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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워서 아마 여러분도 되게 이렇게 몸이 막 꿉꿉하고 저도 아마 양복을 입다 보니까 정말 오늘 덥더라고요. 아마 우리 교회가 유난히 또 더워서 교회 곳곳에서 수고하신 일꾼들이 되게 수고로우실 텐데 그래도 열심히 또 사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에 보면 패싱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요즘 되게 많이 사용하는 단어예요. 그런데 이 패싱이라는 단어가 실제 단어의 의미와는 좀 다르게 요즘 많이 사용됩니다. 원래 의미는 지나가는 아니면 일시적인 아니면 합격하는 이런 의미가 패싱이라는 영어 단어의 실제적인 의미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 단어가 한국 사회와 이렇게 잘 맞닥뜨려져서 어떤 사람을 무시하거나 투명인간 취급하는 행위를 패싱이라고 합니다. 상당히 뉘앙스가 좋지 않은 단어예요. 만약에 이런 일을 당하는 사람은 감정적으로 엄청나게 분노가 일어나거나 괴롭거나 아마 슬플 거예요.
근데 이런 일들이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어서 아마 여러분이 실감하기에는 되게 좋은 단어에 원래 의미는 아주 안 좋은 단어지만 뭔가 여러분이 몸으로 마음으로 깨달을 때는 되게 자극이 되는 효과적인 단어입니다. 그래서 설교에서도 좋지 않은 단어지만 이 단어를 사용했을 때 여러분들이 좀 더 쉽게 말씀에 와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본문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합니다. 제가 짧게 설명을 하면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대, 유다 왕 여호와 김이 다스리는 시대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두루마리를 준비해서 그 두루마리에 요시야 왕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을 다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언의 말씀의 말씀이죠. 이 말씀들을 다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낭독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유다와 이스라엘을 향해 선포된 심판의 말씀들을 다 기록하라고 한 것은 혹시 이렇게 다 모아서 한꺼번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유다 백성들이 돌이킬까 하나님께 돌아올까 하는 마음이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결단 속에는 어떤 마음이 들어있냐 하면 유다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핑계를 들어서라도 유다가 회개만 하면 유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이 진행되지 않도록 멈추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용서하시려고 이 일을 하신 거예요. 실제로 징계하기 위해서 실제로 심판하기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면 유다 백성들이 행여나 돌아올까 하는 마음이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대처럼 예루살렘에 도착한 유다 백성들이 금식을 뇌물이 아니고 있는 큰 일이 일어나요. 그렇게 금식을 선포해요.
그런데 문제는 유다 지도자들이 금식은 선포하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들었지만 정작 회개는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두루마리의 말씀을 기록해서 낭독하라는 것은 유다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킬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는데, 이들이 금식은 하고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그 말씀의 핵심인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말씀을 기록하고 낭독한 바룻과 예레미야가 여호야김의 손에 잡혀서 죽게 될까 봐 이들을 숨겨줘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회개하길 바랬는데 선행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레미야를 숨겨주고 바롯을 숨겨주는 것이 자기들이 마땅히 해야 될 일이라 생각했어요.
아니 숨겨주면 좋은 일이죠.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유다 백성들에게 바랐던 것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호야김은 자신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게 하고 말씀이 될 때마다 잘라서 찢어서 불에 태웁니다.
그러니까 여우디라는 사람이 말씀을 예를 들면 세 구절을 읽으면 이 세 구절을 잘라서 찢어서 불에 태우고 또 읽으면 잘라서 찢어서 또 불에 태우고, 그래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심판의 말씀이 적혀 있는 모든 두루마리를 다 불에 태우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자세히 봐야 될 내용들이 있어요. 유다의 고관들의 태도입니다. 바룩을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유다의 고관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이 사람들이 첫 번째 한 행위는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한 거예요. 두 번째로는 이 사실을 왕이 알면 바롯과 예레미야를 죽일까 봐 이들을 숨기라고 권면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보면 얼마나 좋은 사람들로 보여요. 왕에게 보고했으니까 신하로서도 대개 충성스러운 신화로 보였을 거예요. 또 한편으로는 포악한 왕으로부터 종교 지도자와 지도자들을 보호하는 정말 신인이 신앙이 특출한 사람으로 보였을 거예요.
