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장은 전국의 단체장 중 꽃으로 불린다. 한 해 35조원의 예산을 주무르고 5만여 공무원의 임명·해면권을 쥐고 있는 수도 서울의 최고 의사결정권자다. 경제, 도시계획, 복지, 교육, 문화, 심지어 외교까지 서울시장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분야가 드물다. 국방력만 제외하고는 모든 권한을 갖고 있다는 말이 나올 만큼 그 권한은 실로 막강하다.
조선시대 한성의 수장이던 `한성판윤`은 어땠을까. 한성판윤은 6조판서와 동등한 정2품 경관직(중앙관직)으로, 종2품 외관직(지방관직)인 각 도의 관찰사(오늘날 도지사와 광역시장에 해당)보다 직위가 높았다. 한성부는 부(府)의 하나였지만 부윤(府尹)과 구별해 판윤(判尹)이라 호칭해 특정 지역을 관할하는 직책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
※ 권예(權輗) 1533년(중종28) 12월 22일 한성부우윤 (종2품) 겸 동지성균관사 (종2품)에 拜하였다.
실제 판윤은 의정부 좌·우참찬, 6조판서와 함께 아홉 대신을 뜻하는 9경(卿)에 포함되는 중요한 자리였다. 궁궐과 중앙관서의 호위 및 도성 치안을 담당해 매일 편전에서 국왕과 정사를 논하는 상참(常參)에 참여했다. 지금의 행정부시장 격인 종2품 좌윤과 우윤이 보좌했고 대체로 판서나 참찬 등 정2품을 지낸 인물이 임명됐다. `정승이 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벼슬`로 인식되면서 이를 차지하기 위해 붕당 간 경쟁도 치열했다.
한성부 청사가 광화문 앞 육조거리 핵심 지역에 위치했던 것을 보더라도 높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북악~경복궁 근정전~광화문~육조거리로 이어지는 도성의 중심 축에서 한성부 청사는 의정부와 이조 다음에 배치됐다.
서울 명칭은 태조 4년(1395) `한양부`가 `한성부`로 변경돼 1910년 경술국치 후 `경성부`로 바뀔 때까지 조선조 511년간 사용됐다. 한성부를 다스리는 벼슬아치의 명칭은 `판한성부사`로 시작해 `한성부윤` `한성판윤` `관찰사`, 다시 `한성판윤`으로 변해왔다. 예종 원년인 1469년 한성판윤으로 바뀌어 일제에 병합될 때까지 430년간 사용되면서 한성판윤이 서울 수장의 대명사로 인식돼 왔다.
초대 한성판윤은 이성계의 오랜 벗인 성석린(1338~1423)이었다. 그는 1395년(태조 4년) 한성판윤에 임명됐다. 한성판윤은 조선 511년간 1390대에 걸쳐 1100여 명이 배출됐다. 명재상 황희(1363∼1452)와 맹사성(1360~1438), 명문장가 서거정(1420∼1488), 행주대첩 명장 권율(1537~1599), 한음 이덕형(1561~1613), 암행어사 박문수(1691~1756), 실학자 박세당(1629∼1703), 개화사상 선구자 박규수(1807~1876),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1855∼1935),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민영환(1861∼1905)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한성판윤을 10명 이상 배출한 가문은 전주 이씨, 여흥 민씨, 달성 서씨, 파평 윤씨 등 모두 25개 가문이다. 전주 이씨에서는 43명, 여흥 민씨에서는 35명이 나왔다. 한성판윤을 가장 많이 역임한 인물은 연안 이씨 가문의 이가우(1783∼1852)로 헌종부터 철종까지 13년 동안 무려 10회나 지내 `판윤대감`이라 불렸다.
최단 기간 한성판윤은 안동 김씨 김좌근(1797∼1869)으로 임명된 날(철종 즉위년·1849년) 오후에 최다 판윤을 지낸 이가우가 새로 임명되면서 반나절 만에 옷을 벗어야만 했다. 고종대에 이기세, 한성근, 임웅준도 하루 만에 교체됐다. 판윤대감 이가우 역시 총 재임 기간은 1년3개월에 불과했다.
영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풍산 홍씨 홍상한(1701~1769)과 그의 아들 낙성(1718~1798), 손자 의모(1743∼1811)가 3대에 걸쳐,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달성 서씨 서종태(1652∼1719)와 그의 두 아들 명균(1680~1745)과 명빈(1692~1763)은 3부자가 한성판윤을 각각 지냈다.
정조 14년(1790) 12월 한성판윤 구익(1737∼1804)은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밖 국왕 거둥길의 눈을 치우지 않아 파직되기도 했다. 그는 그러나 3개월 뒤에 한성판윤에 다시 임명됐다. 일제시대에 경성부로 격하된 서울 수장은 경성부윤으로 22명 가운데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 광복 후 서울시로 변경된 이후에는 관선 시장 29명과 민선 시장 5명이 서울의 수장을 맡았다.
도시계획·건설은 오늘날 서울시장과 마찬가지로 한성판윤의 중요한 업무였다. 초대 한성판윤 성석린은 경복궁을 신축하고 도성을 축조하면서 도시 기반을 다졌으며, 홍계희(영조 36년·1760년)는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로 서울 주배수로의 기능을 회복시켰다. 이채연(광무 2년·1898년)은 간선도로를 확장하고 도로 위 쓰레기와 진흙탕을 정비해 근대적 도시 건설의 기초를 다졌다.
조선시대 한성판윤은 오늘날 서울시장과 달리 형사사건도 담당했다. 살인·강도 등 중죄인은 형조가 구속해 죄를 다스리게 하되 절도, 간통, 친족 간 불화, 구타, 욕설 등 상대적으로 가벼운 범죄는 지방 수령이 처리할 수 있었지만 한성부는 형조와 사실상 동등한 파워를 지녔다. 단종 즉위년(1452년) 8월 서울 근교 미사리에서 어린이를 유기한 사건이 발생하자 임금은 한성부가 범인을 국문하라고 지시했다. 태종 4년(1404년) 사노 실구지 형제와 박질이 상전인 내은이라는 여성을 강간한 사건도 한성부에서 맡아 자백을 받아낸 뒤 능지처사했다고 실록은 썼다.
한성부는 사법기관으로서 제반 소송과 재판에 관한 사무도 관장했는데 중앙에 소재한 3개의 사법행정 기관인 삼법사에 형조, 사헌부와 함께 한성부도 포함됐다. 특히 논밭과 가옥을 둘러싼 법적 다툼이나 묘지에 관한 산송, 시체 검시 등 업무는 한성부가 전국을 커버했다. 한성판윤은 오늘날 서울시장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