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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을 바라보며, 갈치재의 귀곡사~"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어수선한 분위기의 위태리에는 이미 공비토벌작전 이유로 동네사람 모두가 밖으로 내보내져 텅텅 빈 마을로 찬바람이 득실거리는 유령의 마을이 되었다.
그래도 땅을 지키려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린아이 몇명이 남아서 어두운 동네에 그나마 인기척이라도 있는게 다행이었다.
벌써 이 동네는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있던 48년도 10월19일 이전부터 군경의 대립과 좌우익의 극한적 대립관계에서 지리산 속으로 숨어든 좌익(빨갱이)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군경의 출입이 많았던 곳이다.
정00('01년 당시 84세)할아버지는 '47년도에 대한 청년단에 가입하여 특공대 1기로 지역에서는 이름있는 반공주의자였다.
'47년 5월11일 인근 광양에서 당시 국방경비대 소속이던 한 대원의 형이 경찰에 좌익혐의로 체포되어 가서 광양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지역의 아픈 역사가 시작 된다
사실 '46년도 그 당시 광주 광산에 4연대가 주둔('46.2.15)하게 되는데 국방경비대 사병들은 대부분 빈농출신으로 광복 후 좌익단체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쫒겨 경비대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이곳 광주의 4연대가 자질문제로 가장 문제점이 많았던 부대였으며 이 부대의 1개대대를 기간으로 창설된 여수의 제 14연대에도 영향을 미쳐 1948년 10월 '여순 10.19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정할아버지는 여수순천반란사건을 진압하는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좌익세력을 색출하고 격멸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리고 "대한청년단(건국초기 지역단위 우익성향의 청년단체)"에서 '48년 11월20일 애국청년들을 근간으로 하는 "육군호국군(지역 예비군 성격, 당시 군은 정규군과 호국군으로 구별)"이 창설시 들어가 좌익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화개장터에 출동도 하게 된다.
'48.10.19 여순사건'을 이해하는데는 "제주도 '48. 4.3사건"을 말하지 않을 수없다.
제주도 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초기 조선총독부의 항복 선언으로 미군정이 실시 되는 때에 제주도는 '45.9.10일에 이미 자치적으로 치안및 행정 조직이 결성되고 청년학도단 결성을 필두로 보안대 치안대 자위대등 무질서한 조직들이 난립하게 된다.
그 당시 중앙에는 좌익 인사들인 박헌영을 우두머리로 남로당이 결성되었고 제주에는 '45년 12월 9일 조선공산당 제주도 위원회에서 '46.12월에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어 당원배가 운동으로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 부녀동맹등 외곽조직의 확대에 노력할때 우익 정당및 단체는 기반이 취약했다.
그 이유는 경제사정의 악화와 미군정 초기 행정체제의 미비로 다소간의 사회적 혼란을 남로당이 적극적으로 이용한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46년도의 대흉작으로 맥류 생산량이 50%미만이었고 여기에 광복 후 55,000명에 달하는 해외 귀환동포와 월남민의 급격한 증가, 천연두 콜레라등이 퍼지고 민심이 어지러워 지면서 '46년 8얼1일 제주도가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도"로 승격되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러던중 미군정이 '47년도에 접어들어 남한내 좌익세력을 단속하게 되는 싯점에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한국정부의 통일정부 수립문제를 해결한다는 소위 신탁통치안이 급부상 하게 된다.
