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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나들길의 첫 번째 길인 1코스 심도역사문화 길은 천년을 넘나드는 시간여행의 길이다,
시점인 강화터미널에서 왕의 길을 지나 견자산에 올랐다가 강화산성 동문을 통과하여 강화성공회한옥성당, 용흥궁, 강화문화원, 고려궁지, 강화향교를 둘러보고 북문에서 북장대 터에 올랐다가 아늑한 대산마을 벌판을 보며 연미정으로 가는 길은 옛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고향 같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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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나들길의 첫 번째 길인 1코스 심도역사문화 길은 천년을 넘나드는 시간여행의 길이다,
소한 지나 대한을 앞두고 있다. 대한은 일년 가운데 가장 춥다고 하지만 포근한 날씨 가 계속된다.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 “소한의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라는 속담처럼 대한이 소한보다 오히려 덜 춥다고 하니 올겨울 강화나들길은 한고비 넘긴 것 같다.
2024-25 시즌 길동무의 동행(同幸)은 우리나라 역사의 집약체이며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 이 땅에 선조가 심어놓은 학문과 역사와 지혜를 가슴 깊이 느끼며 강화터미널에서 1코스 심도문화역사길을 시작한다.
강화산성으로 향하는 길은 먼저 왕의 길을 걷는다. 왕의 길은 1849년 조선 25대 철종의 재위를 모시러 오는 왕실의 강화도 행렬을 그린 역사 기록에 나타난 가로 형태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고려시대부터 조성된 강화산성 안 마을의 가로 형태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과거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 형태와 가로를 중심으로 하여 곳곳으로 연결된 골목과 장소를 연결하는 도시재생사업을 시작하였다는 왕의 길에는 강화를 빛낸 역사 속에 10명이 소개되고 있다.
강화대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너서면서 좌측으로 골목길을 들어서면 찐한 커피향이 풍기는 카페 커피향기가 낯익다.
마을길을 통과하다 보면 강화산성을 오르는 길이 열린다. 한차례 산성 날 등을 따라 가파른 오르막길은 높이 75m의 강화산성의 동쪽 산인 견자산으로 오른다. 견자산은 당산, 남산, 북산과 함께 강화읍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견자산 정상은 겨울이 실감나듯 하얀 눈밭이다. 현충탑이 우뚝하다. 1950년~1953년 7월 27일 사이 한국정쟁이 발발하여 휴전 될 때까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몰한 강화출신 군경 및 유격대원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이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3년 10월 건립하였으며 이 현충탑에는 강화군 출신 전몰군경 1,033신위(국군735, 특공대18, 경찰관36, 육격군224)를 각인하여 모시고 있다.
강화산성 동문으로 내려서는 길은 빙판길의 연속이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젖 먹던 힘까지 쓰다보면 강화산성 동문이다. 강화산성은 강화읍 일대를 둘러싸고 있는 석성으로 조선 숙종37년에 확장되어 축조되었다.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해서 쌓은 산성으로,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는 총 연장길이 7,122미터의 산성으로, 성문 4곳과 남문 안파루·북분 진송루·서문 첨화루·동문 망한루 등의 문루, 암문·수문·장대 등의 방어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현재 강화읍 동쪽의 성벽은 없어졌지만 남쪽과 북쪽의 성벽은 잘 보존되어 있다. 몽골군의 침입,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수많은 외세 침략의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동문 망한루를 통과한다. 나들길은 동문에서 북쪽으로 골목길을 걷다보면 수령 약 400년의 느티나무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이 느티나무는 본래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가 아니고 성곽의 축조와 관련되어 심은 나무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요즈음은 원불교 교당과 주택들이 인근에 자리하여 길목의 쉼터가 되었다. 나무의 형세가 매우 왕성하면서도 균형을 갖추고 있어 아름답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에 들어선다. 강화성당은 동서양의 미를 조화시킨 한옥 성당이다. 토착화 선교를 지향했던 성공회 정신이 담겨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특이하게 한옥으로 지어져 있다.
