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관덕정은 조선시대 제주도의 대표적인 정자다.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세종 30년(1448) 신숙정 목사가 창건하였는데, 좌우에 관아 시설이 위치해 있어서 관덕정은 제주도를 상징하는 건물이었으며 湖南第一亭(현재의 글씨는 고종 19년 박선양 목사의 글씨)이라 칭해지기도 하였다.
'관덕' 이란 명칭은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 라는 禮記(예기)의 내용에서 유래되었다. 창건 당시의 현판 '관덕정' 은 제주 출신 고득종의 간청으로 안평대군이 써준 필적이었으나, 불에 타고 없어지고 말았다. 그 뒤에 선조때 우의정을 지난 아계 이산해가 쓴 액자가 걸려 있었다.
본래 3칸 건물이었던 관덕정은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와 개축과정을 거쳤다. 즉, 성종 11년(1480) 양찬 목사, 명종 14년(1559) 이영 목사, 숙종 16년(1690) 이우항 목사, 영조 29년(1753) 김몽규 목사, 정조 2년(1778) 황최언 목사, 순조 33년(1833) 한응활 목사, 철종 2년(1851) 이현공 목사 때에 중수되었다.
그리고 고종 19년(1882) 박선양 목사가 관덕정을 너비 13칸, 가로 10칸, 높이 5칸으로 중건하였다. 당시 지붕 4각에는 풍경을 달았고, 실내 서쪽 위에 '耽羅形勝(탐라형승)', 중앙 위에는 '湖南第一亭(호남제일정)', 입구 위에는 관덕정이라는 액자를 달았다.
나아가 실내 벽에는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대표적인 것은 商山四皓(상산사호), 醉過楊州橘滿軒\(취과양주귤만헌), 蘇軾(소식)의 赤壁賦(적벽부)에 나오는 大捷圖(대첩도), 제갈량의 陣中西城彈琴圖(진중서성탄고도), 한의 유방과 초의 항우를 주제로 한 鴻門宴(홍문연), 그리고 大狩獵圖(대수렵도), 十長生圖 등이다.
그러나 관덕정은 1924년 島司 前田善次 때에 중수되면서 긴처마가 절단되는 등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말았다. 현 건물은 1969년에 중수된 것이다. 관덕정과 관련해서는 창건기(辛碩祖)와 중수기(徐居正), 그리고 수 편의 詩가 전해지고 있다.
세부항목명 칭 : 제주 관덕정지정(등록)일 : 1963. 1.21소 재 지 : 제주시 삼도 2동 983-1번지건축적특징 건물은 평지에 현무암을 잔다듬하여 축대를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기단을 놓은 이중 기단 위에 높직하게 동향으로 자리해 있다. 축대는 건물 전면에서는 월대처럼 처리되어 있고 건물의 뒤쪽은 조금 높게 돋우어 후원을 조성해서 『선덕대』라고 새겨 놓고 있다.
평면은 5칸×4칸 구조로 기단위에 원형의 현무암 초석을 놓고 민흘림의 두리기둥을 전후 2열로 4개씩의 고주를 세워 대량을 걸었다. 그 위에 동자주로 종보를 받쳤고, 다시 그 위에 파련대공의 종도리를 받아서 지붕틀을 7량구조로 하였는데 기울기가 완만한 것이 특징이다.
고주와 외진주는 퇴량으로 연결했고 측면으로는 충량을 썼다. 지붕은 합각지붕에 겹처마로 위용을 갖추었는데 합각은 좌우 고주의 바로 위에 있다.
전면퇴간은 바닥에 크기가 불규칙한 현무암을 방전처럼 다듬어 깔았고 후면 3칸쪽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공포는 쇠서 두 개의 이익공식이다. 기둥사이에도 화반을 세 개씩 배치하고 그 위에 운공을 놓아 외목도리를 받고 있다.