이를 반대하는 파와 찬성하는 파간에 이해득실에 따라 좌우익이 정파가 갈리어 연일 소요사태가 발생하고 남로당에서는 제주를 혁명의 뿌리로 활용하기위해 중앙당에서 음양으로 사상적 지원등 물심양면으로 조직을 강화하고 행정조직에 맞서게 만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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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제주도가 갖고 있는 지리적 잇점과 일본군이 제주도 여러 오름등 내부에 파 놓은 군사시설과 장비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47.3.1일 소위 '3.1사건'이 제주사회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만드는데 제 28주년 삼일운동 기념식에 모든 당력을 동원하여 25,000여명이 집결하여 집회를 갖는 과정에 경찰과 충돌로 6명의 민간인이 죽고 다수가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로인해 3월10일부터 160개단체 40,000여명이 참여하는 총파업이 발생하면서 세력 규합이 이루어지다가 진정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실제는 이 기간이 남로당의 지하 세력을 확보하고 무장하기위한 시간적 공간을 확보하게 되며 결국 남한만의 총선거를 48.5.10일 실시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48.4.3일" 새벽 2시에 한라산 정상과 주요고지에 일제히 봉화를 올리는 것을 신호로 무장폭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 김달삼이며 특별경비대장이 이득구로써 젊은 층의 강경파들이 온건파를 누르고 실권을 장악하여 무장과 샛별오름지역에서 군사훈련까지 실시하였다.
그당시 '48.4.10일자 인민해방군 포고문에는 '친일파 민족반역 도배의 모략에 빠진 경찰관 대청원등이 급속히 반성하면 생명과 재산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있으며 총사령관 김달삼이 '48년 8월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서 행한 연설에 "45회 이상의 지서습격과 야외전투를 통해 57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각종 시설물을 파괴하고 무기를 탈취하는 등 무장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4.5일 경찰이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각도에서 1개 중대식 8개중대 1,700명의 경찰이 투입 되었으나 인민유격대의 기세로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결국 제주도에 있던 제 9연대에게 진압작전을 하도록 지시했으나 모슬포에 주둔하고 있던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사건의 발생 원인을 경찰과 서북청년단에 대한 주민들의 감정폭발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다.
여기에 이미 내부에 침투해 있던 남로당 세포 조직원들이 정보를 흘리고 더욱이 부산에 주둔해 있던 제5연대 2대대(대대장 오일균소령: 남로당원)가 4월10일 증파되었으나 경찰의 요청이나 주민들의 제보에 출동도 하지않고 공공연하게 장병들에게 경찰을 비난하고 "경.민간의 충돌"에 군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선동까지 하게 된다
이러는 와중에 김달삼과 김익렬연대장간의 담판으로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듯 하다가 '인민유격대의 위장귀순사건'으로 결렬되고 연대장은 보직 해임되었지만 실제 남로당원으로 추정되는 오일균소령은 보직만 조정 된다.
새로 경비대총사령부는 박진경중령(일본군 학병출신으로 태평양전쟁 말기 제주도 근무, 동굴진지 구조와 지형에 익숙)을 새 11연대장으로 임명하고 '48.5.1일 수원에서 창설된 제11연대 본부와 1개대대를 5.15일 제주도로 이동시키고 제9연대(실제 1개 대대 규모) 5연대 2대대를 제 11연대에 배속시켜 강력한 진압작을 하게 된다.
강력한 소탕작전에 직면한 무장대는 군내의 당세포로 하여금 연대장을 암살하게 하여 '48.6.18일에 대령 진급 축하연 후 영내에 들어와 취침중이던 박진경 대령을 암살하게 되며 최경록 중령이 새 연대장으로 부임하여 살해범 '문상길일당'을 체포하게 된다
하지만 현재 진행중인 '제주도 4.3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김달삼의 해주 보고 내용같은 것은 어필하지않고 오직 군과 경철 서북청년단의 횡포와 과잉진압에만 촛점을 맞추어 마치 군이나 경찰이 범죄인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제11연대의 체계적인 진압작전으로 서서히 치안은 안정이 되고 주민들의 하산으로 힘을 잃게된 인민유격대는 산속에서 고립되게 되고 경비대사령부는 '48.7.24일 제 11연대를 수원으로 복귀시키고 송요찬 대령을 연대장으로 하는 제 9연대가 임무를 인수받게 된다.
