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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요4:21-24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
기도일까요? 물론 중요합니다.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봉사일까요? 봉사도 중요합니다. 봉사는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헌금일까요?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헌금은 드림의 가장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다른 무수한 활동들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예배라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오늘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은 봉사하는 자를 찾으신다. 구제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에서 보면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만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 중에 문제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예배드려야 할 때 온전히 예배드리지 않고 봉사만해서 그렇습니다.
예배자로 먼저 온전히 서지 못하고 일만 하니까 진작 자신의 영혼은 돌아보지 않아서 황폐화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서운해지고, 사람과의 관계가 깨져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나가야 하고 예배를 통해 자신을 먼저 하나님 앞에서 조율하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리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예배하며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고 하나님과 온전한 교통을 하기 보다는 예배라는 종교 활동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에서나 기독교 단체에서 회의를 할 때 맨 먼저 예배하고 회의를 합니다.
그런데 회의를 하면서 보여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기 보다는 서로 자기를 고집하고 다투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 먼저 예배 할 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회의 순서상 먼저 예배를 형식적으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회의를 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예배는 의식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경배요 찬양이요,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상관없이 종교화 의식화되고 형식적이 되면서 예배가 지루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어머니와 아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나는 예배드리기 싫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주일 아침은 늦잠 자고 싶어요.
둘째 장로님의 기도가 너무 길어요. 셋째 성가대의 불협화음이 싫어요.
그때 어머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예배를 드려야 하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둘째 예배는 사람과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다.
셋째 너는 담임 목사니까 결석하면 안 된다.
우스게 소리 같지만 사역자들과 직분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보다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은혜받는 것을 소홀히 여기게 될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기에 이런 유머가 나온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하나님과 같은 속성이 있어야만 교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들과 교제하고 사귀기 위해서,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누구와 사귀고 교제합니까? 사람들과 합니다.
또 사람들하고만 진정한 교제가 가능합니다. 사람만이 서로 모양과 형상이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개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개하고 인생을 나누며 사귀는 사람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와 고양이에게는 사람의 형상과 모양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창조하실 때 예배를 통해서 사람과 교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인간에게 심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전체는 예배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성경 전체가 예배 교과서입니다
창세기는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말씀합니다.
출애굽기는 그의 백성들을 왜 출애굽 시키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예배드리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역사서에는 예배 잘 드리는 사람은 복을 받고 그러지 않는 사람은 징벌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시가서에는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인가 하는 예배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 잘 드리지 못해서 바벨론에 망한 이야기와 에배를 회복하여 축복받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불러서 구원하신 이유도 예배드리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나는 예배드리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고 하나님 앞에 예배로서 영광돌리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번제를 드렸다 하는 것은 제물이 천개이다 그런 말도 되고 번제 횟수가 천번이라는 말도 되어집니다. 그만큼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 드렸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예배 잘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친히 솔로몬을 찾아오셔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전무후무한 축복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누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가 하고 찾고 계십니다.
성도의 이 땅에서의 믿음 생활은 예배에서 시작하여 예배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 제일 먼저 출생예배를 드립니다.
백일 되면 백일 예배, 돌이 되면 돌예배를 드립니다. 학교에 입학하면 입학 예배, 졸업하면 졸업예배, 군대가면 입대 예배, 제대하면 제대 예배, 개업하면 개업 예배를 드립니다.
취직하면 취직 감사예배, 회갑이면 회갑 예배, 진갑이면 진갑 예배, 고희가 되면 고희 예배, 돌아가시기 직전에 임종 예배, 죽으면 영결예배, 땅에 묻을 때 하관예배 그리고 그 사람의 일생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서도 계속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같이 예배는 평생이 아니라 영원히 드려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스트리아는 기독교가 조상때부터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일에 장사하거나 일하는 이는 400만원 가량의 벌금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텅텅 비어 가고 있었습니다.
수 천명 들어가는 교회에 수십 명가량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가 살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라가 점점 타락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살아지는 곳에는 하나님도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삼상2:30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이 때 모세가 나타나서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 때 바로가 모세에게 물었습니다. 왜 가려고 하느냐?
이때 모세는 한 번도 자유가 그리워서입니다. 배가 고파서, 고향 땅이 그리워서입니다. 라고 대답한 적이 없습니다.
