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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尊廟・天妃宮>
도교사원이다. 천존묘(天尊廟)는 도교 최상위 신이고, 천조궁(天妃宮)은 해신 마조를 말한다. 해상무역국가였던 유구는 바다로 진출해야 했고, 이 신앙을 전파한 복건성 이주집단은 해양을 건너온 자신들의 복록을 빌어야 했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신앙이었다. 인근에 있었는데 전쟁으로 파괴되어 다시 지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안에 채온과 정순칙의 송덕비가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파견되어 책봉과 조공을 통한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유교의 철학과 제도를 전달하고 뿌리내리게 한 이들의 송덕비가 같이 있는 것은 복건계 이주계층의 정신적인 지주를 모아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거 같다.
1. 방문지 대강
명칭 : 天尊廟・天妃宮 구 구미지성묘
위치: 〒900-0031 沖縄県那覇市若狭1丁目25−1
입장료 : 없음
방문일 : 2026.1.
2. 둘러보기
사원에는 천존묘, 천상성묘, 관제묘, 용왕 등 네 신위가 모셔져 있다. 모두 유구 사람들에게 매우 간절한 신앙의 대상이다.
마조(媽祖)의 공식 존호가 천비이다. 마조신앙은 중국에 가면 흔히 만날 수 있는데 채온의 선조 등 구미촌 사람들이 집단 이주한 복건성이 원조다. 특히 해안가에 많이 발달되어 있는제, 대만에도 사당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요즘은 도교에 흡수되었고, 배금신앙의 대상으로 변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천존(天尊)은 하늘의 존귀한 신으로 도교 신앙 대상으로 옥황상제를 칭하기도 한다. 관제는 관우를 모시는 신앙이다. 관운장 신앙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만날 수 있다. 중국에서는 대표적인 재물신이 되어 중국식당에서는 어디나 만날 수 있다. 한국의 월남식당에서도 관운장을 모시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용왕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거 같다.
도교신앙은 재액 방지와 기복을 위해 필요했고, 해양신앙은 해양 진출이 삶의 조건이 되어 있는 유구에서는 또한 필수적인 신앙이었다. 이 사당은 원래 복건성 이주자의 집단 거주지인 구미촌의 거리 양쪽에 천존묘와 천비궁이 마주하여 세워져 있었는데, 45년 2차대전 당시 나하가 모두 폭격당할 때 함께 파괴되었다. 다시 지으면서 함께 파괴된 久米至聖廟와 나란히 지었다. 久米至聖廟는 공자묘로 대성묘와 명륜당으로 구성된 유교사원이니 함께 둘러보면 좋다.
본전에는 네 신격의 이름이 모두 현판으로 걸려 있다. 본전 옆의 계단을 올라가면 두 개의 비석을 만난다. 정순칙과 채온의 송덕비이다. 이중 채온은 일본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설파 조동일 교수는 일본의 주목해야 할 철학자로 채온과 안등창익 두 사람을 들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일본에서는 부담스러워하는 인물이다. 자신들의 주류 사상과 거리가 있다고 보는 거 같다.
특히 채온은 중국에서 건너온 유구의 인물로 사쓰마번 침공 이후에 활동한 철학자와 행정가로서 탁월한 능력으로 유구의 유교와 제도 발전의 제1등 공신이다. 채온의 공로를 인정하면 일본의 침략의 부당성을 노출하는 것으로 보는 거 같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신사가 바로 위에 있는 것이다. 신사 안에는 일본 천황의 동상이 있다. 많은 신사를 둘러봤지만 안에 천황동상이 있는 경우는 처음이다. 오키나와에서 일본의 영향을 확실히 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그래서 이 블럭은 마치 전통신앙 전시장처럼 되어 있다.
