찢어 버린다.
허기진 들개는
살아남기 위해 이빨을 세우지만,
사람은 욕망이라는 쇠사슬을 달구어
서로의 영혼에 족쇄를 채우고
눈물까지 깃발처럼 꽂아 둔다.
강물은
핏빛으로 얼룩진 시간을 끌고 가며
모든 죄를 씻어 내리는 척하지만,
바람은 아직도
타버린 이름들의 재 냄새를 품고
폐허의 골목을 떠돈다.
북녘에서 내려온 칼바람도,
바다 건너 밀려온 검은 파도도
끝내 남긴 것은
승리의 노래가 아니라,
사람 잃은 울음,
무너진 잠,
돌아오지 못한 저녁 한 끼였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새벽의 숫돌 위에
또 다른 증오의 칼날을 세운다.
묻고 싶다.
꽃이 피어야 할 땅에
왜 사람들은 아직도
포성의 씨앗을 묻으려 하는가.
사람은
더 깊이 껴안기 위해
서로의 손을 배우며 태어난 것 아닌가.
부디 이제는
총구보다 먼저
상처 입은 어깨를 감싸는 손이,
깃발보다 먼저
눈물의 이름을 불러 주는 목소리가,
폐허보다 먼저
한 사람의 온기를 지켜 내는
사람이기를.
261.어머니 생각
겨울 하늘엔
검은 가마솥 같은 구름이
무겁게 걸려 있습니다
그 깊은 속에서
어머니 삼베적삼 같은 흰 눈이
천천히 세상으로 내려옵니다
처마 끝에 소복이 쌓인 눈을 보면
눈부시게 희던 어머니 저고리가 떠오르고
추운 새벽마다
말없이 내 이마를 짚어 주시던
따뜻한 손길도 따라옵니다
마을 길 위로 내려앉는 흰 눈은
여름밤 초가지붕 위에 피어나던
박꽃처럼 환합니다
우물가에서 물을 길으시던 어머니는
굽은 허리로 하루의 고단함을 견디시고
찬 손등으로 젖은 앞치마를 훔치며
긴 한숨 하나
저녁 연기 속에 묻어 두곤 하셨습니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눈은 하늘이 보내는
어머니의 편지라는 것을
그리운 사람들에게
끝내 다 전하지 못한 안부가
하얀 눈송이 되어
소리 없이 세상에 내려온다는 것을
어머니,
오늘도 조용히 눈이 내립니다
식어 있던 가슴을 데우고
잊고 지낸 시간들을
눈빛처럼 하나씩 불러냅니다
검푸른 겨울 하늘 아래
하얗게 쏟아지는 눈 속에서도
나는 아직
어머니를 향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262.모래시계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리듯
오늘도 하루는 말없이 지나간다
잠깐 머물다 간 웃음 하나
가슴에 스미던 눈빛 하나는
잔잔한 물결이 되어
오래 마음의 창가를 두드린다
잊으려 할수록
신발 끝에 밟힌 모래처럼
툭툭 털어내도
끝내 남아 따라오는 기억들
그 기억들은
어느새 마음 깊은 방에 들어와
희미한 음악처럼 조용히 춤추고 있다
아침이 열리고
저녁이 닫히는 길목에서
나는 오늘도
모래시계를 뒤집듯
흘러간 시간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263.할머니
팔베개하고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니
높고 맑은
하늘가에
또렷하게 떠오르는 얼굴
뒷산 자락 베고
누워 계시는
보고픈 할머니
어젯밤 총총
별이 반짝이더니
별 따러 가셨나 보다
하늘 끝에
할머니 웃음만
은은히 남아 있다
264.천사 나팔꽃
하늘 끝에 매달린
작은 기도의 종 하나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말없이 고개 숙인다
환한 낮에는
향기마저 숨겨 두었다가
별빛 젖는 밤이면
고운 숨결 풀어내어
어둠의 이마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벌나비도 모르게
깊은 향기 피워 올리고
산들바람 손을 잡고
외로운 창가와
잠 못 드는 골목마다
향기를 골고루 나누어 준다
어쩌면 저 꽃은
하늘이 내려보낸 천사
낮아질수록
더 향기로워지는 사랑을
밤마다 세상 아래 밝혀 주고 있다
265.그리움
가슴 한켠에
기다림의 샘물 한 그릇 품고
사람들은 강물 위를 떠도는
작은 배처럼 살아간다
어떤 이는 햇살을 따라
반짝이는 물길로 흘러가고
어떤 이는 안개 낀 새벽처럼
조용히 강에 몸을 숨긴다
살아간다는 건
종이배 하나
물 위에 띄우는 일과 닮아 있다
그리움은
붙잡을수록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놓아줄수록
강물의 뿌리처럼 깊어진다
사랑 또한 그렇다
가득 찬 잔처럼 넘쳐 흐르기도 하고
빈 의자 하나 남겨 둘 때는
오래 머무는 바람처럼 곁에 앉는다
슬픔은
먹구름 한 점이
강물 위로 번져가는 것이고
기쁨은
물새 한 마리 스친 자리처럼 짧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다른 나루터의 등불이지만
끝내 하나의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처럼 만나게 된다
그러니 사람은
무거운 욕심보다
작은 웃음 몇 개와
따뜻한 말 한 조각이면 충분하다
저문 강가에 기대어
노을빛 스민 물결처럼 하루를 바라보며
오늘도 조용히 살아간다
266.행복의 길
바람 부는 쪽으로
물길 흐르는 쪽으로
웃음 하나 품고
작은 배 한 척 띄운다
하루는 구름처럼 흘러가고
사람들은 강물처럼 스쳐 간다