1900년 11월 퓨전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동서양 건축법이 조화를 이룬다. 내부 구조도 독특하여 외삼문, 내삼문은 사찰의 구조와 같다. 성당 안에 십자가가 새겨진 범종은 절의 범종과 흡사하고, 본당에 걸린 ‘천주성전’이라는 편액도 사찰의 양식이다. 그러나 천장이 높고 중앙부 양쪽에 날개가 달린 것은 바시리카 양식으로, 기독교 예배공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축조이후 증측 등을 하지 않아 더욱 의미 있는 곳이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을 뒤로 잠시 내려서면 용흥궁이 반긴다. 용흥궁는 비운의 임금이 된 강화도령이라 불리는 철종 임금이 19세까지 살던 잠저이다. 잠저란 법통을 이어받지 않은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집을 말하는데 용흥궁은 원래 세 칸짜리 초가였다.
철종의 본명은 이원범으로 그의 증조 할아버지가 사도세자다. 현재 건물은 내전과 외전 그리고 별전이 각각 1동씩 남아 있고,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라는 잠저구기비각이 서 있다. 창덕궁의 연경당과 낙선재처럼 살림집의 유형을 딴 소박하고 질박한 기풍이 있다.
용흥궁을 뒤로 먼저 김상용 순절비를 찾아본다. 이 순절비는 병자호란 당시 청에 대항하다 순국한 김상용의 우국충절을 기리는 비이다. 김상용은 조선 인조 때의 문신으로 청국과의 화의를 반대한 척화파 김상헌의 형으로 문과를 급제한 후 우의정을 거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상용은 종묘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했다. 청군이 강화들을 함락하자 강화산성 남문루 위에서 그는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국하였다. 숙종 때 증손인 김창집이 세운 구기가 후대에 발견되어 순조 때 유수 김매순이 건립한 신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그리고 만나는 강화군이 1994년에 세운 3ㆍ1운동 기념비다. 강화지역의 3ㆍ1운동은 3월 18일에 읍내 장터에서 1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시위로 시작되었다. 이후 모든 면과 리로 확산되어 4월초까지 지속되었다. 시위 규모에 있어서 저국정으로 손꼽히는 사례에 속한다.
강화문학관이다. 강화출신의 수필가 故 조경희 선생의 유지에 의하여 건립한 강화문학관은 조경희 선생께서 2005년 8월 타계하시며 강화군에 기증하신 소장품 팔천 여 점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아울러 <한국수필가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하신 고인의 수필문학에 끼친 업적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1층 전시실에는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이규보와 정철, 정제두 등 강화도와 관련이 있는 옛 문인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으며, 2층 수필문학관에는 조경희 선생의 육필원고와 생전에 사용하던 책상, 안경 등과 미술품 40여 점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강화문학관을 뒤로 고려궁지로 오르는 길 좌측으로 강화성당이다. 1896년 개교 강화초등학교가 말걸음을 붙잡는다. “그땐 그랫지!” 추억의 사진첩이 전시되어 있다.
고려궁지에 들어선다. 고려궁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으며 사적 제133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은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이 있던 곳이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 든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에 도읍을 옮겼으며, 1234년 궁궐과 관아를 완공하였다. 1270년 몽골과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한 뒤 궁궐과 성곽은 무너졌다고 한다.
강화 유수부 동헌이다. 강화 유수부는 1627년(인조 5)에 인조가 강화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뒤 설치한 것으로 종2품 관청으로 삼았다. 1638년(인조 16)에 유수 김신국이 개수하였고, 1769년(영조 45)에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이라 명명하였다. 현재는 명위헌과 이관당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당호는 송나라 미남궁체를 잘 쓰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였던 윤순(1680∼1741)의 필적이다.