여기서 밝혀지지 않는 일화를 하나 언급하고자 한다
이 9연대 2대대에 당시 정보장교가 육특7기인 이종록중위가 그곳에 근무하게 되고 국방부 진상규명 회의에 참고인으로 들어가도록 되었으나 그 당시 정체모를 인원 몇이 찾아와 시비를 걸고 참가하지 못하도록 종용하게 된다.
" 할아버지, 오래 사셔야지요~~!"
그러다 시간이 경과하여 들어가지도 못하고 중요 증언자가 없으니 일방적인 군의 과실로~~
나는 이종록 예비역 중령과 거의 10여년을 함께 하며 수도사단의 격전지를 찾아다녔다.
산속과 지하 세포망을 통해 세력을 규합해 가던 인민 유격대는 48.8.21(해주에서 남조선인민위원회)이후 김달삼에서 이득구가 사령관이 되어 조직을 거느리고 그때 여단으로 승격된 광주의 제5여단장 김상겸 대령이 사령관으로 왔으나 10일만에 제5여단 소속인 여수 주둔 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그 책임으로 파면되고 송요찬 중령이 후임으로 임명 되었다.
계속적인 인민유격대의 활동이 끊질기게 계속되어 육군본부는 최후의 소탕작전을 위해 '48.12.29일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연대를 제주도에 투입하여 제9연대와 임무교대하게 된다
이무렵 인민유격대는 상당수 피해와 조직원의 이탈로 활동이 중단된 상태가 되고 이에따라 계엄령을 '48.12.31일에 해제하게 된다.
이어서 군은 대부분 선무방송으로 대다수 군민도 하산하고 이제 남은 것은 최후의 유격대만이라 판단하고 마지막 토벌작전을 계획하게 되며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하여 제2연대와 독립1대대를 배속시키고 해군함정 제주경찰이 합동으로 격멸작전을 전개하여 '49.5.18일에 사령부를 해체하고 제2연대도 8.13일에 독립 1대대에 임무를 인계하고 인천으로 이동하고 제주는 독립1대대와 해병대사령부('49.12.28~'50.6.25)가 6.25남침시까지 임무 수행하게 된다.
그러면 "여순 10.19사건"은 어떻게 된것인가?
지금까지의 제주 4.3사건의 진행경과에서 알아보았듯이 48.10.1일 러시아 혁명기념일을 기해 또다시 이득구가 이끄는 인민유격대가 기습 폭동을 일의켜 다시 제주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48.10.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10월15일 광주에 있던 14연대에 제주도에 파견할 1개 대대를 편성하고 대기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제14연대는 '48.5.4일 여수에 창설된다.
창설요원으로 당시 광주에 주둔하던 제4연대의 1개 대대가 차출되었으며 대대장은 이영순 소령이고 주둔지는 일제 말 일본 해군항공기지가 있던 여수 신월리였다.
그당시 창설 요원으로 제4연대의 문제아 들인 경비사관학교 3기생인 김지회, 홍순석 중위와 제4연대 1기생인 지창수, 정낙현상사등이었다
여수에 주둔한 제 14연대는 신병 모집에 들어가는데 순조롭게 모집이 어려워 불온사상 여부에 관계없이 지원자는 입대 되었고 당시 남로당에서는 국방경비대에 자파세력을 침투시키려 활발한 공작활동을 하게 되는데 지창수가 인사처 정낙현은 정보처 간부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고 특히 그 당시 연대장이던 오동기 소령이 좌익으로 '48.6.18일 제주도 주둔 11연대장 박진경대령 암살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숙군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 구속된다.
이런 와중에 육군으로부터 제주도에 파견할 1개 대대를 편성하게 되는데 남로당 당원들이 대거 포함되자(내부 정보망을 이용 사전에 정보 공유) 위기감을 느끼고 19일 LST로 제주도로 출항한다는 21:00보다 한 시간전인 20:00에 "경찰이 우리를 습격하러 온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는 이유로 총소리와 비상나팔소리로 병력을 유인하고 이미 행동책 40여명은 탄약고를 탈취하여 실탄을 지급하게 된다.