저마다 다른 길을 걸어도
저녁이면
불빛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돌부리에 채여 아픈 날도 있지만
햇살 한 줄기 내려앉으면
마음은 다시 환해진다
삶은 움켜쥐는 일이 아니라
담고 비워 가는 일
돌아보니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따뜻한 말 한마디
서로의 곁을 지켜 주는 일이었다
267.텔레비전
벽에 걸린 작은 바다
수천 개 파도가 눈동자 속을 흔든다
사람들은 불빛 낚싯대를 드리우고
웃음과 눈물을 건져 올리며
남의 하루를 제 삶처럼 끌어안는다
세상은
검은 액자 속에서
끝없이 피고 진다
우리는 어느새
밥상보다 먼저
빛 앞에 둘러앉아
마음의 리모컨을 넘긴다
268.장미
비바람에 눕던 풀잎들이
새벽에 다시 일어난다
삶도 그렇게
쓰러졌다 일어나며 길을 건넌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쇠사슬을 끌며
꽃이 피고 지는 것도 잊은 채 살아간다
도시 담장 아래 붉은 장미를 보는 순간
나는 알았다
낙엽이 붉은 이유는
누군가를 오래 그리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장미공원에는
수천 개의 심장이 함께 피어 있다
꽃이 사람을 보는지
사람이 꽃을 보는지
그리움이 저녁 공기처럼 번진다
가을 장미는 다르다
서리를 알면서도 피어나는
늦은 사랑처럼
조용히 붉어진다
269.미우다 해변
잔잔한 해변은
먼 길을 걸어온 시간들이
잠시 등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는 푸른 의자였다
지친 날들은
햇살처럼 바다 위에 스며들고
에메랄드빛 물결은
오래 접어 둔 마음처럼
맑고 깊은 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파도는
가슴속 오래 묵은 이름들을
조용히 지워 가는
하얀 손끝이었고
모래사장은
끝내 보내지 못한 편지처럼
따뜻한 그리움을 품은 채
낮은 숨을 쉬고 있었다
바람은 철새가 되어
잊힌 기억들을 물어 나르고
나는 물빛 위에 잠시 머무는
옅은 구름처럼 서 있었다
밀려오는 파도는
잊고 지낸 시간들을 흔들어 깨우고
이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먼 바다로 되돌아갔다
삶은
밀려왔다 사라지는 파도 같고
그리움은
마음 한쪽에서 천천히 깊어지는
작은 바다라는 것을
저녁 물결은
말없이 흔들리며
내게 오래 들려주고 있었다
270.낙동강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흐르는 낙동강은
유리잔 속 물빛처럼
맑고 느리게 흘러갑니다
눈부신 햇살 아래
강변의 푸른 풀밭은
빛바랜 편지 한 장처럼
묵은 그리움을 품은 채
가만히 숨을 쉽니다
강물은
낡은 문짝을 두드리는 바람처럼
잊힌 기억의 먼지를 털어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바다 쪽으로 몸을 눕힙니다
바람은
한때 입술 끝에 머물던 이름들을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 놓고
물결 사이를 스쳐
푸른 하늘 끝으로 밀어 올립니다
눈을 감으면
낙동강 건너 어디쯤에서
그리운 얼굴들이
새벽 물안개처럼
희미하게 피어오릅니다
끝내 건네지 못한 마음 하나
맑은 물빛 위를 떠도는 물새처럼
몇 번이고 제자리만 맴돌다가
내 가슴 가장 깊고 고요한 곳에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고단했던 하루를 벗어두고
푸른 하늘 아래 오래 서 있으면
내 마음 또한
잔잔한 물결 속 그림자처럼
천천히 강물에 스며듭니다
삶도 물결처럼
잠시 밀려왔다가
끝내는 소리 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을
이제야 강물은
늙은 스승의 뒷모습처럼
아무 말 없이
흐르는 삶의 법칙 하나를
조용히 내게 가르쳐 줍니다
271.그날까지
동방의 새벽은
푸른 강물 위로
햇살을 비단처럼 풀어놓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검은 먹구름 같은 바람이 밀려와
삼천리 산하의 빛을 삼켜버렸고
하늘마저 재빛 상복을 걸친 채
낮에도 울음을 흘렸습니다
거리마다
땅을 치며 울부짖는 백성들의 통곡은
메마른 들녘을 적시는 장맛비 같았고
“대한독립 만세”를 품은 젊은 숨결들은
새벽 풀잎 끝 이슬처럼
총칼 아래 스러져 갔습니다
그러나 쓰러진 자리마다
붉은 꽃씨 하나씩 남아
조국의 산천에 묻혔고
그 뜨거운 핏물은 오늘도
무궁화 되어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시절
탐욕의 그림자에 영혼을 판 자들은
외세의 술잔에 입 맞추며
비단 웃음 속에 검은 혀를 숨긴 채
노래하고 춤추고 있었습니다
하늘도 무심하였던가
지옥 같은 서른여섯 해의 밤
꽃잎 같던 어린 소녀들은
폭풍 속 들꽃처럼 꺾여
짐승의 발굽 아래 짓밟히며
나라 잃은 설움을
피눈물로 삼켜야 했습니다
독립을 외치던 별들은
형장의 새벽하늘로 떨어졌고
찢긴 육신은 이름 없는 들판의 흙이 되어