건물규모는 정면 8칸, 측면 3칸, 건평 24칸이고 구조는 익공계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현재에 이른 것인데, 오늘날의 군청과 같은 관아건물로서 여러 차례에 걸친 개조로 원형은 남지 않았다고 한다.
유수부 동헌 왼쪽으로 외규장각있다. 외규장각은 조선시대 왕립 도서관격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으로, 왕실 서적의 안전한 관리를 목적으로 1781년 정조가 강화도에 설치하여 왕실 관계 서적 1,000여 종, 6,000권 가량을 보관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국보급 문화재에 해당하는 외규장각 의궤를 포함한 일부 서적이 약탈되고 나머지는 소실됐다고 한다.
외규장각을 내려서면서 만나는 수령 약 400년의 회화나무가 아름답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인물이 난다 하여 궁궐이나 양반가에 많이 심었던 상서로운 나무라고 한다.
이 회화나무는 13세기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로 천도해 왔을 당시의 나무는 아니고, 17세기 강화유수부 뒤편 행공과 외규장각, 강녕전, 만년전 등 강화부의 조선궁구궐을 지을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회화나무는 강화의 가장 중심부에 있으면서,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등 영욕의 세월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어 강화부종각이다. 보물 11-8호 강화동종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강화동종의 균열이 심해져서 타종할 수 없게 되자, 1999년 10월에 강화동종과 같은 모양의 종을 만들어 강화부종각에 설치하고, 강화동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옮겼다.
이 종각은 원래 강화산성 남문 동쪽에 있었고 강화산성의 사대문을 열고 닫을 때 사용하였다고 한다.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고려궁지로 옮겼다고 한다.
강화부종각에서 조금 더 내려서면 유수부 이방청있다. 이방청은 강화 유수부 내 육방(六房:예·병·공·이·호·형방) 중의 하나로서 1654년(효종 5) 유수 정세규(:1583∼1661)가 건립하여 관아로 사용한 건물인데, 1783년(정조 7) 유수 김노진(1735∼1788)이 내부를 개수하여 계홀당이라는 당호를 게시하였다고 한다.
이방청을 뒤로 고려궁지에서 나들길은 한옥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이 은행나무 보호수는 칠백 살이 넘는 품이 넉넉한 나무다.
한옥마을 골목길로 들어선다. 한옥마을이라고 하지만 새로 단장한 한옥 한 채가 골목길을 지키고 있다. 고불고불 골목길을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자칫 놓치기 쉬운 '북관제묘’ 를 만나는 곳인데 북관제묘가 예전 모습이 아닌 것 같다.
북관제묘는 이름은 관우(關羽)요 자(字)는 운장(雲長), 관운장은 소설 삼국지에서 보듯이 출중한 무장이었는데 중국 송나라 시대에는 무신 및 재신으로 모셔졌다. 우리나라에는 임진란 때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군사들의 요청으로 서울에 동관묘가 세워진 이래 관우신앙이 퍼져나갔으며,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관아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고종 때에는 나라의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더욱 관우 숭배를 강화했기에 서울 동서남북에 관왕묘가 서고 지방에도 많은 관왕묘가 세워졌다. 이곳에 세워진 관제묘도 그 시기인 1892년(고종 29년)에 세워진 것이라 한다. 그 뒤로 관우숭배는 종교나 무속의 영역으로 남아 무가에서는 장군으로 모시고 있다. 중국에는 부자되고 싶은 이들이 관운장상 앞에 향을 올리려 줄을 서고 있다고 한다.
문이 굳게 닫은 강화향교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국립교육기관인 강화향교는 성현들엑 제사를 지내고 교육을 담당했던 국립교육기관으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강화향교는 고려 1127년(인종 5)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고려산 남쪽에 세워졌던 강화향교는 1232년에 갑곶리로 옮겼다가 몽골의 침입으로 서도면으로 이건하였다.