이곳에 다시 세워진 두 사당은 유교와 도교 사상은 일본이 수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멀지 않은 곳에 복건성과 교류 10주년을 기해 세운 정원인 복주원은 복건성의 모습을 그대로 본뜨고 많은 자재를 중국에서 직접 갖다 만들었는데, 마치 중국 내의 정원을 산책한다는 느낌을 준다. 벤쿠버 인근 차이나타운에서도 이러한 정원을 만난 적이 있다. 복주원은 신앙이 아닌 문화이다. 중국 신앙과 문화는 오키나와에 허용되는 범주인 것이다.
하지만 유구 전래의 우타키 신앙을 위한 공간은 많지 않다. 일단 사제인 노로가 거의 사라졌다. 유구의 고유신앙은 일본이 들어오면서 거의 몰락시켰다. 민간에 깊이 뿌리박힌 신앙을 다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행정력이 미치는 한 약화시키려 한 것이 감지된다. 수리성에 가면 성문 앞에 작은 건물이 있는데, 우타키의 성소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3시간 페리호를 타고 구미섬(쿠메지마)에 갔는데, 거기서는 민간에서 여전히 우타키 신앙이 유지되며 노로가 주관하는 제례가 행해짐을 알 수 있었다.
오키나와의 문화적 맥락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거 같다. 1) 고유문화와 신앙, 2)중국 전래 문화와 종교, 3) 일본에서 이식한 신사 등 일본 문화 4)2차대전 이후 전래된 미국문화 등이 그것이다. 이들 넷은 대응되는 언어도 다 다르다. 1)유구어 2)한문 3)일본어 4)영어, 이 네 층위가 오키나와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음식에서도 각각 대응되는 유형과 현상을 찾아낼 수 있다.
곳곳에 스테이크집이 성황을 이루고, 서구식 아침식사 메뉴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미국문화 영향이면서 선망 현상을 보여준다. 지금도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의 75%가 오키나와에 있다. 위험의 외주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하에서 북쪽으로 길을 달려보면 마치 미국에 온 거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미국 시골과 흡사한 주택과 도로 양식이 일본 본토와는 많이 다른 것을 보여준다. 미국처럼 평평한 지형은 미군 주둔의 배경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미국 문화를 그대로 이식할 조건이 되기도 한 것이다.
신사는 이 도교 사당을 내려다 보고 있다. 천황의 동상은 신사 본관을 왼쪽에 아래쪽이 이 사당을 보는 위치에 세워져 이 사당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거 같다. 일본이 유구, 오키나와를 대하는 시각이 그대로 드러난 배치로 보인다.
뒷곁에 세워진 두 비석 중 왼쪽비는 정순칙의 송덕비다. 비의 정식 명칭은 '程順則名護親方寵文頌徳碑'다. 정순칙 명호의 친방 총문의 송덕비라는 뜻이다. 명호(현 나고시)는 오키나와 현의 가장 북쪽 지역에 있는 지명이다. 이곳을 봉토로 받아 고위직인 친방 벼슬, 지금의 시장을 했다는 말이고 총문은 그의 자이다.
程順則(程順則, 1663~1734)은 유구(琉球)의 유학가이자 정치가로서 교육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유구의 ‘퇴계(退溪)’라는 관점에서 쓴 논문들이 있다. 명나라의 『六諭衍義(육유연의)』를 유구로 전래해 교육에 활용한 공적이 있다. 그의 교육적 공헌에 대해 쓴 논문들이 여럿 있다. 무엇보다 문인으로서의 활동이 주목된다. 중국 책봉사에 의해 유구 최고의 문인으로 포상된 바 있다.
하나는 채온의 비석이다. 비석 이름은 蔡溫具志頭親方文若頌德碑다. 具志頭는 지명이다. 具志頭의 친방을 지낸 채온의 송덕비라는 말이다. 문약은 채온의 자이다.