바람 속을 떠돌았습니다
산골짜기 깊은 곳
그들의 백골은 흙으로 스며
어느 봄날
한 송이 들국화로 다시 피어나
오늘도 우리 가슴을 흔들고 있습니다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핏빛으로 건너온 그 계절을
어찌 지울 수 있겠습니까
뼈를 깎아 지켜낸 조국의 이름을
그러나 꺼지지 않은 혼은
긴 어둠 끝에서 횃불이 되었고
그들의 염원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운
굳건한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폐허 위에 강물은 다시 흐르고
상처 입은 역사 위에도
끝내 새벽은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아직
한반도의 허리에는
차가운 철조망이 겨울 강처럼 흐르고
같은 피를 나눈 심장끼리
서로를 향해 침묵의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이제는
동과 서가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고
증오의 돌담을 허물어야 합니다
용서의 강물이 흐를 때
갈라진 산하는 다시 이어지고
사랑의 불빛은
분단의 긴 밤을 녹여낼 것입니다
그날까지
흩어진 숨결들을 하나로 모아
한민족의 뜨거운 심장을
세계의 하늘 아래 힘차게 울려봅시다
“대한민국 만세”의 메아리가
백두에서 한라까지 번져가고
마침내 분단의 겨울이 끝나는 날
우리는 비로소
눈부신 통일의 태양 아래서
진정한 광복의 아침을
뜨겁게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272.커피
한 잔의 커피향 사이로
너의 모습이
안개비처럼 내려앉는다
따뜻한 한 모금
모금마다
내 마음은
꽃처럼 조용히 피어난다
고요한 커피잔 속에는
너의 그림자가
향기처럼 은은히 맴돌고
조금씩 식어가는
커피잔에도
너를 향한 내마음은
식을줄 모른다
273.베풂
나의 작은 양보 하나가
메마른 얼굴 위에 번지는 햇살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웃음을 피워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따뜻한 행복은 없습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은
날카로운 가시처럼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상처는 겨울 그림자처럼
내 영혼에도 드리워집니다
상대의 단점만 들춰내는 일은
돌멩이를 던지듯 쉽지만
장점을 발견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는 일은
메마른 땅에 꽃씨를 심듯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거울 앞에 서 있으면서도
자신의 얼굴은 보지 못한 채
남의 흠만 바라보는 사람처럼
하루를 살아갑니다
건전한 비판도
칼날처럼 날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폭풍처럼 몰아치면
상대의 마음엔
상처만 남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별처럼 소중하고
꽃처럼 고귀한 존재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남긴 아픔은
잔잔한 호수 위에 번지는 물결처럼
결국 다시 나에게 돌아옵니다
가끔은 자신을 돌아보며
닫힌 마음을 풀어내고
상대를 따뜻하게 품어 안는다면
봄바람이 얼어붙은 들판을 녹이듯
너와 나의 삶에도
조용한 행복이 피어날 것입니다
274.「푸르다는 것은」
푸르다는 것은
지친 마음 위에
투명한 물빛 하나
조용히 흘려보내는 일이다
푸르다는 것은
넓은 바다처럼
가슴 깊이 잠들어 있던
바람까지 흔들어 깨우고
푸른 숲의 초록 숨결로
지친 등을 천천히 어루만지는 일이다
푸르다는 것은
맑은 가을 하늘처럼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고요한 빛 한 장
가만히 내려앉는 일이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처럼
두 팔로는 다 안을 수 없는
시원한 숨 하나가
가슴 가득 밀려오는 일이다
푸르다는 것은
긴 여행 끝에 만난 바람처럼
세상 속을 걷다가도
가슴 깊은 곳에
맑은 숨 하나 품게 되는 일이다
그리고 오늘을
햇살처럼 환하게,
숲길처럼 푸르게
천천히 살아가는 오월이다.
275.「콩나물 쉼터」
길은 하루 종일
세상의 무게를 실은 늙은 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다
마침내 한 모금 숨을 내려놓을
쉼터를 찾는다.
도로 가장자리,
세월을 낚고 있는 남루한 할머니.
그녀 앞의 콩나물은
새벽마다 다시 돋아나는
가난한 희망의 뿌리 같다.
할머니는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으로
사람들의 허기뿐 아니라
오늘을 버티는 마음까지
따뜻한 국물처럼 담아낸다.