모세는 매번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출5: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니까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모세의 대답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 주시고 광야 40년 내내 보호해 주시고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예배를 잘 드린 자를 하나님은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울과 다윗, 이 두 왕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예배입니다
사울이 한번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전쟁터에 나가야하는데 제사장 사무엘이 빨리 안옵니다. 그러니까 사울임금이 그럽니다.
자! 기다려도 안오니까 내가 제사드린다. 번제와 화목제 가져와 자기가 제사장의 몫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립니다.
사울은 이 불순종의 예배 때문에 왕좌에서 쫓겨나게 되고 그의 인생이 파멸로 치닫게 됩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도 예배 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인의 잘못 드려진 예배가 동생 아벨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예배순서에 맞추어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듣는 것만이 예배가 아닙니다.
참된 예배는 내게 어떠한 상황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이 옳습니다.
하나님만 높으십니다 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낮추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러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하자 다윗은 모압땅으로 망명을 갑니다.
그러자 선지자 갓이 나타나 사울이 기다리고 있는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예!! 알았습니다하고 순종할 줄 압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윗은 원수 갚을 기회가 있다고 원수를 갚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종을 내맘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거기에 자신의 자아와 의지를 꺾는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께서 다윗보고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그러고 복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원의 성공은 예배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것이 가장 큰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에 성공하려면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예배 드리는 것이 성공적인 예배입니까? 딱 두 단어입니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1. 영으로 드리는 예배
시35:9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한다는 것은 다윗이 전심으로 주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42: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간절히 소원하는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듯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하였다고 합니다.
예배자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 이렇게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러 나옵니까?
주일에는 예배드려야 하니까 타성적으로 드립니까? 예배 안드리면 부담스러우니까? 예배드립니까?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갈망하며 예배드립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갈급한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솔직히 담임목사인 나도 그런 갈망을 가지고 예배를 인도하는지 살펴 볼 때 회개가 나옵니다.
여러분! 전심으로 예배드립시다.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생명이요,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어야만이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배드릴 때 나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고 변하여 새사람되게 하시고 위로부터 능력을 부어달라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간구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헐레벌떡 늦게와서 예배드리려고 하지 말고 예배 시간 2-30분전에 미리와서 회개하고 기도하고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예배도중에 들어온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영으로 드리는 예배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진리로 드리는 예배
무엇이 진리입니까?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이 된 예배가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구하고 예수님을 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예배 시간에는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예배를 드려야 진정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중심이 되어야지 사람 중심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나타나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사람은 모두 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회갑 축하예배를 드리고 개업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고 회갑을 맞은 사람이 주인공이 되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라는 말이 들어가면 하나님이 주인공이어야 하는 데 사업이 주인공이 됩니다.
그러면 이미 예배가 아닙니다. 차라리 <회갑축하식> <개업축하식>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보기 좋습니다.
모든 기념예배가 그렇습니다.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또 성가대가 찬양을 하고나면 박수를 치는데 그 박수의 의미가 성가대 찬양 잘 불렀습니다 하는 칭찬의 의미로 박수를 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가대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는 부르지 않았지만 우리도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런 자세로 박수를 쳐야 옳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성가대가 내 영광을 가로챘으니 저주를 받아라 그렇게는 하지 않으시겠지만, 예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고, 예배 때 유일하게 찬양과 박수를 받아야 분은 하나님 한분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를 통해 얼마나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돌립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합니까?
은혜받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구합니까?
지금 주님께서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예배드립니까?
여러분! 바로 이런 예배가 성공적인 예배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성공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하는 예배, 하나님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어떤 목사님이 교회를 아주 아름답고 웅장하게 잘 짓고 나자 청와대에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여기는 청와대고 저는 대통령 비서실장인데요, 대통령께서 목사님이 교회를 아주 아름답게 잘 지으셨다고 올해의 건축상 받으러 오라고 하십니다. 그 목사님은 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다 날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럼 언제 청와대에 가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전화를 통하여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오늘이 만우절입니다> 그리고 전화는 끊겼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목사님은 큰 회개와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나를 찾는다고 해도 이렇게 감격스러운데 하나님께서 나를 찾으시면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이제부터 예배 잘 드려서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십니까?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사하는 곳마다 우선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야곱도 돌단을 쌓아 놓고 예배드하나님은 예배에 성공한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우리 모두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여 예배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