벽화
관덕정의 벽화는 8편이나 각 2편이 내·외벽의 벽화가 하나로 연결되어 모두 4편이다. 내벽 왼쪽 안에 虎獵圖(호렵도)가 있고 바깥쪽에는 지초를 뜯는 백록의 그림과 老松과 어울린 白鶴(백학)의 그림이 연결되어 있다.
오른쪽 내벽의 안쪽에는 赤壁大捷圖(적벽대첩도)가 있으며 바깥쪽에는 신선이 바둑을 두고있는 商山四皓圖(상산사호도)와 醉過揚州橘滿車圖(취과양주귤만차도)가 연결되어 있다.
이 그림을 그려넣은 기둥의 그림판 두께는 12.5㎝이며 재료는 단청의 오방색을 사용하였다. 섬세하고 치밀한 솜씨는 아니나 사실적이면서도 중요한 요체만을 묘사하고 과감히 생략할 것은 생략하고 있어 조선시대 民畵(민화)에서 볼 수 있는 활달함이 배어난다. 色感(색감)이 古拙(고졸)하여 휘황한 맛은 없으나 아취가 있다.
虎獵圖(호렵도)는 중국 한나라 陰山(음산)에서 호랑이 사냥하던 고사를 인용하여 그린 그림인 듯한데 다만 虎獵圖(호렵도)라고만 畵題(화제)가 적혀있어 어느 곳의 호렵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맞은 편에는 赤壁大捷圖(적벽대첩도)라고 그림제목이 붙어있어 촉한의 제갈량 東吳(동오), 周瑜(주유), 간웅 조조와의 적벽강대전이다.
이 두 그림은 군사를 호랑이도 잡을 수 있게 훈련하고 특히 제주는 물을 건너온 고을이기 때문에 水戰에서는 제갈량이 화공을 써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치듯 도덕으로 함축된 지략을 발휘하여야 한다는 뜻을 담은 벽화이다.
호렵도 바깥 쪽에는 흰사슴 두 마리가 芝草(지초)를 뜯어 먹는 그림과 늙은 소나무에 흰학 두 마리가 노니는 그림이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그림제목이 지워져 月公山水 이 네 글자만겨우 읽어낼 수 있을 뿐이다.
한라산 백록담에 흰사슴과 난학을 타고 내려왔다는 신선의 전설을 그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한라산을 예로부터 瀛洲山(영주산), 신선이 사는 산이라 부르므로 영주산의 不死藥(불사약)을 그렸으리라 생각된다. 적벽대첩도 그림 바깥 쪽에는 商山四皓圖(상산사호도)와 醉果楊州圖(취과양주도)가 그려져 있다.
상산사호도는 한고조 때 난세를 피하여 상산에 숨어살며 임금이 불러도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던 東園公(동원공), 夏黃公(하황공), 角里先生(각리선생), 綺里季(기리계) 네 사람이 바둑을 두는 그림이다. 제주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명리를 등지고 살아갈 만한 곳임을 은연중 암시한 그림이다.
醉過揚州橘滿車圖(취과양주귤만차도)는 가마를 탄 관리가 거리를 지나는데 청루의 기녀들이 다투어 귤을 던져 호객하지만 돌아다 보지않고 초연하게 떠나가는 그림이다. 관리의 몸가짐을 경계하고 한편으로는 제주에 橘柚(귤유)등 方物이 풍요로움을 나타낸 그림이다.
서거정의 중수기에도 '제주의 물산이 다른 군보다 갑절이나 풍요롭다(其物産之饒倍於他郡)' 고 하였다. 이 그림에서 가마를 탄 관리는 당나라 시인 두보로 알려져 있으나, 젊어서 揚州刺史(양주자사)를 지낸 杜牧之(두목지)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 관덕정 벽화는 훼손인 심하여 자취를 알아보기가 힘들다. 그림의 형상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며 나무판의 나이테 무늬가 다 드러나 있는 상태이다. 이 글은 제주시청이 1975년 復刻해 둔 그림을 보고, 관덕정을 찾아가서 기둥의 그림 상태를 확인하고 쓴 것이다.
세부항목 지정번호 : 명 칭 : 제주 관덕정(보물) 소 재 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