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후 및 평가 ⑴ (1926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 기사. 신문 1면에 이완용 사망 소식을 대서특필로 다뤘다.) 사후는 생전보다 더 화려했는데,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참석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정2위대훈위 후작 이 공 지 구란 휘황찬란한 깃발을 들고 장례가 치루어 졌다. 그의 장례 행렬은 그의 3,000평짜리 집 옥인동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졌는데 고종 사후 이후 최대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⑵ 당시에도 민중에게 이완용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이완용이 팔아먹은 건 왕조만이 아니라 수천만 조선 동포 전체였고, 그의 결정으로 조선 백성들이 일제의 노예로 전락했다. 이전 매국노들과는 애초에 급이 다르다. ⑶ 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1면 사설에 실린 기사.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으로 이완용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여기서 동아일보는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중략) 누가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능히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이냐. (중략) 이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라는 글귀를 남겼다. 조금만 일제의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써도 잡혀가는 시대였는데 대놓고 이렇게 기사에다 비난하는 글을 쓸 정도면 이완용에 대한 조선인들의 증오가 얼마나 컸는지 알만하다. ⑷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가면 해당 기사 부분이 지워져 있는데, 이는 총독부의 검열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음날인 2월 14일자에 '본보압수'라는 제목 하에 "2월 13일 기사 중 당국(當局)의 기휘(忌諱, 금지령)에 저촉된 바가 있어"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신문자료에 가면 원문 이미지를 볼 수 있으니 참조하자. 옛 신문이라 한자가 좀 많다. 신문 발행일은 당시 일본의 연호인 다이쇼(大正)로 표기되어 있다. ⑸ (전문 :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갔다. 보호순사(保護巡査)의 겹겹 파수(把守)와 철비전벽(鐵扉磚壁)의 견고(堅固)한 엄호(掩護)도 저승차사의 달려듦 하나는 어찌하지 못하였으며 드러난 칼과 뵈지 않는 몽둥이가 우박같이 주집(注集)하는 중에서도 이내 꼼짝하지를 아니하던 그 달라진 눈동자(瞳子)도 염왕(閻王)의 패초(牌招) 앞에는 아주 공손(恭遜)하게 감겨지지 않지를 못하였구나. 이때이었다. 너를 위하여 준비하였던 것이 이때이었다. 아무리 몸부림하고 앙탈하여도 꿀꺽 들이마시지 아니치 못할 것이 이날의 이 독배(毒杯)이다. (후략) 어허! 부둥켰던 그 재물을 그만하면 내놓지! 앙탈하던(=끝내 피하려던) 이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⑹ 한자 표현과 예스러운 표현이 많은데, "겹겹이 보호를 하고 굳게 엄호하여도 저승사자의 칼과 몽둥이 찜질은 못 피했고 전혀 감기지를 않던 눈동자도 염라대왕 앞에서는 공손하게 감겨졌다" 정도의 논조를 담고 있다. ⑺ 그 밖에도 네이버에서도 확인이 가능한 동아일보 "횡설수설" 란에는 이틀 연속으로 그의 죽음에 대한 짤막한 촌평을 달아두고 있다. ① 2월 12일 : 구문(口文 : 흥정을 붙여 주고 그 보수로 받는 돈) 후작 이완용은, 작일(作日 : 어제) 황천객이 되엿다고, 지옥행하노라고 무던이 고달풀걸. 해석 : 나라를 팔아먹어 그 대가로 후작을 받은 이완용은 어제 죽었다. (나라를 팔았으니) 지옥으로 갈 텐데, 고생길이 훤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라 팔아먹은 죄로 조상님들께 두들겨 맞을테니까. ② 2월 13일 : 구문 공신 이완용은 염라국에 입적하엿스니, 염라국의 장래가, 가려(可慮 :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해석 : 나라 팔아 공신이 된 이완용은 염라국에 들어갔는데, 이 작자가 나라 팔아먹는 데 일가견이 있기에 염라국의 장래가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치 못하다. 살아서도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저승에서도 염라대왕이 다스리는 저승을 팔아먹을것이 뻔하니 이것이 걱정이 된다. ⑻ 그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군(現 익산시) 낭산면에 있었는데 매국노다 보니 지속적인 훼묘사건이 빈번이 일어났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때는 양반이었고 광복 이후에는 매우 심하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발생한 데다 수풀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 관리가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러, 1979년 이완용의 증손자 이석형이 파묘를 하고 유골을 화장했다. 오늘날 이완용의 묘가 있었던 곳은 채석장으로 바뀌었으며 위치는 육군부사관학교에서 매우 가깝다. 파묘할 때 지속적으로 훼손된 묘였지만 붉은 명정에 쓰인 '조선총독부 부의장'이란 글은 상하지도 않고 그대로였다고 한다. 다만 이 글은 오히려 보존하는 게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후손들에게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내버려뒀을 가능성도 있다.((1979년 파묘 당시 이완용의 관 뚜껑. 