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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
[2021년 3월 28일, 사순절 제6주 (종려주일, 고난주일)]
[*. 성경, 찬송가를 준비합니다.]
*.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2021년 3월 28일, 사순절 제6주 (종려주일, 고난주일)입니다. 함께 인사 나누고 예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예수님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
성령님 안녕하세요, 평안합니다. ~
*. 다 함께 조용한 기도를 함으로 사순절 제6주 (종려주일, 고난주일)를 시작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시고, 오늘 거룩한 주일 맞이하여 예배 가운데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 기뻐 받으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 받아 주시고,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함을 얻게 하시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예배의 처음부터 나중까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였습니다. 아멘.
*. 찬송가 142장(시온에 오시는 주)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성시 교독 시편 118:1~2, 19~29절까지입니다. 한 절씩 교독합니다. (성경)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19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20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21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24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27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28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29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함께 기도합니다. [바질 네일러 (Basil Naylor)]
(실시간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신 분을 위한 기도문입니다)
주님, 주님은 이 종려주일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길로 가시면서
영웅의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고
박수갈채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우리 앞에 우리의 소명에 대한 비전을 늘 밝히 보여주셔서,
주께서 우리를 위해 택하신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소서.
다만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모든 영광과 칭찬과 존경이 주님을 향하게 하소서.
오늘과 또 영원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오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2:5~11절입니다. (성경)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특별 찬양 -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 말씀 선포: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사순절 제6주, 종려주일이면서 고난주간의 시작이 됩니다. 오늘 나눌 주제는 지식과 대척하고 있는 ‘마음’인데, 특별히 ‘예수의 마음’을 살펴보고, 우리 시대에 예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살펴봅니다.
2. 지평(paradigm)의 변화: 지식에서 마음으로!
큰 틀에서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났다면 우리는 지평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 혹은 수렵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의 전환 등은 큰 담론의 변화로, 지평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를 1년 3개월 째 겪고있는 우리 지구촌 문명은, 이런 의미에서, 지평의 큰 변화 앞에 서 있습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그동안 정보화 시대의 ‘지식’(정보)만을 너무 키워오지 않았나, 지식이 우상이 되고, 괴물이 되어, 우리 앞에 와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새로운 지평의 변화는 ‘지식’에서 지식을 쓰는 ‘마음’으로 우리의 시선이 바뀌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지식은 칼과 같아서 날카롭습니다. 우리는 지식, 곧 칼을 날카롭게 하는 데 많은 시간과 투자를 해 왔지만, 정작 그 칼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마음’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칼(지식)은 신(神)을 모독하고, 사람을 해치고, 자연을 파괴하는데 쓰였고, 마침내 우리 앞에 코로나19라는 비극의 자리에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 인류문명은 이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앞으로 ‘지식’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한 ‘마음’으로의 지평에 대한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더 큰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식에 대한 것은 늘 궁금해 하면서도, 막상 그 지식을 어찌 사용할 것인지 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시선을 두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우리 가운데 있음입니다. 성경의 몇 구절을 살펴봅니다.
백성의 장로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궁금해합니다.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누가복음 22:66-67a).”
빌라도가 궁금해합니다.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가복음 15:2a).”
헤롯이 궁금해 합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누가복음 23:8).”
로마의 관리들도 궁금해합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누가복음 23:35).”
로마의 군인들이 궁금해합니다.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누가복음 23:36-37).”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가 궁금해합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누가복음 23:39).”
백부장이 지식으로 이야기합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누가복음 23:47).”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지, 하나님의 아들인지, 유대인의 왕인지 등등. 진위(眞僞)의 언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려는 인간은 그때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시선이 가 있지 못하는 인간들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늘 ‘시험자’로 온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 ‘누가 크냐?’ 라는 문제로 서로 다투지요 (ref. 마가복음 9:34). 누가 큰 지는 ‘지식’의 차원입니다. 시인 쟝 꼭도는 ‘이 세상은 크든지 작든지(객관적, 절대적, 크로노스적-지식)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든지 멀리 있든지(주관적, 상대적, 카이로스적-마음)로 되어 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칼보다는 칼을 잡은 사람의 마음이 더 중요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지식에서 마음으로~ 지평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기가 아니겠습니까?