이어서 연단에 올라 영문도 모르고 모여든 장병들에게 "미국의 괴뢰들을 쳐부수자, 지금부터 인민 해방군이 된다. 동족을 상상하는 제주도 파병에 절대 반대한다. 제국주의 압잡이인 장교들을 모두 죽이자"라고 외치고 반대한 3명의 하사관을 즉석에서 사살하여 광란의 사태로 몰아 넣은 사건이다.
지창수 상사의 지휘하에 3,000여명의 반란군이 여수시내로 20일 01:00에 들어가 당시 기다리던 민애청 소속으로부터 길 안내를 받아 봉산지서 출장소를 공격하고 여수경찰서 200여명이 저지선을 쳤으나 무너지고 반란군이 시내 주요기관를 점령하고 인공기를 내걸고 좌익 청년단체와 좌익계 학생들을 동원하여 경찰 국군장교 우익인사등에 대한 검거와 테러활동을 본격화 하였다.
그들은 민애청 학생동맹 여성동맹 합동노조 교원노조 철도노조등 등 좌익단체 청년들 600여명이 자발적으로 인민의용군을 조직하여 경찰과 우익인사들의 체포 그리고 재산몰수에 나섰다. 해방이후 북한 공산당이 최초로 함경도 지역에 들어와 행한 조치와 비슷하며 얼핏보면 나누어 같이 살자는 것 같지만 실은 몇몇 동조자(공산당)들의 독식과 선전선동에 도구로 활용된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일부 준동한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20일 10:30분경에는 여수에서 열차를 타고 순천에 온 반란군이 경찰과 사전에 도착한 4연대 파견중대가 있었지만 이미 파견중대는 좌익계 하사관들이 중대장과 반대파를 사살해버려 싸울의지도 없었고 경찰도 여력이 부족해 무너지고 일부 청년단이 있었으나 바로 와해되어 버렸다. 순천도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20일 01:00이 되어서야 철도 경찰대로부터 사태를 통보 받은 국방부는 38선 경비 병력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가용 병력을 진압작전에 투입하게 된다.
'48.10.21일 광주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송호성 준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한편 제2여단 예하의 제12연대(군산) 제2연대(대전), 제5여단 예하의 제3연대(전주)와 제4연대(광주)를 진압부대로 순천방면에 급파하여 10.30일까지 담양에서 순천 들어가는 입구인 학구와 순천 광양 여수에서 교전을 하게 되며 세력의 열세로 반전된 반란군은 산속으로 은거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지리산일대로 밀리며 구례와 광양의 백운산 노고산 지리산 산청의 웅석봉 남원 밑의 천마산일대로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것은 모두 남로당의 지시였으며 유격전 근거지를 물색하고 있던 이현상이 갑작스런 소식을 듣고 순천으로 들어가 홍순석을 총사령관 김지회를 부사령관으로 하는 반란군 지휘쳬계를 갖추고 산악지역으로 이동하여 장기전에 돌입하게 된다.
하지만 일부 무리한 속도전으로 시가전을 감행하여 27일 여수까지 탈환했으나 많은 일부 시민이 희생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에따라 10.30일 호남방면 전투사령부로 변경하고 북지구와 남지구로 구분하여 토벌작전을 하게 되는데 11.4일에 북지구 사령부로 회의 참석하러 가던 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은 구례 동북방 산동지서 부근에서 사전에 감청으로 이동상황을 알고 있던 반란군의 기습으로 수행하던 헌병이 죽거나 모두 도망쳐버려 한 농가에서 자살해야만 하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차후 밝혀진 바로는 김지회가 지휘하는 반란군이었으며 그 김지회도 뱀사골 입구 반선리에서 홍순석과 49.4.9일경 사살 되었다
다시 군은 48.10.30일에 남북지구로 분할하여 광주에 사령부를 둔 호남지구사령부로 원용덕 준장이 지휘하고 제20연대, 15연대 1개 대대, 제9연대 1개 대대, 제19연대 1개 대대, 제3연대 1개대대로 편성하였다.
