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어른의 스승 / 양선례
올해 우리 학교 첫 번째 전문적학습공동체(함께 연구하고 실천하는 교원 모임, 이하 ‘전학공’) 도서로 못 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오은영/ ㈜대성코리아닷컴)가 선정되었다. ‘분노조절장애의 시대를 사는 대한민국 부모에게 주는 육아 멘토 오은영 박사의 감정 조절 육아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표지에 빨간 원피스를 입은 박사의 모습이 들어 있어 이채롭다. 이비에스(EBS)<라이브토크 부모>와 에스비에스(SBS)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프로그램에 출연 중으로 꽤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라서 그런가 보다.
<동고동락 온 작품 읽기> 라는 이름의 우리 팀 구성원은 모두 6명. 이제 막 교직에 입문한 신규 교사부터 30년이 넘은 다경력자까지 있다. 첫 모임에서 운영자가 올해 전학공에서 다뤘으면 하는 도서를 추천하라고 했다. 각자가 가지고 온 도서를 소개하고 다수결로 최종 결정을 했는데, 일곱 살 자녀를 키우는 젊은 선생님이 추천한 이 도서가 뽑혔다. 아이를 키운 지 오래되어서 세세한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가까운 시간에 손자나 손녀를 볼 계획도 없어서 속으로는 좀 뜨악했으나 모두가 한 표를 행사하는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첫 장이 끝나는 58쪽까지 읽어 오는 것이 과제였다. 각자 읽고 두서너 군데 밑줄을 쳐 와서 그렇게 한 이유와 그때의 느낌을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함께 읽고 싶을 만큼 괜찮은 부분은 소리 내어 읽기도 하고, 발제자를 정하여 질문에 답하기도 한다. 책의 성격에 따라 다음 시간의 진행 방식을 그때그때 정하는데 이번에는 읽어오는 것과 더불어 발제자가 낸 질문을 생각해 오는 게 과제였다.
학창 시절부터 독서 편식이 심해서 소설류만 주야장천 읽어 댔던 나는 자기계발서나 실용서를 거의 읽지 않은 채 어른이 되었다. 어쩌다 기회가 있어도 다 읽고 나서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책일 때가 많아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부끄럽게도 2016년 초판이 발행된 이후 올해 2월 1일에 무려 116쇄를 찍은 이 책 역시 알지 못했다. 언젠가 내가 사는 지역에 명사 초청 특강 강사로 온다는 것만 육교 위에 붙은 현수막으로 본 기억이 있어 이름만 들어 본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앞부분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책 속에 빠져들었다. 육아 지침서니까 ‘뻔할 뻔 자 이야기만 하겠지’ 하는 예상은 처음부터 깨졌다. 다양한 사례로 설명하는 작가의 글을 읽다 보니 나 역시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슬기롭게 감정조절 하지 못한 채 함부로 키웠다는 반성이 되었다. 작가는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로 '기다리기' 그리고 '아이를 나와 다른 인격체로 존중하기'를 꼽는다. 잘 기다려 주려면 아이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아이를 나와 동일하게 생각하면 아이가 서툴고 못 할 때마다 중간에 간섭하거나 채근하게 된다. 또 아이를 내 소유로 생각하여 아이가 내 마음이나 계획과 어긋나면 내 마음이 불편해지기 때문에 기다리지 못한다. 결국 아이가 아닌 어른인 나를 기준에 두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아이를 다그치고, 욱하게 된다고 진단하고 있다.
장의 마지막에는 ‘나는 욱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체크리스트로 자신의 ‘욱’ 정도를 알아 보는 곳이 있었다. ‘운전하다가 자주 짜증을 내는 편이다.’, ‘식당에서 음식이 늦게 나오면 짜증이 난다.’, ‘아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가끔 귀찮다.’, ‘부모가 내게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지금 나는 훨씬 더 잘됐을 것이다.’, ‘나는 돈에 관해서 많이 철두철미한 편이다.’, ‘나는 남이 잘됐다는 소리를 들으면, 솔직히 배가 아프다.’ 등의 40개의 문항이 있다. 팀원들끼리 돌아가면서 자신의 ‘욱’ 지수를 말하는데 이미 아이를 다 키워 버렸거나, 아직은 그 고난의 길에 접어들지 않은 신혼이거나 미혼인 선생님만 감정 조절을 잘하는 편이라는 10개 이하가 나왔다. 반면 지금 초등학생 이하의 자녀를 키우고 있는 과반의 젊은 선생님들은 11~20개가 나왔는데, 이는 ‘가끔 치밀어 오르는 욱 때문에 혼자 가슴앓이하는 때가 많다’는 구간이었다.