그후 강화군으로 옮겨왔으며 1624년(인조 2)에 강화유수 심열이 소동문 밖의 송악산(지금의 북산) 옆에다 복원하였으며 1629년에는 명륜당을 세워 완전한 체제를 갖추어 학궁이라 하였다. 1731년 강화유수 유척기가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1766년에 유수 이은이 중수하였는데, 이때 소동문 밖에 있던 비석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강화여자고등하교 정문을 보며 왼쪽으로 들어서면서 은수물이 마중 나온다. 은가루를 풀어놓은 듯 은빛을 띈다 해서 은수물이라고 불리는 우물이다. 강화향교 서편에 있는 은우물은 향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이 물을 길어다 썼다고 한다. 우물 아래쪽에 빨래터가 만들어져 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수도시설이 생기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천년을 넘나드는 시간여행 심도역사문화길은 은수물을 뒤로 북산 숲길이 시작된다. 곡갱이 자루에 “여러분의 행복을 위하여!”라는 글귀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요즘 맨발걷기가 활성화 되면서 북산 산책길도 맨발길이 조성되어 있다.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산성의 북문이 마중 나온다. 북문은 고려 고종 19년(1232)에 강화로 천도한 뒤 대몽 항쟁을 위하여 축조한 내성(당시 토성)에 연결되었던 문이다.
문루에 이름은 진송루이다. 하얀 눈밭 길의 가파른 강화산성 성곽길을 한차례 조금은 힘들게 올라서면 북장대 터가 기다린다. 장대는 성곽을 지키는 장수의 지휘소이다. 강화산성에는 북산에 북장대와 남산에 남장대가 사방이 잘 보이는 정상 부분에 있었다.
남장대는 2010년에 복원되었고, 북장대는 복원을 위한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했는데 아직 빈터로 마중 나온다.
북장대 터에서 휘둘러보는 조망이 남다른 곳이다. 북녘 땅이 손에 잡힐 듯하다. 북장대 터에서 성곽길을 따르다가 북산 정상으로 오르기 직전 좌측으로 급경사의 송악골로 내려선다. 북사면이라 빙판길이지만 아이젠을 착용하니 한결 가볍게 내려설 수가 있다.
사랑나무 연리목 한 그루가 길목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만나는 오읍약수터, 오읍약수는 강화산성 북문 밖에 있는 샘물이다. 고려 고종이 강화로 천도하여 성을 쌓을 때, 가뭄이 심해 장정들이 갈증으로 허덕이고 있었는데, 문득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지금의 오읍약수터 위 바위가 깨지면서 샘물이 솟아나 장정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절하였던지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신이 울고, 임금이 울고, 그리고 온 강화 백성들이 울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다섯 오(五)’ ‘울 읍(泣)’ 자를 써서 오읍약수라 불렀다고 한다.
오읍약수터에서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풀고 내려서다 보면 송악빨래터를 볼 수가 있다. 북산(송악산) 숲길을 내려서면서 도로를 가로질러 대산리 2리 마을로 접어든다. 예전에는 산 전체가 학이 춤을 추는 형상과 같다 하여 학무산(70m)이라 부르는 학무산 능선길을 걸었던 기억 있다.
강화읍 대산리에는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가 있다. 아직 찾아가 보지는 못했지만 대산리 고인돌은 고려산의 동쪽 봉우리인 북산의 북쪽 능선의 맨 마지막 자락에 있다고 한다.
나들길은 한동안 포장도로를 따라 걷는다. 비닐하우스를 만나면서 우측길로 들어선다. 초기에 학무산의 고즈넉한 숲길이 이젠 반으로 줄어 조금은 아쉽지만 고즈넉한 나들길은 힐링이 된다. 좌측으로 전원주택단지가 보인다.
해온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있고 좌측으로 잠시 고갯마루에 올라 다시 숲길로 들어선다. 가족묘지가 있어 가끔은 길동무들의 점심 장소를 이용했었는데 이곳도 전원단지 조성으로 옛 모습이 아니다. 잠시 가족묘가 자리한 봉우리에 올랐다가 월곳리 마을에 내려선다.
