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반포 세빛섬 달빛광장처럼 / 정희연
전라남도 장흥 들녘 육지 끄트머리에 ○○마을이 있다. 마을 앞에는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위치에 10평 가까이 되는 ○○섬이 자리하고 있는데, 봉그슴한 섬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와 키작은 나무들로 보기 좋게 군락을 이루고 있다. 바닷물이 들고 나면서 하루 두 번 섬으로 이어주는 베루길은 아름다운 여인의 허리선을 닮았고, 황금빛 물든 가을 들녘이 콤바인의 기계음으로 하나 둘 사라질 무렵, 전국의 사진을 아는 사람들은 일출을 담기 위해 모여든다. 이때부터 겨울이 끝나갈 무렵까지 깡촌 마을의 아침은 서울반포의 세빛섬 달빛광장처럼 활기차게 변한다.
나는 감리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토목현장이 착공 되면 현장에 상주 하면서 발주청으로부터 감독 권한을 대행 받아 시공에서 준공 후 인계 인수까지 공사에 대한 모든 사항을 총괄하며, 설계도서 및 기타 관계 서류의 내용대로 시공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지원하는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국도 819호 선이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다 멈춘곳에, 바다를 가로지르는 해상 교량을 건설하는 임무를 맡았다.
설계서에 맞게 목적물을 만들어 내는 일이 주요 업무이지만, 현장이 넓다 보니 관계되는 사람이 많아 생각지도 않은 민원을 접하게 된다. 민원 처리는 직접 처리가 가능한 민원과 절차와 관련 규정을 준수하여 처리해야 하는 중대한 민원으로 나눈다. 시대의 흐름처럼 민원은 많고 다양해져 규모만 작을 뿐 작은 법원이라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다.
공사기간이 60개월 이었다. 용지보상이 지연 되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공사가 늦어져 연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도로구역(변경)결정고시’를 하여야 한다. 이는 사업의 시작과 끝을 관계자에게 알리는 사항으로 보상과 관련되는 밀접한 행위이다. 공사기간 변경시 발주처는 변경고시를 하여야 하나 담당자가 바뀌다 보니 뒤늦게 고시했다. 기간내 변경고시를 알리지 않을 때는 앞의 공사와 뒤의 공사가 분리된 것으로 보고 보상은 뒤의 공사 시점이 기준일이 된다. 이로 인하여 공사 구간에 농작물을 심는다든지, 영향권 내에 어업신고를 하였을 경우에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항은 업무처리의 잘못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므로 세부적인 검토가 필요했다. 향후 중대한 민원으로 이어질 수 있어 발주처로부터 검토에 대한 모든 행위를 위임 받고, 어업 신고 현황이 필요해 해당되는 두 개 면의 행정복지센터에 공문을 보냈다.
다음은 법적 해석 이었다. 사업을 연속하여 볼 것인지와 구분 할 것인지 ‘국토교통부’에 질의를 하였다. 회신 내용은 법에 대한 해석은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하니 발주처와 협의하여 판단하라는 답을 얻었다. 50:50의 부정확한 답은 매우 당혹 스럽게 한다. 법을 총괄하는 법제처에 법의 해석을 재차 질의 했다. 며칠 후 전화가 왔다. 담당 부처인 국토교통부에서 의견을 현장에 보냈으므로 법제처에서는 국토교통부 의견을 따라야 한다는 설명과 이에 대한 동의를 물어왔다. “저는 국토교통부의 해석이 모호하여 국민으로서 법제처에 ‘법의 해석’을 문의한 것입니다. 국토교통부의 의견은 통보 받아 알고 있습니다. 국토교통부의 의견에 이의가 있어 상위 부처인 법제처의 의견을 구한 것이므로 법제처의 답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말은 공손한 듯 보이지만 물러설 수 없는 항변에 가까운 표현을 했다. 반대되는 답변을 받게 되면 나중에 번복이 어렵다는 것과, 법적해석이 명확하지 않음으로서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눈앞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십 여일이 지난 후 법제처에서 연락이 왔다. 법제처에서 국토교통부의 의견을 새로이 받은 결과 ‘보상계획의 공고일이 기준이 되는바 앞의 사업과 뒤의 사업을 연속하여 본다’는 의견을 얻었다는 내용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승낙했고 며칠 후 법제처의 공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해보지도 않고 안되는 쪽으로 결정하는 나에 대한 편견이 바꾸어 지고 있다는 결과라서 더없이 좋았다.
‘하면 된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예쁘게 꾸미고 다녀라. 비교하지 말고 나의 삶을 살아라. 고개를 들고 가야 할 곳을 보라.’ 등 인생의 이정표들이 많지만 나와는 항상 별개였다. 공부도 못했고, 몸도 부실했으며, 돈도 꿈도 없었다. 기분좋은 일을 찾아 하루하루 보내기 보다는 주변에 맞춰가는 날을 보냈다. ‘너의 길이 아니야, 할 수 없어’ 이것은 행동·습관·이념이 되어 머리와 몸속 깊숙이 각인되어 지금까지 같이하고 있다.
소심한 성격으로 앞서지 못하고 뒤에서 숨어 지냈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결정되어 지는지 잘 알고 있다. 대학 입학 후 토목공학은 인생의 마지막 끄나풀로 생각했다. ‘이것마져 쟁취할 수 없다면 더 이상 갈곳이 없다’생각하며 전공은 열심히 공부했다. 다행 스럽게 졸업전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고 지방의 이름있는 회사에 입사해 나름 명함을 내 놓을 수 있는 여건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그때부터 오십살이 넘은 뒤늦은 나이에 나에 대한 좋지않은 편견을 조금씩 바꾸어 가고 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숱한 일화중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임직원들에게 불호령을 내리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다는 “임자 해보기는 했어”를 일머리 뒤에 붙이고 ‘나는 할 수 있어’를 글로 쓰고 뇌리에 세기며, 깡촌 마을의 아침이 서울반포 세빛섬 달빛광장처럼 활기차게 변하듯 나에 대한 편견을 새롭게 바꾸어 본다.
첫댓글 저도 현대 故 정주영 회장님을 좋아합니다. 자서전도 읽었는데 기업가 정신 정말 멋지더라고요.
그러게요. 엉뚱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 성과로 만들어내는 사람. '모든 일의 성패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사고와 자세에 달려 있다' 옆에 두고 다니지만 쉽지 않는 일이네요.
"임자, 해 보기는 했어?"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듯합니다.
덕분에 감리용어를 많이 알게 되었네요.
전문용어라서 어려워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