남원에 사령부를 둔 지리산전투사령부는 정일권준장이 임명되고 제3연대 1개 대대, 제5연대 1개 대대, 제9연대 1개 대대, 제19연대 1개 대대, 독립 유격대(일명 서울 유격대)로 편성되어 주로 덕유산과 괘관산 지리산 반야봉 북쪽 달궁과 반석리 일대, 지금의 뱀사골을 기점으로 토벌작전을 벌여 일망타진하게 된다.
49.4.18일에 정일권 준장은 복귀하고 제3연대장 함준호 대령이 지휘하다 49.9.28일에는 김백일 대령이 지휘하여 잔당들을 거의 섬멸함으로써 50.1.25일에 호남지방의 전투사령부가 해체 되고 50.2.5일에 계엄령도 해제 되었지만 이현상을 중심으로한 인민유격대는 계속 살아남아 북한군의 남침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렇듯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 피해, 특히 좌우익으로 갈라져 이념전쟁이라 할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 전쟁전에 발발했는데 단지 그당시 진압과정에 무리가 있었다 하여 본말은 말하지않고 오직 군경에의한 피해만으로 목숨을 받쳐 명령에 따르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던 인원에게 역도들이라 한다면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모욕이며 대역사건이 아닐까!
사건을 일의킨 지창수며 홍순석 그리고 그들을 따라 지키는대로 곡두각시노릇을 한 인원들, 그들을 통제 지령으로 지휘한 남로당과 좌익세력을 뭐라고 할 것인가~.
그 당시 반란군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인원, 군인 경찰 지역유지 우익인원은 역적이라서 피해를 당했다는 말인지 묻고 싶다
정할아버지는 화개장터 반란군 토벌에 참가하게 되며 이곳의 수괴는 김지회였다.
그러다 50.6.25일에 전쟁이 나고 밀물처럼 몰아닥친 북한군에게 밀리어 낙동강전선으로 7월말 물러날때 할아버지는 지역 청년방위대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역으로 할아버지가 도망자 신세가 되어 지리산 속으로 잠입하여 망을 봐야 했단다.
동네에는 빨갱이들의 세상이 되어 연일 인민재판이 벌어져 머슴이나 좌익들에게 잘못보인 지주, 지역유지, 경찰이나 군인가족등이 그 재물로 희생되고 있었다.
물론 후퇴해 가던 국군도 경찰과 공조하여 남로당의 세포라 불리던 "보도연맹"가입자들을 찾아내어 차에 실고 계곡이나 으슥한 곳에서 미리 묻을 자리를 파놓고 집단으로 죽여버리는 일들도 있었다.
그러다 북한군의 점령기간은 길지 못했단다. 바로 유엔군의 반격으로 50.9월말에 지역이 수복되고 미쳐 도망치지 못한 북한군이나 빨갱이들이 다시 산속으로 들어와 할아버지와 자리교대를 하게 되었단다.
이때부터 다시 총을 들고 지역경찰과 지리산 일대에 토벌작전에 따라다니는 지역 청방대원노릇을 열심히 하게 되었다.
그러다 51년 5월에 삼천포에 있던 102노무사단에 편입되었으며 육군본부 소속으로 전북 이리에 주둔후 진안및 장수일대 공비소탕작전에 계속 투입되어 51.8월에 장수군 계남 계북지역에서 박격포 사격으로 공비 17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군번도 받아 900~이며 51.11월에 전방사단으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전남 보성에 적이 나타나 지서를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실 그 당시는 전후방이 없이 전투는 계속 되었다고 한다.
9.28 서울 수복당시 미쳐 북으로 후퇴하지 못한 잔당과 4.3사건 여순사건등과 관련된 지역 푸락치들이 연계하여 지리산과 태백산 줄기를 이용하여 낮에는 산속에 은거하고 밤에는 내려와 약탈과 관공서 습격등을 일삼아 후방지역을 교란하고 있었다.