3. 예수의 마음
오늘 본문은 ‘마음’을 품되,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마음이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사실, 예수의 영을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영이 맑으면, 참나 의식을 깨치고, 참나 의식은 지성을 형성시키고, 마음은 그 지성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이야기는, 예수의 영, 혹은 예수의 참나 의식, 예수의 지성을 품으라는 말과 같은 내용이 됩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에 휘둘리는 그런 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본문 8절에서 드러낸 바,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첫째는, 자기를 낮추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이고, 셋째는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는 지평으로 읽어야합니다. 곧, 첫째는 사람에 대해서 자기를 낮추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신(神)에 대하여 복종하셨다는 것이고, 셋째는 자신에 대하여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3-1. 사람의 지평: 자기를 낮추시다
제자들 간에 ‘누가 크냐?’라는 다툼이 났을 때, 예수님께서는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26절입니다.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섬기라는 이야기, 낮추라는 이야기를 ‘섬김을 받거나, 섬기거나’ 혹은 ‘높은 자리 낮은 자리’로 이해하시면 예수님의 본 뜻을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본 뜻은, 사람은, 섬김을 받거나 섬기거나 혹은 높거나 낮거나 하는 자리가 아예 없다는 뜻입니다.
마르크스가 오해한 것이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을 일으켜 공산사회가 되면 지상낙원이 올 것이라 보았지만, 실상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가 자리바꿈을 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섬김을 받고 싶어 섬기는 자리에 간다고 하면, 섬기는 자리가 곧 섬김 받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도토리 키재기,’ 곧 프랙탈(fractal)과 같은 것입니다. ‘여인에게서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가 천국에서는 가장 작다’고 말씀하신 뜻은, 말 그대로의 뜻이 아닙니다. ‘작은 자 큰 자가 천국에서는 없다’라는 뜻입니다. (ref. 마태복음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우분투(Ubuntu)”라는 말이 있습니다. 큰 의미에서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다’라는 뜻입니다. 우분투에 대한 설명을 봅니다.
[“우분투(ubuntu)는 사람들간의 관계와 헌신에 중점을 둔 윤리 사상이다. 이 말은 남아프리카의 반투어에서 유래된 말로, 아프리카의 전통적 사상이며 평화운동의 사상적 뿌리이다. 남아프리카 성공회 대주교인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에 의하면 옮겨 쓰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뜻이 있다고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성공회 대주교인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1999년과 2008년에 각각 우분투의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분투 정신을 갖춘 사람은 마음이 열려 있고 다른 사람을 기꺼이 도우며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할 줄 압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뛰어나고 유능하다고 해서 위기 의식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더 큰 집단에 속하는 일원일 뿐이며 다른 사람이 굴욕을 당하거나 홀대를 받을 때 자기도 마찬가지로 그런 일을 당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을 알기에 우분투 정신을 갖춘 사람은 굳은 자기 확신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 1999년 No Future Without Forgiveness에서
(2008년도에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격언 중에는 우분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이지요.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바로 우분투의 핵심입니다. 우분투는 우리가 서로 얽혀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홀로 떨어져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라고 할 수 없고, 우분투라는 자질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관용을 갖춘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개인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서로 이어져 있으며 우리가 하는 일 하나하나가 세상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좋을 일을 하면 그것이 번져 나가 다른 곳에서도 좋은 일이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 전체를 위하는 일이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곧 사람을 지평으로 하는 관계 속에서, 우분투(Ubuntu)를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3-2. 신(神)의 지평: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관계가 있다면,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도 있습니다. 복종하셨다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복종이라는 우리 말 표현에는 원치 않지만 따른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순종하신 것입니다. 마음의 소리(영의 소리, 참나의 소리, 지성의 소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여기서 내 원과 아버지의 원이 갈등하지만, 깊이 살펴보면, 아버지의 원이 자신의 원이 된 것입니다.