박지성의 벽화 그림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인적이 없는 월곶마을길은 능가사 지나면서 곧이어 월곶돈대가 마중 나온다. 2019년 태풍 ‘링링’의 아픈 흔적이 남아 있는 연미정이다.
연미정은 강화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자리로서 절경을 이루고 있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염하강)으로 흘러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하여 연미정이라 불렀다.
연미정에서 보는 북으로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자는 높다란 주초석 위에 세워져 있다.
지난 2019년 9월 태풍 ‘링링’에 의한 강풍으로 인천 강화군 연미정 느티나무 두 그루 중 한 그루가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쓰러진 연미정 느티나무는 수령 500년 이상 된 나무였다.
피해를 본 느티나무는 지상으로부터 약 1m부터 위 줄기가 완전히 부러져 나무의 뿌리와 밑동만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자연의 순환을 보여주고 있다. 새싹이 나와 자라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겠지....
부러진 연미정 느티나무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이수자 양석중 소목장의 전통가구 ‘강화반닫이’ 작품으로 재탄생 되었다고 한다.
태풍 링링의 피해가 나기 전만 해도 정자 양쪽에는 수 백년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정취를 더해주고 있었다. 이 정자는 고려시대에 지어졌다고 하며, 1244년(고종 31)에 시랑 이종주에게 명하여 구재생도를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 : 여름철에 50일 동안 절에 들어가 공부하던 일)를 시켜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중종 때 삼포왜란에서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내려주었으며, 청나라와 형제의 맹약을 맺어 병자호란까지 이어진 비운의 정자이기도 하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보구곶리에서 끝나는 한남정맥의 마지막 산 문수산이 이 곳에 올 때마다 추억을 되돌아보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황형 비를 뒤로 내려선다. 황형 택지는 조선 중기 무신이었던 황형(1459~1520년)의 옛 집터이다. 황형은 1510년(중종 5년)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 방어사로 적을 크게 무찔렀고, 1512(중종 7년)에는 함경도 지방에서 야인들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황형은 평안도, 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장무이다. 왕이 그의 공을 찬양하며 연미정을 하사하였고 이곳 월곳리에서 만년을 보냈다 한다. 택지는 월곶진을 설치한 뒤 관아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논밭으로 변하였으며 후손들이 파손된 비석을 새로이 설치하였다.
해안북로 철책길이 시작된다. 새로운 길안내 목이 보인다. 평화의 길이다. 구 강화대교에서 평화전망대로 가는 길이다. 연미정에서 평화전망대까지의 길은 두 번 걸었던 길이다.
철책길을 한동안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건너야 할 다리가 보인다. 옥개방죽길의 시작이다. 옥개라면, 옥같이 맑은 냇물이라는 뜻이다. 강화읍 옥림리 옥개에 있는 방죽이다.
이 옥개방죽의 수로는 저어새와 황로 등 철새가 자주 오는 곳이다. 근처의 옥창돈대는 월곶진의 관리 아래에 있던 강화 돈대 중 하나이다. 동남쪽의 바깥 석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쌓았던 중성의 북쪽 끝 지점이다.
조금은 지루하다 싶었는데 예전 가을이면 바람에 날리는 갈대숲이 아름답던 길을 지나 숲길로 접어든다.
고즈넉한 숲길 한쪽에는 낯익은 가족묘지를 만나는 정겨운 나들길이다. 한겨울 푸름이 가득한 솔밭길을 뒤로 푸른마을로 가는 길이다. 오늘의 마지막 산길로 접어든다. 예전 진달래군락지는 국궁장이 들어서면서 빼앗기고 곧바로 능선길로 대산기계공업 정문으로 내려선다. 다시 해안북로 철책길이 시작된다.
이 길은 지난 2014~2015년에 극심한 가뭄으로 김포 신곡양수장에서 취수한 한강하류 물을 강화도까지 공급하는 임시관로가 설치되어 걷기 불편했던 길인데 그사이 말끔히 정리되여 한결 편한 길이 되었다. 6,25참전용사기념공원에 들어선다.
