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이에 주어진 책임 / 정선례
진달래로 온 산이 붉다.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라 마음이 푸근해진다. 비가 와 땅이 질척이니 오늘은 밭매기도 공쳤고 그렇다면 집안 정리나 해야겠다. 남편이 공방으로 쓰는 뿌리 공예 방에는 책장마다 칸칸이 채워진 책들로 빼곡하다. 책을 뒤적이다가 앨범이 눈에 들어온다. 빛바랜 사진 속에 제대로 먹지 못해 키만 훌쩍 큰 깡마른 동생들이 있다. 잊고 있었던 지난날의 민낯을 꺼내 보는 게 망설여진다.
농부의 딸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까지 남해안의 섬에서 자랐다. 고향 집 뒤꼍에는 무화과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 학교에서 돌아오면 담벼락에 올라가 따 먹었다. 밭둑에는 울타리로 탱자나무가 있었는데, 가을이면 탱자가 주렁주렁 달려 샛노랗게 익어 그 향을 맡으며 놀았다. 논 옆으로 흐르는 개울가에는 미나리가 지천이어서 고추장과 식초를 넣고 새콤하게 무쳐 봄이면 식탁의 단골 반찬이었다. 이때 식초는 막걸리를 소주 큰 병에 담아 솔잎으로 주둥이를 막아 부뚜막 위에 놓아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초무침을 좋아한다. 봄이면 애호박 소금에 절였다가 살짝 데쳐 낙지나 바지락으로 회무침을 하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우리 집은 담배와 고구마, 콩 농사를 지었다. 밭에서 따온 담뱃잎을 크기별로 분리해놓으면 아버지가 끝으로 엮어 비닐하우스 대나무 시렁에 걸쳐 말려 수매를 했다. 시골에서는 논이 많아야 여자들이 편하다고 하는데 바다와 인접해 논은 거의 없어 밭일이 많았다. 아버지의 “워워, 이랴” 소모는 소리에 먼 산 멧비둘기 구우구우 구구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황토 고구마밭을 소가 끌고 아버지가 쟁기 잡아 두둑을 뒤집어 엎어주면 다음 고랑에 쟁기가 오기 전에 엄마와 우리가 고구마를 옆으로 던져야 했다. 재빨리 하지 않으면 쟁기 흙 속으로 고구마가 묻혀 버린다. 캐낸 고구마는 기계로 썰어 황토 맨땅에 널어놓는데, 신기하게도 흙이 하나도 묻지 않고 잘 말랐다. 그 고구마 쪽을 가마니에 주워 담아 창고에 쌓아 놓으면 고구마 장사가 마을에 들어와 사 갔다. 고구마를 캐기 전에는 순을 걷어 황소에게 먹였는데 가끔 이파리에 엄지손가락보다 큰 고구마 벌레가 달려 있기도 했다. 고구마는 좋아하지만, 벌레가 징그러워서 먹기 싫어지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어 졸업할 때까지 쭉 함께 지냈다. 토요일에는 마을별로 운동장에 모여 고학년생들이 저학년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온 것이 기억난다. 집에 오는 산길에서 노란 싸리버섯을 가방에 한가득 따오면 어머니가 결 따라 찢어 된장국에도 넣고 말려서 나물로 볶아 먹었다. 그 맛이 소고기 못지않게 맛있어서 내가 먹어본 버섯 중에 으뜸이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산과 들로 쏘다니며 자유롭게 놀았는데, 집 앞 바닷가 백사장에는 해당화가 군락을 이뤄 피어나 예뼜다. 파도 소리 너울대는 길로 학교에 다녔는데 그곳을 떠난 지 사계절이 마흔 번도 지났건만 하얗게 포말 일으키며 백사장에 밀려와 발을 적시던 그 물결 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동생들이 학교에서 상을 타올 적에는 흰 이를 드러내며 흙 물든 뭉텅한 손으로 막걸리 사발을 들이키며 흐뭇해하셨다. 아버지는 그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형님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국민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고 했다. 불우한 환경이라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형님 밑에서 농사일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보기 드물게 영특했던데다 못 배운 한이 깊어 자식들만은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 하셨다. 내 동생들은 공부며 미술 운동 등 모든 분야에서 월등한 재능을 보여 선생님들 사이에 관심을 받았다. 지역의 대표 행사인 가을 운동회 날, 선생님이 아이들 재능이 아까우니 넓은 도시로 전학하라 권하여서 아버지는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우리 마을은 면 소재지에서도 산을 몇 개를 넘어야만 닿는 깊숙한 곳이었다. 낙후된 곳이라 전기도 늦게야 들어왔다. 하지만 조금씩 발전을 하게 되었는데, 바다를 가로질러 막은 네모반듯한 간척지 논도 만들어지고 깊고 넓은 저수지도 생겼다. 저수지 둑을 쌓은 흙은 바로 옆 우리 밭에서 가져갔는데, 덕분에 밭이 논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마을 일을 보았기 때문에, 광주가 집인 중장비 기사님이 한동안 우리 집에 머물렀는데, 이 인연으로 나중에 나와 동생들은 목포의 그 집에서 자취했다.