때문에 전후방 두 곳에서 전투를 해야 하고 그래서 주로 후방은 경찰이 지역 청년 방위대와 협력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일부 정도가 심한 지리산 일원은 군인이 직접 소탕작전을 주기적으로 했단다.
그러다 정할아버지는 1개중대를 이끌고 공비소탕작전중에 공비에게 생포되어 그만 20여일을 지리산 이곳저곳으로 끌려 다녀야만 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기로에서 그들이 하라는대로 할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여 밥지고 탄약지고 하루에도 산 능선을 2~3개씩 넘어야 했다.
산청 단성의 웅석봉(1099), 지리산(1915), 지리산 쑥밭재(1315), 산청 내원사계곡, 하동 청암의 삼신봉, 하동 화개의 목통골에서 화개재를 넘어 뱀사골로 밤이면 밤마다 이동이다. 낮에는 동굴이나 다른 것으로 위장을 하고 수면을 취해야 했다.
한번은 밤새걸어 갔는데 나중에 보니 함양 병곡의 괘관산(1254),안의의 월봉산(1279)을 넘어 남덕유산까지 한밤에 걸어서 끌려 다녀야 했다.
나중에 잔당 소탕전에 장수의 계정과 계북을 들어 갔는데 바로 덕유산(1508)일대가 그들의 아지트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본인이 포로 신세에서 살아남아 그 당사자를 사살하러 쫒기는자에서 쫒는자가 된 것이 아이러니 하더란다.
밥은 겨우 죽지않을만큼 얻어먹으며 씻기는커녕 옷 한번 갈아입지도 못했고 그나마 처음에 입고 있던 군복도 공비들이 벗겨가고 핫바지같은 광목으로 된 그 당시 우리나라 농민들의 낡은 옷을 입어 겨우 중요한 부분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얼마나 많은지 가려워서 항상 긁어대야 했고 여차하면 회초리로 두둘겨 맞아야 했다.
여기저기에 어디에서 잡혀왔는지 군인이며 경찰 그리고 알지 못하는 민간인들이 정할아버지와 같은 신세가 되어 우굴우굴 했단다.
그러다 어디에선가 억 소리나면 도망치다 잡혀 죽는데 총으로 안쏘고 소리 못지르게 혀부터 자르고 대나무로 찔러 죽이고 때로는 껍질을 벗기어 나무에 매달기도 한단다.
그런 대상은 주로 경찰이라고 했다. 또 어떤 때는 여자가 대상이기도 하고 노리개로 활용하다 버리며 남자는 성기가 크면 재미로 불알을 까서 크다고 매달아 놓기도 한단다.
정말 놀라운 것은 뱀사골 지역에 붙잡혀 있는데 왠 어린 여학생들이 그 하얀 상의 옷이 까맣게 때가 묻어 숟가락으로 긁어도 나올지경인데 옆에서 밥하고 때로는 세탁도 하고 유격대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
머리는 이가 알을 낳아 머리가 하햫게 보이는데 머리만 보면 80먹은 노파처럼 생겼더란다
별별 이야기로 공포심은 높고 도망칠 여유는 없고 얼마나 감시가 심한지 서로 조를 만들어 연대책임을 지도록 해서 곰짝 못하게 통제되고 있었단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친구가 빨치산 중요직책을 맡아서 나타났다. 이제 죽기 아니면 살기다.
동네에서 같이 있던 친구가 지리산 경남지부 선전부장이 되어 있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더니 이제 죽지는 않겠구나 안심이 되었다.
동네에 함께 살면서 나쁜 관계가 아니라 항시 배려해 주고 먹을 것 나누어 주고 학교 다닐때 책보자기도 어깨에 걸어매고 다녔고 어떤 때는 동네 00집의 참외 서리도 함께 했던 친구다.
