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로 먼저 알려지기 시작하여 화려한 색감으로 치장한 컬트감독처럼 인식되어버린 피터 그리너웨이는 실상 50편 이상의 영화를 만든 다작감독이자 온갖 영화형식을 모의해보았던 실험정신이 투철한 감독이기도 했다.
<H를 통과한 산책>부터 시작하여 <몰락> <필로우 북>에 이르기까지, 그는 글자를 하나의 시각적 장치나 미장센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여, 거대한 상징과 기호학의 커튼 속에 끼워넣음으로써 필름을 하나의 책처럼 만든다. 또한 자신의 정신적 지주의 한축을 이루었던 구조주의와 기호학이 세계 지성계에서 쇠퇴하자 80년대 후반부터 아날로그와 결별하고 소니사의 지원을 받아 HD-TV 기술로 영화를 찍어내기도 했다. 실상 88년의 그의 모든 영화제목이 <센 강에서의 죽음> <익사에 대한 공포> <차례로 익사시키기>라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때부터 그리너웨이는 아날로그에 대한 수중 장례식을 치르고 디지털의 세계로 한 발짝씩 나아갔다. 이후 그는 <TV단테>와 <프로스페로스의 서재>를 통해 이중인화, 흑백과 컬러의 결합, 애니메이션 등을 이용하여 스크린을 화폭삼아 적극적으로 디지털 기술을 탐색하였다. 이때부터 디지털은 그의 작품세계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는데 실상 <필로우 북>에서처럼 인체에 새겨진 동양 서체의 탐미적 세계는 소니사의 디지털 기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는 <요리사…>나 <메이콘의 아기> 같은 이야기의 유혹이 두드러지고 화려한 중세회화의 이미지로 가득 채운 영화들로 세계의 이목을 포획하는 이중의 전략을 구사하면서 작가주의 감독으로의 입지를 굳혀나아갔다.
흔히 그리너웨이의 작품에서는 성이 개인간의 계약이나 신분상승을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 혈맹은 깨지고 주인공들은 빈번하게 죽음의 형틀에 매달리게 되는데 포르노그라피의 외관이나 식인, 스릴러적인 기법, 복수와 욕망을 재현하는 화려한 색감 등은 주인공들의 죽음 자체도 하나의 이벤트로 만들어버린다.
현학적인 어법과 자폐적인 주제의식으로 인해 그리너웨이의 영화에 대한 평가는 늘 양극의 극단으로 엇갈렸지만 그의 영화가 ‘튄다’는 것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만든 셈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기존의 영화감독들이 관객의 느낌, 감정 또는 상상력에 호소하지만, 그리너웨이 영화들은 항시 관객의 지성의 반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들은 <파우스트>나 단테의 <신곡>처럼 몇번의 정독이 필요한 작품이고 그리너웨이는 자신의 영화는 ‘보는 영화가 아니라 읽는 영화’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실 프로스페로스의 서재 세트가 다메시나의 작품 <성 제롬의 서재>를 모델로 한다는 것을 알면 더욱 흥미롭게 읽히는 텍스트가 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세계 그리너웨이 팬들은 그의 영화를 통해 서면화된 텍스트, 사운드, 음악, 이미지 등을 통합하는 극적인 효과를 만끽하게 된다. 즉 글과 그림과 건축을 섭렵한 몇 르네상스적인 인간 프로스페로스처럼 그는 영상과 회화와 텍스트를 결합시켜 말 그대로의 ‘멀티미디어’를 만들어낸다.
최근작 은 성적 강박관념에 빠진 한 백인남자의 자폐적 판타지로의 퇴행징후를 보여주지만, 그의 영화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기호를 감추는 과정에서 미장센이 도출되는 영화판의 전위작가라는 점에서는 의심할 바가 없을 것 같다. 영화가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일부 식자들의 비난에 대해, 피터 그리너웨이보다 더 영화를 통해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준 감독은 아직까지 없었던 셈이다.
