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2권 6-1 6 거실居室 사는 집
1 즙송회이위려葺松檜以爲廬 소나무와 전나무로 지붕 이어 집을 만들다
의암가소려倚巖架小廬 바위에 의지하여 작은 집을 세웠는데
근득용아구僅得容我軀 겨우 내 한 몸 용납할 수 있을 것 같네.
락엽이위전落葉以爲氈 떨어지는 잎으로 담요를 삼고
고사이위로枯査以爲櫨 삭정이로 횃대를 만들었네.
바위에 의지해 작은 오두막집 얽어매어
겨우 얻은 것이 내 몸 하나 받아들이네.
떨어진 잎을 가지고 담요로 삼고
마른나무 찌꺼기가 서까래가 되었네.
즙지혜송회葺之兮松檜 지붕은 소나무와 전나무로 하니
실소심유유室小心愉愉 방은 작지만 마음은 유쾌하다네.
운하위장악雲霞爲帳幄 구름과 노을은 휘장이 되고
벽산위병풍碧山爲屏風 푸른 산은 병풍이 되어 있다네.
소나무와 전나무로 지붕을 이으니
방은 작지만 마음은 즐겁고 기쁘구나.
구름과 노을로 휘장을 삼고
푸른빛 산이 병풍이 되었구나.
원조위반려猿鳥爲伴侣 잔나비와 새들은 짝이 되어서
득아심소동得我心所同 나의 마음 같은 것 얻었다 하네.
아시방랑인我是放浪人 나는 방랑하는 나그네여서
이유운수중夷猶雲水中 구름의 물속에서도 편안하다네.
원숭이와 새들 짝과 벗이 되니
내 마음과 한가지로 만족한다네.
나는 무릇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
구름과 물이 오히려 안온하다네.
물성역순요物性亦馴擾 물건의 성질에도 역시 길들여져
음탁의고총飲啄依枯叢 마시고 먹는 것 마른 풀을 의지했네.
원결세한맹願結歲寒盟 원컨대 날 추운 뒤 맹세를 맺어
행락무종궁行樂無終窮 즐거운 일 끝나 다함이 없게 하세나.
다만 물성에 길들여져 움직이고
마시고 두드리며 텅 빈 숲 의지하네.
삼가하며 맺은 세한의 맹세는
즐겁게 지냄이 늘 다함없는 것이라.
►‘기울 즙(집)葺’ 깁다. (지붕을)이다
►모전 전氈 모전毛氈(솜털로 만든 모직물) 담요. 융단
►유유愉愉 좋아하는 模樣.
►순요馴擾 길들이다
‘시끄러울 요擾’ 시끄럽다. 어지럽히다. 침략侵略하다
‘길들일 순, 가르칠 훈馴’ 길들이다. 익숙하다
●歲寒盟
자왈子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든다는 걸 아느니라.
범씨왈范氏曰 범조우范祖禹가 말했다.
소인지재치세小人之在治世 소인은 치세治世엔
혹여군자무리或與君子無異 혹 군자와 함께 다르지 않다.
유림리해惟臨利害 오직 이해利害의 상황에 이르거나
우사변연후遇事變然後 갑작스런 상황에 닥치고 난 후에야
군자지소수가견야君子之所守可見也 군자가 지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씨왈謝氏曰 사량좌謝良佐가 말했다.
사궁견절의士窮見節義 선비는 궁해지면 절의를 보이고
세난식충신世亂識忠臣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충신을 알아보게 되며
욕학자필주어덕欲學者必周於德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덕에 넉넉해지려 한다.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1844년에 제주도 유배지에서
‘논어’ ‘자한子罕’편의 이 글에 담긴 뜻을 ‘세한도’로 그려내고
안중근은 1910년 3월에 만주 뤼순旅順 감옥에서 이 글을 정성스럽게 옮겨 적었다.
