헷갈리는 교수 명칭
대학의 구성원은 ‘학생’과 ‘교수’ 그리고 ‘직원’ 등 세 부류로 갈래 지을 수 있다. 여기서 ‘교수’와 ‘직원’을 하나로 뭉뚱그려서 ‘교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전통적인 학생의 강의와 연구를 담당하는 집단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 ‘교수’이다. 단순하게 불리던 ‘교수’도 꼼꼼히 따져보면 시간강사,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를 비롯해 원로들에게 부여했던 석좌교수와 명예교수 등으로 갈래지어 각각에 합당한 대우를 해왔다.
우리의 대학은 역사가 길다고 해도 겨우 한 세기를 조금 더 넘겼을 따름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상전벽해를 연상하리만큼 급속한 변화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 변화의 원동력과 단초는 대학이 제공하는 아우라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도해야 할 대학은 거세게 몰아치는 변화를 외면한 채 상아탑 속에 갇혀 나태하게 묘언(妙言)이나 기언(奇言)을 비롯해 교언(巧言)으로 자기 합리화라는 바쁘지 않았었는지 성찰이 필요하지 싶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고루한 학문의 전당이라는 자가당착이나 오만이라는 모순의 나락에 빠져 뭉그적거리며 슬기로움을 잃지 않았었는지 혁신적인 자구책이 화급한 현실이다.
그동안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에 허우적이던 대학에 날선 비판과 조롱이 숱했다. 하나의 예로서 대학의 중심축 중에 하나인 교수 집단을 비아냥대던 내용이다. 대학에서 전임강사는 ‘세상에 있는 것 없는 것을 포함해 자기가 모르는 것’까지 강의하며, 조교수는 ‘책에 있는 것만’ 가르치고, 부교수는 ‘자기가 아는 것’만 가르치며, 정교수는 ‘학생이 알아들을 것’만 골라서 가르친다고 몰아붙이며 면박을 주기도 했다.
이 날선 비판을 좋게 받아들이면 ‘경륜을 쌓을수록 핵심이나 요점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고 그에 합당하게 대처하는 슬기로운 지혜에 이른다.’고 위안 할 수 있다. 이를 부정적인 견해에서 보면 ‘변화를 거부하고 주어진 현실에 타협하여 적당히 안주한다.’는 무서운 경고이며 맹성과 통찰을 일깨우려는 촌철살인의 충언이 아니었을까.
대학의 때늦은 자구책이며 몸부림의 방증일까. 딴에는 대학에서 머물다가 정년을 맞이했던 주제인데 이즈음 대학의 교수 명칭을 보면 정확히 어떤 임무가 주어지며, 어떤 예우를 받는지 당최 가늠이 되지 않아 헷갈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근 대학에서 붙여준 다양한 교수 명칭이다.
강의전담교수, 연구교수, 특훈교수, 겸임교수, 초빙교수, 기금교수, 특임교수, 특임연구교수, 외래교수, 객원교수, 전문교수, 계약교수, 대우교수, 예우교수, 강의초빙교수, 명예특임교수, 외래교수, 임상교수 등을 위시해서 여러 유형의 교수가 더 존재하며 앞으로도 유사한 새로운 명칭의 교수가 속속 등장할 가능성은 엄청 크다. 게다가 대학과 전혀 관계가 없는 공사(公私)의 연수원에서 강의하는 경우까지 버젓이 ‘○○연수원 교수’, ‘○○수련원 교수’ ‘○○교육원 교수’라는 명함을 마구 찍어 뿌려대는 때문에 때로는 ‘교수’라는 명함이 저자골목에 버려진 업소 홍보용 명함 같이 지천에 깔려서 개에게 던져 줘도 물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자괴감이 듦은 나 혼자만의 속 좁은 생각일까.
어떤 신문의 칼럼에서 적시했던 내용 요약이다. 여러 갈래의 교수가 봇물 터지듯이 등장하면서 더욱 고약한 비하가 등장한 모양이다. ‘자질이 의심스럽다고 초딩교수(초빙교수)’, ‘예산만 축내는 적자교수(석좌교수)’, ‘돈 되는 자리에 모여드는 개근교수(객원교수)’ 등은 구체적으로 직명을 곧바로 빗댄 조롱이다.