채온(蔡溫, 1682~1761) 에 대해 조동일 교수는 "채온은 유구가 주권을 일부 상실하고 일본의 간섭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 나라를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세상을 구하는 근본이치를 바로잡는 과업과 함께 수행하고자 분투한 정치인이고 학자였다. (중략) 단상을 쓰고 서사문을 만든 가운데 동아시아 사상의 정수를 마련했다고 평가할 만한 업적이 발견된다." 라고 하고 농무잔과 임정팔서 및 성몽요론 등등을 거론하며 그의 기일원론 사상을 논했다. (<철학사와 문학사 둘인가 하나인가> 참조)
<蔡溫具志頭親方文若頌德碑>
채온 蔡溫(1682—1762)
유구 제2 상씨왕조 第二尚氏王朝 시대의 정치가이자 유학자. 일본명은 具志頭 親方 文若,아명은 真蒲戶,호는 魯齊이다. 蔡氏 具志頭殿內의 11세손이다. 1728年~1752年까지 유구의 삼사관三司官을 맡아 재직하는 동안에 유구의 산하천을 감독하고 삼림의 보호정책을 제정하여 농업과 수공업을 장려하여 왕실 재정을 크게 개선하였다. 호적제도도 제정하여 유쿠의 정치 및 위계구조를 개혁했다.
채온은 강희제 21년 9월 25일 구메촌 채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채씨 가문의 족보에 따르면, 채온의 선조는 송나라 대학사 채양蔡襄의 후손인 채숭蔡崇이다. 채숭은 푸젠성 취안저우시 난안현에서 태어났다. 명나라 초기에 채숭은 류큐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푸젠성 36개 성씨 중 채씨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 채온은 채숭의 11대손이다. 채운의 부친 채탁蔡鐸은 부현청의 최고행정관이자 자금대부(子金大学)를 역임했다. (야후 재팬 채온 항목 축약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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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溫의 주요 漢文著作은 아래와 같다.
《圖治要傳》
《要務彙編》
《實務彙編》
《治家捷徑》
《居家必覽》
《蓑翁片言》
《醒夢要論》
《客問錄》
《一言錄》
《家言錄》
《山林真秘》
《琴論》
蔡溫의 주요 일본어 저작은 아래와 같다.
《獨物論》
《家內物語》
《自敍傳》
《御教條》
《農務帳》
《習俗要論》
蔡溫
其人也
少而好學
仕於王府
以政治爲務
嘗正農政
務在安民
不以苛法
而以德化
公而無私
志在國本
雖當時艱
而政理以立
其功其德
不可泯焉
後之人
宜鑑之
(明治 □□ 年)
□□建之
AI에게 판독하게 했으나 오류가 매우 많은 것 같다.
程順則名護親方龍文頌德碑
程順則名護親方龍文頌德碑 . '정순칙 명호 친방 총문 송덕비'
정순칙은 명호(현 나고시, 오키나와현의 북쪽 도시) 친방(親方(ウエーカタ, 우에카타, 류큐 왕국의 최고위 귀족 관직·호칭)이다. 정순칙은 이름, 총문寵文은 자字이다.
정순칙(程順則, 데이준소쿠, 1663∼1734)
정순칙은 1663년 구미촌에 태어났다. (현재 생가터가 있음) 부친은 程泰祚이다.
1683년 열심히 공부하여 처음 청나라에 유학하여 4년을 체류하였다. 그후 세번을 중국에 유학하였는데, 1706年에는 正議大夫(せいぎたいふ)(進貢副使)로서 北京(ぺきん)에 부임하였다. 1719年에는 紫金大夫(しきんたいふ)(親方位(ウェーカタくらい))에 올랏고、久米村総役(クニンダスーヤク)(久米村の最高役職)을 맡았다.
그 사이『十七史(じゅうしちし)』全1,592巻과 中国의 教訓書인『六諭衍義(りくゆえんぎ)』等을 가지고 왔다. 『六諭衍義』육유연의는 사쓰마번薩摩藩을 거쳐、8대 장군인将軍인 徳川吉宗(とくがわよしむね, 덕천길종)에 헌상되었는데, 그후 庶民教科書로서 全国에 普及되었다. また、孔子廟(こうしびょう) 경내에 琉球 최초의 학교인 「明倫堂(めいりんどう)」을 創設(1718年)하여、久米村의 子弟 教育을 담당하였다.