뚜껑 위에 씐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의장 정이위 대훈위 후작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院副議長 正二位 大勳位 侯爵牛峯李公之柩)'라는 글귀가 뚜렷하였다고 한다.) ⑼ 1992년 <시사저널> 기사에 의하면 이완용의 관 뚜껑은 당시 인부가 바둑판을 만들기 위해 가져갔다가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사들인 것을 이완용의 손자뻘 친척이라고 상당 기간 오해받던 국사학자 이병도가 사비로 구입해 자택에서 불태워버렸다고 전해진다. 결국 부관참시로 이완용의 무덤은 사라지고 관과 유해는 불타버렸다. ⑽ 이완용은 일제에 부역하며 다양한 직함을 수여받았는데, 조선귀족원 회원ㆍ농사장려회 회장ㆍ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ㆍ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평의원ㆍ조선귀족회 부회장ㆍ농림주식회사고문ㆍ교육조사위원ㆍ총독부산업조사위원ㆍ조선미술전람회심사원ㆍ조선사편찬위고문ㆍ조선농업교육연구회고문ㆍ선만노몽(조선ㆍ만주ㆍ러시아ㆍ몽골) 연구협회고문 등을 지냈다. ⑾ 이러한 모습 때문에 그는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그의 손자인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하여 환수 작업이 진행 중이다. 또한 2009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이완용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물론 친일인명사전에 집어넣은 건 형식상 그렇게 했을 뿐 그는 이전부터 당연히 매국노 중에서도 가장 악질 매국노로 간주되고 있었다. ⑿ 이완용은 1910년대 토지, 임야 등 확인된 것만 여의도 면적의 약 2배에 해당하는 1,300여 필지, 1,600만㎡를 소유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완용은 일제 때에 구입한 토지를 현금화하였으나 총 규모는 아직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완용의 증손자인 이윤형은 친일파 후손 중 최초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하여 1997년 7월 승소하였으며, 반환된 북아현동 일대의 토지는 당시 시가로 30여억 원에 달하였다. 이윤형은 곧바로 이 토지를 처분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12. 평가 ⑴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관료로서의 능력은 출중하나, 그것을 매국에 악용해 아무리 명석한 사람이라도 돌이킬 수 없는 악행들을 저지르면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후술하겠지만, 이완용은 주위에서 총명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고 판단이 명확했으며 처세술에 능한, 흔히 말하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데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이완용과 비슷한 시기에 같이 매국 행위를 해 조선귀족 직위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후 처신을 잘못하거나 재산 관리에 실패하여 일제강점기 중에 몰락하거나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았다. 매국도 능력이 없으면 못 한다. 하지만 명석한 두뇌를 매국 행위와 개인의 이득을 위해 타인에게 크나큰 피해를 가하는 일에 사용했으니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 것. 아무리 개인의 능력이 백날 천날 뛰어나 봤자 기본적인 인간 됨됨이가 글러먹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사람이다. ⑵ 심지어 관료로서의 능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그가 광무개혁 중반에는 부친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등용되는 것이 불가능하였으나, 초반에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대신직이 아닌 관찰사직에 머물렀다. 당시 대신직에는 서자였던 김가진도 등용되었는데, 이완용이 안될 이유는 없었다.(적어도 신분적으로는) 그래도 관찰사로서의 문제해결 능력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당장에 민생이 힘들었던 시절에 공덕비를 세운 것을 보기는 힘들다. 이러한 능력을 가진 다른 관료는 윤영렬 정도로 볼 수 있다. ⑶ 이와 같은 악질적인 친일 행각으로 인하여 국내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라 하면 바로 이완용이 연상될 정도로 매국노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을 확고히 했다. 그가 사망한 지 96년이 된 현재까지도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판받고 있다. ⑷ 현대에 와서조차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을사오적 중 나머지 넷은 몰라도 이완용만큼은 대부분 알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를 이완용에 비유하는 것은 거의 서양 국가에서 누군가를 나치,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모욕으로 통한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우페이푸가 량스이를 비판할 때 모욕적 표현으로 쓰는 사례가 있었다. ⑸ 이완용과 동시기에 똑같이 매국노 짓을 한 송병준 같은 경우도 이 정도로 욕을 먹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면 생전에 이완용이 얼마나 대표적이고 악랄한 매국노였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심지어 그의 후손들도 국가를 상대로 환수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까지 한 다음 외국으로 도망가는 악행을 저질러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13. 성품 ⑴ 이완용? 그는 한마디로 기계 같은 사람이다.(호러스 뉴턴 알렌) ⑵ 이완용은 처세술에 뛰어나고 영민했던 인물이었다. 