피터 그리너웨이 영화제, 미리보는 상영작 11편
몰락 (The Falls), 1980
근 미래, 지구에는 VUE(Violent Unknown Event)라는 신종 전염병이 돌고 있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던 신종 언어를 구사하게 되고 이상하게도 새와 연관된 것에 집착한다. 또한 이들은 모두 이름 안에 fall이라는 철자를 가지고 있다. 92명의 VUE환자에 대한 의사 다큐멘터리인 <몰락>은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나스>처럼 기이한 SF영화이다. 환자들은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이야기를 웅얼거리고 화면에는 끊임없이 무의미한 철자들이 굴러다닌다. 이미지와 사운드는 불화하고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내레이터의 목소리, 극도로 차가운 도시의 외관이나 시골풍경, 자주 등장하는 새와 연관된 이미지들은 전작인 이나 <수직영화 속편> 등을 연상케 한다. 일설에 의하면 전위예술가 존 케인즈의 영향을 받아 만들었다는 <몰락>은 전 영국에 그의 이름을 새겨넣으며 영국영화로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BFI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TV 단테 (TV Dante: The Inferno Cantos I-VIII, A), 1989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TV영화로 만든 단테 텔레비전판이다. 90분의 영화는 10분씩 나뉘어져 있으며 영국배우 탐 벡이 단테로 존 길구드가 단테를 지옥으로 이끄는 비질로 나온다. 이들은 배역에 따라 가만히 서서 단테의 신곡의 대사를 읊조리고, 이후 화면은 이와 걸맞은 혹은 여기서 연상되는 다양한 시각적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표범의 얼룩무늬를 이중으로 인화한 것이나 2차대전과 핵전쟁의 이미지들이다. 인간군상이 손을 뻗어 구원을 외치는 지옥의 장면들은 그로테스크하고 13세기의 칸토(장편시의 한 챕터)는 놀랄 만한 현대적 이미지로 탈바꿈한다. 이미지에 이미지를 겹칩으로써 얻는 만화경 같은 효과는 소니사의 HDTV를 통한 비디오 편집기술을 활용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단테 <신곡>의 극적인 측면을 배제한 채,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와 디지털세계로 조형한 중세적 텍스트를 탐구하였다.
건축사의 배 (The Belly of an Architect), 1987
시카고의 건축사 크랙 라이트는 아내 루이자와 18세기 프랑스건축가인 에티엔느 불리의 전시회를 위해 9달 동안 로마에 머무른다. 전시회의 준비는 정확히 9달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크랙 라이트는 끔찍한 위통으로 고통을 겪고 자신이 암에 걸렸음을 발견한다. 그의 전시회 계획은 한 젊은 동료건축가 스펙클러에 의해 뒷전으로 밀리는데, 크랙 라이트는 자신의 아내와 프로젝트를 동시에 잃어간다. 이후 크랙 라이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아이작 뉴턴 등의 복부 사진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자신이 아내에 의해 독살당한다고 믿게 되고 아내의 아이마저 자신의 아이인지 의심하게 된다. 여기서의 9는 바로 인간이 탄생하는 9달과 정확히 일치하는 재생의 숫자이다. 건축가의 아내는 로마로 가는 기차 안에서 아이를 임신하고 전시회 개막날 아이를 낳는다. 개봉당시 영화형식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영화의 이야기를 끌고가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로마의 건축물을 배경으로 하는 개인의 강박관념과 동일시, 인류의 문화사로의 지적인 여행기이기도 하다.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 (The Draughtsman's Contract), 1982
17세기 말 영국귀족 허버트부인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화가 네빌을 고용하여 독특한 계약을 맺는다. 집 주변을 12장의 그림으로 담는 동안 자신은 남편의 부재시 네빌의 어떤 성적 요구에도 응하며 상당한 보수도 아울러 지불한다는 것. 네빌은 극사실주의를 고수하며 그림을 그리지만, 어느날인가부터 프레임 안에 있어야 할 정물의 배치에 이상한 흐트러짐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와중에 익사한 허버트 백작의 시체가 발견되고, 그는 12장의 그림을 완성한 뒤 그곳을 떠나지만 허버트 백작이 죽은 장소를 13번째 그림에 담기 위해 돌아온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영화는 서스펜스 스릴러의 이야기 구조 속에 형식적 대칭과 대비를 통한 미장센과 기호들을 구축하였다. 그는 여기서 17세기 귀족들의 속물주의, 예술에 대한 허위의식을 꼬집는다. 원래 원판은 4시간20분짜리이나 상영시간을 위해 1시간48분으로 재편집한 또 하나의 저주받은 걸작이다. 이 영화는 아직 감독판이 존재하지 않는다.
필로우 북 (The Pillow Book), 1996
나키코는 일본의 전통적인 서예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해마다 생일이 오면 나키코의 얼굴에 자신의 이름과 그의 이름을 붓으로 써준다. 나키코는 네살되던 해 그녀의 고모로부터 성의 판타지가 기록되어 있는 필로우 북 이야기를 듣고 그날 아버지와 출판업자의 비밀스런 관계를 목격한다. 성장한 나키꼬는 출판업자가 맺어준 남자와 애정없는 결혼을 하지만 그의 곁을 떠나고, 홍콩에서 번역가 제롬을 만난다. 제롬의 권유에 따라 나키코는 제롬의 몸에 자신의 글을 써서 출판업자에게 보내고, 제롬은 그녀의 아버지처럼 출판업자와 관계를 가지는데….10세기 헤이안시대 여류작가 세이 쇼노간의 <필로우 북>에 근거한 영화는 그리너웨이가 즐겨 다루는 성과 사랑, 돈과 권력 사이의 계약과 죽음 그리고 복수라는 주제를 도돌이표 한다. 무엇보다 <필로우 북>은 문자가 시각적 메타포로 등장하는 그리너웨이의 타이포그래피의 정점을 이룬 작품이다. 일본의 문화와 서예 글자체에 대한 매혹, 예술을 돈과 성으로 되파는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드러나는 가운데 그리너웨이는 흑백과 컬러를 계속 전환시켜가며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를 다층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8과 1/2 우먼 (8½ Women), 1999
필립 에멘탈은 제네바에 성채 같은 저택을 가진 스위스의 갑부로 일본에 있는 아들 스토리와 함께 도쿄, 교토 등지의 빠찡꼬 게임장들을 인수하고 돌아오지만 아내의 죽음에 깊이 상심한다. 실의와 무기력에 빠진 아버지를 위로하고자 애쓰던 스토리는 아버지에게 위안을 줄 만한 새로운 여자들을 찾아보기로 한다. 결과 빠찡꼬 중독자인 시마토, 가부키배우 미오, 파계한 수녀 출신 그리젤다, 남자보다 돼지와 말을 사랑하는 베릴, 아기낳기를 즐기는 지아콘다, 비서 키토와 하녀 클로틸드, 제발로 찾아온 팔미라, 휠체어 신세라 ‘1/2 여인’이라 불리게 되는 줄리에타까지 8명 하고도 절반의 여인들이 에멘탈 부자의 성적 판타지를 위해 수집된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을 모티브로 한 영화는 오이디푸스적 태도로 각종 성적 판타지를 화려하게 시각화한다.