順則은 『雪堂雑爼(せつどうざっそ)』(1696年)・『雪堂燕遊草(せつどうえんゆうそう)』(1698年) 등 漢詩集과 中国 항해를 위한 가이드북 航海指南書인『指南広義(しなんこうぎ)』(1708年) 등을 저술하였다. 1719年에는 유구에 온 중국의 책봉부사 冊封副使 서보광徐葆光(じょほこう)에 의해 유구 中山(ちゅうざん)(琉球) 제1의 문인으로 상을 받았다.
1728年、66歳에 名護間切(なごまぎり)(現名護市 현 나하시)의 総地頭가 되어、名명호친방 護親方으로 칭해졌다. 덕이 높은 사람으로 알려져 후대세 명호성인 명호성인 名護聖人으로 칭해졌다.
1734年 享年72세에 사망하였다. 묘는 辻原(つじばる)に 있다가 오키나와 전쟁 후에 구획성리되어 시기나 識名(しきな) 묘지 霊園안으로 이전되었다. (생애는 아래 나하 역사박물관 홈피 탑재 내용 번역임)
琉球王国を代表する文人、程順則の生家跡。
程順則は、1663年久米(クニンダ)村(現那覇市久米(なはしくめ))生まれ。程順則は中国名で、字は寵文(ちょうぶん)。父は程泰祚(ていたいそ)といい、首里士家(しゅりしか)の虞氏外間筑登之實房(ぐううじほかまチクドゥンじつぼう)の次男であったが、中国語の才能を買われ、22才の時、王府の命により、久米村に入籍し、長く途絶えていた程家の跡を継いだ。
順則は、1683年20才の時、勤学(きんがく)として初めて清(しん)(中国)に留学し、4年間滞在した。その後も3度渡唐(ととう)しているが、1706年には、正議大夫(せいぎたいふ)(進貢副使)として北京(ぺきん)へ赴いている。1719年には、紫金大夫(しきんたいふ)(親方位(ウェーカタくらい))に登り、久米村総役(クニンダスーヤク)(久米村の最高役職)に就いた。
この間、『十七史(じゅうしちし)』全1,592巻や中国の教訓書『六諭衍義(りくゆえんぎ)』等を持ち帰った。『六諭衍義』は薩摩藩を経て、八代将軍徳川吉宗(とくがわよしむね)に献上され、その後、庶民教科書として全国に普及した。また、孔子廟(こうしびょう)境内に、琉球で最初の学校の「明倫堂(めいりんどう)」を創設(1718年)し、久米村子弟の教育にあたった。
順則は、『雪堂雑爼(せつどうざっそ)』(1696年)・『雪堂燕遊草(せつどうえんゆうそう)』(1698年)といった漢詩集や、中国渡航の際の航海指南書である『指南広義(しなんこうぎ)』(1708年)などを著し、1719年に来琉した冊封副使徐葆光(じょほこう)に、中山(ちゅうざん)(琉球)第一の文人と賞された。
1728年、66歳の時に名護間切(なごまぎり)(現名護市)の総地頭となり、名護親方と称した。高徳の人として知られ、後に名護聖人と称された。
1734年死去、享年72。墓は辻原(つじばる)にあったが、沖縄戦後の区画整理により、識名(しきな)霊園内に移転された。(나하시 역사박물관 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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路ふみわけて 路知らば我身の たとひなま死じも 何恨みゆが
야마지 후미와키티/ 미치 시라바 와미누/ 타투이 나마 시지ㄴ/ 누우라 미유가
산길을 헤쳐나가며/ 제 길 안다면 이 몸은/ 설령 당장에 죽어도/ 뭘 원망하리오
: 나구 웨카타 쵸분・정순칙(名護親方寵文・程順則, 나고 쵸분・테이 쥰소쿠, 1663-1735), 류카전집 2595
정순칙이 지었다는 류카다.
<유구한시선>에 정순칙의 시 24수와 주신명(周新命, 슈우신메이, 1666∼1716)이 쓴「정총문에게 부치다(寄鄭寵文)」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채온의 시는 11수가 수록되어 있다.