조선 전기의 이행李荇(1478-1534)이 유배지 거제도에 지은 작은 정자를 세한정歲寒亭이라 하고
김부필金富弼(1516-1577)이 거처하는 당을 후조당後彫堂이라 한 것은
君子는 환난患難을 당하더라도 지조志操를 지켜야 한다는 이 글의 뜻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세한歲寒은 날이 추워졌다는 말로 세상이 혼란스러워짐을 비유한다.
이런 역경逆境에도 신념을 지켜나가겠다는 굳은 마음을 세한심歲寒心이라 하고
시절이 어려워도 절조節操를 잃지 않겠다는 맹세를 세한맹歲寒盟이라고 하며
그 절조를 세한조歲寒操라 한다.
연후然後는 그렇게 된 뒤라는 뜻이다.
송백松柏은 소나무와 잣나무로 상록수를 가리킨다.
조彫는 조凋와 같아 시든다는 뜻이다.
조락凋落의 의미이다.
후조後彫는 뒤늦게 시든다는 말인데
사실은 다른 초목들이 모두 시들어도 끝까지 시들지 않고 남아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송백松柏을 후조後彫(後凋)라 부르게 됐다.
역사에는 지조志操 있는 사람의 일화가 많다.
한나라 성제成帝 때 주운朱雲의 절함折檻 고사도 한 예이다.
주운은 성제에게
“상방참마검尙方斬馬劍을 주시면
간신 한 사람을 참수하여 사람들을 징계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상방서의 칼은 말을 벨 정도로 예리하다고 해서 참마검이라 했다.
성제가 간신이 누구냐고 묻자 주운은 성제의 인척인 장우張禹라고 대답했다.
성제가 노하여 그를 끌어내라고 했지만 주운은 직간直諫하면서
어전御殿의 난간을 꽉 붙잡고 있었으므로 난간이 부러지기까지 했다.
이 시대에는 세한송백歲寒松柏의 전형典型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데모하는 이들이 잡히면 거의 대부분 최전방이었던 시절.
데모는 안했지만 1975년에 입대해서 서부전선에서 34개월 근무했었다.
사회도 시끄러웠지만 남북간은 살벌했는데 판문점에서 818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났다.
철조망이 북쪽으로 이설하는 작업에 능선따라 진지구축 작업이 병행되었다.
한치 앞이 암흑이었다.
전우신문에 최인호崔仁浩(1945-2013)의 <가족><상도商道>가 연재되었다.
<상도>에 이 세한도 내용이 나온다.
아득한 시절에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잠겼다.
●김정희필金正喜筆 세한도歲寒圖
조선 말기의 사대부 서화가 완당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수묵으로만 간략하게 그린 사의체의 문인화이다.
1840년 윤상도 사건에 연루되어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 온 김정희에게
사제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두 차례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역관인 우선 이상적(1804-1865)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려 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작가의 발문이 화면 끝부분에 붙어 있으며
이어서 이 그림을 받고 감격한 이상적의 글이 적혀있다.
그리고 1845년 이상적이 북경에 가 그려주었고 이상적은 청나라에 이를 가지고 가서
추사의 옛 친구를 비롯한 명사들의 글을 그림에 이어 붙인 저지에 받은 것이다.
그 후 세한도는 이씨 문중에게서 떠난 후 130여년 동안 유전을 거듭하다가
1930년대 중엽에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 1879-1948)에게 들어갔다.
세한도는 일제 말에 후지쓰카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2-1981)에게 무상으로 기중해서 국내에 돌아오게 되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실학자로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하였으며 뛰어난 예술가로 추사체를 만들었고 문인화의 대가였다.
이 작품은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가로 69.2㎝, 세로 23㎝의 크기이다.
이 그림은 그가 1844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그린 것으로 그림의 끝부분에는 자신이 직접 쓴 글이 있다.
이 글에서는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답례로 그려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하여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완당’이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다.
거칠고 메마른 붓질을 통하여 한 채의 집과 고목이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고 청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른 붓질과 묵의 농담, 간결한 구성 등은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에 반발하여 극도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문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