트럭들이 천둥처럼
도로를 흔들며 지나갈 때마다
할머니의 가느다란 손은
바람 앞 촛불처럼 떨리고,
그녀의 기침은
오래 끓인 곰탕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천천히 끓어오른다.
누구를 먹이려고
꺼져 가는 등잔불 같은 숨 하나 붙들고
하루 끝에 앉아 있는지.
도로가 쉼터의 낡은 의자는
지친 시간들이 잠시 쉬어 가는
오래된 책 속 쉼표 같다.
세월은 젖은 볏짚처럼
그녀의 등을 조금씩 굽혀 놓았지만,
삶의 불씨만은
재 속 숯불처럼 끝내 남겨 두었다.
나는 콩나물 한 봉지를 들고
길가에 앉은 할머니를 바라본다.
그 모습은 저녁 노을 속에
묵묵히 서 있는 한 그루 나무 같고,
비닐봉지 속 콩나물에서는
갓 지은 밥 냄새 같은
따뜻한 사람 냄새가 묻어난다.
우리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허기를 품은 콩나물처럼
하루를 건너와
바람 속에서도 살아남는
불씨 하나를 지키게 될지 모른다.
276.목요시장
목요일이면
수성구 신매 목요장은
낡은 주머니 속 동전처럼
달그락달그락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거리는
허기진 개미굴이 되어
사람들을 천천히 골목 속으로 삼키고
노점마다 번지는
아지매들 웃음소리는
김 오른 국밥 냄비처럼
시장 허공을 뽀얗게 데운다
수북이 쌓인 채소들은
푸른 산맥의 등허리 같고
생선 비린내는
멀리 떠났다가 돌아온 바닷바람처럼
골목 어깨를 스친다
값을 묻는 목소리들은
참새 떼처럼 가벼운 날개를 달고
이 좌판 저 좌판 사이를 맴돌다가
낯선 사람들 어깨 위에
슬며시 정을 내려놓는다
“싱싱하고 맛 끝내 줍니더!”
“한 번 보고 가이소!”
“싸게 싸게 줄게예!”
구수한 아지매들 목청은
돌솥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처럼
오래 씹을수록 따뜻하고
사람들 가슴 한쪽에
천천히 불을 지핀다
흥정 소리 뒤섞인 시장 골목은
하루살이 같은 삶들이 모여 부르는
낡고도 정겨운 합창이 되고
두 손 가득 장을 본 사람들의 발걸음은
백 점 받아 들고 뛰어가는
아이의 심장처럼
골목 끝까지 콩닥콩닥 환하다
내가 즐겨 찾는 목요시장은
한 상 가득 차려 놓은 저녁밥처럼
흩어진 사람들 마음을 불러 모아
서로의 체온과 입담으로
구수한 사람 냄새를 끓여 낸다
277.별
별을 보고
별을 이야기하고
별을 품고
별을 노래하며
별을 꿈꾸고
그리워했다.
높고 넓은 하늘이 있어
별은 편히 누울 수 있고
깊고 어두운 밤이 있어
별은 더욱 반짝인다.
별 볼 일 없다고
스스로를 탓하지 마라.
별 볼 일 있다고
함부로 자랑하지 마라.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큰 별이 될 수 있는
작은 별 하나 품고 있다.
별무리 속에서
제 빛을 찾으려 하고
별처럼 살아 보겠다고
별 이야기를 하며
별처럼 웃고
큰소리도 친다.
낮에는
햇살 속에 숨어 잠들다가도
밤이 오면
외로운 마음 위에 내려앉아
조용히 반짝이는 별.
별처럼 살겠다고
애써 말하지 마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나는 이미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별이다.
278.호감
처음 본 순간
한 송이 꽃이 되어
내 마음에 피어났다.
뽀얀 얼굴과
장밋빛 입술,
눈길이 스칠 때마다
미소 한 잎씩 돋아나
가슴에 봄빛을 물들였다.
행여 바람에 흩어질까
나는 눈을 감고
눈꺼풀 속 작은 정원에
그 미소를 고이 심어 두었다.
지금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그 꽃 한 송이는
비내리는 금호강 물결에
잔잔히 흔들리고 있다.
279.목요수업 가는
이서면 모산길 끝,
파란 잔디가
초록 융단처럼 펼쳐지고
햇살 한 줌이
반가운 손님처럼 다가왔다.
목요일은
둥근 꽃 한 송이로 피어나고,
그 꽃 둘레에 모인 사람들은
꽃향기 같은 웃음을 나누었다.
상추는 싱그러운 푸름을 펼쳐 놓고,
수육은 따뜻한 아랫목처럼 다가와
입가에 정을 머금게 했다.
붉은 수박과 참외 조각에는
여름 햇살의 달콤함이 배어 있었고,
빵은 고운 손길처럼 부드러워
조용히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시마와 된장은
오래된 편지처럼 소박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바다와 땅의 마음을 전해 주었다.
꽃처럼 환한 선생님들,
큰 나무 그늘 같은 이사장님,
그리고 햇살처럼 밝은 박자문 님의 미소 사이로
시간은 잔잔한 강물처럼 흘러갔다.