근데 문제는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그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유다의 고관들에게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바랐던 것은 예레미야와 바롯을 숨겨주는 것이 아니었고,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는 게 아니었어요. 말씀을 듣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길 바라셨어요.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이들이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왕이 바란 것,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이들이 바롯과 예레미야를 숨겨주는 것도 아니었어요. 아니 하나님이 얼마든지 숨겨줄 수 있어요. 이들이 충성스럽지 않아도 유다는 하나님이 얼마든지 견고하게 세울 수 있어요.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이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다의 고관들은 왜 이렇게 했을까요? 이렇게 하는 것이 신앙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모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거예요. 신하니까 왕에게 보고하는 것이 마땅하고, 나라의 형편들을 성도니까 불의한 왕으로부터 서기관과 선지자를 숨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작 자기들을 향해 선포되는 말씀은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할 생각도 못했어요. 어쩌면 이들에게는 이것이 최선일 수 있어요. 왕에게는 현재 나라에 일어난 일들을 보고하는 것, 그리고 종교 지도자에게는 악한 왕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못했어요.
성도들 중에는 인격적으로 정말 존경할 분들도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인간관계가 정말 좋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칭찬을 받고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정말 인간적으로도 성숙한 분들이 있어요. 문제는 말씀에는 반응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품은 좋은데 말씀에는 반응이 없다는 거예요.
유다의 마지막 때의 모습과 지금의 때가 흡사해요. 유다 백성들도 유다의 고관들도 신하로서는 왕에게 충성을 했고, 종교인으로서는 종교 지도자들을 잘 보호해 줬어요. 왕의 손이 닿지 않도록. 근데 하나님이 정말 그들에게 원했던 것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었습니다.
인격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이 많은데 문제는 말씀 앞에서는 반응이 없다는 거예요. 성품은 좋은데 말씀에 반응하지 못하고요. 관계는 좋은데 말씀에는 반응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말씀에 반응하는 삶이에요.
여러분 유다 고관들이 겉보기에는 얼마나 멋있어 보여요. 왕에게 즉각 나라의 정황을 보고하는 것. 신하로서는 정말 멋져 보이죠. 종교인으로서도 악한 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을 숨기려고 했던 것. 이것도 얼마나 좋은 모습이에요.
그러나 영적으로는 빵점이었던 거예요. 하나님이 회개하게 하시기 위해서 말씀을 읽기라고 한 거지, 왕에게 보고하라고 그리고 종교 지자자들을 숨기라고 한 게 아니었어요.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이 유다를 훨씬 더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바롯과 예레미야를 훨씬 더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어요.
실제로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많은 박해와 고난 중에도 예레미야를 지키셨어요. 오늘 새벽 말씀에 우리가 함께 봤던 것처럼 유다가 망할 때 유다가 무너질 때 예레미야는 자유의 몸이 됐던 거예요. 나라를 위해서 충성은 할 수 있어도 종교인으로서 종교 지도자들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정말 그들에게 원하던 것은 하지 못했습니다. 기도도 하지 못했고, 회개하지도 못했고, 돌이키지도 못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유다를 위태롭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자신들이 유대를 유다를 정말 위태롭게 하는 존재라는 것도 몰랐어요. 왜 빨리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씀을 낭독하는 것을 왕에게 보고했냐면, 이 일 때문에 나라가 어지러워질까 봐 실제로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었어요. 유다의 고관들이었어요. 예레미야가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니까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할 시간에 회개하지 않고 왕에게 보고하려고 했고, 회개할 시간에 회개하지 않고 바롯과 예리야미야를 숨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이런 모습이 아니라는 거예요. 충성스러운 신하가 먼저가 아니라 사랑이 많은 지도자가 먼저가 아니라 말씀에 반응하는 신화와 지도자였어요. 나라의 위기 앞에서 이 나라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라는 걸 깨닫고 회개하는 지도자이기를 하나님이 바라셨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거예요.