아버지는 험난하게 살아오신 그 길을 절대로 자식에게는 걸리지 않으려 하셨고, 마침내 우리 형제들은 목포행 버스에 올랐다. 영리하고 순했던 우리 개 메리가 흙 먼지 나는 신작로를 따라 달려왔다. 말로만 듣던 목포의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그곳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모인 곳처럼 보였다. 사람들에게 떠밀릴까 봐 겁이 나 막내동생 손을 꼭 붙잡고 엄마 옆에 바싹 붙어 있었다. 우리는 목포 죽교동 자취방 근처에 있는 서부국민학교로 전학을 왔다. 학교는 도심인데도 유달산이 가까웠고 바다도 멀지 않았다. 운동장도 다섯 배쯤 넓었고 건물도 3층이나 되었다. 밤에도 꺼지지 않는 가로등이 눈부셨고, 비가 오고 눈이 와도 흙 한 점 없이 깨끗한 도로를 걸어가는 학교 길도 좋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한 별천지였다. 내가 6학년, 바로 아래 동생이 4학년, 그 밑에 동생이 3학년, 막내가 1학년 때였다.
목포에는 친할머니께서 전부터 계셨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큰아버지네와 고모네 고등학생 사촌들에게 밥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할머니께서 우리를 가끔 돌봐주리라 기대했었는데 무안이나 영암으로 밭일을 다녀 손자들 뒷바라지로 우리까지 살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지금도 아침잠이 많은 내가 그때는 오죽했겠는가. 부지런히 청소하고 밥 지어 동생들 먹이기는커녕, 번번이 굶은 채로 학교에 가곤 했다. 아버지는 젊은 날 서울에서 생활했었는데,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어 우리에게 연탄을 못 때게 했다. 대신 솜이불을 두껍게 깔고 덮었는데 코가 시려 이마까지 이불을 덮었다. 이불속에 막 들어갈 때는 선뜩하니 추웠지만, 나란히 누워 조금 있으면 서로의 온기로 이내 훈훈해졌다. 시골에 부모님도 추운 곳에서 떨고 있을 자식들 생각에 아궁이 불을 때지 않으셨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나에게도 언니가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단짝이었던 보육원 친구가 늘 웃는 얼굴이어서 나도 그곳에서 살고 싶었다. 늦게 일어난 날은 도시락은커녕 동생들 아침밥도 못 먹여 학교에 보냈으니 맏이 역할에 너무나 소홀했다. 어머니는 오시는 날은 생선과 고깃국으로 밥숟가락이 요란했다. 어머니는 한 달에 서너 번 쌀이며 반찬거리를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오셨다. 고향 집에서 읍내까지 걸어 나와 시외버스 타고, 목포터미널에서 또 시내버스를 타고 오셨다. 가져오신 반찬은 냉장고가 없어 물에 담가 놓았지만, 여름에는 금세 쉬어서 못 먹기 일쑤였다. 겨울 가뭄에 수돗물이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물차가 골목에 들어오면 집마다 내놓은 주전자, 플라스틱 통, 양동이가 줄을 서기도 했다. 우리가 살았던 죽교동은 낮은 지대여서 어느 해에는 비가 많이 쏟아져 방과 부엌에 물이 허리만큼 차올랐다. 이불이며 살림살이가 물에 잠기고 우리들도 다락방으로 피해 밤을 보냈다. 물이 빠진 후 동생들과 양동이, 바가지로 부엌의 물을 퍼내었다. 수돗가에서 발로 밟아 빨아 이불과 옷가지를 마당에 바지랑대 높이 세워 널었다. 부엌의 살림살이를 다 꺼내 닦으면, 4학년이었던 여동생이 다시 넣어 정리했다.