말보다 따뜻한 정은
봄비처럼
서로의 어깨에 가만히 내려앉고,
모산길의 오후,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온기 하나는
잘 익어 가는 과일처럼
가슴속에서 천천히 익어
한 편의 시가 되었다.
나는 그 시를 품은 채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돌아왔다.
280.장미
장미는 마치
초록 치마를 입은 무희처럼
치맛자락 아래 송곳 같은 가시 하나를 숨기고 있었다
그 향기는
여름의 등을 떠미는 바람처럼
잠든 계절들을 깨워
내 곁으로 불러왔다
나는 마치 편지를 받아 적는 아이처럼
꽃잎마다 번지는
붉은 빛을 가만히 마음에 옮겨 적었다
가시에 찔린 아픔은
마치 꽃이 건네는
작은 입장권처럼
따끔했지만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리운 얼굴을 품듯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꺾어
외로움 같은 화병에
오래도록 꽂아 두고 싶었다.
281.하루의 언저리
아침에 갈아입고 나온 속옷은
땀에 젖은 피부를 훔치는
작은 수건이 되어
하루 종일 말없이 몸을 감싼다.
따가운 햇살은
목마른 들녘을 집어삼키는
불길이 되어 온몸을 서서히 달군다.
살아간다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언덕 하나를 품고 사는 일,
무거운 숨을 어깨에 걸친 채
한 걸음씩 밀어 올리는 일이다.
그러나
문득 스치는 바람은
목마른 가슴에 솟아나는 샘물,
거친 숨결 사이로 스며들어
잠시 쉼표 하나를 놓아 준다.
손에 쥔 생수병은
오랜 기다림 끝에 건네진 손길처럼
지친 손을 조용히 다독인다.
가족의 생계는
땅속 깊이 뿌리내린 나무,
거센 바람에도 흔들릴 뿐
결코 쓰러지지 않는 삶의 기둥이다.
그렇게 살아낸 하루의 언저리는
붉게 익은 서산마루에 걸려
오랜만에 돌아온 가족의 얼굴이 되고,
나는 그 환한 미소 속에서
내일을 향한 숨 하나를 고른다.
282.하루
땅거미 내려앉은 퇴근길,
비좁은 가게마다 낡은 의자 위에 똬리 튼 하얀 함박웃음들이
하루의 굳은살을 천천히 녹인다.
무겁게 엉킨 생각들은 쓴 소주잔에 띄워 하나씩, 하나씩, 강물처럼 흘려보낸다.
새벽 들고양이가
훔쳐 가는 쥐꼬리만 한 밤.
객차처럼 길게 이어진 이야기 속으로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가고,
잠시 짐을 벗어둔 어깨들 위로
말들은 물고기 떼처럼
유유히 헤엄친다.
오가는 이야기가 바닷속 물길처럼 깊어질수록,
새털 같은 휴식은 손가락 사이 모래처럼 더 빠르게 흘러내린다.
동살 한 줄,
새벽의 이마를 쓰다듬으면
사람들은 저마다
어깨에 보이지 않는 산 하나씩 얹은 채,
접힌 날개 같은 골목길을 지나 좁고 긴 새벽의 강을 건넌다.
하루라는 먼 바다를 향해,
오늘보다 내일의 들녘이 더 넉넉한 이삭으로 출렁이기를 바라며.
바람에 스러진 어제의 잎새들은 초록빛 바다에 띄워 보내고,
먼 수평선의 빛을 따라 묵묵히 삶의 노를 젓는다.
그렇게, 또 하루를 향해.
283.환성사 성전암
팔공산 자락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온
고단한 바람이
따스한 양지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십육 나한 모신 성전암
환성사 언덕 위에 고요히 서서
무학산 자락을 바라본다
저 멀리
초례봉과 낙타봉은
두 손 모은 수행자처럼
마주 서서 미소 짓고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암반 틈에서
맑은 생명수 솟아나 그 물길 따라
들꽃 한 송이 조용히 피어난다
천년의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
환성사 언덕 위 성전암은
무학산 품에 피어난
한 송이 연꽃이 되어 고요히 빛난다
284.첫눈
첫눈이 내리면 소나무는 빌려 입은 코트처럼 하얀 어깨를 늘어뜨리고
눈꽃은 기다리는 편지처럼 나뭇가지 마디마다 소복소복 피어난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계절의 첫 숨결을 흔들어 놓고
나는 그 한가운데 서서 하얀 편지 위를 더듬는 글자처럼 조심스레 첫눈을 밟는다
나무들은 말없이 서 있고 눈꽃들은 은빛 떨림으로 가지 끝에 매달린다
그 순간 세상은 겨울의 첫 편지가 되고
하늘에서 내려온 하얀 문장들이 내 어깨와 마음 위에 쌓인다
아무 말 없이 찾아온 계절이 환한 목소리로 내 곁에 앉는 아침
나는 그 속에서 막 도착한 겨울에게 조용히 박수를 보낸다
285.이팝꽃
금호강으로 이어지는 고갯길
나뭇가지마다
보슬보슬 피어 있는 새하얀 이팝꽃
"밥 묵었나?"
