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성지>⑮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대구 남산동에 있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유스티노캠퍼스)는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성소(聖召)를 지켜주는 못자리 성지이다. 지금부터 93년 전, 한일합방으로 나라살림, 개인 생활이 나락으로 떨어져 피폐하던 시절,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고고성을 울렸다.
실타래처럼 엉켜서 앞이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작은 원칙들을 지켜나가려는 노력들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던져줄 수 있듯이, 믿음의 세계에서도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근본을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더해지는가 보다. 2011년 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할 천주교대구대교구의 교회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대구 도심 속의 성지 성 유스티노 신학교는 일제강점하 척박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세상을 밝힐 빛으로 태어났다. 93년 전, 1914년 5월 3일이었다.
◈ 루르드 성모님, 신학교 건립을 도와주세요
우리에게 과거로의 정확한 여행을 안내해주는 ‘타임머신’과도 같은 ‘대구교구 참사·재무위원회 회의록’을 보고 1910년대로 날아가 보자. 초대 주교 안세화 주교가 서품 이후 로마 교황청에 보낸 인사 보고서를 보면 무척 힘들지만, 결코 성령의 품 안에서 낙담하지 않는 강인한 용기와 신념을 읽을 수 있다.
“제일 어려운 문제는 물질적인 것입니다. 한국의 건물들은 모두 작고 자기 소유의 건물도 없고 피정할 집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신학교가 없어서 성소(聖召) 확보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여건에서 모든 것을 새로 건설하려면 너무 부족하고 비참합니다. 그러나 저는 부당한 돈 걱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성모님께 의탁하고… 황금주의와 대항하여 하느님 사업을 한다면 필요한 것은 주시리라 믿습니다.”
프랑스 알사스 지방 출신으로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기반을 잡은 안 주교는 만 가지가 다 부족하지만, 우리나라 사제들을 키울 신학교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느꼈다. 그래서, 안 주교는 수많은 치유의 기적을 보인 루르드의 성모를 주보로 모시고, 세 가지 허원을 드렸다. “성모님. 주교관과 신학교와 주교좌 성당 증축을 이뤄주시면 주교관 가장 높은 곳에 성모굴을 지어서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허원을 세운 지 3년 만에 안 주교는 신학교 건립을 완공하였다. 바로 지금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이다.
◈ 태풍 매미가 남긴 문화재 얼룩
1911년 4월 8일 조선대목구에서 분리,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교구로 설정된 대구대교구 안세화 초대 주교가 지닌 재정은 1만 8천 엔(딸린 박스 참조)이 전부였다. 우선 주교관을 건립한 안 주교는 상해에 있던 은인의 도움을 받아서 신학교를 건립하였다.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그 은인은 “유스티노 성인을 신학교 주보로 모셔달라.”는 단 한마디만 부탁하였다. 조건 없는 희사이자 이름 없는 기부였다.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킨 주역 대구의 서상돈이 그에 화답하여 부지를 내놓았다. 안 주교는 서울 명동성당 건축에 참여하였던 프와넬 신부를 초청하여 서구식 벽돌건물을 지었다. 1913년 9월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8월 12일 유스티노성당 종각까지 완성했고, 1914년 개교하였다. 붉은 벽돌을 주로, 검은 벽돌로 띠를 둘러 지은 단아하고 아름다운 외관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개교하자, 서울 용산신학교에 다니던 주재용 등 대구출신 신학생들은 다 이곳으로 전학되었다.
학교는 ㄷ자형 평면으로 중앙 성당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이었으며, 1층 전면에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사용되던 연속 아치가 있어서 툇간 역할을 하였다. 현재는 전면으로 돌출되었던 양 날개는 철거되고, 중심인 성당만 남아있다. 1915년 5월 9일 안 주교가 축성한 신학교 성당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다. 유스티노 성당의 성물과 비품에는 오래 묵어 아픈 세월조차 향기롭게 느껴지는 신비가 숨어있다. 유스티노 신학교 성당에는 성 푸덴시오, 성 만수에또 두 분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 아픈 상처조차 향기롭게 만드는 신학교 성당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초대 교장은 1914년 5월 3일에 임명된 송덕망(샤르즈뵈프) 신부이다. 샤르즈뵈프 신부는 1891년 2월 19일에 한국에 입국하여 사목하다가, 1897년 5월 8일 예수성심신학교의 제5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안 주교를 도와서 성 유스티노신학교를 짓고, 성당을 신축하는 데 크게 기여한 샤르즈뵈프 신부는 미사 집전 도중 뇌일혈로 쓰러져 1920년, 53세로 선종하였다.
당시 신학생들은 1명당 월 7원 이상 생활비를 쓰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7원은 부두 노동자 임금의 15분의 1에 불과한 아주 검박한 액수이다. 하얀 동정을 단 까만 두루마기를 입고 신학교 생활을 하는 학생들에게 안 주교는 늘 강조하였다. “애덕이 가장 필요하며, 성교회를 영속시키기 위해서 방인(=우리나라) 사제가 필요하다.” 여러 가지 여건상 힘들고, 교구 문서를 보면 신학교에서 적자가 나는 해가 적지 않았지만, 신학생들의 영성생활을 돕기 위해서 휴식공간인 성 니콜라오 별장도 마련되었다. 지금은 그 흔적이나 모양을 알기는 어렵지만 기록상으로는 1923년 10월 11일 강복된 니콜라오 별장에서 신학생들은 두루마기를 입고 성 김대건 신부 연극이나 성서에 나오는 인물에 대한 공연을 했다.