지금처럼 돌봄 교실과 방과후 학교가 정착되어 사회가 일부분 육아를 책임져 주던 시절이 아니어서 세 명의 아이를 키워 내느라 참 많이도 힘들었다. 그런데 막상 자녀를 키우면서 언제 욱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보자는 발제자의 질문에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힘들었어, 청춘을 다시 준다 해도 두 번 다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 기억은 덩어리로만 남았다.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하려고 보니 딱히 짚이는 게 없었다. 가해자(?)인 나는 잊었을지라도 피해자(?)였던 아이들은 잘 기억하고 있으리라 여겨져 큰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답이 줄줄이 나왔다.
교직 생활 동안 가장 후회되는 일 한 가지는 섬에 근무할 때 큰딸의 4학년 담임을 한 일이다. 읍 지역권 학교 십 년 근무를 마치고 서른 중반에 세 아이와 섬 학교를 자청했다. 통근 시간이 긴 육지 끝을 고를 수도 있었지만 생활근거지인 도시권으로 일찍 들어오려면 섬 점수가 필요했다. 들어가던 해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큰딸은 그 해에 무려 담임이 4번이나 바뀌었다. 아이가 참 좋아하던 1학기 담임이 광주시 전입시험에 합격하여 떠나고 2학기에는 한 달 간격으로 새 담임이 왔다. 그 중 한 분은 오래 전 교직을 떠나서 학원을 운영했는데 아이엠에프(IMF)로 어려워지자, 처녀 시절부터 꿈꾸던 ‘섬마을 선생님’이 되고 싶어 왔다고 했다. 서울까지 다녀야 하는 거리도 그렇고, 무엇보다 꿈이 현실이 되기에는 섬 생활이 녹록지가 않아 결국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나머지 두 번은 이미 퇴직한 교장 선생님의 친구분들이 오셨고, 아이들은 ‘우리 선생님은 할아버지’라고 말했다.
아이의 4학년은 제대로 가르치고자 고육지책으로 담임을 신청했다. 집에서는 ‘엄마’, 학교에서는 ‘선생님’으로 호칭은 잘 정리했지만 마음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른 아이였더라면 세 번은 기꺼이 참아 줄 일인데 내 아이에게는 그게 안 되었다. 남들 다하는 걸 못 하면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나눗셈을 가르칠 때였다. 아이가 자릿수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우리 반은 달랑 4명. 인영이도 대필이도 다 하는데 큰딸은 예외였다. 몇 번 설명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이성이 끼어들 새도 없이 손이 먼저 나갔다. 기습적으로 군밤을 맞은 딸아이의 입은 더 나왔고, 내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아이의 일 년을 망치지 않으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공부 못지않게 정서적인 안정과 교감도 중요하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남의 자식은 ‘직업 정신’으로 가르칠 수 있지만 내 자식은 보통의 인내로는 힘들다는 것도 말이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도망갈 곳 없던 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딸아이의 4학년을 도둑질한 것처럼 그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 외에도 내가 잠자고 있는데 아이들이 놀면서 큰 소리를 내거나, 어질러진 집을 치운 후 밤늦게 설거지 하면서도 화를 많이 냈다고 했다. 그 말끝에 따라온 말이 걸작이다. “그래도 엄마, 지금은 다 이해해. 그때 충분히 그럴 만했어.” 부족하고 못난 엄마를 넓은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딸의 마지막 말이 슬프게 와 닿았다.
흔히 결혼해야 어른이 된다고 한다. 온전히 나를 내어 주고 상대방에게 맞추는 일인 육아의 어려움을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육아는 먹고, 배설하고, 우는 것밖에는 하지 못하는 갓난아기 때부터 내 시간을 아이에게 내주고, 내 체력을 나눠 주는 것이다. 기저귀를 떼고, 뛰어다니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자기 시간쯤을 관리하는 중학생이 되고, 저녁밥 걱정 안 해도 되는 고등학생이 되기를 기다린다. 아이가 자립했다 싶어서 거울을 보면 어느새 나는 아이가 자라는 속도만큼 늙어 있다. 부모에게 받아서 자식에게 되돌려주는 내리사랑의 준엄한 이치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바로 인생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면,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