우리가 또 하나 살펴봐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바롯이 성전에서 말씀을 낭독했다는 말을 들은 여호야김은 예레미야에게 두루마리를 가져와서 자기 앞에서 낭독하라고 합니다. 그때 그 자리에 왕과 왕의 모든 고관들이 같이 있었어요. 근데 이 자리에서 시드기아 여호야김은 절대로 성도라면 하면 안 되는 어떻게 보면 정말 성도로서 최악의 모습을 보입니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읽으면 읽은 불량까지 말씀을 자르고 그 자력을 찢어서 또 불에 태웁니다.
이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 반복해서 결국 모든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들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읽으면 여호야김은 그 말씀이 자신과 관계없다는 듯이 말씀을 잘라 불에 태웠어요. 이런 거죠. 이 말씀은 나와 관계없습니다. 자르고 찢고 태우고 읽으면 이 말씀은 우리나라와 관계가 없습니다. 자르고 찢고 태우고 말씀을 읽으면 그 말씀은 나와 아무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라고 또 자르고 찍고 태웠습니다.
23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선어쪽을 낭독하면 왕이 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듣고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고 갈기갈기 찢어서 불에 태웠습니다.
물론 엘라단 들라야 그마리아와 같은 신하들이 이 이런 왕의 행동을 막았어요. 절대 안 된다고 그래도 여호야김은 듣지 않았습니다. 24절을 좀 보겠습니다.
왕과 그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왕도 신하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회개하거나 돌이키지 않았다는 거예요. 회개하기 위해서 기록한 말씀, 회개케 하기 위해서 선포한 말씀 앞에서 왕도 왕의 모든 신하들도 회개하거나 돌이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찢어서 불에 태웠습니다.
문제는 말씀을 찢어 불에 태운다고 해서 거기에 기록된 말씀의 효력이 사라질까요? 성경책을 찢어서 불에 태운다고 해서 이 기록된 말씀의 효력이 사라질까요?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기록된 말씀의 모든 효력은 이미 벌써 사라졌어요. 왜요? 수많은 박해자들이 이 성경을 불에 태웠거든요. 여호야김뿐만 아니라 이전 이후에 우리나라에서도 수없이 성경이 불태워졌어요.
그렇다면 불태워진 성경은 말씀의 효력이 사라지나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여호야김과 여호야김의 제자들이 왕과 왕의 제자들이 신하들이 몰랐던 게 이거예요. 이걸 말씀에 불에 태우면 이 말씀이 나와 관계가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근데 문제는 말씀은 불에 태워도 태워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효력은 절대로 태워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수천 번 불에 태우고 수천 번 찢어도 말씀의 효력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호야김은 말씀을 찢으면 효력이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말씀을 불에 태우면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지 몰라요. 그래서 여호야김은 옷을 씻고 회개할 시간에 두루마리를 찢었던 거예요. 그래서 불에 태웠던 겁니다.
지금 이 시간은 어떤 시간이어야 정상입니까? 자기 옷을 찢고 회개해야 될 시간이에요. 그런데 그 말씀을 짓고 그것을 불에 태웠던 겁니다.
하나님은 다시 예레미야에게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루마리에 또 기록하라고 이게 어떤 산이에요? 니가 수천 번 찢어도 말씀의 흐름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니가 수만 번 말씀을 불에 태워도 말씀의 효력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회개하지 않고 두루마리를 찢은 여호와 김에게는 정말 상상하기 힘든 심판의 말씀을 선포해요. 그게 30절 하반절과 31절 상반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에게 다윗의 왕위에 앉을 자가 없게 될 것이오. 그의 시체는 버림을 당하여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 또 내가 그와 그의 자손과 신하들을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할 것이라.