6,25참전용사기념공원이다. 참전용사기념비를 중심으로 한반도를 형상화한 조각물을 조성해 놓은 공원이다. 이 공원은 당초 6,25참전용사기념비가 위치한 곳에 참전용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해안북로 철책선을 따라 나들길은 평화의 길과 함께 이어간다. 철책선 염하 너머로 나루터가 보인다. 강화읍 갑곶리와 김포군 월곶면 성동리를 배로 연결해 주던 곳이다.
강화대교 다리 밑을 통과하면 곧이어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표석을 만나게 된다.
갑곶이란 지명은 고려 고종 때 몽고가 침입하자 왕이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었을 때 이 곳이 강 건너와의 거리도 짧고 수심이 얕아서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쌓아 놓고 건널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이 곳은 정묘호란(1627) 당시 인조가 건넜던 나루터로, 병자호란(1636) 때에도 봉림대군이 임금을 모셨던 곳이고, 병인양요(1866) 때에는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나루터 시설 없이 이용되었다가, 조선 세종 원년(1419) 박신이라는 사람이 최초로 자신의 재산을 털어 14년간 석축로 공사를 하여 완성하였고, 약 500년간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석축로는 1900년대까지 강화도와 육지를 오가는 사람들의 중요한 통행시설로 이용되었으나 1920년경에 성동리와 강화군 용정리 사이에 나루터가 신설되어 옛 나루터는 폐쇄되었다.
광복 후 나루터 부근에 자동차를 나르는 도선장이 생겨 이용되다가 1970년 강화대교가 건설되면서 두 나루터 모두 폐쇄되었고 주변의 제방 공사로 인하여 원래의 시설들도 상당부분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갑곶순교성지로 들어선다. 먼저 진해루가 마중 나온다. 진해루는 2003년 사적 제452호로 지정된 강화외성 제물진(갑곶진)의 성문으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내륙에서 염하강을 건너 갑곶나루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했던 가장 중요한 길목의 문루였다고 한다.
갑곶순교성지는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삼아 1871년 군함을 앞세우고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신미양요가 일어난 후 대원군은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후 고종은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교서를 내리게 되는데 이때 미국 함대에 왕래했던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등이 제일 먼저 잡혀 갑곶진두(갑곶나루터)에서 목이 잘려 효수되었다.
한국 천주교에는 적게는 만 명, 많게는 삼 만명의 순교자가 있다. 이곳에 '한국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을 조성하여 한국의 순교자들, 특히 '무명 순교자들'께 봉헌하였다. 이곳에는 전국의 유명성지의 상징물등이 있는 '순교자의 길'이 조성되어 있고, 순교자 현양당과 무명순교자상, 십자가의 길, '일만위 순교자 현양탑'등이 있다.
갑곶순교성지를 뒤로 갑곶돈대로 내려서는 길에 만나는 표지석 ‘개국 성지 강화’ 잠시 발걸음을 붙잡는다.
개국의 성지 강화는 단군신화에도 나오는 유서 깊은 곳으로 상고시대엔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하다가 고구려 때에는 혈구군(穴口郡), 신라 때에는 해구군(海口郡)이라 하였다.
현재의 지명 강화는 940년(고려 태조 23) 이래의 것으로, 고려시대 몽골 침입 때와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는 임시수도의 역할을 하면서 강도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수도 방위상 중요시되어 연안에 포대를 구축하고 마니산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수도의 관문에 위치하기 때문에 근세에 이르러서는 병인양요·신미양요·운요호사건 등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드넓은 강화의 관문 갑곶돈대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의 소규모 관측ㆍ방어시설이다. 강화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갑곶돈대이다. 갑곶돈대는 1679년(숙종5년) 5월에 완성되었는데, 1977년 옛터에 보수, 복원 작업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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