"안 묵었다."
등에 붙은 배도 잊은 채
노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눈만 멀뚱멀뚱 굴리던 나를
외할머니는 미꾸리처럼 빠져나가는
손목을 붙들고
꼬질꼬질한 손바닥 위에
꽁보리밥 한 덩이와
강된장 한 숟가락을 툭 얹어 주셨다
허기진 봄날
그냥 세워 둘 수 없었던 할머니 마음이
나뭇가지 마디마다
하얀 꽃으로 피어났는지
이팝꽃은 해마다 고갯길을 덮는다
지나가는 바람에 꽃잎이 날려
손등에 나비처럼 내려앉으면
강된장 냄새 스미던
외할머니가 먼저 떠오른다
세상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풍성한 상을 차려 놓았는데
나는 아직도
젓가락 끝으로 밥투정만 뒤적인다
286.보아 준다면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그저 시선 하나 스쳐 머문다면
나는
마른 껍질 위에서도
조용히 틈을 내는 빛의 씨앗으로 살겠습니다
눈이 내려도, 비가 쏟아져도
그 젖음 속에서
한쪽으로만 아주 느리게 기울어 가는
숨결 하나로 남겠습니다
벽에 기대 선 그림자처럼
어디로도 완전히 떠나지 못한 채
말없이 길어지는 존재로
그 자리에 머물겠습니다
시간이 나를 늙은 문턱까지 밀어도
나는 끝내 봄이 되지 못한 봄으로
가장 낮은 계절의 가장자리쯤에
조용히 남아 있겠습니다
고목의 갈라진 틈에서
이름 없이 피어나는 꽃처럼
크지도, 환하지도 않게
그저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당신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도
나는 사라졌다기보다
잠시 형태를 낮춘 빛처럼
아주 조용히 그 자리에 있겠습니다
287.확진
무탈하던 하루가
저녁의 문턱에서
조용히 방향을 잃는다
몇 번의 기침은
아직 오지 않은 예고처럼
공기 속을 느리게 흔들고
몸은
보이지 않는 신호에 가만히 점등된다
손안의 노란 표식 하나
괜찮다는 말 대신
잠시 멈추라는 말처럼
시간은
둥근 궤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같은 자리를 오래 밟고
나는
밖으로 나가지 못한
하루와 함께
안쪽으로만 더 깊어진다
먹고
잠들고
깨어나도 여전히 이어지는
조용한 반복 속에서
세상은 멀어지고
방 안의 공기만
천천히 나를 다시 쓰고 있다
288.육삼.오염된 선거
투표함은
처음엔 유리처럼 투명했으나
지금은
속이 보이지 않는 물처럼 변해 있다
손끝에 찍힌 잉크는
표식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의심처럼 번져
종이의 빈칸 사이로 스며든다
종이가 한 번 접힐 때마다
길은 하나씩 줄어들고
먼저 도착한 말들은 이미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처럼 서 있다
거리의 웃음들은
가면처럼 걸려 있지만
가면 아래 얼굴들은
서서히 자기 이름을 잃어간다
하루는 질서처럼 흐르지만
그 질서의 바닥에서는
말들이 서로의 방향을 바꾸며 흔들리고
진실은 깃털처럼 가벼워져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개표의 밤
별들은 너무 많아
오히려 길이 되지 못한
불빛처럼 떠 있고
내 손의 한 표는 숟가락만 쥔 채
밥이 사라진 식탁 위의
사람처럼 허공을 긁는다
이것이 민주라면
나는 묻는다
왜 선택은 언제나
이미 쓰인 문장처럼 느껴지는가
닫힌 투표함은
끝내 열리지 않는 방처럼 남고
열리지 않는 것들만
시대의 무게처럼 쌓여 간다
289.생각을 담는 정원
경부선과 KTX, 두 줄기 쇳물 강이 쉼 없이 시간을 실어 나르는 사이,
그 한가운데 생각 한 알이 싹을 틔운 섬이 있다.
매호동의 햇살은 오래된 편지처럼 정원에 내려앉고,
행운목은 가슴속 깊이 품어온 비밀을 꽃봉오리로 번역하며
초록 손끝마다 작은 별들을 매달아 놓는다.
덴마크무궁화는 먼 바다를 건너온 바람의 악기,
연화수와 카프라는 이국의 꿈이 잠시 머물다 간 구름의 발자국이다.
붉은 캐리안드라는 저녁노을이 흘린 심장의 불씨,
야자수는 하늘을 떠받치는 초록 기둥이 되어
파파야와 커피나무 곁에서 삼척바나나는 희망이라는 깃발을 바람에 펼친다.
부겐베리아 꽃빛은 달아나는 시간을 붙잡아 한 장의 노을로 접어 두고,
기차들은 세상의 조급한 심장처럼 지나가지만
정원은 그 사이에서 천천히 숨 쉬는 한 권의 시가 되어
바쁜 마음들이 잠시 내려앉아 생각을 꽃으로 피우고 가는
조용한 영혼의 역이 된다.