이완용과 교류했던 미국인 선교사 알렌은 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머리가 잘 돌아가고 영민하지만, 영혼이 없는 것 같은 기계 같은 사람이라는 평을 내렸다. ⑶ 다만 의외로 검소한 습관을 지향했다고 한다.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 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반찬을 집을 때에는 결코 남이 먹다 남긴 것처럼 헤집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다만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고, 임금부터 다 먹고 나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곤 했다. 그래서 이러한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물 쓰레기도 줄이고자 했다. ⑷ 아이러니하게도 이완용은 생전에 일본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한자라면 눈 감고도 한시 몇편 줄줄 쓸 만큼 통달했을 사대부 입장에선 어지간한 단어는 다 한자어인지라 문법 몇 개만 익히면 되는 일본어는 전혀 배우지 않고 완전 이질적인 영어는 원어민 수준으로 배워 익힌 걸 감안하면 굳이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⑸ 영어는 처음엔 육영공원에서 배웠지만, 서툴러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는 큰 활약을 못했다. 하지만 오랜 미국 생활로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나중에는 조선총독부 관료들보다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마사타케 같은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는 영어를 사용하거나 통역사와 함께 다녔으며, 정사를 맡을 때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과 했다. 여건이 충분함에도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 일본인 인맥을 넓히려 하지도 않아서 그가 공직에 있을 때 아는 일본 정치인들은 이토나 데라우치 총독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1906년 학부대신 시기에 공교육의 일본어 시간 도입을 추진하고, 가장 교육시간이 많은 과목으로 만들어 일본에서 "이완용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4. 서예 실력 ⑴ 그의 친일 행적과는 관계없이 서예에 능해 조선 후기의 명필가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필체에 대해 예술의 전당 학예연구사인 이동국 씨는 "이완용은 행서와 초서가 뛰어났다"고 밝힌 바 있으며, 그 동안 공개된 이완용의 필적을 보면 그는 행서를 즐겨 쓴 편이다. 행서는 정자체인 해서와 흘림체인 초서의 중간 서체로 미적인 감각이 뛰어난 우수한 글씨체라 할 수 있다. ⑵ 그의 자서전인 <일당기사(一堂紀事)>에 의하면 경북 김천 직지사의 대웅전 및 천왕문, 창덕궁 함원전 등에 걸린 현판 10여 종의 글씨를 썼다고 기록했다. 또 독립문 현판의 '獨立門'이라는 글자는 그가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친일파 연구가 정운현은 "필체는 이완용이 아니라 동농 김가진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⑶ 하지만 삶의 상태가 상태인지라 글씨의 수준과는 별개로 가격은 바닥을 긴다. 물론 그가 원체 명필이었던 까닭에 아예 휴지 값까진 아니다. 유퀴즈온더블럭에 출연한 수집가의 증언에 의하면 보통 2~30만원, 비싼 건 40만원 선에 거래된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나라를 팔아먹지 않았다면 최소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은 했을 글씨라는 말도 된다. ⑷ 서예는 글씨를 얼마나 잘 썼느냐도 중요하지만, 글쓴이의 인품·평판도 값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글씨가 쓴 사람의 성품과 평판이 반영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⑸ 이완용과 완벽한 대척점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경우, 뤼순 감옥에서 남긴 글씨들은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으며(대한민국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 일단 경매에 나왔다 하면 대한민국 원화 기준 억 단위는 가볍게 찍는다. 안중근의 글씨가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안중근의 올곧고 청아한 성품과 민족에 대한 충성심이 글씨에 그대로 묻어났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와 적대적 포지션에 있는 일본 순사들이나 간수들도 글씨 한 점 얻어가려고 했는데, 이는 안중근 의사의 행적과 태도, 지식이 주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⑹ 안중근이 가진 특유의 기개와 고귀함은 이상적인 남성, 특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성이라면 막연히 동경하고 추구하는 무인의 성품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사무라이를 비롯한 에도 시대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던 당시 일본인 입장에서는 완벽한 무인, 사나이로 보였던 셈이다. 당대 재판을 맡은 검사, 변호사, 간수가 모두 그를 존경한다고 했을 정도였다. ⑺ 판사도 안중근의 미완성 유고작인 동양평화론 집필을 마칠 때까지 사형 집행을 연기하려 했지만 본국에서 직접 집행 통보가 내려오면서 연기하지 못했다. ⑻ 김구의 글씨도 수천만 원이고, 비교적 덜 유명한 신익희의 작품도 최소 수백만 원의 가격에 거래된다. 반면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의 글씨는 고작 30~40만 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