그는 못사는 친구였는데 항상 형제처럼 잘 지냈고 방학때면 골방에서 합숙도 하고 동네 여자친구들하고 소곱놀이도 함께 하던 친구인데 어떻게 프락치가 되어 이곳에 나타났다.
누구보다도 우리 실정을 잘알고 있던 선전부장이었다. 할아버지 계시고 형들은 없고 아버지는 배우지 못하고 그나마 일본에 징용으로 갔다오면서 병을 알아 실제 농사는 많이 없지만 일꾼이 꼭 있어야한 집이다.
"상영아, 너 오랜만이다. 너같이 열열한 동무가 산속에만 있으면 되갔나~?"
어어 말도 변해갔다. 눈은 핏기가 돌고 입은 야무지게 큰소리였다. 얼떨결에 옆에서 본대로 그만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가슴이 뛴다. 혹시나 잘못 짚었나해서 말이다.
"동무 일로 오라우, 동문 지금부터 날따라 시천면에 가기오"
이것이 친구와의 마지막 우정의 선물이었다.
일정 거리를 걸어나와 종이 한장에 확인서를 써주어 되돌아 갔다.
감시초소를 벗어난 다음 어떻게 달렸는지 모른다.
남원 산내지서로 달려가 나는 그동안의 사정을 낱낱이 이야기했다.
경찰과 함께 다시 뱀사골로 총을 들고 이제는 내가 친구를 잡으러 가야했다.
친구야 미안하다. 나라를 구해야 너도 살고 나도 살 수 있어서 택한 최선의 선택이다.
할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혔다. 본인을 보내면서 친구가 남긴 마지막 말이 떠 올랐다.
" 다시는 오지마라. 올 곳이 아니야. 우리집 부모님에게도 안부 전해라. 난 후회는 없어. 잘못된 선택이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위치야. 잘가라~~"
지원경찰이 오고 지역 군대도 오고 아마 8사단으로 기억이 된단다. 본인이 8사단으로 전방에 11월에 가게 되었는데 포로 되었을 때가 51년4 월경으로 국군 8사단이 51년 2월초에 횡성에서 중공군의 2월공세로 대량 피해를 입고 부대가 와해되어 대구로 내려가 재편성해서 51.4.3일부터 5월11일까지 호남지역 공비토벌작전을 하는 시기였다.
차량을 이용하여 반선리까지 간 후 대열을 갖추어 계곡 안으로 진출하는데 결과적으로 대부분 도망치고 부상자와 어린아이들 몇명, 그리고 고향이 여주라는 여학생 4~5명을 생포(?)하는 선에서 일단 당일 작전을 마감했다.
"친구, 선전부장은 어디로 갔을까", 전쟁이 종료된 후에도 그의 생사는 알 수 없었고 요즘 북한 매체에도 얼굴이나 이름이 안뜨는 것을 보면 그후 다른 곳에서 죽었지 않나 싶단다
물론 그의 형제들은 동네를 떠나 어디서 연명하는지 모르고 동네를 떠나기 전까지는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드렸단다.
정할아버지는 이후 8사단으로 잔방에 가는 꿈을 버리고 지리산 공비토벌을 전담한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에 전투경찰로 편입하여 55년 3월까지 공비토벌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말이 전투경찰이지 그때는 제대로 행정이 이루어지던 시대가 아니라 누굴 좀 알면 그 덕택으로 나은 보직을 얻기도 하는데 할아버지는 주로 중대본부에서 중대장 부관으로 있으면서 경찰도 했다가 향토방위대도 하고 의용경찰도 하고 다양한 보직을 받아가며 55년 3월까지 공비토벌 임무를 수행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는 52년도 서남지구 사령부에 편성되어 4월에 바로 옥종면 이태리 갈치재로 공비들이 이동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매복작전으로 71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다고 한다.