290.사랑이라는 나무
사랑은
안개가 낮게 깔린 새벽 숲길, 이름 모를 새 한 마리의 울음처럼 먼저 마음에 내려앉았다.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서로의 온기를 더듬으며 걷는 동안,
계절은 조용히 지나가고 마른 가지 끝에 숨겨 두었던 연둣빛 꿈들이 하나둘 눈을 떴다.
어느 날부터인가
가슴속 깊은 흙 한 줌에 심긴 씨앗 하나가 작은 나무로 자라나 햇살이 오면 그늘을 내어주고, 비가 오면 빗방울을 먼저 받아내며 서로의 하늘이 되어 주었다.
사랑은
거창한 불꽃이 아니라
겨울 들판을 건너는 바람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품어 주는 담장이고,
긴 장맛비가 내리는 저녁이면 젖은 어깨를 감싸 안는 작은 처마 같은 것이다.
노을이 산마루 너머로 스러질 때면
돌아오지 않는 발자국 소리 하나에도 저무는 하늘 끝이 붉어지고,
문 앞에 당신의 그림자가 머무는 순간
오래 잠들어 있던 꽃봉오리 하나가 가슴속에서 조용히 입을 열어 향기를 풀어 놓는다.
그래서 사랑은
기다림마저 꽃이 되게 하고,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루를 환하게 밝히는 햇살 한 줌이 되어,
세월의 강을 건너는 동안에도 서로의 마음에 푸른 숲 하나씩 키워 가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291.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가슴 한쪽에
작은 꽃씨 하나 떨어집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자라난 그 씨앗은
어느새 내 마음을
꽃밭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바로 당신입니다.
이제는 숨길 수 없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루하루 피어나는
이 꽃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대구고보 110주년
292.국제 시와 음악회 다녀오다
초여름 저녁은
녹향음악실에
역사의 책장을 펼쳐 놓고
대구고보 백열 번째
은빛 음표들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무대는 강이 되었고
시는 물결이 되어 흐르며
서로 다른 세월을 건너온 사람들의 마음을 한자리로 모아 주었다.
누군가는 별빛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띄우고,
누군가는 바람의 결을 따라
시를 건네며 잊고 있던
추억의 창문을 하나둘 열어 주었다.
멀리서 온 새들은
낯선 하늘 아래서도
아름다운 화음을 피워 올렸고,
고운 목소리들은 꽃잎처럼 객석 위에 내려앉아 저마다의 가슴에
작은 등불 하나씩 밝혀 주었다.
식당으로 옮겨 간 밤은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온기가 되어
정겨운 웃음과 이야기들을
별자리처럼 둥글게 엮어 놓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음을 보태 준 손길들은
나무를 키우는 뿌리처럼 깊었고,
순간을 사진으로 붙들어 준 눈빛들은
흐르는 시간을 꽃으로 묶어 두었다.
그날의 시와 음악은
공연이 아니라 한 척의 배였다.
우리는 모두 그 배에 올라
추억이라는 강을 함께 건넜고,
돌아오는 길에도 가슴속 어디선가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 한 소절이
은은한 달빛처럼
오래도록 흔들리고 있었다.
293.가을 언덕에서
싱그럽던 잎새들이
마치 세월의 손길에 빚어진 작품처럼
노을빛 단풍으로 익어 간다.
봄꽃이
햇살 속 아이의 웃음처럼 환하다면,
가을 단풍은 긴 길을 걸어온
사람의 미소처럼 깊고 아름답다.
제 빛을 끝까지 붙들지 않고
등불을 나누어 주는 사람처럼
붉음과 노랑을 아낌없이 풀어놓으며
세상을 따뜻하게 물들인다.
비워 둔 자리마다
황혼은 수채화 물감처럼 번져들고,
상처처럼 뚫린 가지 사이에는
작은 등불처럼 내려앉은 노을이
조용히 어둠을 밝힌다.
노을이 머문 자리마다
가을은 오래 숙성된 술처럼 깊어지고,
깊어진 가을은
붉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저녁 하늘 가득
풍요로운 빛으로 번져 나간다.
가을 언덕은
한 폭의 화폭처럼 붉게 물들고,
저물어 가는 가을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타오르는 불꽃처럼 서산 끝에 서서
세상을 향해 조용히 손을 흔든다.
294.보고픈 얼굴
오래도록
핸드폰 화면 속에 머물던 얼굴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척 웃었지만
손끝은 온기 하나 건네지 못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반가운 웃음이 봄바람이 되어 다가와
굳어 있던 마음을 살며시 녹인다
못다 한 이야기들은
엉켜 있던 실타래를 풀고 나와
서로의 뒤에 차례로 줄을 선다
눈빛 한 번 마주치는 순간
가슴 깊이 잠들어 있던 서러움이
조용히 문을 열고 나온다
잘 있었지
짧은 한마디가 가슴에 닿자
반가움은 하늘로 떠오르는 풍선이 되어 마음 가득 부풀어 오른다
함께 있다는 것은 평범한 하루를 선물로 바꾸는 일이다
시들어 있던 꽃밭에
단비가 찾아오는 일이다
나는
그 신기하고 고마운 앞에
오래도록 웃고만 있었다
295.달비골에서
달빛이 골짜기 깊은 곳까지
천천히 스며드는 달비골,
부용정의 물결은
그저 물이 아니었다.