“퀘렌시아 (Querencia)”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입니다. 스페인 투우장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다고 합니다. 투우사와 싸우다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그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으는데, 여기에서 새롭게 힘을 다시 얻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의 퀘렌시아를 발견해야 합니다. 싸움을 멈추고 평화로움 안에 머물 수 있는 나만의 퀘렌시아가 필요한 것입니다. 류시화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
[삶에서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매일매일이 단조로워 주위 세계가 무채색으로 보일 때,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상처 받아 심장이 무너질 때, 혹은 정신이 고갈되어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렸을 때, 그때가 바로 자신의 퀘렌시아를 찾아야 할 때이다. 그곳에서 누구로부터도, 어떤 계산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 자유 영혼의 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건강한 자아를 회복하는 길이다.]
사람이 괴로운 일을 맞이하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 흔히 산에 오릅니다. 유명 정치인이 선거에서 패배한 후에도 산에 오르는 것을 봅니다. 퀘렌시아,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 보면, 다 고만 고만해 보입니다. 도토리 키재기, 프랙탈을 느끼는 것입니다. 치유가 되고 새롭게 힘을 얻게 됩니다. [*. 프랙탈의 의미가 잘 안 잡히시면 그냥 ‘도토리 키재기’라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퀘렌시아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조용히, 고요 속에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메시아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의 퀘렌시아를 가지신 까닭입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입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우리 신앙인들의 퀘렌시아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시편 91편 2절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하나님을 만나는 수직적 관계 속에서 퀘렌시아, (영적인) 피난처, 휴식처를 꼭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3-3. 자신(自身)의 지평: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사람에 대하여는 낮추심으로(우분투), 하나님께 대하여는 복종하심으로(퀘렌시아) 사셨습니다. 그리고 혹은 그래서, 그분의 삶은 십자가를 맞이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알아채시고 십자가를 달게 지셨습니다.
자동차가 바로 뒤로 가려고 하는데, 후진 기어가 없다면 어떻게 할까요? 길고 긴 길을 달려 유턴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운이 나쁘면 지구 한 바퀴를 돌 수도 있겠지요. 후진 기어를 넣고 잠시 갈 길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차리셨다는 것은 마치 후진 기어를 알아챈 것과 같습니다. 지식으로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 마치 후진 기어가 없는 자동차가 빙~ 돌아 가야 하듯 참 어렵습니다. 이 길은 법(法)입니다. 아담과 화와에게 선악과의 법(法), 아브람에게 주었던 약속의 법(法), 모세를 통해 주었던 율법의 법(法), 그런데 인간은 밖으로 드러난 법(法)의 세계에 맥 못추고 당합니다. 그렇게 법(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인간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후진 기어를 장착하시기로 작정하십니다. 그것은 “선(善)을 진(眞)으로 삼는’ 구원 방식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채셨습니다. 후진 기어를 넣자! 그리고 십자가를 받아 들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마침내 복음(福音)이 선포되었습니다!
킬케골은 ‘종교는 내면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내면의 자리매김없이 밖을 향해서는 구원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선(善)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그냥 두시지 않고, 다시 살리셔서 진(眞)으로 삼으십니다. 오늘 본문 9-11절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4. 나가는 말
사람이 가장 행복한 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할 때’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또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죠. 그러나 이런 조건에 맞는 행복한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행복을 포기할까요? 아니죠. 우리가 지금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지금 행하는 일을 가장 좋아하는 일로 여긴다면 어떨까요? 행복은 기다릴 필요도 없이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원효가 깨달은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합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십시요.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분투(Ubuntu),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퀘렌시아(Querencia)를 기억하십시요. 사람과의 관계, 우분투, ‘내 안에 너 있고, 너 안에 내 있다’입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퀘렌시아, (영적인) ‘피난처, 휴식처’입니다.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 왔던 운명의 십자가를 달게 지신 것처럼,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여러분의 십자가를 달게 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부활의 신 새벽을 맞이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온전히 누려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찬송가 154장 (생명의 주여 면류관)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찬송가 50장 3절 부르며 헌금합니다. (찬송가) / *. 헌금 기도합니다. (#. 헌금은 따로 잘 보관했다가 교회에서 예배할 때 함께 봉헌합니다)]
*. 헌금 기도합니다.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물을 정성껏 모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이 땅 위에 주의 나라 세워가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온전하고, 아름답게 쓰이는 예물 되게 하시고, 귀한 열매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헤아려 살펴 주셔서,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 받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저희 있는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찬송가 150장 (갈보리산 위에)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