이 말씀은 무시한다고 해서 외면한다고 해서 말씀의 효력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오늘 말씀 제목처럼 말씀을 패싱한다고 해서 이 말씀의 효력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만큼 말씀의 효력이 강력하다는 거예요. 불에 태워도 효력은 사라지지 않고, 찢어도 효력은 사라지지 않고, 내가 불순종한다고 해도 말씀의 효력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힘과 능력을 우리에게 발휘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말씀 앞에서의 여러분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선포되는 수많은 말씀을 패싱하지 않으셨나요? 모른 척하고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그렇게 패싱해버리지 않았나요? 문제는 내가 수천 번 많은 수만 번 말씀을 패싱해도 말씀은 내게 그대로 적용된다는 거예요. 나만 그렇게 행동을 한 것뿐이지 나만 그렇게 여길 뿐이지 말씀의 효력이 나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의 효력이 결단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는 말씀을 내가 무시하면 말씀을 안 들은 척하면 이 말씀은 나와 상관없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성도들은 좀 안 좋은 말씀이 선포되면 잘 안 들어요. 여러분의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말씀을 안 들어요. 좀 이 말씀이 좀 심각하다. 아니면 내 요즘 나의 삶과 너무 비슷하다. 근데 나는 회개는 하지 못하겠고, 나는 그 옛날을 버리지 못하겠고 해서 말씀을 안 들은 척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말씀을 안 들은 척한다고 해서 말씀의 효력이 과연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내가 아무리 말씀을 무시해도 말씀은 그대로 그 효력을 발휘하고 내가 아무리 말씀을 못 들은 척해도 말씀은 그대로 나의 삶에 다 적용이 돼요. 이 기록된 말씀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다 적용되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안 읽었다고 해서 적용이 안 되는 게 아니에요. 만약에 성도들 중에 조금 머리를 굴리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도 할 것 같아요. 내가 말씀을 안 읽으면 이 말씀은 나와 상관없는 게 아닐까 그래서 아마 여러분 중에 말씀을 안 읽는 분이 있을 수 있거든 이 말씀을 안 읽는다고 해서 우리와 상관없는 말씀일까요? 아니라는 거예요. 말씀은 우리가 그냥 지나친다고 해서 효력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야김은 하나님의 말씀을 패싱할 게 아니라 회개했어야 됐어요. 유다의 고관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패싱할 게 아니라 회개했어야 됐어요. 말씀을 듣고 왕에게 보고할 게 아니라 회개했어야 됐어요. 말씀을 듣고 바롯과 예레미야를 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했어야 됐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람은 패싱해도 돼요. 모른 척하고 지나가도 그게 나의 인생과 상관없을 때가 많아요. 물론 모른 척한 것 때문에 치명적인 손해를 볼 때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냥 모른 척해도 별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저도 사람들을 패싱할 때가 있어요. 그냥 별로 안 본 척하고 지나갈 때도 있어요. 모든 사람에게 다 인사하고 하는 건 아니니까 저도 마음이 불편하면 그냥 이렇게 보기만 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어요. 돼요. 그래도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아요.
상황도 패싱해도 돼요. 어려운 일들이 벌어져요. 그냥 어려운 일 아닌 것처럼 하고 여기고 그냥 지나가도 돼요. 누구에게 다 있는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냥 지나가도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패싱할 수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무리 모른 척해도 모를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무리 무시하고 지나쳐도 결코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함정은 피해갈 수도 있습니다. 위험도 피해갈 수 있습니다. 어려움도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말씀 앞에 가슴을 치고 옷을 찢고 회개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혹 요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가슴을 씻고 옷을 씻고 회개하라고 하시지 않나요? 수업이 선포된 이 말씀을 여러분 패싱하고 지나쳐 보내지 않으셨나요? 나와 상관없는 일처럼 여기며 여기까지 오지 않으셨나요?
만약 그랬다면 오늘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할 때 우리가 함께 회개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옛날에는 회개하라는 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어요. 교회만 오면 계속 회개하라는 거예요. 나이가 들고 보니까 진짜 회개할 게 많더라고요. 그때는 좀 순수해서 회개하라고 회개를 했는데 나이가 들고 회개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잘 회개가 안 돼요. 그래서 저도 그렇지만 저와 여러분이 상황이 비슷하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오늘 공식적으로 기회를 여러분에게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무시하고 있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 내가 다시는 나를 향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들을 무시하지 않고 나를 향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내가 사람은 지나치고 그냥 어떤 상황은 그냥 지나쳐도 내가 말씀만은 지나칠 수 없는 걸 깨달았습니다. 주여 내가 회개합니다
라고 회개하기 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