그런가하면 모두를 싸잡아서 ‘교수’는 ‘아무도 모르는 걸 가르치면서 사기를 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이’를 말한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그에 더해서 ‘박사’란 ‘나만 모르는 줄 알았더니 남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더라는 사실을 증명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학위’라는 개떡 같은 비웃음거리로 전락한 작금이다.
다양한 명칭의 교수의 등장이 진정 21세기 디지털시대의 변혁에 합당한 최선책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급변하는 사회에 능동적인 대처를 위한 방책으로서 다양한 역할을 염두에 둔 대응방안이라는 충정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대학이 생존을 위한 ‘교수 충원율’을 높이기 위한 편법으로써 나타난 이상 현상이 아닌지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곰곰이 되씹어 볼 일이다. 다시 말하면 대학 평가의 잣대 중에 하나인 ‘교수 충원율’을 높이기 위한 편법으로 등장했다는 삐딱한 시선을 깡그리 그리고 정면으로 부정할 수 있을까.
우리사회의 기업 거개가 그렇듯이 대학의 교수도 십 여 년 전부터 ‘정년제 교수’와 ‘비정년제 교수’로 나뉘어 채용해왔다. 그러므로 그 역할이나 예우 수준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 많이 등장한 다종다양한 교수를 ‘정년제교수’와 ‘비정년제교수’로 구분해서 후자가 많다면 색안경을 쓰고 들여다 볼 구석이 더 커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구석구석에서 요구하는 전문지식이나 급변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대학도 전향적으로 발전적인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나 구조 조정을 통한 환골탈태의 자구책이 절실하다. 따라서 수많은 분야의 수많은 계층에서 갈고 닦은 천금 같은 실무경험이나 다양한 특수 지식을 갖춘 전문인이 대폭적으로 과감하게 수혈되어야 할 당위성이 인정된다. 이런 맥락에서 여러 명칭으로 공급되고 있는 전문교수들의 뛰어난 지식과 경험이 학생들에게 온새미로 전달되고 연구의 결실로 이어져 혁혁한 업적을 거둬 칭송을 받는 대학으로 우뚝 서야 한다.
우리의 대학 역사를 서양에 견주면 일천하다. 그동안 요즈음처럼 대학이 사회적으로 까발려져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적이 있을까. 고고한 학문의 전당이며 상아탑으로 융숭한 대접과 존경의 대상에서 어쩌다가 동네북으로 전락하여 헉헉대는 옹색하기 그지없는 처참한 꼴로 전락했을까.
지나치게 많아진 대학과 대학생 수, 거대한 공룡 같이 외형적으로 비대해져 경쟁력을 스스로 갉아 먹은 대학의 구조적 모순, 교육 내용에 비해 턱없이 비싸다고 야멸친 험구의 대상으로 전락한 등록금, 학점성형이나 학점 인플레 현상의 만연, 연구나 교육은 등한시하고 철 밥통을 지키기에 골몰한다는 비난을 옴팡 뒤집어쓴 교수, 국제화나 세계화에 둔감한 대학문화 등이 총체적인 부실을 초래했을지라도 내일의 가능성을 대학에서 찾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통째로 부정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대학이 뼈를 깎는 참회와 성찰을 통해서 거듭나려는 질실한 변모 과정의 필요충족조건으로서 다양한 이름의 교수 등장이라면 금상첨화일 터인데.
2014년 5월 7일 수요일
첫댓글 대학의 구조적 모순은 과거나 현재나 동일한 것 같습니다. 학교의 운영비 절감을 위해 외래 강사를 많이 쓰지만 외래강사가 더 잘 가르친다고들 합니다. 자리에 만족하고 안주해 있는 그 분들이 있기에 발전이 더디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학생들에게 그 몫이 돌아가지요.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감상 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