◈ 성지 훼손 막기 위한 보수책 세워져야
유스티노 신학교는 1945년 3월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될 때까지 모두 67명의 사제를 배출하였다. 첫 사제는 주재용(1894~1975·제4대 대구교구장) 신부이다. 주 신부는 1905년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성 유스티노신학교로 전학, 첫 졸업생이 되었다. 이후 유스티노신학교에서 배출된 사제 가운데 다섯 분은 주교로, 여섯 분은 몬시뇰(명예교위성직자) 명의를 받았다. 신학생은 매년 받지 않고, 재정적인 준비가 되면 수시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입학연도는 1914년, 1917년, 1926년, 1929년, 1932년 등으로 이어졌다.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된 성 유스티노신학교는 민족의 아픔과 함께 단절과 핍박을 당하였다. 대구시문화재자료 제23호인 성 유스티노신학교는 93년의 연륜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되어 왔으나 얼마 전 태풍 매미 때문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오래된 벽돌 곳곳은 매미가 할퀸 상처가 얼룩으로 남아있다.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그냥 두면 성지 원형이 훼손될 것은 뻔하다. 요즘도 성지주일이면 성소를 찾아오는 주일학교 예비성소자들의 들뜬 발걸음으로 활기를 되찾는 성 유스티노신학교의 원형, 시급하게 복구해야 될 것으로 보인다.
글 최미화 기자 magohalmi@msnet.co.kr
사진 권정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
♠ 성 유스티노 신학교 성광
이 성광은 1914년 유스티노 신학교가 개교하던 때부터 1944년 폐교될 때 까지 쓰였던 성광이다. 이 성광은 십자가 가운데,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묘사되어 있고, 돌아가면서 포도나무 가지, 포도잎이 달려 있다. 중앙 위 아래 좌우에는 천사들이 맨끝에 어린 양 한 마리가 제물로 바쳐져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4년) 이전만 하더라도 주일 미사 후에 항상 성체 현시가 있었다. 요즘은 매달 첫 목요일 저녁 미사후에 열리는 성시간에 성광을 들고 성체 현시를 한다.
이 성광은 2000년대 초까지 대구 관덕정 순교기념관에 있었으나, 요즘은 대구가톨릭대학교 유스티노캠퍼스 유물관에 모셔져있다. 왼쪽은 보존처리 작업을 하기 전이고, 오른쪽은 보존처리 후의 모습이다. 녹은 깨끗이 벗겨졌으나 성광 중앙 부분이 약간 다른 것 같은 느낌인데,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 1만 8천 엔은 당시 돈으로 얼마?
천주교 대구대교구 안세화 드망즈 주교가 부임할 당시 지닌 돈은 1만 8천 엔 이었다. 당시 1만 8천 엔이라는 빈약한 재정으로 대구대교구의 첫걸음을 뗀 안 주교는 성모님께 의탁하고, 은인의 도움을 받아서 주교관을 짓고, 계산성당을 증축하고, 1914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개교하는 놀라운 힘을 보였다. 당시 신학생들의 생활비는 7원으로 부두 노동자 품삯의 15분의 1에 불과하였다.
안주교가 가져온 1만 8천 엔은 당시로서 어느 정도의 규모일까?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난 뒤 10년 동안의 물가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1910년에서 1920년 사이의 물가를 보면 노동자 품삯이 월 10엔 이었다. 당시는 노동자의 유형이 별로 없었고, 대표적인 노동자 유형이 바로 부산의 부두 노동자였다. 주로 일본사람들이 일을 시켰는데, 부두 노동자들은 10년 가까이 참고 있다가 1921년 3월, 1천여 명이 모여서 품삯 데모를 하였다.
또 그 시절, 초등교원은 일본인 정교원이 월 70엔, 한국인 촉탁교원은 37엔을 받았다.
대구의 물가를 보면, 1911년에 일본인이 술공장인 (주)마루사마(丸三) 주조회사를 동인동에 차렸는데, 총 자본금이 1만 엔이었고, 일본인들이 모여살던 대구 북성로에 1915년에 들어선 어채(魚菜)회사 모노마찌 자본금이 6만 엔이었다. 1914년에 한국사람 일본사람 13명이 합작해서 세운 대구 미곡시장은 6만 5천 엔이 들었다.
안주교가 주조 공장 2개를 지을 돈이 채 안되는 재정으로 시작한 천주교대구대교구는 2011년 교구설정 100주년을 앞두고 있고, 대구 남산동 성 유스티노신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유스티노캠퍼스)는 대구 도심의 성지이다.
첫댓글 사진이 안타깝게도 안보입니다
보이는데요...조금 기다려 보시든지 X표 클릭해보세요
아..잘보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무한 하여 저희들 생각으로선 이해가 안되는게 많아요
기적은 바로 언제나 눈앞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