한 개의 Z와 2개의 O (A Zed and Two Noughts), 1985
<한 개의 Z와 2개의 O>는 제목 그대로 ZOO, 곧 동물원을 무대로 한 이야기. 동물학자인 쌍둥이 형제 오스왈드와 올리버는 백조 때문에 일어난 차 사고로 한꺼번에 부인을 잃는다. 실의에 빠진 두 형제는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생명의 기원부터 따져보고 동식물의 사후 부패를 관찰하는 한편, 사고에서 한쪽 다리를 잃고 살아난 여인에게 집착적으로 빠져든다. “영화는 종종 레디메이드된 스토리나 캐릭터, 사건이 아닌 일련의 불확실한 아이디어로 시작된다”는 그리너웨이에 따르면 이 영화는 쌍둥이 관계, 곧 유사성에 대한 매혹에서 출발했다. 태내에서 자신과 가장 닮은꼴인 쌍둥이를 잃고 불완전하게 살아간다는 신화적인 이론들, 팔과 다리 등 곳곳에 ‘한쌍’을 이루고 있는 인체 구조, 그리고 동물원에 대한 매혹. 제목에서부터 동물원과 그 영문 철자에서 2개의 O가 갖는 ‘한쌍 구조’를 내세운 이 영화는, 감독 특유의 상징적인 이미지와 언어의 퍼즐로 죽음과 ‘유사성’에 대한 모호한 추상화를 그려내고 있다.
차례로 익사시키기 (Drowning by Numbers), 1988
지금껏 다른 여자를 만나며 자신을 기만해온 늙은 남편을 욕조에서 익사시킨 엄마, 먹는 것에만 집착할 뿐 자신과의 소통에 무심하기 짝이 없는 남편을 물에 빠뜨리는 딸 등 이름이 씨시 콜핏츠인 세 여성이 남편들을 ‘차례로 익사시키는’ 과정을 그린 작품. 세명의 ‘씨시’들은 그들에게 육체적 욕망을 느끼는 마을 검시관을 유혹해 살인을 은폐하려 하고, 주위에서는 의혹의 시선을 던진다. 어두운 마당에서 별을 100개까지 헤아리며 줄넘기하는 소녀의 기묘한 이미지로 문을 연 영화는, 소녀의 놀이와 숫자의 이미지, 전통적인 영국식 게임을 상징으로 끌어와 살인의 내러티브를 하나의 게임처럼 풀어간다. 1부터 100까지, 인물들의 운명과 영화의 엔딩을 향해 카운트다운을 하듯 화면 곳곳에 나열되는 숫자와 장중하면서도 화려한 색채의 이미지로 섬뜩한 블랙유머의 살인극을 펼쳐보인다.
그리너웨이의 단편 3 <디어 폰> <H는 글자 첫 House의> <H를 산책 통과한>
문자와 숫자 등 기호학적인 상징을 이미지로 끌어내고, 관습적인 내러티브보다 이미지 실험을 통해 새로운 영화언어를 만들고자 하는 그리너웨이의 세계는 초기 단편영화에서부터 드러난다. <H를 산책 통과한>(1973), <디어 폰>(1977), <H는 글자 첫 House의>(1978)는 그리너웨이가 16mm로 촬영한 초기 단편들. <디어 폰>은 하나의 전화박스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를 중심에 놓고 이를 거쳐갔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레이션으로 들려주고, <H는 글자 첫 House의>는 H와 기타 알파벳 문자를 이용한 단어 게임을 하듯 흐르는 내레이션에 따라 영국의 평화로운 전원풍경 등 감독의 시선에서 내레이션의 언어와 연결된 이미지를 담아 보이는 등 그리너웨이 영화세계의 초심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