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불꽃
처음에는 작은 불꽃이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처음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러하다. 내 사랑은 언제나 작은 불꽃이었다. 크게 타오르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작은 불꽃. 그래서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불꽃’이라고 스스로가 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또한 ‘불’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전부가 다 타 없어질 때까지 말이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 내일 있을 발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완성시킨 피피티를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고, 이 피피티를 가지고 발표할 내용에 부족한 것은 없는지 시뮬레이션을 반복했다. 문제가 없다는 것을 완벽히 하고 나서야 나는 컴퓨터를 끌 수 있었다. 모니터는 이미 까맣게 변했지만, 나는 전원 버튼에 들어와 있는 불빛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검은 모니터에 비춰지는 나의 얼굴엔 피곤이 가득했다.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눈이 뻑뻑하고 침침해서 눈꺼풀이 움직일 때마다 찔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 나는 문득 그 아이를 생각했다.
컴퓨터에 연결된 전선을 콘센트에서 뽑아버리고서야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항상 품에 안고 자는 하얀 쿠션이 침대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잠에 취해 녹진녹진 가라앉는 몸을 뒤척여 떨어진 쿠션을 주워 품에 안았다. 무겁게 가라앉는 눈꺼풀, 잠에 들 때 쯤 나는 언젠가 내 침대에서 잤던 그 아이를 떠올렸다.
그 아이는 내 생활 어디에서도 볼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마주친 교복 입은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도, 기초 연기 시간에 주어진 대본 속에서도, 동아리 시간에 한 즉흥 연기에서도,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가는 길에 발견한 예쁜 나무에서도, 아무런 목적 없이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인 핸드폰 속에서도. 나는 아주 사소한 것들에서 그 아이를 생각하고 떠올렸다. 너무 격하지도 않고, 놀랍지도 않게. 나는 그렇게 작은 불꽃처럼 그 아이를 사랑했다.
명치 근처가 아릿하게 아픈 것 같았다. 숨이 목에서 겉도는 것처럼 숨 쉬기가 힘들었고, 카페인을 잔뜩 들은 음료를 마신 듯 혈관이 떨리는 것만 같았다. 눈앞이 침침해져 와서, 어딘가 멍한 머리로 ‘내가 너무 피곤한가?’ 하고 생각했다. 눈을 비비고 괜히 안경을 닦았다. 그새 뽑힌 속눈썹이 눈을 찔렀다. 가슴이 답답해서 성대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기침을 했다. 어쩐지 굉장히 우울했다. 울고 싶었는데 딱히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그 아이를 생각했다.
한창 연애사업에 몰두 중인 동기 녀석들이 부러웠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이나, 자연스럽게 안겨 있는 포즈나, 서로가 서로의 첫 번째라는 것이 그렇게나 자연스럽다는 것이 입에 쓴 맛만 가득 찰 정도로 부러웠다. 여태껏 살면서 내가 좋아하면 되는 거라고만 생각해 왔는데, 이번엔 나 또한 사랑받고 싶었다. 날 사랑해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 아이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이제는 누구라도 좋으니 나를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좋아한다 말하는 주변의 아무 남자랑 한 번 쯤은 사귀어 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자기혐오에 빠졌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장작은 거의 다 타버린 후였다. 크게 타오르지 않았다. 작은 불꽃에 불과했다. 내 사랑이 항상 그러했듯, 그 아이를 사랑하는 내 마음이 꼭 그랬다. 그래서 몰랐다. 이렇게나 오랜 시간 꾸준하게 타들어가고, 타들어가고, 타들어가서 결국 남은 장작보다 검은 잿더미가 더 많아지게 되었는데도 모르고 있었다. 잿더미를 치우고 새로운 장작을 넣어주어야 하는데 내 주변엔 새로운 장작을 얻어낼 곳이 없었다. 아니, ‘나에게 맞는’ 장작을 얻을 곳이 없었다고 하는 게 더 옳은 말이겠지.
그래서 나는 그냥 울었다.
내 눈물에 그 작은 불꽃이 꺼졌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바란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동안 그 불꽃 위로 많은 눈물을 쏟았다. 작은 불꽃 주제에, 후 불면 꺼질 것처럼 작은 불꽃인 주제에 뭐가 그리 끈질긴지. 이제는 제발 꺼지게 해주세요, 나는 끝없이 그렇게 속삭이면서 울었다.
손끝에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아렸다. 뭔가 먹은 것도 없는데 얹힌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멀미를 하는 것 같았고, 그 아이를 생각하면 기쁘다가도 명치 근처가 아팠다. 작은 불꽃은 지금도 꾸준히 타오르고 있었다.
장작이 다 타오르고 나면,
나는 과연 어떻게 되는 걸까.
숨이 막혔다. 괜히 심호흡을 하고 찬 물을 들이키며 나는 그 아이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