당시 사남지구전투사령부는 51년11월25일 백야전전투사령부(백야사)에 편성되어 지리산 부근의 운봉 곡성 하동 함양 산청등지에 출몰하는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국군8사 수도사단과 서남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하여 52년 3월14일까지 임무수행하며 그 이후는 서남사와 지리산지구 경찰전투사령부가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사상자중에는 공비끌려다니던 경찰 향토방위대 민간인도 다수 있으며 사망자가 너무 많고 신원이 바로 확인도 안되고 지형이 험해 언제 또 기습을 받을지 몰라 죽은사람의 귀를 잘라 전과를 보고 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함양 두리침에서 제보에의해 전사한 11인의 유해를 발굴할 때에 당시 동네 청년방위대로 지리산 전투에 참가했는데 현역이나 경찰이 아니다 보니 명단도 없고 동네에서는 어디로 가서 전투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어쩌다 부상당해 살아남은 인원이 동네에 돌아와 저기 높은 산 계곡이라하면 동네 유가족들이 우르르 달려가 먼저 와 까마귀들이 눈을 파먹고 장을 꺼내 먹는 상황에 맞닥드린\리다 보니 형체만 가지고 신원을 구분하기 힘들어 같은 동네니 고만 모두 모셔다 장사 지내자해서 모셔다 매장했는데 요즘 DNA가 발달해서 신원확인이 되니 우리 아버지를 구별해 달라는 민원으로 발굴하게 되어 3명이 바뀐 것을 옳바르게 정정해 드린 적이 있다.
조그만 동네에 갈치재는 바로 서쪽이 하동 악양과 산청 시천면 지역의 경계다.
그 위에 지리산 동쪽 자락인 대원사와 내원사 계곡이 있는 곳으로 지리산 공비들이 함양 지곡과 수동, 거창 신원리로 이동하는 곳으로 지금도 시천 중산리에 지리산 빨치산토벌전시관이 있다.
지금은 길도 있어 재를 넘으면 시천면 내공리가 나오지만 그때는 사실 소로길도 없고 오직 공비들만이 사용하던 루트로 사람도 없었던 곳이다.
그 바로 북쪽 시천천 변의 내공리 앞 외공리는 또 역사의 비극인 보두연맹이 어딘서 잡혀왔는지는 모르지만 밤나무 숲에 많은 인원이 죽어서 묻혀있다.
언젠가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현장을 조사하고 시굴결과 많은 유해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나 대부분의 지역이 유가족들이 명확하고 찾는 대상도 친족들인 반면 이곳은 어디서 실려왔는지조차 모르는 곳이라 발굴해서 처리절차가 미궁에 빠질 것이 분명해 발굴 도중 그대로 덮어버리고 말았다 한다.
이렇듯 우리의 역사는 아름답지 못한 숱한 상처를 안고 있다.
그 상처를 이제는 아물리게 하고 다시는 반복됨이 없는 자유대한민국을 지켜야 함이다.
따라서 옥종면의 충혼탑에는 13인의 무명용사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중 9기는 52년도에 지리산 공비토벌작전간 전사한 아군의 시신을 묻었고 4기는 그후 군에서 화장한 채로 가져온 것으로 1기는 분명히 전방에서 전투중 전사한 이곳 사람이며 3기는 신원미상이라 한다. 사실 말이 전투경찰이지 지금의 경찰과는 성격이 다르고 동네에 살던 일가친척도 전쟁속에 뿔뿔히 흩어져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니 군에서 유골이 와보야 받을 유족이 없어서 그만 동구밖에 놓고 가는 것이 그 당시 우리의 유해처리 수준이었다.
어떻게 하랴, 잊혀진 전사자의 신원 그리고 멀어져간 유족들!
갈치재에서 숨져간 그 전사자는 아군도 있고 공비도 있고 민간인 신분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대원사 입구 평촌리에서도 공비들의 매복에 걸려 많은 경찰과 청년 방위대가 피해를 입었는데 유족들이 나타나지 않아 10여구를 일정기간 한곳에 안치했다가 면사무소가 있는 원리 공동묘지에 매장하고 말았다고 한다.
우리는 옥종 충혼탑 참배를 마치고 시천 원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