어느 날은 집으로 가는 조붓한 골목에서 나보다 한 학년 아래인 여자아이가 자기 집 앞에서 놀고 있다가 괜한 시비를 걸었다. 우리는 골목 안쪽에 세 들어 살아서 그리 지나야 집에 갈 수 있었다. 평소 기가 죽어지내던 나는 울먹이며 서 있는데 빨래 걷으러 옥상에 올라가던 주인집 아주머니가 그 광경을 보고 “왜 그러니? 너! 우리 집 애들에게 또 그러면 혼난다.” 해주셨다. 억울한데도 대들지 못한 분함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고향에서는 남학생 그 누구도 나에게 덤비지 못했었는데, 그 성깔 있고 용감했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시골에서의 밝고 당찬 수다쟁이는 차차 말수가 줄어들고 새침해졌다. 학교 공부도 안 하고 엄마가 주고 간 생활비로 만화책을 빌려다 보며 집안일은 뒷전이었으니 나는 왜 그렇게 철이 없었을까?
아버지의 높은 교육열은 아무도 못 말렸다. 사계절을 세 번 그곳에서 보낸 뒤 “사람은 사대문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는 서울 한복판 종로구로 이화동으로 이사를 와서 다 같이 살게 되었다. 몸을 혹사하며 일군 운동장만큼 커진 논과 밭은 동네 사람에게 헐값에 주다시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빈손으로 사대문 안에 입성한 부모님은 방 한 칸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나는 동생들에게 평생 갚아도 다 못 갚을 빚이 있다. 이정표는 길을 안내하고 등산객의 안전한 산행을 돕는다. 그런데 나는 나쁜 습관이 굳어 말과 행동에서 동생들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했다. 미래에 본보기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십 대 중반을 넘겨서야 비로소 철이 들었으니 어떡하면 좋은가? 사춘기를 지나오며 정체성이 너무 혼란스러워 죽으려고 한 적도 있었는데 바로 아래 여동생에게 들켜 약통을 빼앗겼다. 그런 못난 모습을 보여주었던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창피하다. 미래에 꿈이 없었던 잃어버린 시간이다. 여동생이 봉긋 젖몽울이 올라올 무렵이었다. 뭣 때문에 그랬는지 이유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 때린다는 게 그만 가슴이 맞았나 보다. 가슴을 감싸고 눈물을 뚝뚝 떨구던 모습이 아직 시간이 멈춘 채로 마음을 짓누른다. 그 시기에는 옷깃만 스쳐도 아픈데, 때렸으니 얼마나 아팠을까? 부모님 떨어져서 자취하는 동안 투정 한번 부리지 않고 잘 따라주었는데, 순하고 여린 동생들에게 맏이인 내가 든든하고 올바른 행동으로 모범을 보였다면 나와 동생들은 지금과는 달라진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업어서 키운 막내 동생이 직장에서 사무관을 달고 얼마 전에 찾아와 너무나 기쁘고 고마웠다.
나는 두 가지 꿈이 있다. 글을 꾸준히 써서 수필집과 시집 한 권 내는 것이 첫 번째다. 두 번째 꿈은 미국에서 자리잡고 사는 남동생이 나오면 부모님 모시고 동기간들과 쉬엄쉬엄 신안과 무안을 잇는 서해랑 길을 완주하는 것이다. ‘우연도 성의에 편을 든다’는 말이 있다. 좋은 일이 나한테 오는 것도 그냥 오는 것이 아닌 평소에 그 일에 성의를 기울인 선물이라고 한다. 오늘 최선을 다해 사노라면 머지않은 날 소망이 이루어질 거라 믿는다. 봄이면 길 따라 진달래가 참 좋을 것이다.