정순칙은 구미촌 사람으로 중국에 외교사절로 방문 체류하면서 중국 서적을 들여와 교육에 영향을 끼쳤고, 만년에는 나고 시의 시장으로서 경륜을 펼치면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한시와 류카를 많이 지어 문집을 간행하면서 문인으로 활동하였는데, 채온과 비교하면 사상사적 측면보다 문인과 교육자로서 역량을 더 발휘한 인물이다. 후세에 구미촌 사람들은 채온과 함께 중국계를 대표하는 두 사람으로 꼽아 현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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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碑ハ
蔡溫先生ノ遺徳ヲ
後世ニ伝ヘント欲シ
有志相謀リ
之ヲ建ツ
先生ハ
琉球王府ニ仕ヘ
政治ヲ掌リ
農政ヲ興シ
民生ヲ安ンジ
徳望一世ニ重ク
王府ノ信任亦厚シ
然ルニ
廃藩置県以後
世運ノ変遷ニ因リ
其功績
稍顕彰ヲ欠ク
是ヲ以テ
同志相議シ
旧跡ニ碑ヲ建テ
其徳業ヲ記ス
昭和九年
六月吉日
社団法人
久米崇聖会 建之
「久米崇聖会」가 昭和九年(1934) 에 건립했다.
서론 :
本碑ハ 蔡溫先生ノ遺徳ヲ 後世ニ伝ヘント欲シ 有志相謀リ 之ヲ建ツ
→ 이 비는 채온 선생의 남은 덕을 후세에 전하고자, 뜻있는 사람들이 서로 의논하여 세운 것이다.
본론 :
① 경력과 정치
先生ハ 琉球王府ニ仕ヘ 政治ヲ掌リ 農政ヲ興シ 民生ヲ安ンジ
→ 선생은 유구 왕부에 봉직하여 정치를 맡았고, 농정을 일으켜 백성의 삶을 안정시켰다.
② 평가
徳望一世ニ重ク 王府ノ信任亦厚シ
→ 덕망은 당대에 매우 높았고, 왕부의 신임 또한 두터웠다.
然ルニ 廃藩置県以後 世運ノ変遷ニ因リ 其功績 稍顕彰ヲ欠ク
→ 그러나 번을 폐하고 현을 설치한 이후(일본 병합 이후),
→ 시대의 변화로 인해 그의 공적은 다소 제대로 기려지지 못하였다.
결론 :
是ヲ以テ 同志相議シ 旧跡ニ碑ヲ建テ 其徳業ヲ記ス
→ 이에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서로 상의하여, 옛 자리에 비석을 세워 그의 덕과 업적을 기록한다.
건립 정보
昭和九年 六月吉日 社団法人 久米崇聖会 建之
→ 쇼와 9년(1934년) 6월 길일에, 사단법인 구메숭성회가 이를 세웠다.
AI의 음독과 번역 및 해설이다. 얼핏 봐도 오류가 많으니 참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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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은 채온 선생의 덕을 후세에 전하고자 뜻있는 사람들이 서로 의논하여 세운 것이다.
선생은 유구 왕부에 봉직하여 정치를 담당하였고, 농정을 일으켜 백성의 삶을 안정시켰다.
그의 덕망은 당대에 높았으며, 왕부의 신임 또한 매우 두터웠다.
그러나 일본의 폐번치현 이후 시대의 흐름이 바뀌면서,
그의 공적은 충분히 현창되지 못하였다.
이에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옛 자리에 비석을 세워,
그의 덕과 업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1934년 6월 길일
사단법인 구메숭성회.
程順則名護親方龍文頌德碑
#오키나와가볼만한곳 #채온 #정순칙 #채온송덕비 #사옹편언 #유구문화 #유구종교 #구메무라중국인
<참고>
조동일,(2001), 철학사와 문학사 둘인가 하나인가, 지식산업사 - '채온과 안등창익' 편 : 채온의 기일원론적 사상을 채온의 저서 <사옹편언>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