입안에 머문 칼치구이의 짠 기름기처럼 오래된 기억 하나가 혀끝에서 조용히 녹아내리고,
굴비의 단단한 결은
말하지 못한 날들의 마음결처럼 씹을수록 더 깊어져 갔다.
롤링핀을 걷는 시간은 둥글게 굴러가는 하루의 반죽 같아
가볍게 웃는 순간에도 속은
은근히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콰이어트 그레이 카페,
그곳의 공기는
말 대신 흰 눈을 품고 내려와
눈꽃빙수는 잊고 있던 여름의 끝을 하얗게 지워내는 침묵이었고,
건강빵 스콘은 단단한 하루를 견뎌낸 마음의 조각처럼
조용히 손바닥 위에서 따뜻해졌다.
그날의 여행은 먹는 일이 아니라 풍경이 혀 위에 잠시 머물다
천천히 마음으로 스며드는
하루의 맛과 멋이였다.
296.어제와 오늘과 그리고 내일
어제는
오래된 편지처럼
조용히 나를 데워 주어서
무척 행복했습니다.
오늘은
따뜻한 밥 한 그릇처럼
비어 있던 마음을 채워 주어
무지 살 맛이 납니다.
내일은
첫눈처럼
아직 닿지 않았는데도
벌써 설레고 기쁩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한 품처럼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조용히 숨 쉬고 있습니다.
297.눈꽃 속의 그리움
코발트빛 하늘은
오래 접어 둔 편지 한 장
그 위를 건너는 바람마다
하얀 꽃잎의 말들이 흩어진다
겨울은 빈 가지에
눈꽃이라는 이름의 숨을 걸어 두고
잠들어 있던 나무의 심장은
봄이라는 연둣빛 문장을 밀어 올린다
부푼 가지 끝마다
환한 웃음이 봉오리로 맺히고
먼 길을 돌아온 시간은
도돌이표 하나 가슴에 달고
뚜벅뚜벅
기억의 골목을 다시 걸어온다
불그스름한 눈가에 고인 것은
녹지 못한 눈 한 송이
그 이름을 부르면 그리움이 된다.
298.고향의 봄 100주년
백 년의 시간을 건너온 노래 한 송이,
고향의 봄이 저녁 하늘에 피어났다.
그리움은 선율이 되어 흐르고,
고향은 가슴속 작은 들꽃처럼 다시 피어났다.
한국과 일본의 목소리는
바다를 건너 한 그루 나무의
두 가지처럼 어우러졌고,
추억은 오래된
편지의 향기처럼 객석에 번졌다.
낯익은 얼굴들과의 반가운 재회는
봄날 다시 만난 제비처럼 정겨웠고,
바리톤의 깊은 울림과
피아노의 맑은 물결은
마음의 먼 길을 조용히 적셔 주었다.
마지막 고향의 봄이 흐를 때,
백 년의 시간은
한 송이 꽃이 되어 피어나고,
우리의 고향은
오래도록 가슴속에서 노래하였다.
299.줄 서는 봄
겨울은 마른 가지마다
작은 번호표
하나씩 걸어 두고 떠났다
나무들은 번호를 들고
긴 기다림의 줄 끝에 섰다
뿌리 깊은 곳에서
따뜻한 숨결이 올라오면
새순이 먼저 손을 들고
꽃봉오리가 조용히 문을 열어
저마다의 이름으로 봄을 받아 적었다
어떤 꽃은 햇살의 첫 편지를 읽고
어떤 꽃은 바람의 체온을 품는다
그러나 봄은
한 번도 순서를 묻지 않는다
기다린 만큼의 시간으로
꽃들에게 환한 자리를 내어 줄 뿐
비가 오고 바람이 지나가면
가지마다 걸려 있던 번호표는
어느새 의미를 잃어갔다
먼저 핀 꽃도 늦게 핀 꽃도
같은 하늘 아래
꽃잎 한 장의 무게로 흔들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꽃들은 분홍빛 편지가 되어 흩날리고
바람은 그 편지들을
하늘 저편으로 부친다
삶은 피어나는 순서만
정해 주었을 뿐
떠나는 순서까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는 것을
오늘도 하늘은 꽃비를 내리며
눈부신
작별 하나를 천천히 펼쳐 보인다
300.맛에도 색깔이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꽃은 향기를 한 겹 더 입고,
먼 산은 푸른 이불처럼
눈동자 가까이 눕는다.
귀 끝에 걸린 물소리 하나는
은빛 종처럼 맑게 흔들리고,
서리를 삼킨 열매 하나는
꿀처럼 깊은 단맛을 혀끝에 녹인다.
햇살 몇 알이
구슬처럼 가지 끝에 매달렸던 시간,
입속에 숨은 길은
맛의 향기따라 먼 곳으로 번져 간다.
서리를 건너온 열매가
꿀처럼 더 깊은 단맛을 품듯,
거친 계절을 지나온 마음도
세상을 향기롭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